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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6권, 태종 13년 11월 3일 기묘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공안부 윤으로 치사한 당성의 졸기

공안부 윤(恭安府尹)으로 치사(致仕)한 당성(唐誠)이 졸(卒)하였다.

당성은 강절(江浙)의 명주(明州) 사람이었는데, 원(元)나라 말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왔었다. 처음에 정동행성(征東行省)380) 의 연리(掾吏)가 되었으나, 행성(行省)이 혁파되자 중랑장(中郞將)으로 사평 순위부(司平巡衛府)의 평사(評事)가 되었다. 율령(律令)에 통하고 밝아서 일을 만날 적마다 용감히 말하였는데, 당시 국정을 맡은 자가 성석린(成石璘)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미워해서 죄를 무고하여 하옥(下獄)하고, 병마 도통사(兵馬都統使) 최영(崔瑩)을 부추겨서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니, 당성이 그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나, 최영이 듣지 않았었다. 당성이 굳이 다투었으나 어쩔 수가 없게 되자, 드디어 율문을 집어 땅에 던지면서 최영에게 이르기를,

"도통(都統)이 율문보다 먼저 났습니까? 아니면 율문이 도통보다 먼저 났습니까? 도통이 어찌하여 자기 한 사람의 견해로써 율문을 버리십니까?"

하니, 최영당성이 정직하다고 하여 노하지 않았고, 우리 태조도 또한 성석린을 구해 내려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형에서 감형할 수 있었다. 관직을 여러 번 옮겨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고, 이원필(李元弼)을 대신하여 사대 이문(事大吏文)을 맡았었다. 태조가 즉위하게 되자, 호조·예조·형조·공조의 4조 전서(典書)를 거쳤다. 일찍이 노비를 변정 도감(辨定都監)에 소송하였다가 이기지 못하니, 조회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제 이 도감(都監)은 변정(辨定)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不定)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연좌되어 면관(免官)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서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로서 문서 응봉사(文書應奉司)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신사년에 임금이 이미 고명(誥命)을 받게 되니, 당성이 면알(面謁)하여 아뢰기를,

"지난번에는 국함(國銜)381) 을 ‘권서 국사(權署國事)’라고 칭하였으나, 이제는 다만 ‘국왕(國王)’이라고 칭하니, 이름이 바르고 말이 간단하여 매우 좋습니다."

하고, 인하여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소신(小臣)의 두함(頭銜)382) 에서도 또한 검교(檢校)383) 두 자를 없애버리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로 고쳐 임명하였다. 다시 공안부 윤(恭安府尹)에 옮겼다가 기축년에 본관(本官) 그대로 치사(致仕)하였다. 임금이 녹봉을 온전하게 종신토록 주게 명하였다. 당성은 성질이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나이 70이 넘어도 정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무릇 사대 문자(事大文字)가 있을 때는 반드시 친히 살피고 가다듬어 조금도 차오(差誤)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믿고 맡겼으며 본향(本鄕)을 밀양(密陽)으로 내려 주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77세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중관(中官)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로 쌀·콩을 각각 40석과 종이 1백 50권을 내려 주고, 관곽(棺槨)을 주고 사제(賜祭)하였다. 중궁(中宮)도 또한 사제(賜祭)하였다. 성석린이 시(詩)로써 애곡(哀哭)하였다.

"학문이 이문(吏文)을 겸하여 양쪽이 정강(精强)하니, 동방에 유익함을 누가 견줄 수 있으리오? 도통(都統)과 율문(律文)의 선후 이야기, 이 생에 갚기 어렵고 죽어도 잊기 어렵네."


  • 【태백산사고본】 11책 26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93면
  • 【분류】
    가족-성명(姓名)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신분-천인(賤人) / 왕실-사급(賜給) / 외교-명(明)

  • [註 380]
    정동행성(征東行省) : 원(元)나라에서 고려에 두었던 관청. 세조(世祖) 때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정동 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란 관부(官府)를 설치하였으나, 2차의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정동행성으로 고쳐 원나라의 관리를 내주(來駐)시키고 고려의 내정(內政)을 감시 내지 간섭하였음. 공민왕(恭愍王)의 배원(排元) 정책으로 폐지되었음.
  • [註 381]
    국함(國銜) : 국왕의 직함.
  • [註 382]
    두함(頭銜) : 직함의 첫머리.
  • [註 383]
    검교(檢校)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정원(定員) 외에 임시로 녹봉(祿俸)을 주기 위하여 설치한 허직(虛職)에 붙이던 칭호. 주로 정부에서 기구 대신(耆舊大臣)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녹봉만 받고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곧 폐지되었음.

○己卯/恭安府尹致仕唐誠卒。 , 浙江 明州人。 季, 避兵東來, 初爲征東行省(椽)〔掾〕 史, 行省罷, 以中郞將爲司平巡衛府評事。 通曉律令, 遇事敢言。 時, 當國者惡成石璘不附己, 誣以罪下獄, 掖兵馬都統使崔瑩, 將置極刑, 言罪不至死, 不聽。 固爭不能得, 遂取律文投地, 謂曰: "都統先律文而生乎? 抑律文先都統而出乎? 都統乃何以一己之見, 而捨律文乎?" (徑)〔勁〕 直不怒, 我太祖亦營救石璘, 乃得減死。 累官至判典農寺事, 代李元弼掌事大吏文。 及太祖卽位, 歷戶禮刑工四曹典書。 (常)〔嘗〕 訟奴婢于辨定都監, 不勝, 揚言于朝曰: "今此都監, 非辨定, 乃不定也。" 坐此免官。 未幾, 以檢校判漢城府事, 提調文書應奉司。 歲辛巳, 上旣受誥命, 面啓曰: "向者國銜稱權署國事, 今只稱國王, 名正辭簡, 甚好。" 因伏地請曰: "小臣頭銜, 亦欲除檢校二字。" 上笑, 改除開城副留後, 再遷恭安府尹。 己丑, 以本官致仕, 命給全俸終身。 性勤謹, 年踰七十, 精力不衰, 凡遇事大文字, 必親審覆, 鮮有差誤, 上委信之, 賜鄕密陽。 卒年七十七。 上悼甚, 遣中官以弔, 賜賻米豆各四十石、紙百五十卷, 給棺槨, 賜祭, 中宮亦賜祭。 石璘以詩哭之曰: "學兼文吏兩精强, 有益東邦孰可方! 都統律文先後語, 此生難報死難忘。"


  • 【태백산사고본】 11책 26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93면
  • 【분류】
    가족-성명(姓名)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신분-천인(賤人) / 왕실-사급(賜給)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