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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4월 6일 신축 7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용관을 태거하도록 청하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하도록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삼가 주관(周官)을 상고하니, 삼공(三公)은 도(道)를 의논하고, 육경(六卿)034) 은 직사(職事)를 분장(分掌)하여, 관(官)을 반드시 갖추지 아니하고 오직 적합한 사람을 썼습니다. 천관(天官) 총재(冢宰) 이하의 각 소속(所屬)이 60이므로, 육경(六卿)의 소속이 3백 60인데, 오히려 능히 어진 이를 쓰고 능한 이를 부리어 태화(泰和)의 정치를 가져왔습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3백 67인의 관원을 정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것으로 천하의 현재(賢才)를 대접하면 족하다.’ 하였습니다. 비록 천하가 크지만도 관작(官爵)의 설치한 것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은 동반(東班)이 판문하(判門下)·영삼사(領三司)에서 9품(品)까지가 5백 20여 원(員)이고, 서반(西班)이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에서 대장(隊長)·대부(隊副)까지가 4천 1백 70여 인이니, 문무(文武) 관리의 수효가 진실로 중국 조정의 제도에 3배나 됩니다. 게다가, 성중관(成衆官)·상림원(上林園)·도화원(圖畫院)·사순(司楯)·사의(司衣)·사막(司幕)·사옹(司饔)·충용(忠勇)·근시부(近侍府)·내시부(內侍府)·액정서(掖庭署)·전악서(典樂署)·아악서(雅樂署)에 각각 녹관(祿官)이 있고, 검교(檢校)·산질(散秩)이 또한 그 수를 더하니, 녹봉의 부족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고려의 옛 제도에 중서령(中書令)에서 지문하(知門下)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10원(員)이고, 판추밀(判樞密)에서 학사(學士)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9원(員)이고, 상서령(尙書令)에서 좌·우원외랑(左右員外郞)에 이르기까지가 각품(各品)마다 1원(員)이었고, 개성부 윤(開城府尹)은 직질이 이조 전서(吏曹典書) 위에 오르나 양부(兩府)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그 하관(下官)은 각품(各品)에 각각 2원(員)씩 두었고, 육부(六部)에는, 이부(吏部)·공부(工部)가 상서(尙書) 이하 매 품(品)에 각각 1원(員)씩이고, 호부(戶部) 이하가 매 품에 각각 2원(員)씩이었고, 6시(六寺)035) ·7감(七監)036) 에는 판사(判事) 이하가 각품에 각각 1원(員)이었으니,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서반(西班)에서는 상호군(上護軍)이 8인이고, 대호군(大護軍)이 16인이고, 친종(親從)이 3인이었고, 매 1영(一領)에 호군(護軍)이 1인이고, 중랑장(中郞將) 이하가 5원(員) 10장(將)037) 인데, 모두 42영(領)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아문(衙門)의 원리(員吏)의 수효도 또한 번다하지 않았으나, 직사를 폐(廢)하지 않게 하여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하여 4백여 년을 유지하였습니다.

