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전에서 정사를 의논하며, 총제 연사종에게 동북면의 기근을 묻다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았다. 총제(摠制) 연사종(延嗣宗)이 동북면(東北面)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묻기를,
"동북면에 기근(飢饉)이 거듭 들어 백성들 가운데서 농사를 짓는 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사실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짓지야 아니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굶주려서 힘써 농사를 짓지 못하고, 소도 여위어서 갈고 심는 자가 적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측은하게 여겨 말하기를,
"요즘 안변(安邊)의 백성들이 더욱 심하게 굶주린다고 들었는데, 강원도의 곡식을 옮겨서 진제(賑濟)하자고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내가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곡식을 옮기기를 기다리다가, 곡식이 이르지도 아니하여 백성들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강원도 백성들이 함께 그 폐해를 받게 될 것이니, 안변의 백성들로 하여금 와서 회양(淮陽)의 곡식을 받게 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 내가 생각하건대, 동북면의 백성들은 밀·보리를 심지 아니하니, 비록 보리가 익을 때를 당할 지라도 반드시 진대(賑貸)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절기에 따라 밀·보리를 갈도록 권장케 하되, 항식(恒式)을 삼으라."
하고, 인하여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감사와 수령에게 달렸다. 그러므로 그 백성을 보호하도록 책임을 맡긴 것인데, 그 백성을 가까이 하는 자가 과연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아, 백성들로 하여금 살 곳을 얻도록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물며 지금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진휼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하였다. 연사종이 또 진언(進言)하였다.
"신이 노상(路上)에서 금강산(金剛山)의 송백(松柏)이 누렇게 마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것은 거승(居僧)들이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개국(開國)한 이래로 재변(災變)이 없는 해가 없었다. 태상왕(太上王) 때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나, 상왕조(上王朝) 때에는 만약 재이(災異)가 있으면, 들어와서는 고하고 나가면 물어,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매양 산(山)이 무너지고 물[水]이 마르는 일과 해·달·별·바람·서리·우레·비·새·벌레·물고기 따위의 변괴(變怪)가 있으면 모두 기억(記憶)하여 수성(修省)하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하늘의 견고(譴告)는 진실로 알기 어렵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도 재이(災異)를 면하지 못하여, 동중서(董仲舒)가 재이(災異)를 논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응(應)한 것인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송(宋)나라는 지금부터 오래지 아니한데, 사람이 변하여 용이 된 이변(異變)이 있었어도, 무엇 때문에 응(應)한 것인지를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찌 예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하여 하늘의 경계를 만홀(慢忽)히 여길 수가 있겠느냐?"
찬성(贊成) 남재(南在)가 대답하였다.
"옛날 임금은 재이(災異)를 만나면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그 정사를 고쳐서 바로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재이(災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응보(應報)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임금의 삼가고 두려워하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비록 부덕(否德)하지만 어찌 감히 수성(修省)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공경 대신(公卿大臣)이 모두 덕의(德義)가 있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왕업(王業)을 도와 이룩하였으니, 비록 근시(近侍)의 무신(武臣)이라 하더라도 남의 전지를 빼앗거나 남의 처첩(妻妾)을 유혹하여 사풍(士風)을 무너뜨려 화기(和氣)를 손상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재이(災異)의 변이 무슨 연고로 생기는 것인가? 전조(前朝) 말년에 남의 전지와 사람을 빼앗아 만백성을 침해하여 포학(暴虐)함이 몹시 심하였으나, 큰 이변이 없었으니, 반드시 천수(天數)이리라. 예전의 말에 인애(仁愛)하라는 말이 있는데, 과인과 같은 자야 어찌 임금의 덕에 합하겠는가!"
남재가 대답하였다.
"재상(宰相)·대신(大臣)도 위로 열수(列宿)089) 에 응하여 나라를 도와 다스리는데, 하물며 인군(人君)은 위로 황천(皇天)을 이고 아래로 억조창생(億兆蒼生)에 임(臨)하였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임금이 빙그레 웃으며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문무 군신(文武群臣)으로서 어느 누구가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여 마땅히 해야 할 직분에 힘쓰지 아니하겠느냐? 다만 붕우(朋友) 사이의 교분(交分)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해 서로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이니, 얼굴을 대해서는 좋은 체 하나 돌아서면 미워하는 자가 간혹 있을 것이다."
