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일 을축 20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길재가 사직하고 돌아가다. 사신의 인물평

길재(吉再)가 사직하고 돌아갔다. 길재신씨(辛氏)080) 조정에 벼슬하여 문하 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기사년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081) 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당(鄕黨)에서 그 효도를 칭송하였다. 세자(世子)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길재가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서 같이 배웠었다. 하루는 세자가 서연관(書筵官)과 더불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하다가 말하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함께 배웠는데, 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하니,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길재와 같은 고향 사람인데, 길재가 집에 있으면서 효행하는 아름다움을 갖추 말하였다. 세자가 기뻐하여 삼군부(三軍府)에 영을 내려, 이첩(移牒)하여 그를 불렀었다.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세자가 임금에게 아뢰어 봉상 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다. 길재가 대궐에 나와 사은(辭恩)하지 아니하고, 동궁(東宮)에게 상서(上書)하였다.

"길재가 옛날에 저하(邸下)와 더불어 반궁(泮宮)082) 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 정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길재신씨(辛氏) 조정에 등과하여 벼슬하다가, 왕씨(王氏)083) 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서 장차 몸을 마치려 하였습니다. 지금 옛일을 기억하고 부르셨으니, 길재가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려 하는 것이요, 벼슬에 종사하는 것은 길재의 뜻이 아닙니다."

세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하는 것은 바로 강상(綱常)의 바꿀 수 없는 도리이니, 의리상 뜻을 빼앗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요, 벼슬을 시킨 것은 주상(主上)이니, 주상에게 사면을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길재가 드디어 상서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이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씨(辛氏)의 조정에 벼슬하여, 과거에 뽑혀 문하 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합니다. 빌건대, 놓아 보내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여, 신의 두 성(姓)을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효도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게 하여 남은 여생을 마치게 하소서."

임금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것이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가 말하기를,

"한미한 유자(儒子)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권근(權近)에게 묻기를,

"길재(吉再)가 절개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으니, 예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떻게 처치할까?"

하니, 권근이 대답하였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머물기를 청하여 작록(爵祿)을 더해 주어서 뒷사람을 권려하여야 합니다. 청하여도 억지로 간다면, 스스로 그 마음을 다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광무제(光武帝)한(漢)나라의 어진 임금이지마는, 엄광(嚴光)084) 이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비가 진실로 뜻이 있으면,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이에 본군(本郡)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그 집을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사신 홍여강(洪汝剛)이 논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씨(辛氏)가 이미 정통(正統)이 아니요, 주서(注書)가 또한 현달한 관직이 아니니, 길재(吉再)가 마땅히 성조(盛朝)에 벼슬할 것이요, 작은 절개에 구애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생각하건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니, 신씨(辛氏)가 비록 위조(僞朝)이나 이미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었고, 주서(注書)가 비록 미관(微官)이나 또한 종사(從仕)하여 녹을 먹었으므로, 어떻게 위조(僞朝)와 미관(微官)이라 하여 나의 신자(臣子)된 분수를 이즈러뜨릴 수 있겠는가! 또 절의(節義)는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어서, 삶이 있는 처음에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공리(功利)에 이끌리고 작록(爵祿)에 어두어서 모두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 신씨가 망한 지가 이미 오래이고, 자손 가운데 의탁할 만한 자도 없는데, 길재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를 지켜, 공명을 뜬구름 같이 여기고, 작록을 헌신짝 같이 보아, 초야(草野)에서 몸을 마치려 하였으니, 또한 충렬한 선비라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1책 5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81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歷史)

  • [註 080]
    신씨(辛氏) : 우왕(禑王).
  • [註 081]
    선주(善州) : 선산(善山).
  • [註 082]
    반궁(泮宮) : 성균관.
  • [註 083]
    왕씨(王氏) : 공양왕(恭讓王).
  • [註 084]
    엄광(嚴光)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 여요인(餘姚人). 광무제와 어려서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여 불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았음.

吉再辭職而歸。 朝爲門下注書, 歲己巳, 棄官歸善州, 奉養孀親, 鄕黨稱其孝。 世子在潛邸, 嘗侍學于成均館。 一日, 世子與書筵官, 論遺逸之士, 乃曰: "吉再, 剛直人也。 我嘗同學, 不見久矣。" 正字田可植, 同貫人也。 具言在家孝行之美, 世子喜, 下令三軍府移牒徵之。 乘傳至京, 世子啓于上, 授奉常博士, 不詣闕謝恩, 乃上書東宮曰:

所言,於昔日, 得與邸下, 讀《詩》泮宮, 今之召臣, 不忘舊也。 然朝登科筮仕, 及王氏復位, 卽歸于鄕, 若將終身。 今者, 記舊徵召, 欲上謁卽還, 從仕則非志也。

世子曰: "子之乃綱常不易之道也, 義難奪志。 然召之者吾也, 官之者上也, 告辭於上可矣。" 遂上書, 略曰:

臣本寒微, 仕於辛氏之朝, 擢第至門下注書。 臣聞女無二夫, 臣無二主。 乞放歸田里, 以遂臣不事二姓之志, 孝養老母, 以終餘年。

上覽而怪之曰: "此何人也?" 左右曰: "寒儒也。" 明日御經筵, 問權近曰: "吉再抗節不仕, 不識古有如此者, 何以處之?" 對曰: "如是之人, 當請留之, 加以爵祿, 以勵後人, 請之而强去, 則不如使之自盡其心之爲愈也。 光武, 之賢主也, 而嚴光不仕。 士固有志, 不可奪也。" 上乃許歸本郡, 令復其家。

【史臣洪汝剛曰: "或以爲辛氏旣非正統, 注書亦非達官, 宜仕於盛朝, 不須拘於小節。 愚謂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辛氏雖僞, 旣委質以爲臣, 注書雖微, 亦從仕而食祿, 安得以僞朝微官, 而虧吾臣子之分乎? 且節義, 天地之常經, 莫不受之於有生之初矣, 然其誘於功利, 淫於爵祿, 不能皆有以全之也。 辛氏之亡已久, 無子孫之可托矣。 也能爲舊君, 守其節義, 等功名於浮雲, 視爵祿於弊屣, 若將終身於草野, 亦可謂忠烈之士矣。"】


  • 【태백산사고본】 1책 5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81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