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의 동·서상과 공신 배향전을 지을 때의 여부를 의논케 하다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종묘(宗廟)의 동·서상(東西廂)을 짓는 것의 편부(便否)를 의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종묘(宗廟)에 나아가 비[雨]를 피할 데를 지을 곳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만일 묘전(廟前)에 보첨(補簷)을 달면 컴컴하게 가려서 미편(未便)할 것 같으니, 동서 이방(東西耳房) 앞뜰에 10척(尺)의 보첨(補簷)을 달아서, 제사(祭祀)를 행하는 날에 비나 눈을 만나면, 나와 향관(享官)은 동쪽에 있고, 악관(樂官)은 서쪽에, 여러 집사관(執事官)은 묘실(廟室)의 영(楹) 밖에 있으면 된다. 이렇게 하면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모두 용의(容儀)를 잃는 일이 없어, 거의 성경(誠敬)을 다할 것이다."
하였다. 대언(代言) 김여지(金汝知)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동서 이방(東西耳房)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종묘 제도가 아닙니다. 후일(後日)에 상국(上國)의 사신(使臣)이 보게 되면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하겠지, 어찌 비난하고 웃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빈 당[虛堂]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저것은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만세(萬歲) 후에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할 당(堂)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탄식하기를,
"길옆에 휑하게 비어 있는 원락(院落)076) 보다 심하구나! 제작(制作)이 어찌 저렇게 소략(疏略)한가? 저 향배(向背)를 보면 동서(東西)를 분변할 수도 없고, 묘정(廟庭)과의 상거(相去)도 또한 머니, 미편(未便)할 것 같다. 그러나, 처음에는 반드시 옛 법(法)에 의하여 지었을 것이니, 예조(禮曹)로 하여금 자세히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의령군(宜寧君) 남재(南在)가 도읍(都邑)을 옮겨 경영(經營)하는 것을 모두 친히 보았으니, 그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이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애연(鄭藹然)을 보내어 물으니, 남재가 대답하기를,
"그때에 또한 예문(禮文)을 상고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오직 전조(前朝)의 태묘 제도(太廟制度)를 참고하였을 뿐입니다."
"종묘를 세운 지가 이미 오래니, 낭무(廊廡)를 보충하여 짓는 것이 음양(陰陽)의 구기(拘忌)에 편한지 편치 못한지 알 수 없으며, 또 사당[廟] 가운데 역사(役事)를 일으켜 신주(神主)를 경동(驚動)하는 것이 더욱 미편(未便)하니, 다시 전조(前朝)의 종묘 제도(宗廟制度)와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하는 당(堂)의 원근(遠近)을 상고한 연후에, 비로소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가합니다. 신 등이 재력(財力)을 꺼려하여서가 아니라, 법 밖[法外]의 뜻으로 하면 천루(淺陋)한 염려가 없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는데, 산 사람도 묵은 집[舊家]을 수리(修理)하는 일이 있으니, 종묘(宗廟)에만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조(前朝)의 종묘(宗廟)가 태조(太祖)·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을 거쳐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초기에 법제(法制)가 갖추어지지 못하여 그러했던 것입니다. 어찌 본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를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점[卜]쳐서 길(吉)한 것을 따르는 것이 가하다. 그러나, 공신(功臣)의 당(堂)은 고치지 않을 수 없다. 하 정승(河政丞)의 말이 내 뜻과 꼭 맞는다. 《춘추(春秋)》에 ‘세실(世室)의 집[屋]이 무너진 것’을 썼으니,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은 것을 기롱(譏弄)한 것이다. 어찌 종묘를 수리하는 도리가 없겠는가? 오늘날로 징험(徵驗)하더라도, 제릉(齊陵)이 오래 되어 크게 공역(工役)을 일으켜서 수축(修築)하였으니, 어찌 종묘에 대해서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19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48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註 076]원락(院落) : 울타리에 싸인 거실(居室).
○命議政府議構宗廟東西廂便否。 上詣宗廟, 相置備雨之處, 乃曰: "若於廟室前作補簷, 則恐暗蔽未便。 東西耳房前階, 作十尺補簷, 行祭日若値雨雪, 則予與享官在東, 樂官在西, 諸執事官在廟室楹外。 如此則與祭之人, 皆無失容, 庶盡誠敬。" 代言金汝知進曰: "東西耳房作虛廳, 非廟制也。 後日上國使臣儻見之, 以爲如何?" 上曰: "使臣何爲而來宗廟乎? 雖或見之, 謂爲朝鮮之法如此爾, 豈肯詆笑乎?" 上望見廟垣外西南隅有虛堂曰: "彼將何用?" 對曰: "萬歲之後, 配享功臣之堂也。" 上嘆曰: "甚於道傍廓落之院落, 制作何如此其疏略乎? 觀其向背, 則未辨東西, 去廟庭亦遠, 似爲未便。 然其初必依古法而作之, 可令禮曹詳稽古制以聞。" 上曰: "宜寧君 南在, 遷都經營, 皆所親見, 可使問之。" 乃遣禮曹佐郞鄭藹然問之, 在對曰: "其時亦考禮文而未得, 唯倣前朝太廟之制而已。" 成石璘、趙英茂以爲: "建宗廟已久, 補作廊廡, 於陰陽拘忌, 未知便否。 且廟中起役, 驚動神主, 尤爲未便。 更考前朝宗廟之制與配享功臣堂遠近, 然後始可起役。 臣等非憚其財力也, 以法外之意, 而不能無淺陋之慮耳。" 河崙曰: "生亡無異。 生者猶有修葺舊家, 其於宗廟, 獨不然乎? 前朝宗廟, 歷太、惠、定、光而至成宗乃立焉, 則王氏之初, 法制未備然也, 何足取法!" 上曰: "陰陽拘忌, 豈可不從! 卜之從吉可也。 然功臣之堂, 不可不改。 河政丞之言, 甚合予意。 《春秋》書世室屋壞, 譏久不修也。 豈無修宗廟之道乎? 以今驗之, 齊陵久矣, 大興工役以修之。 何獨疑於宗廟乎?"
- 【태백산사고본】 8책 19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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