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릉의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의 내용
제릉(齊陵)의 비(碑)를 세웠다. 그 비문(碑文)은 이러하였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남에는 반드시 어진 비필(妃匹)이 덕(德)을 같이하고 경사(慶事)를 기르는데 힘입어서 그 계통을 영구히 한다. 하(夏)나라에 도산(塗山)이 있어 계(啓)004) 가 능히 계승하였고, 주(周)나라에 태사(太姒)005) 가 있어 무왕(武王)이 크게 계승하여, 우(禹)임금과 문왕(文王)의 하늘을 짝하는 제사(祭祀)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계속하였으니, 아름답고 성하도다! 우리 신의 왕후(神懿王后)께서 천자(天資)가 현숙(賢淑)하고 아름다우며, 곤덕(坤德)이 유순(柔順)하고 발라[貞]서, 일찍이 용연(龍淵)에 빈(嬪)이 되어 왕업(王業)을 도와서 이루게 하였고, 후하게 성철(聖哲)을 낳아서 대통(大統)을 끝없이 전하였으니, 신이(神異)한 공(功)과 아름다운 의범(儀範)이 옛사람에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아깝게도 대훈(大勳)이 이루어지게 되자 선유(仙遊)006) 가 심히 급하여,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신 뒤에 곤의(壼儀)를 높일 수가 없고, 이성(二聖)이 대통(大統)을 이으매 영양(榮養)007) 을 이룰 수 없어서 산릉(山陵)이 빛을 가리고 상로(霜露)가 슬픔을 더하니, 아아! 슬프다.
처음 시호(諡號)는 절비(節妃)요, 능호(陵號)는 제(齊)인데, 뒤에 시호를 더하여 신의 왕후(神懿王后)라 하고, 인소전(仁昭殿)을 두어 진용(眞容)을 모시었으니, 추숭(追崇)하는 예전(禮典)이 이미 갖추 거행되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자의(慈儀)가 영원히 닫히어 효도(孝道)의 생각을 펼 수 없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시어, 이에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큰 비(碑)에 명(銘)을 새기게 하고, 신(臣)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만세(萬世)에 보이게 하시었으니, 신(臣) 근(近)이 명(命)을 받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후(后)의 성(姓)은 한씨(韓氏)니, 안변(安邊)의 세가(世家)이다. 황고(皇考)의 휘(諱)는 경(卿)이니, 충성 공근 적덕 육경 보리 공신(忠誠恭謹積德毓慶輔理功臣)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문하부사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을 주었고, 황조(皇祖)의 휘(諱)는 규인(珪仁)인데, 적선 육경 동덕 찬화 익조 공신(積善毓慶同德贊化翊祚功臣) 특진 보국 숭록 대부 문하 좌정승 판도평의사사사 겸 판이조사(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使司事兼判吏曹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을 주었고,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유(裕)인데, 순성적덕 좌명 보리 공신(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 숭정 대부 문하 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판호조사(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戶曹事) 안원군(安原君)을 주었고, 황비(皇妣) 신씨(申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증 병의 육덕 보조 공신 숭정 대부 문하 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형조사(贈秉義毓德輔祚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判刑曹事) 원려(元麗)의 딸이다. 후(后)는 낳아서부터 현숙(賢淑)하고 완순(婉順)하며, 총명하고 슬기로워 범상(凡常)한 사람과 달랐고, 계년(筓年)008) 에 미치매 배우자를 택하여 우리에게 와서 빈(嬪)이 되었다. 태상왕(太上王)께서 처음에 장상(將相)이 되어 수십년 동안을 출입(出入)하며 공전(攻戰)하여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후(后)가 능히 힘을 다하여 집안을 다스려서 성공하도록 면려(勉勵)하였고, 또 성품이 투기(妬忌)하지 않아서 첩시(妾侍)를 예(禮)로 대접하였으며, 많은 아들이 있어 의리로 가르치시었다.