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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17권, 태종 9년 1월 1일 갑진 1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백관을 거느리고 문소전에 제사지내다. 세자가 맹사성 등을 용서하기를 청하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소전(文昭殿)에 친히 전(奠)을 올리고, 환궁(還宮)하여 하정례(賀正禮)를 행하였다. 세자와 여러 왕자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대언(代言)들에게 일렀다.

"내 아들 가운데 죽은 자가 여섯이고 지금 다만 네 아들만이 남아서 같이 밥을 먹으니,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우애하는 도리를 가르칠 터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라."

대개 지난번에 민무구(閔無咎) 형제가 여러 왕자들을 전제(剪除)할 뜻을 가졌던 것을 언짢게 여긴 까닭이었다. 황희(黃喜)에게 일렀다.

"예전 진(晉)나라 때에 왕돈(王敦)001) 이 반역(叛逆)하자, 왕도(王導)002)주의(周顗)003) 에게 말하기를, ‘많은 식구들을 경(卿)에게 부탁한다.’ 하였는데, 주의가 힘써 구(救)해 주었지만, 끝내 왕도에게 말하지는 아니하였다. 왕도가 죄를 면하게 된 뒤에 《상서고사(尙書故事)》를 조사하여 보고, 주의가 자기를 구하기에 매우 힘쓴 사실을 알았다. 재상의 마음 씀이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탁신(卓愼) 등의 죄는 도당(都堂)에서 마땅히 율(律)대로 처단할 것이요, 용서를 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마땅히 이를 용서해 주겠다."

세자 이제(李禔)가 조용히 아뢰었다.

"맹사성(孟思誠)이 신을 따라 중국에 입조(入朝)하여 간난(艱難)한 일들을 갖추 겪었으므로, 신이 그 성품이 졸직(拙直)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상의 뜻을 거슬러서 죄를 받을 때에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천위(天威)를 범할까 두려워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허조(許稠)탁신(卓愼)은 신을 따른 지 오래 되고, 또 모두 졸직한 자들입니다. 이제 말[語言] 때문에 죄를 얻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하시기를 빕니다."

임금이 기꺼이 가납(嘉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70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註 001]
    왕돈(王敦) : 중국의 진(晉)나라 사람. 왕도(王導)의 종형(從兄)으로 무제(武帝)의 딸 양성 공주(襄城公主)와 결혼했음. 원제(元帝) 때 강동(江東)을 진압하여 정남 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공(功)을 믿고 권력을 전횡하다가 드디어 무창(武昌)의 난을 일으켰는데, 명제(明帝)가 토벌할 때는 이미 병사(病死)하였음.
  • [註 002]
    왕도(王導) : 중국의 진(晉)나라 재상(宰相). 시호는 문헌(文獻). 조야(朝野)에서 중보(仲父)라고 불렀음. 원제(元帝)의 신임을 받아 벼슬이 승상(丞相)에 이르렀음. 뒤에 유조(遺詔)를 받들어 명제(明帝)·성제(成帝)를 보필하였음.
  • [註 003]
    주의(周顗) : 중국의 진(晉)나라 안성(安成) 사람. 왕돈(王敦)의 난 때 왕도(王導)를 구해 주려고 크게 노력하였으나, 왕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음. 뒤에 왕돈이 왕도에게 주의(周顗)가 어떠하더냐고 물었을 때, 왕도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는 죽음을 당하였음.

○甲辰朔/上率百官, 親奠于文昭殿, 還宮行賀正禮, 賜食于世子及諸王子。 謂代言等曰: "予之子, 物故者六, 今只有四子, 同饌而食。 父母之心, 爲如何哉! 予誨友于之義, 爾等其識之。" 蓋傷向者無咎兄弟有剪除之志故也。 謂黃喜曰: "昔時, 王敦反, 王導周顗曰: ‘以百口累卿。’ 力救之, 終不與言。 獲免後, 檢料尙書故事, 乃知救之甚力。 宰相處心, 當如是也。 今卓愼等罪, 都堂宜以律斷之, 不宜請宥, 予當貸之。" 世子從容啓曰: "孟思誠從臣入朝, 備嘗艱險, 臣知其拙直也。 當忤旨被罪之時, 竊欲營救, 恐犯天威, 未敢發言。 許稠卓愼從臣久矣, 亦皆拙者也。 今以語言獲罪, 乞賜寬假。" 上欣然嘉納。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70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