근대(近代)에 이르러서 양부(兩府)의 수가 조금 옛날보다 증가하였으니, 공민왕(恭愍王)이 비로소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육조(六曹)와 6시(六寺)·7감(七監)의 매 품에 각각 2원을 증원하였습니다. 서반(西班)의 직도 또한 옛날보다 증가하였습니다. 갑인년038) 이후로 권신(權臣)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명기(名器)를 자기 사물(私物)로 보아 제 도당들을 죽 늘어놓으니, 양부(兩府)에 관직을 증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또 상의(商議)를 설치하였습니다. 수가 많아서 십수명에 이르렀으나 경제(經濟)를 맡은 자는 시중(侍中) 2인(人)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가 보고 들은 바입니다. 우리 태상(太上) 전하께서는 천운(天雲)에 응하여 개국하여서 법을 세우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용관(冗官)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초창기(草創期)임으로 인하여 근로(勤勞)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 때문에 다 고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러서, 매년 녹(祿)을 나누어 줄 때에 항상 넉넉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식량의 저축은 나라의 큰 계책인데, 지금 군량으로 녹봉(祿俸)에 충당하니, 심히 나라를 위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바다 밖에 있어서 절장보단(折長補短)하면 불과 천 리에 지나지 못하는데, 산천이 험조(險阻)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조세(租稅)의 법을 중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 창고(倉庫), 궁사(宮司), 각품(各品)의 과전(科田), 각사(各司)의 공해전(公廨田), 원(院)·관(館)·진(津)·역(驛)의 수전(受田), 군자(軍資)의 소속, 외관(外官) 3백여 원(員)의 늠급(廩給) 외에, 경관(京官)의 녹이 거의 10만 석이나 됩니다. 녹봉이 항상 부족한 것을 걱정하게 되고 군자(軍資)가 저축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용관(冗官)이 태거(汰去)되지 않고 산질(散秩)이 오히려 많은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전(傳)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없으면 야인(野人)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봉양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남을 다스리는 자는 남으로부터 얻어 먹고,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는 남을 먹여 살리는 것이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비록 존비(尊卑)의 등급은 있으나, 실상 서로 돕는 것입니다. 어찌 일 없이 앉아 먹기만 하여 백성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검교(檢校)의 직은 그 수효를 증가하여 많기가 수십 인에 이르는데, 관(官)에 사진(仕進)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녹을 먹으니, 이것은 바로 일 없이 백성의 봉양하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양부(兩府)는 일체 고려의 옛 제도에 의하고, 상의(商議)는 모두 없애소서. 한성부(漢城府)는 땅[土]을 맡은 관원이므로 양부(兩府)에 참렬(參列)할 수 없는데, 지금 하는 일 없이 묘당(廟堂)에 앉아 있으니, 조정을 높이고 명실(名實)을 중하게 하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판사(判事)를 혁파하고 다만 1윤(尹)만 두어서 옛 제도를 회복하고, 품질은 이조 전서(吏曹典書)의 위에 오르게 하며, 육조(六曹)는 각각 전서(典書) 1원(員)을 감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두며, 6시(六寺)·7감(七監)은 판사(判事)와 경(卿)·감(監)을 각각 1원(員)씩 감하고, 4품(品) 이하는 예전대로 하소서. 서반(西班)은 고려의 42도부(都府)의 제도에 의하여, 매양 1영(領)에 각각 5원(員) 10장(將)을 두고, 대장(隊長)·대부(隊副)는 모두 그 액수 그대로 하고, 기타 긴요하지 않은 경관(京官)과 신설한 성중 애마(成衆愛馬)의 녹관(祿官), 상림원(上林園)·도화원(圖畫院)·상의원(尙衣院)의 녹관 등과 외방의 주현(州縣)은 특별히 도당(都堂)에 명하여 상량 의논해서 없앨 것은 없애고, 합병할 것은 합병하며, 나이 늙은 훈구(勳舊)로서 수직(授職)할 수 없는 70세 이상의 사람은, 청하건대,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해서 녹을 허비하지 않게 하며, 검교(檢校)·산질(散秩)은 일절 모두 혁파하여, 공후(公侯)·종실(宗室)·공신(功臣) 외에 공이 없는 자는 봉군(封君)을 허락지 말고, 녹봉은 원액(原額)의 다소에 따라 수량을 계산하여 나누어 주어서, 군자(軍資)를 꾸어서 충당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조정이 높아지고 관작이 귀하여지며, 용원(冗員)이 줄어들고 녹봉이 넉넉하여져서, 백성은 수운(輸運)하는 수고가 덜리고 나라에는 축적하는 물자가 있을 것입니다."

소를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혹 합병하고 혹 없애는 일은 내가 이미 영(令)을 내렸고, 양부(兩府) 백사(百司)의 원수(員數)를 줄이는 일은 지금 초창(草創) 시기를 당하여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68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군자(軍資) / 인사(人事) / 역사(歷史) / 군사(軍事)

  • [註 034]
    육경(六卿) : 주대(周代)의 6관(官)의 우두머리. 천관(天官)의 우두머리로 궁중(宮中)의 일을 맡아보던 총재(冢宰), 지관(地官)의 우두머리로 내정(內政)·교육(敎育)을 맡아보던 사도(使徒), 춘관(春官)의 우두머리로 제사·예악을 맡아보던 종백(宗伯), 하관(夏官)의 우두머리로 군사를 맡아보던 사마(司馬), 추관(秋官)의 우두머리로 사법·외교를 맡아보던 사구(司寇), 동관(冬官)의 우두머리로 영조(營造)·공작(工作)을 맡아보던 사공(司空)을 말함.
  • [註 035]
    6시(六寺) : 6시(寺)는 태상시(太常寺:典儀寺)·종정시(宗正寺:宗簿寺)·위위시(衛尉寺)·태복시(太僕寺:司僕寺)·예빈시(禮賓寺)·사농시(司農寺:典農寺)임.
  • [註 036]
    7감(七監) : 7감(監)은 태부감(太府監:內府寺)·소부감(小府監:小府寺)·장작감(將作監:繕工寺)·사재감(司宰監:司宰寺)·군기감(軍器監:司器寺)·사천감(司天監:書雲觀)·태의감(太醫監:典醫寺)임.
  • [註 037]
    5원(員) 10장(將) : 8품 산원(散員) 5인과 7품 별장(別將) 5인·6품 낭장(郞將) 5인.
  • [註 038]
    갑인년 :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된 해.