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께서 예철(睿哲)하고 영무(英茂)하여 성학(聖學)이 날로 진취(進就)하여, 나이가 20이 못되어 과거에 급제하여 춘관(春官)009) 에 벼슬하였다. 위주(僞主) 신씨(辛氏)010) 의 무진년(戊辰年)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화하(華夏)011) 를 어지럽히려고 꾀하여,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위엄과 명망이 일찍이 나타났으므로, 절월(節鉞)을 주어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태상왕이 대의(大義)에 의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명유(名儒) 이색(李穡)으로 대신하니, 〈나라의〉 안팎이 조용하여 나라[邦國]가 길이 힘입었다. 색(穡)이 태상왕께 고하기를, ‘중국과 흔단(釁端)을 일으킨 뒤를 당하여 집정(執政)한 사람이 친히 황제의 조정에 조회하지 않으면, 공(公)의 충성(忠誠)을 천하(天下)에 밝힐 수 없다.’ 하고 날을 정하여 장차 떠나려고 하니, 태상왕이 색(穡)에게 이르기를, ‘나와 공(公)이 일시(一時)에 사자(使者)로 가면 나라 일은 누가 맡겠는가? 내가 자식 하나를 택하여 공(公)을 쫓아서 가게 하면, 내가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하고 우리 전하를 보내어 서장관(書狀官)을 삼았는데, 특별히 고황제(高皇帝)의 우대하는 예(禮)를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또 칙서(勅書)를 내려서 다른 성(姓)으로 왕씨(王氏)의 후사(後嗣)를 삼은 것을 책(責)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고 왕씨의 후예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워 왕을 삼았다. 이보다 앞서 권간(權奸)들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강제로 빼앗고 속여서 빼앗았다. 태상왕이 그때에 좌상(左相)이 되어, 사전(私田)을 파(罷)하고 문란하여진 법을 다시 바로 세우니, 폐해가 없어지고 이익이 일어나서, 온갖 제도가 함께 새로워졌다. 공(功)이 높으면 상주지 아니하고, 덕(德)이 크면 용납하기 어려운 법이다. 참소(讒訴)와 간계(奸計)가 서로 얽어서 모함(謀陷)하니, 점점 번지고 젖어들어오는 것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정창(定昌)이 유약(柔弱)하고 암우(暗愚)하여 이럴까 저럴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후(后)가 드디어 근심하고 걱정하여 병(病)이 되어, 신미년 가을 9월 23일로 훙서(薨逝)하니, 향년(享年)이 55세였다.
예(禮)를 갖추어 성(城) 남쪽 해풍군(海豐郡) 치속촌(治粟村)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우리 전하께서 분묘(墳墓)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이듬해 임신년 봄에 태상왕이 서쪽으로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매, 전하께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았다. 간사한 무리가 틈을 타고 모함(謀陷)함이 더욱 급하매, 우리 전하께서 사기(事機)에 응하여 계책을 결단하고, 괴수를 쳐서 제거하여 흉도(兇徒)들이 와해(瓦解)되니, 정창(定昌)이 더욱 꺼리었다. 가을 7월 16일에 두세 사람의 대신(大臣)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주창(主唱)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므로, 말을 합하여 추대(推戴)하였다. 태상왕(太上王)이 군정(群情)에 못이기어 왕위(王位)에 나가시니, 저자[市肆]도 바꾸지 않고 조정(朝廷)도 청명(淸明)하였다. 곧 사신(使臣)을 보내어 제정(帝庭)에 들어가 아뢰니, 잇달아 칙보(勅報)를 받아서 이미 왕작(王爵)을 허락하고, 또 국호(國號)를 고치어 조선(朝鮮)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회복하였다.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친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고 하였다. 태상왕께서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통하고 예(禮)에 밝아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여기시어, 사신을 따라 입조(入朝)하라고 명하시었다. 