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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표전 문제 등 황제가 힐문한 10가지 조항에 대해 해명하는 주문

조정(朝廷)015) 의 사신 김인보(金仁甫)·장부개(張夫介)가 돌아가니, 임금이 주본(奏本)016) 1통(通)을 지어서 부쳐 올리고,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에 이르러 전송하였다. 그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6년(1393) 12월 초8일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김인보(金仁甫) 등이 이르러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어찌해서 고려이성계(李成桂)가 스스로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켜 해마다 그치지 않는가? 그 계량(計量)은, 창해(滄海) 강토(疆土)를 빙 둘러 있고 겹친 산[重山]을 짊어져서 험지(險地)를 삼은 것은 믿는 데 불과하니, 자주 흉완(兇頑)한 짓을 함부로 행하여, 우리 조정에서 군사 징발함을 한(漢)나라·당(唐)나라와 같이 여기고 있다. 또한 한(漢)나라·당(唐)나라 장수들은 기사(騎射)에는 장점이 있고 주즙(舟楫)017) 에는 단점이 있는 까닭으로, 바다를 건너는 데 고생을 하고 군사의 행진이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짐(朕)은 중국을 평정함으로부터 호로(胡虜)를 물리치고 하해(河海)와 육지(陸地)를 통틀어 정벌했으니,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어찌 한(漢)나라·당(唐)나라의 한 일에 비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반드시 군사가 삼한(三韓)에 이르지 않더라도 전후(前後)에 유인(誘引)한 여진(女眞)의 대소(大小) 가족들을 돌려보내고, 유인된 여진(女眞)의 변방을 수비한 천호를 보내어 오고, 이후에는 간사한 꾀를 만들어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지 말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한다면, 바야흐로 동이(東夷)의 군주가 되고 후사(後嗣)도 또한 번성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삼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천조(天朝)를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고 두 마음이 없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겠습니까? 국토(國土)는 좁고 인민은 적은데, 보잘것없는 산해(山海)를 무엇이 믿을 것이 있기에, 흉완(兇頑)한 짓을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전후(前後)에 여진(女眞)을 유인한 적이 진실로 없었는데, 지금 삼가 성지를 받고 전일에 있었다고 함을 알았으니, 두렵고 낭패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臣)의 선대(先代)는 본디 조선(朝鮮)의 유종(遺種)인데, 신의 22대 조상(祖上) 이한(李翰)에 이르러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으며, 신라가 망하자 이한(李翰)의 6대 손(孫)인 이긍휴(李兢休)고려에 들어와 벼슬하였으며, 이긍휴(李兢休)의 13대 손(孫)인 이안사(李安社)가 전대의 원(元)나라에 벼슬했으니, 이 분이 신의 고조(高祖)였습니다. 이로부터 뒤에는 고려의 관작은 받지 않았습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군사가 일어나매, 신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신(臣)들을 거느리고 피란하여 동쪽으로 왔습니다. 그 당시에 마침 왜구(倭寇)의 작란(作亂)이 있었으며, 또 모원수(毛原帥)·관선생(關先生)·나하추(納哈出)가 잇달아 들어와서 침구하니, 신이 무재(武才)를 좀 익혔던 이유로써 신을 항오(行伍)에 배치하였지마는, 신의 관직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공민왕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위성(僞姓)인 신우(辛禑)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이 잇달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 죄악이 가득하였으므로, 스스로 주륙(誅戮)을 취(取)하였습니다. 신은 본마음[素心]이 근신(謹愼)하여 다른 과실이 없었으므로, 신을 거용(擧用)하여 문하 수 시중(門下守侍中)으로 삼아 바야흐로 나라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했는데, 뜻밖의 최영(崔瑩)이 도리어 광망한 계획을 내어 신우(辛禑)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였습니다. 