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실록1권, 정종 1년 5월 16일 을유 3/6 기사 / 1399년 명 건문(建文) 1년
통신관 박돈지가 일본과 왜구 근절책을 교섭하고 돌아오다. 일본이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다
국역
통신관(通信官) 박돈지(朴惇之)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피로(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 임금이 정전(正殿)에 나아가서 이를 인견(引見)하고, 명하여 4품(品)의 반차(班次)에 서서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대상국(大相國)은 능(綾) 1백 필, 사(紗)·나(羅) 각각 50필을 바치고, 대내전(大內殿) 의홍(義弘)은 투구 1개, 장검(長劍) 1개를 바치고, 대상국(大相國)의 모후(母后)는 나무로 조각한 지장 당주(地藏堂主) 천불위요(千佛圍繞) 1좌(座)와 극히 정교한 견(絹) 10필과 호초(胡椒) 10봉(封)을 바쳤다. 처음에 삼도(三島) 왜구(倭寇)039) 가 우리 나라의 변환(邊患)이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다. 무인년에 태상왕이 명하여 박돈지(朴惇之)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었는데, 박돈지가 명령을 받고 일본에 이르러 대장군과 더불어 말하였었다.
"우리 임금께서 신에게 명하기를, ‘우리 중외(中外)의 군관(軍官) 사졸들이 매양 청하기를, 「육지에는 진수(鎭戍)를 두고 바다에는 전함을 준비하여,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시석지간(尸石之間)에 붙여 초췌(憔悴)하고 노고하기가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른 것은, 삼도 왜구(三島倭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신 등은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내어 삼도를 쳐서 도적의 남은 무리가 없게 하고, 우리 국가에 다시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한다. 과인이 군관(軍官)과 사졸(士卒)의 희망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토벌하고자 하나, 대장군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평소에 위엄과 덕망이 있어 삼도지경(三島之境)에 미치니, 감히 군사를 가만히 행하여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하를 보내어 좌우(左右)에 고하는 것이다. 또 대장군이 정(精)한 병갑(兵甲)과 엄한 호령으로 어찌 삼도의 도적을 제압하여 이웃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겠는가?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시었습니다."
대장군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제가 능히 제어하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여섯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대장군이 대내전(大內殿)으로 하여금 군사를 더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니, 적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 [註 039] 삼도(三島) 왜구(倭寇) : 상하 대마도(上下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 등지에 근거지를 둔 왜구. 이 지역은 일본의 왜구가 가장 심하게 발호(跋扈)하던 곳임.
원문
○通信官朴惇之回自日本。 日本國大將軍遣使來獻方物, 發還被虜男女百餘人, 上御正殿引見, 命立四品班次行禮。 大相國獻綾一百匹、紗羅各五十匹, 大內殿 義弘獻鎧子一、長劍一, 大相國母獻刻木地藏堂主千佛圍繞一座, 極精巧。 絹十匹、胡椒十封。 初, 三島倭寇爲我國患, 幾五十年矣。 歲戊寅, 太上王命惇之, 使于日本。 惇之受命至日本, 與大將軍言曰: "吾王命臣曰: ‘我中外軍官士卒每請云: 「陸置鎭戍, 海備戰艦。 今我輩寄命矢石之間, 憔悴勞苦, 至於此極者, 以三島倭寇之致然。 臣等願大擧以討三島, 則寇賊無遺類, 而我國家無復患矣。」 寡人以軍官士卒之望, 欲興師討罪, 然大將軍久掌兵權, 素有威望在乎三島之境, 不敢潛師入境。’ 故先遣臣告于左右。 且大將軍以兵甲之精、號令之嚴, 豈不能制三島之賊, 以雪隣國之恥! 惟大將軍以爲如何?" 大將軍欣然聞命曰: "我能制之。" 卽遣兵討之, 與賊戰六月未克。 大將軍令大內殿加兵進攻之, 賊棄兵擲甲, 擧衆出降。