드디어 도착하매, 황제가 더불어 말하여 보고 가상하게 여기어 넉넉히 상(賞)을 주어 돌려보내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상왕께서 편치 못하시매,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권세를 제멋대로 할 것을 생각하고, 여러 적자(嫡子)를 없애고 장차 어린 얼자(孽子)를 세우려고 음모하여 여러 무리들과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화란(禍亂)의 발생이 눈앞에 다가왔다. 전하께서 그 기미를 밝게 살피어 발(發)하기 전에 앞질러 베어 멸(滅)하고, 태상왕께 아뢰어 청하여서 적장(嫡長)인 상왕(上王)을 맞아 세자(世子)로 책봉하니, 이륜(彝倫)이 발라[正]지고 종사(宗社)가 정하여졌다. 9월 정축(丁丑)에 태상왕이 병이 낫지 아니하여 상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 등이 동기(同氣)를 해(害)하려고 꾀하여, 회안(懷安) 부자(父子)를 꾀어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여 반역의 형세가 심히 치성(熾盛)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장수와 사졸들을 거느리고 독려하여 이내 곧 평정하고, 박포만 베고 나머지는 모두 묻지 않았으며, 회안(懷安)은 안치(安置)하여 의친(懿親)012) 을 폐하지 않았다. 상왕(上王)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功)이므로, 이를 책봉하여 세자(世子)를 삼아 국본(國本)을 정하였다. 가을 7월 기사(己巳)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太上王)의 계운 신무(啓運神武)의 호(號)를 가상(加上)하고, 겨울 11월 계유(癸酉)에 상왕(上王)도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 전하에게 손위(遜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이듬해 신사년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寺丞) 장근(章謹)·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예(端木禮)를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봉(封)하여 왕으로 삼고,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어 면복(冕服)을 내려 주고 질(秩)을 친왕(親王)에 비(比)하였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여 널리 만방(萬邦)에 고(告)하매, 전하께서 곧 좌정승(左政丞) 신(臣) 하윤(河崙)을 명하여 들어가 등극(登極)을 하례(賀禮)하였다. 황제가 〈우리 전하께서〉 충성(忠誠)으로 사대(事大)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내려 주고,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금년 여름 4월에 그대로 봉하여 왕을 삼고, 가을 9월에 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어 곤면 구장(袞冕九章)과 금단(錦段)·사라(紗羅)·서적(書籍), 그리고 왕비(王妃)의 관포(冠袍)와 금단·사라, 태상왕(太上王)의 금단·사라를 내려 주어 세상에 드문 총전(寵典)이 전후(前後)에 답지(遝至)하였다. 대개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盛)한 것은 실로 하늘이 열어 준 바로서, 오로지 대동(大東)을 부탁하여 홍도(鴻圖)와 휴명(休命)을 연장하게 하였으니, 황제(皇帝)의 융숭(隆崇)한 권고(眷顧)를 받아 천록(天祿)의 영구함을 누려야 마땅할 것이다.
기업(基業)을 창시(創始)한 자취는 비록 조종(祖宗)에서부터이나, 〈자손을〉 후하게 낳으신 경사는 실로 신의 왕후(神懿王后)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아아! 성(盛)하도다. 후(后)께서는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상왕(上王)이 둘째이시고, 우리 주상 전하가 다섯째이시다. 맏은 이방우(李芳雨)이니 진안군(鎭安君)을 봉하였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 세째는 방의(芳毅)이니 익안 대군(益安大君)을 봉하였고, 다음 네째는 이방간(李芳幹)이니 회안 대군(懷安大君)이다. 