하니, 남재가 대답하기를,
"옛부터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자의 친구가 되도록 힘쓰는 것이 오늘날 내 뜻이다."
하고, 또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석씨(釋氏)의 교(敎)에 일찍이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다. 요즘 듣자니, 외방(外方) 고을에서 혁거(革去)한 사사(寺社)의 불상(佛像)을 관부(官府)에 잡치(雜置)한다고 하는데, 백성이 보고 들으면 해괴할 듯하니, 사사(寺社)로 옮겨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82면
- 【분류】사상-불교(佛敎) / 왕실-의식(儀式) / 구휼(救恤) / 농업(農業) / 과학(科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89]열수(列宿) : 하늘에 제성(帝星)을 둘러 싸고 벌여 있는 별들.
○乙未/視事便殿。 摠制延嗣宗回自東北面, 上問曰: "聞東北面飢饉荐臻, 民無耕稼者。 有諸?" 對曰: "豈不耕乎? 但飢餓不能力耕耳。 牛亦羸疲, 耕種者少。" 上惻然曰: "近聞安邊之民, 飢莩尤甚, 有請移江原道粟而賑之者。 予不許者, 待移粟, 則粟未至, 而民且就死矣, 且使江原之民, 竝受其病, 不若使安邊之民, 來受淮陽之粟之便也。 予念東北之民, 不種麰麥, 雖逢麥熟之時, 必仰賑貸, 而後生活。 自今以後, 令監司守令, 春秋趁節勸耕麰麥, 以爲恒式。" 因謂左右曰: "民生休慼, 係乎監司守令, 故專責其保民。 其近民者, 果能體予至懷, 使民得其所乎? 是未可知也。 況今民飢, 其能汲汲於賑恤乎?" 嗣宗又進曰: "臣於路上, 聞金剛山松栢黃枯。" 上曰: "此則居僧未免其責。 開國以來, 災變無歲無之。 太上時則予未有記, 上王之朝, 若値災異, 則入告出問, 常以警懼。 每當山水崩渴, 與夫日月星辰風霜雷雨禽鳥蟲魚之怪, 靡不記臆而修省, 以至今日, 天之譴告, 果難知也。 漢之光武、唐之太宗, 未免災異, 董仲舒論災異, 未有曰有某應也。 若宋朝, 去今未遠, 至有人化爲龍之異, 亦未聞有某應也。 然豈可謂古旣如此, 而慢天戒乎?" 贊成南在對曰: "古之人君, 遇災異則恐懼修省, 改紀其政, 故雖有其異, 無其應, 是在君上謹畏之如何。" 上曰: "予雖否德, 敢不修省! 且公卿大臣, 皆有德義, 同心協力, 輔成王業。 雖近侍武臣, 未聞有奪人之田, 誘人妻妾, 以毁士風, 以傷和氣。 災異之變, 何緣而起! 在前朝季, 奪人田民, 侵漁萬姓, 暴虐尤甚, 無大變異, 意必天數也。 古有仁愛之說。 若寡人者, 豈合人君之德乎!" 在對曰: "宰相大臣, 上應列宿, 佐理邦國。 矧人君, 上戴皇天, 俯臨億兆乎!" 上哂之。 顧謂左右曰: "文武群臣, 孰不孝於親忠於上, 勉其職分之所當爲乎! 第其間朋友之交, 恐未必施誠相愛, 面悅背憎者, 容或有之。" 在對曰: "古有君子小人之分。" 上曰: "勉爲君子之朋, 今日之意也。" 上又謂近臣曰: "予於釋氏之敎, 不曾留意焉。 近聞外方州郡, 以革去寺社, 佛像雜置于官府, 似駭民之視聽。 宜令移置寺社。"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82면
- 【분류】사상-불교(佛敎) / 왕실-의식(儀式) / 구휼(救恤) / 농업(農業) / 과학(科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