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선발을 신중히 할 것 등을 건의한 문하부 낭사의 상소문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가 상소하여, 전선(銓選)을 중하게 하고 쓸데없는 관원[冗官]을 태거(汰去)하기를 청하였다. 소(疏)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 등이 엎드려 성시(盛時)를 만나, 고명(誥命)을 받으시어 대위(大位)를 바루시고, 또 관제(官制)를 고치는 일로써 상국(上國)에 계달(啓達)하였으니, 대개 정화(政化)를 경장(更張)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새로워져서, 일대(一代)의 다스림을 일으키고 만세(萬世)의 법을 세우자는 것이니, 심히 성대한 일입니다. 신 등이 모두 재주가 없이 외람되게 언책(言責)에 있어, 광고(狂瞽)의 말씀을 진달하여 성치(聖治)의 만(萬)의 일(一)이라도 돕기를 생각하와, 삼가 국제(國制)가 전조(前朝)의 구폐(舊弊)를 그대로 인습하여 마땅히 고쳐야 될 한두 가지 조건(條件)을 들어서 갖추 기록하여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감(上鑑)께서 재택(裁擇)하여 시행하소서.
1. 전선(銓選)의 법은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조(前朝)의 성시(盛時)에는 이조(吏曹)는 문선(文選)을 맡고, 병조(兵曹)는 무선(武選)을 맡게 하여, 각각 정안(政案)을 두어 제수(除授)하는 일을 맡겼으니, 대개 중국과 같았습니다. 중엽(中葉)의 쇠(衰)한 때에 이르러 권신(權臣)이 폐(廢)하고 세우[立]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 주고 빼앗는 것을 오로지하여, 항상 제 집에 있으면서 요속(僚屬)과 더불어 사사로이 정안을 가져다가 주의(注擬)하고 제수하였는데, 이를 ‘정방(政房)’이라 이름하고, 여러 대(代)를 상전(相傳)하여 으레 그럴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 뒤에 뜻 있는 선비가 시정(時政)의 잘못을 말하려면 반드시 정방의 혁파(革罷)를 말하였으나, 마침내는 혁파하지 못하고 능이(陵夷)하여 결국은 망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국초에 정방(政房)을 고쳐 상서사(尙瑞司)로 하였는데, 이름은 비록 고쳤으나, 그 실상은 그대로 있어, 왕실의 중임(重任)으로 사문(私門)의 폐법을 답습하였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상서사(尙瑞司)를 파하고, 문전(文銓)은 이조로 돌리고, 무선(武選)은 병조로 돌리어, 공평하고 청렴하며, 강직하고 정대하며 식감(識鑑)이 있는 자를 택하여 이조·병조의 관원을 갖추어 전조 구시(舊時)의 성제(盛制)를 회복하소서.
1. 재상(宰相)의 직책은 인주(人主)가 더불어 정사를 함께 하는 것이니, 직임(職任)이 가장 중합니다. 전조의 예전 제도가 당나라·송나라를 본받아서, 문하부 시중(門下府侍中) 이하 참지(參知) 이상 다섯 사람을 두어 재상의 일을 맡기어 이를 ‘성재(省宰)’라 하고, 밀직 판사(密直判事) 이하 일곱 사람을 두어 군정(軍政)을 맡기어, 평시에는 각각 본사(本司)에 앉아 있게 하고, 큰일이 있은 연후에야 모여서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합좌(合坐)’라 하여, 혹은 1년에 한번 모이고, 혹은 여러 해 동안 모이지 않기도 하였는데, 쇠퇴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번다하고 일이 많아서 날마다 합좌하고, 그 인원을 더 두어서 많기가 수십 인에 이르러, 떼로 나오고 떼로 물러가고 하였으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모두 성(省)은 다섯, 추(樞)는 일곱의 수에 의하여 나머지는 모두 없애고, 의정부(議政府)를 파(罷)해서 각각 본사(本司)에 앉게 하고, 큰일이 있은 연후에야 합좌하여 의논케 하여 재상의 임무를 중하게 하소서.