다음 여섯째는 이방연(李芳衍)이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두 분이 있으니, 맏은 경신 궁주(慶愼宮主)로서 찬성사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로서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상왕(上王)의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서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니, 증 좌시중(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고, 우리 전하의 배위는 정비(靜妃)이니,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영예문 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민제(閔霽)의 딸이다. 맏아들은 원자(元子) 제(禔)이고, 둘째와 세째 아들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정신 궁주(定愼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녕군(平寧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복근(福根)을 낳았으니 봉녕군(奉寧君)이고, 딸은 소윤(少尹) 이숙묘(李叔畝)에게 출가하였다. 익안(益安)은 증 찬성사(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으니 원윤(元尹)이고, 딸은 첨총제(僉摠制) 김한(金閑)에게 출가하였다. 회안(懷安)은 증 찬성사(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종(孟宗)을 낳았으니 의녕군(義寧君)이고, 딸은 종부 영(宗簿令) 조신언(趙愼言)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신(臣) 근(近)은 일찍이 살펴 보건대, 삼대(三代)013) 성왕(聖王)의 후비(后妃)의 덕(德)이 도산(塗山)·태사(太姒)보다 더 큰 이가 없어, 《시경(詩經)》·《서경(書經)》에 실려 있어 천고(千古)에 밝게 빛나는데, 신의(神懿)의 덕(德)이 진실로 〈그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다만 신(臣) 근(近)이 학식(學識)이 천박(淺薄)하고 필력(筆力)이 비졸(鄙拙)하여, 비록 지극히 형용(形容)하나 천지(天地)를 그리는 것 같으니, 어찌 능히 〈그것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주(周)나라 대아(大雅)의 대명장(大明章)014) 과 사제장(思齊章)015) 의 뜻을 상고하여 삼가 명사(銘辭)를 지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拜手稽首]려 올린다. 그 사(詞)에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밝고 성하시어 덕(德)이 있는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나니, 사사로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그 계도(啓導)는 무엇인고하니, 유순하고 아름다운 이를 낳아, 와서 덕(德) 높은 임금의 배필(配匹)이 된 것일세. 실가지락(室家之樂) 마땅하여 임신(姙娠)하고 생육(生育)하니, 그 정령(精靈)이 밝고 밝아, 천인(天人)이 기대하던 착하고 어진이를 낳았네. 거룩한 아버지를 붙들어 도우시고, 위대하게 백성들의 임금이 되었네. 몸소 제정(帝庭)에 조회하시어 우리 방토(邦土) 보전하였네. 서얼(庶孽)의 화란(禍亂)이 싹틀 때에, 기미를 밝게 살펴 시원스레 소탕하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편안하게 되었네. 공(功) 세우고 사양하여 적장 왕자(嫡長王子) 높이시니, 이륜(彝倫)이 발라[正]지고 기세(基勢)가 더욱 장(壯)하여졌네. 형제(兄弟)의 집안 싸움 만났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그 신명(身命) 보전(保全)케 하시어 우애(友愛)함이 더욱 더 돈독(敦篤)하였네. 덕(德)은 높고 공(功)은 크니, 황제(皇帝)의 권고(眷顧)를 받는 것이 마땅하여, 명(命)을 주심이 중첩하였네. 밝고 밝은 제고(帝誥)016) 와 빛나고 빛나는 금보(金寶)017) 를, 우리 임금 받으시어 만세(萬世)에 길이길이 보존하리라. 왕업(王業)의 자취는 조종(祖宗)이 쌓은 것이나, 우리의 성신(聖神)은 후덕(后德)으로 말미암았네. 신(臣)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올리는 말씀이 구차한 것이 아니니, 만세(萬世)에 밝게 전하여 천지(天地)와 같이 영구하리라.’"
비문(碑文)은 권근(權近)이 지난해에 지은 것인데, 화장사(華莊寺)의 묵은 비(碑)를 갈아서 새기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89면
- 【분류】역사-사학(史學)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4]계(啓) : 하후(夏后)씨로 우(禹)의 아들.