○門下府上疏, 請汰冗官。 疏曰:

謹按周官, 三公論道, 六卿分職。 官不必備, 惟其人。 天官冢宰以下, 各屬六十, 而六卿之屬, 三百六十, 猶能任賢使能, 以臻泰和之治。 太宗, 定爲三百六十七員而曰: "吾以此, 待天下之賢才足矣。" 雖以天下之大, 官爵之設, 不過如此。 我朝東班, 自判門下、領三司至九品, 五百二十餘員, 西班自上、大將軍, 至隊長隊副, 四千一百七十餘人, 文武官吏之數, 固三倍於中朝之制矣。 加以成衆官、上林園、圖畫院、司楯、司衣、司幕、司饔、忠勇、近侍、內侍府、掖庭、典樂ㆍ雅樂署, 各有祿官, 而檢校、散秩, 則亦增其數, 祿俸之不周, 實由此也。 前朝舊制, 自中書令至知門下凡十員, 自判樞密至學士凡九員, 自尙書令至左右員外郞每各品一員。 開城府尹陞於吏曹典書之上, 不得與於兩府, 而下官各品, 各置二員。 六部則吏部工部, 自尙書以下每品各一員, 戶部以下每品各二員, 六寺七監, 判事以下各品各一員。 大槪如此。 西班上護軍八人、大護軍十六人、親從三人。 每一領護軍一人、中郞將以下五員十將, 凡四十二領。 其餘衙門員吏之數, 亦不煩冗, 使之不廢職事, 而國治民安, 維持四百餘年。 至于近代, 兩府之數, 少加於古, 而恭愍王始毁古制, 六曹、六寺、七監, 每品各增二員, 西班之職, 亦加於古。 甲寅之後, 權臣擅政, 視名器爲己私物, 布列枝黨, 增添兩府, 猶爲不足, 又設商議, 多至十數, 而掌經濟者, 不過侍中二人, 此皆殿下所見聞也。 我太上殿下, 應天開國, 立經陳紀, 欲革冗官, 第因草創, 以待勤勞, 而未得盡革, 以至于今, 每年頒祿, 常不周足。 夫糧餉之畜, 有國之大計。 今以軍資, 充其祿俸, 甚非爲國之道也。 我國在海外, 折長補短, 猶不過千里, 山川險阻, 土地磽薄, 租稅之法, 不可與中國比也。 諸倉庫、宮司、各品科田、各司公廨田、院館、津、驛所受, 軍資所屬外官三百餘員廩給外, 京官之祿, 幾於十萬石。 祿俸常患於不足, 軍資未見其積畜者, 豈非冗官之未汰, 散秩之尙多也? 《傳》曰: "無君子, 莫治野人, 無野人, 莫養君子。 治人者食於人, 治於人者食人。" 君子小人, 雖有尊卑之等, 而實相資也。 豈可無事而坐食, 享民之利乎? 檢校之職, 增益其數, 多至數十, 不仕於官, 在家食祿, 是乃無事而享民之食者也。 伏惟殿下, 深思廣慮, 兩府一依前朝舊制, 而商議則一切汰去。 漢城府掌土之官, 不可列於兩府。 今無所事, 而坐於廟堂, 非所以尊朝廷重名實也。 請革判事, 只置一尹, 以復舊制, 而陞於吏曹典書之上。 六曹各減典書一員, 餘皆仍之。 六寺七監判事卿監, 各減一員, 四品已下仍舊。 西班請依前朝四十二都府之制, 每一領各五員十將, 隊長隊副, 皆仍其額。 其他不緊京官、新設成衆愛馬祿官、上林院、圖畫院、尙衣院祿官等及外方州縣, 特命都堂擬議, 可汰者汰之, 可幷者幷之。 年老勳舊, 不可授職七十已上者, 請循前朝之制, 仍令致仕, 俾不失祿, 檢校散秩, 一皆革之。 公侯宗室功臣外無功者, 不許封君祿俸。 以原額之多少, 計數頒賜, 毋得貸軍資而充之。 如此則朝廷尊, 而官爵貴, 冗員省而祿俸足, 民弛漕輓之勞, 國有畜積之資。

疏啓, 上曰: "州府郡縣, 或幷或除事, 吾已下令矣。 兩府百司減省員數事, 今當草創之時, 不可遽行。"


  •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68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군자(軍資) / 인사(人事) / 역사(歷史)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