1. 근자에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어서 군정(軍政)을 맡기니, 중추(中樞)의 인원은 많고 할 일이 없어서, 한갓 허설(虛設)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대간(臺諫)이 헌언(獻言)하여 중추(中樞)를 파해 삼군부(三軍府)에 합쳤었는데, 대개 한때의 권의(權宜)였고 정법(定法)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또 중추(中樞)의 이름은 당(唐)·송(宋)을 본받은 것이고, 의흥(義興)의 이름은 한때의 명칭이니, 중국(中國)에 통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다시 중추원(中樞院)을 두어서 삼군(三軍)을 통솔하게 하고 의흥(義興)의 이름은 없애소서.
1. 육조(六曹)의 전서(典書)는 주관(周官)의 육경(六卿)인데, 본래 한 경(卿)이 한 사람에 그치고, 여섯 시(寺)와 일곱 감(監)은 본래 판사(判事)가 없고, 역시 다만 경(卿)과 감(監)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전조(前朝) 공민왕(恭愍王) 이래로 더 두었사오니, 원컨대, 지금부터 전서·판사·경·감을 각각 한 사람씩 두고, 그 나머지는 없애도록 하소서. 그리고, 무릇 쓸데없는 관원[冗官]도 없앨 만한 것은 또한 모두 없애소서."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06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鄕村) / 농업-임업(林業)
○門下府郞舍上疏, 請重銓選汰冗官。 疏略曰:
臣等伏値膺受誥命, 以正大位, 且以改官制事, 咨達上國, 蓋欲更張政化, 與國咸新, 以興一代之治, 以立萬世之法, 甚盛擧也。 臣等俱以不才, 忝居言責, 思陳狂瞽, 以補聖治之萬一。 謹將國制因襲前朝舊弊, 在所當改者一二條件, 具錄申聞, 伏惟上鑑裁擇施行。 一, 銓選之法, 不可不重。 前朝盛時, 吏曹掌文選, 兵曹主武選, 各置政案, 以任除授之事, 蓋與中國同也。 及其中衰, 權臣擅廢立專予奪, 常居其第, 與其僚屬, 私取政案, 注擬除授, 號爲政房, 累世相傳, 習以爲常。 其後有志之士, 言時政之失, 必以革政房爲言, 而卒不能革, 陵夷以至于亡。 國初, 改政房爲尙瑞司。 其名雖改, 其實尙存。 以王室之重任, 襲私門之弊法, 不可不改也。 願自今, 罷尙瑞司, 以文銓歸吏曹, 武選歸兵曹, 擇公廉剛正有識鑑者, 以備吏兵曹員, 復前朝舊時之盛制。 一, 宰相之職, 人主所與共政, 其任最重。 前朝舊制, 取法唐、宋, 置門下府, 侍中以下參知以上五人任相事, 謂之省宰, 密直判事以下七人任軍政。 平時則各坐本司, 及有大事, 然後會議, 謂之合坐。 或一歲而一會, 或累歲而不會, 至其衰季, 政繁事夥, 逐日合坐, 增置其員, 多至數十, 旅進旅退。 願自今, 悉依省五樞七之數, 餘悉汰去。 罷議政府各坐本司, 及有大事, 然後合坐而議, 以重宰相之任。 一, 近者置義興三軍府, 以任軍政。 中樞員額增多, 而無所事, 徒爲虛設, 故臺諫獻言, 罷中樞而合于三軍府, 蓋一時之權宜, 非可以爲定法也。 且中樞之號, 取法唐、宋, 義興之名, 一時所稱, 非可通于中國。 願自今, 復置中樞院, 以總三軍, 革去義興之號。 一, 六曹典書, 卽《周官》之六卿, 本一卿止一人爾, 六寺七監, 本無判事, 亦只有卿監而已, 自前朝恭愍王以來, 乃增置之。 願自今, 典書判事卿監, 各置一員, 其餘汰去, 凡冗官可汰者, 亦皆汰之。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06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鄕村) / 농업-임업(林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