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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16권, 태종 8년 9월 15일 경신 3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여흥 부원군 민제의 졸기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가 죽었다. 제(霽)의 자(字)는 중회(仲晦)이며, 호(號)는 어은(漁隱)이니, 여흥군(驪興君) 민변(閔抃)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지정(至正) 정유(丁酉) 과제(科第)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에 뽑혀 들어가, 여러 벼슬을 거쳐서 상의 밀직(商議密直)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우리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하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무인년에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고 영예조사(領禮曹事)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예(禮)를 잘 안다고 알려져 무릇 국가의 전례(典禮)를 모두 상정(詳定)하였다. 건문(建文) 기묘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경진년에 주상께서 세자(世子)가 되매, 승진하여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에 제수되고, 조금 뒤에 좌정승(左政丞)으로 옮기었다. 주상께서 즉위(卽位)하자 국구(國舅)162) 로서 다시 여흥백(驪興伯)을 봉하였다. 신사년에 ‘순충 동덕 보조 찬화 공신(純忠同德補祚贊化功臣)’의 호(號)를 주고 부원군(府院君)으로 고쳐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심해졌으므로, 임금이 가 보니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말하는 바가 조금 평시와 같았는데, 엿새 만에 죽었다. 향년(享年)이 70이었다. 임금이 슬퍼하여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친림(親臨)하였으며, 시호(諡號)를 문도(文度)라 하였다.

제(霽)는 타고난 자품(資稟)이 온인 청검(溫仁淸儉)하여,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고 가산(家産)은 일삼지 않았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음사(淫祠)를 미워하여, 화공(畫工)을 시켜 노복(奴僕)이 막대기를 가지고 개[犬]를 시켜 중과 무당을 쫓는 그림과 약(藥)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제하는 모양을 벽에 그려 놓고 보았다. 존귀(尊貴)와 영화(榮華)가 극진하였으나, 조금도 부귀(富貴)한 티가 없이 날마다 바둑판과 더불어 스스로 즐기고, 시(詩)를 잘 평론하여 소연(蕭然)히 출진(出塵)의 정취(情趣)가 있었다. 항상 아들 민무구(閔無咎)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매우 교만하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니, 자식들을 알아보았다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51면
  • 【분류】
    인물(人物)

驪興府院君 閔霽卒。 仲晦, 號漁隱, 驪興君 之子也。 年十九, 中至正丁酉科, 選入翰林, 歷官至商議密直。 洪武壬申, 我太祖開國, 陞政堂文學, 戊寅, 封驪興伯, 領禮曹事。 自少以知禮聞, 凡國家典禮, 皆所詳定。 建文己卯, 知貢擧。 庚辰, 上爲世子, 進拜門下右政丞, 尋遷左政丞。 上卽位, 以國舅復封驪興伯。 辛巳, 賜純忠同德補祚贊化功臣之號, 改封府院君。 至是疾革, 上視之, 整衣冠, 言辭稍似平時, 越六日卒, 享年七十。 上震悼, 輟朝親臨, 諡文度天資溫仁淸儉, 留心經史, 不事家産, 闢異端惡淫祠, 使工圖僕(肄)〔隷〕 制挺嗾犬逐僧巫及以藥濟人若物之狀於壁以觀之。 尊榮旣極, 略無富貴相, 日以碁局自娛, 善評詩, 蕭然有出塵之趣。 常謂子無咎等曰: "汝輩驕盈不悛, 必敗。" 可謂知子矣。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51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