신은 소국(小國)이 상국(上國)의 국경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여러 사람들에게 대의(大義)로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신우(辛禑)는 그 죄를 알게 되고, 최영은 참형(斬刑)을 당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斬刑)을 당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왕씨(王氏)의 후손은 세상의 인망(人望)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고,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이에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들이, 신이 대국(大國)을 섬기는 충성이 있는 이유로써 함께 추대하여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를 임시로 보게 하고, 즉시 주문(奏聞)하여 삼가 윤허(允許)를 얻었습니다. 신은 본디 무부(武夫)이므로 실로 사리(事理)를 아는 능력이 없사오며, 또 신의 선대(先代)는 고려에 있었으므로 전혀 빙자(憑藉)할 세력이 없었는데, 다행히 성은(聖恩)을 힘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여 떠받드는 정성은 하늘의 해와 같이 명백합니다. 하물며, 최영·정몽주의 한 일이 밝은 거울처럼 가까이 있었는데, 신이 만약 그 간사한 계획을 계속한다면, 성은(聖恩)은 비록 신을 용서하고자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어찌 즐거이 용서하겠습니까?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히 심력(心力)을 수고롭게 하면서 이러한 이익이 없는 흔단(釁端)을 만들어 스스로 화(禍)를 초래하겠습니까? 신이 만약 기망(欺罔)한다면 천지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실 것입니다. 지금 조관(條款)의 정유(情由)를 낱낱이 한조목 한조목씩 열기(列記)하여서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1관(款)에 ‘조정(朝廷)018) 에서 매양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遼東)을 지키게 했는데, 저들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의 유(類)로써 거짓으로 행례(行禮)한다고 이유로 삼고 있으나, 마음속은 우리의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보니, 소방(小邦)에서 무릇 사신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갈 적에는 반드시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가게 되는데, 특별히 조정(朝廷)을 중하게 여겨 혹은 토산물인 포백(布帛)으로써 행례(行禮)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정(人情)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서로 꾀려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1관은 ‘요사이 사람을 보내어 제왕(齊王)의 처소에 이르러 행례(行禮)하였는데, 보내 온 사람이 거짓으로 이상한 말을 하면서 스스로 그 나라를 비방하고 있으니, 마음속은 왕(王)의 동정(動靜)을 정탐하는 데 있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를 조회(照會)해 보니, 소방(小邦)에서 다만 사신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갈 적엔 제왕부(齊王府)를 경유하여 가게 되므로, 제왕 전하(齊王殿下)에게 나아가서 행례(行禮)한 것이며, 또 그 중간에 혹시 언사(言辭)의 실수가 있었다면, 대개 이것은 명령을 받고 간 원인(員人)의 과실이므로 소국(小國)의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1관은 ‘전부터 자주 청하여 약속을 듣겠다 하고는, 약속한 지가 이미 오래 되매, 가고 난 뒤에는 곧 전일의 약속을 어기고 암암리에 여진(女眞)을 꾀어서 가족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게 했으니, 과연 이것이 약속을 듣겠다고 한 것인가? 죄의 큰 것이 이 흔단(釁端)보다 더 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보니, 소국(小國)의 군민(軍民)이 잇달아 요동(遼東)으로 도망해 가서 군정(軍丁)에 충당된 사람과 혹은 잠시 거주한 사람은 본디부터 유인한 일이 없었는데도, 고향을 생각하여 도로 다시 도망해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몰래 거주하고 있는데, 신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요사이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기(小旗) 이한니(李閑你) 등을 처자(妻子)까지 합쳐 23명을 잡아서 요동 도사에 보냈으며, 홍무(洪武) 26년(1393) 5월 13일에 삼가 수조(手詔)를 받고는 즉시 관할 서북면의 각 부(府)·주(州)·군(郡)·현(縣)에서 본디는 본국인(本國人)에 속했던 박용(朴龍) 등을 가족 3백 88명까지 잡아 오고, 파절 천호(把截千戶) 김완귀(金完貴) 등까지 잡아 와서,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조언(曺彦)을 시켜 압송(押送)한 것과, 취(取)하여 조사한 본래 거주하던 여진인(女眞人) 구을토(仇乙土) 등 1백 16명은 파견해 온 천호(千戶) 왕탈환불화(王脫歡不花)의 관령(管領)에게 부쳐, 모두 홍무(洪武) 26년 8월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 등과 함께 요동 도사에 보내어 서로 주고받고 했습니다.