- [註 005]
태사(太姒) : 문왕(文王)의 비(妃).- [註 006]
선유(仙遊) : 죽음.- [註 007]
영양(榮養) :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함.- [註 008]
계년(筓年) : 시집갈 나이 곧 15세.- [註 009]
춘관(春官) : 예조(禮曹).- [註 010]
신씨(辛氏) : 우왕(禑王).- [註 011]
화하(華夏) : 중국.- [註 012]
의친(懿親) : 지친(至親).- [註 013]
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 [註 014]
대명장(大明章) : 무왕(武王)과 그 조상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노래한 것.- [註 015]
○立齊陵碑。 碑文曰:
自昔帝王受命而興, 必賴妃匹之賢, 侔德毓慶, 以永厥緖。 夏有塗山 而啓能繼, 周有太姒而武丕承, 禹、文配天之祀, 繇是有永。 猗歟盛哉! 惟我神懿王后, 天資淑懿, 坤德柔貞, 早嬪龍淵, 弼成王業, 篤生聖哲, 垂統罔極, 神功懿範, 比古無愧。 獨惜夫大勳垂集, 仙遊甚遽, 太上開國而莫崇其壼儀, 二聖承緖而莫致其榮養。 山陵掩耀, 霜露增悲, 嗚呼痛哉! 初諡節妃, 陵號曰齊, 後加諡神懿王后, 置仁昭殿, 以安眞容, 追崇之典, 已備擧矣。 我主上殿下, 慟念慈儀永閟, 孝思莫伸, 爰命攸司, 勒銘豐碑, 令臣近爲文, 垂示萬世。 臣近承命悸恐, 不敢以辭。 謹按后姓韓氏, 安邊世家。 皇考諱卿, 贈忠誠恭謹積德毓慶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皇祖諱珪仁, 贈積善毓慶同德贊化翊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使司事、兼判吏曹事、安川府院君; 皇曾祖諱裕, 贈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戶曹事、安原君; 皇妣申氏, 封三韓國大夫人, 贈秉義毓德輔祚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判刑曹事元麗之女。 后生而淑婉, 聰慧異常, 及筓擇配, 來嬪于我太上王。 初爲將相數十年間, 出入攻戰, 靡有寧歲, 后能竭力營家, 勉以成功。 又性不妬忌, 禮遇妾侍, 克有多男, 敎誨以義。 今我主上殿下, 睿哲英茂, 聖學日進, 年未及冠, 擢第春官。 當僞辛戊辰之歲, 侍中崔瑩, 謀欲猾夏, 以我太上王威望素著, 授以節鉞, 俾往攻遼。 太上王仗義還師, 執退崔瑩, 代以名儒李穡, 中外晏然, 邦國永賴。 穡告太上王曰: "當玆構釁中國之後, 非執政者親朝帝庭, 則公之忠誠, 無以白於天下", 剋日將行。 太上王謂穡曰: "吾與公一時竝使, 國事誰任? 我擇一子, 從公而行, 猶吾往也。" 乃遣我殿下, 充書狀官, 特蒙高皇帝優禮而還。 己巳秋, 帝又降勑, 責以異姓爲王氏後, 太上王與諸將相議, 立王氏之裔定昌君 瑤爲王。 先是, 權奸擅政, 敓攘矯虔。 太上王時爲左相, 罷私田擧墜典, 弊去利興, 百度俱新, 功高不賞, 德大難容, 讒邪交構, 浸潤叵測, 定昌柔暗, 依違兩端。 后乃憂勞成疾, 以辛未秋九月二十三日薨, 享年五十五。 以禮葬于城南海豐郡治粟村之原。 我殿下廬墳, 欲終三年, 明年壬申春, 太上西行, 舁疾而還, 殿下來侍湯藥, 群邪抵隙, 謀傾益急。 我殿下應機決策, 討除渠魁, 兇徒瓦解, 定昌益憚。 