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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2일 기묘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였다.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스러운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성왕(成王)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 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 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주(周)나라양견(楊堅)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중국에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하는 곳은,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晉)나라·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여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당나라·진(晉)나라·한나라·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인해 도읍을 하였는데 대송(大宋)의 덕이 한 나라·당 나라에 못지 않았으며,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대요(大遼)·대금(大金)·대원(大元)이 다 도읍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平壤)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완산은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을 편벽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1.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1.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날사람들이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인사를 참고해 보시고, 인사가 다한 뒤에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

○上命諸宰相, 各上書議遷都之地。 判三司事鄭道傳曰:

一, 此地居國之中, 漕運所通。 所恨介於一洞之間, 內而宮寢, 外而朝市宗社之位, 無所容焉, 非王者居重御輕之所也。 一, 臣不學陰陽術數之說, 而今者衆多之論, 皆不出陰陽術數之外, 臣固不知所言。 孟子曰: "幼而學之, 壯而欲行之。" 請以平日所學言之。 [成]定鼎于郟鄏, 卽關中也。 卜年八百, 傳祚三十。 至十一代孫平王, 乃興四百四十九年, 遷于洛陽, 而人都于西舊地; 至三十代赧王乃亡, 人代之。 由是觀之, 所謂三十代八百年家之數, 無係於地也。 高祖項羽同伐, 韓生留都關中, 見宮室焚燒、人民屠殺, 不樂。 有人以術數說曰: "隔壁揚鈴, 喜聽其聲, 不見其形, 曰是祖宗山川, 思欲見之。" 信之, 東還彭城; 劉敬之言, 卽日西都關中, 乃滅亡, 德配天。 自是宇文 相繼都關中, 亦因之, 德與配。 由是言之, 人有治亂, 地無盛衰, 可知矣。 一, 中國之爲天子多矣。 所都之地, 西則關中, 如臣所言; 東則金陵, 而, 以次都之; 中則洛陽, 繼都此地, 又因之, 而大之德, 不下; 北則燕京, 而大遼大金、大皆都之。 且以天下之大, 歷代所都, 不過數四處, 其當一代之興, 豈無明術者乎? 誠以帝王都會之地, 自有定處, 非可以術數計度得之也。 一, 東方三韓舊都, 東有雞林, 南有完山, 北有平壤, 中有松京。 然雞林完山, 僻處一隅, 豈可使王業偏安於此乎? 平壤逼近北方, 臣恐非所宜都也。 一, 殿下初卽位, 承前朝毁廢之餘, 生民未蘇, 邦本未固, 是宜鎭靜, 休養民力。 仰察天時, 俯察人事, 相地之宜, 待時而動, 則庶乎萬全。 朝鮮之業, 垂於無窮, 而臣之子孫, 亦與有永矣。 一, 今之言地氣盛衰者, 非其心自有覺處, 皆傳聞古人之說也, 臣之所言, 亦皆古人已驗之說也。 豈在術數者爲可信, 而在儒者爲不可信乎? 伏望殿下留意量度, 參之以人事。 人事盡, 然後稽之卜筮, 動罔不吉。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