정종실록1권, 정종 1년 5월 16일 을유 3/6 기사 / 1399년 명 건문(建文) 1년
통신관 박돈지가 일본과 왜구 근절책을 교섭하고 돌아오다. 일본이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다
국역
통신관(通信官) 박돈지(朴惇之)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피로(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 임금이 정전(正殿)에 나아가서 이를 인견(引見)하고, 명하여 4품(品)의 반차(班次)에 서서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대상국(大相國)은 능(綾) 1백 필, 사(紗)·나(羅) 각각 50필을 바치고, 대내전(大內殿) 의홍(義弘)은 투구 1개, 장검(長劍) 1개를 바치고, 대상국(大相國)의 모후(母后)는 나무로 조각한 지장 당주(地藏堂主) 천불위요(千佛圍繞) 1좌(座)와 극히 정교한 견(絹) 10필과 호초(胡椒) 10봉(封)을 바쳤다. 처음에 삼도(三島) 왜구(倭寇)039) 가 우리 나라의 변환(邊患)이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다. 무인년에 태상왕이 명하여 박돈지(朴惇之)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었는데, 박돈지가 명령을 받고 일본에 이르러 대장군과 더불어 말하였었다.
"우리 임금께서 신에게 명하기를, ‘우리 중외(中外)의 군관(軍官) 사졸들이 매양 청하기를, 「육지에는 진수(鎭戍)를 두고 바다에는 전함을 준비하여,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시석지간(尸石之間)에 붙여 초췌(憔悴)하고 노고하기가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른 것은, 삼도 왜구(三島倭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신 등은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내어 삼도를 쳐서 도적의 남은 무리가 없게 하고, 우리 국가에 다시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한다. 과인이 군관(軍官)과 사졸(士卒)의 희망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토벌하고자 하나, 대장군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평소에 위엄과 덕망이 있어 삼도지경(三島之境)에 미치니, 감히 군사를 가만히 행하여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하를 보내어 좌우(左右)에 고하는 것이다. 또 대장군이 정(精)한 병갑(兵甲)과 엄한 호령으로 어찌 삼도의 도적을 제압하여 이웃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겠는가?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시었습니다."
대장군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제가 능히 제어하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여섯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대장군이 대내전(大內殿)으로 하여금 군사를 더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니, 적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 [註 039] 삼도(三島) 왜구(倭寇) : 상하 대마도(上下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 등지에 근거지를 둔 왜구. 이 지역은 일본의 왜구가 가장 심하게 발호(跋扈)하던 곳임.
원문
○通信官朴惇之回自日本。 日本國大將軍遣使來獻方物, 發還被虜男女百餘人, 上御正殿引見, 命立四品班次行禮。 大相國獻綾一百匹、紗羅各五十匹, 大內殿 義弘獻鎧子一、長劍一, 大相國母獻刻木地藏堂主千佛圍繞一座, 極精巧。 絹十匹、胡椒十封。 初, 三島倭寇爲我國患, 幾五十年矣。 歲戊寅, 太上王命惇之, 使于日本。 惇之受命至日本, 與大將軍言曰: "吾王命臣曰: ‘我中外軍官士卒每請云: 「陸置鎭戍, 海備戰艦。 今我輩寄命矢石之間, 憔悴勞苦, 至於此極者, 以三島倭寇之致然。 臣等願大擧以討三島, 則寇賊無遺類, 而我國家無復患矣。」 寡人以軍官士卒之望, 欲興師討罪, 然大將軍久掌兵權, 素有威望在乎三島之境, 不敢潛師入境。’ 故先遣臣告于左右。 且大將軍以兵甲之精、號令之嚴, 豈不能制三島之賊, 以雪隣國之恥! 惟大將軍以爲如何?" 大將軍欣然聞命曰: "我能制之。" 卽遣兵討之, 與賊戰六月未克。 大將軍令大內殿加兵進攻之, 賊棄兵擲甲, 擧衆出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