秋七月十六日, 與二三大臣, 倡以大義, 臣僚父老, 不謀而同, 合辭推戴。 太上王迫於群情, 迺卽王位, 市肆不易, 會朝淸明。 卽遣使入奏帝庭, 聯承勑報, 旣許王爵, 且更國號, 以復朝鮮之美稱。 越三年甲戌夏, 帝乃遣使, 令朝親男, 太上王以我殿下, 通經達禮, 最賢諸子, 命隨來使以行。 旣至, 帝與語嘉之, 優賞遣歸。 戊寅秋八月, 太上王不豫, 姦臣鄭道傳等, 思擅國柄, 謀去諸嫡, 將立幼孼, 朋家聚黨, 禍發斯迫。 殿下炳幾, 先其未發, 誅除以熸。 申請太上以嫡以長, 迎致上王, 冊封世子, 彝倫旣正, 宗社載定。 九月丁丑, 太上以疾未瘳, 傳位上王。 庚辰正月, 逆臣朴苞等, 謀戕同氣, 誘掖懷安父子, 稱兵向闕, 逆勢甚熾。 我殿下率勵將士, 旋卽平定, 誅止苞身, 餘悉不問, 安置懷安, 不廢懿親。 上王以未有繼嗣, 且其開國定社, 咸我殿下之績, 冊爲世子, 以定國本。 秋七月己巳, 奉冊寶加上太上王啓運神武之號。 冬十有一月癸酉, 上王亦以疾, 遜位于我殿下, 遣使請命。 明年辛巳, 建文帝遣通政寺丞章謹、文淵閣待詔端木禮, 奉誥命印章來, 封我殿下爲王。 冬, 遣鴻臚寺行人潘文奎, 來錫冕服, 秩比親王。 今皇帝卽位, 誕告萬邦, 殿下卽命左政丞臣河崙, 入賀登極。 帝嘉忠誠事大, 賜以誥印, 遣都指揮高得、左通政趙居任, 以今年夏四月來, 仍封爲王。 秋九月, 又遣翰林待詔王延齡、行人崔榮, 來錫袞冕章錦段紗羅書籍, 王妃冠袍錦段紗羅, 太上王錦段紗羅, 希世寵典, 先後遝至。 蓋我殿下功德之盛, 實天所啓, 專付大東, 以延鴻休, 宜受帝眷之隆, 以膺天祿之永也。 肇基之迹, 雖自祖宗, 篤生之慶, 實繇神懿。 噫嘻盛哉! 后生六男, 上王居二, 我主上殿下居五。 長曰芳雨, 封鎭安君, 先卒; 次三芳毅, 封益安大君; 次四芳幹, 懷安大君; 次六芳衍, 登科不祿。 二女: 長慶愼宮主, 適贊成事李佇; 次慶善宮主, 適靑原君 沈淙。 上王配金氏, 今封王大妃, 贈左侍中天瑞之女。 我殿下配靜妃, 驪興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閔霽之女。 男長元子禔, 次三男皆幼。 女長定愼宮主, 適淸平君 李伯剛; 次慶貞宮主, 適平寧君 趙大臨, 餘皆幼。 鎭安娶贊成事池奫之女, 生男曰福根, 奉寧君; 女適少尹李叔畝。 益安娶贈贊成事崔仁㺶之女, 生男曰石根, 元尹; 女適僉摠制金閑。 懷安娶贈贊成事閔璿之女, 生男曰孟宗, 義寧君; 女適宗簿令趙愼言, 餘皆幼。 臣近嘗觀三代聖王后妃之德, 莫盛塗、姒, 載在《詩》、《書》, 千古炳耀, 神懿之德, 誠可儷美。 第以臣近, 學識膚淺, 筆力鄙拙, 雖極形容, 如繪天地, 曷能髣髴其萬一哉! 敢稽《周雅》 《大明》、《思齊》之義, 謹述銘辭, 拜手稽首以獻。 其詞曰: 上帝赫赫, 啓佑有德。 匪伊私之, 爲民之極。 其啓維何? 迺生柔嘉。 來配于德, 允宜室家。 載震載育, 厥靈是赫。 篤生聖哲, 天人攸屬。 扶翊聖父, 誕作民主。 躬朝帝庭, 保我邦土。 孼牙之萌, 炳幾維明。 廓爾汛掃, 宗社載寧。 功成克讓, 以尊嫡長。 彝倫旣正, 基勢益壯。 迺遭墻鬩, 不忍致辟。 俾獲保全, 友愛彌篤。 維德之隆, 維功之崇。 宜紆帝眷, 錫命稠重。 明明帝誥, 煌煌金寶。 我龍受之, 萬世永保。 粤維王迹, 祖宗攸積。 誕我聖神, 繄繇后德。 臣拜稽首, 獻辭不苟。 萬世昭垂, 天地永久。
碑文, 乃權近去年所製也。 磨去華莊寺舊碑而刻之。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89면
- 【분류】역사-사학(史學)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