1관은 ‘근일에 요동(遼東)에서 와서 아뢰기를, 「금년 7월에 불한당[劫賊] 1명을 잡아 왔는데 살펴보니, 고려 해주(海州) 청산(靑山) 파절 천호(把截千戶) 합도간(哈都干)의 하민(下民)으로서, 이름은 장갈매(張葛買)인데, 그가 말하기를, 고려왕(高麗王)이 흑포(黑布) 30통을 합도간(哈都干)에게 귀착(歸着)시켜 배 17척을 내게 했는데, 배마다 군사 40명, 노젓는 사람[搖櫓人] 18명, 백호(百戶) 1명씩이며, 연강(燕江)오 천호(吳千戶)를 시켜 관령(管領)하게 하고는 7월 초5일에 길을 떠났습니다. 배 위의 사람은 모두 왜적(倭賊)처럼 꾸미고, 배도 모두 흑색(黑色)으로 꾸며, 거짓으로 매매(賣買)합니다.」 하면서 소식을 정탐하게 하되, 만약 관군(官軍)을 만나면 다만 이것이 왜선이라고 말하고는, 연로(沿路)에서 겁략(劫掠)하여 잡아가면서 안치(安置)했는데, 화자(火者) 9명 중에서 1명은 죽이고, 6명은 놓아 돌려보내고, 2명을 남겨 두어 길을 인도하게 하여, 7월 28일 밤에 금주(金州)위도(衛島)에 도착하여 조금 정박했다가 오 천호(吳千戶)가 매(每) 선척(船隻)에 남은 군사 10명을 내어 간수(看守)하게 하고, 그 나머지 군인들은 자기가 인솔하여 언덕에 올라 신시(新市)의 군둔(軍屯)을 불사르고 겁탈하여, 군인과 가속(家屬)을 합계 4명을 사로잡아 가고, 2명을 죽이고, 3명을 살상(殺傷)하였다.’고 하였으며,

1관은 ‘또 거짓으로 왜적(倭賊)을 꾸며 선척(船隻)을 타고 산동(山東)의 영해주(寧海州)로 가서 언덕에 올라 본주(本州)019) 의 인연을 겁살(劫殺)하였음을, 본디 잡혀 갔던 화자(火者)가 도망해 돌아와서 말하여 그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삼가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기면서 지성으로 하고 두 마음이 없는데, 어찌 감히 소민(小民)을 보내어 배를 타고 거짓으로 왜적(倭賊)을 꾸며서 금주(金州)와 산동(山東) 등지에 가서 언덕에 올라 도둑질을 하여 인명(人命)을 살상(殺傷)하였겠습니까? 그 장갈매(張葛買)가 일컬은 바 ‘거짓으로 매매(賣買)한다 하면서 소식을 정탐한다는 것’은, 신은 실로 갈매(葛買)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오며, 더구나 만약 도둑질을 하여 겁살(劫殺)했다고 한다면 인정(人情)이 조격(阻隔)하여졌을 것이니 어떻게 사정을 정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거짓인 것은 분변(分辨)하지 않더라도 자명(自明)한 일입니다. 그전에 윤이(尹彝)이초(李初)가 도망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시비(是非)를 거짓 꾸몄으나, 황제께서 살펴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아시어, 윤이이초가 이미 그 죄에 복종하여 처형(處刑)되었사온데, 신은 아마 장갈매(張葛買)도 역시 이런 등류의 불량(不良)한 무리로서, 잡혀서 관청(官廳)에 이르매, 문득 없는 사실을 꾸며 내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소국에서 사신을 보내매 이와 같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사오니, 위에 하늘의 해가 있사온데 입으로는 사정을 호소(呼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잡힌 겁적(劫賊) 장갈매를 보내시어 나라 사람들과 대변(對辨)한다면 문득 거짓인가 참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관(款)은 ‘표문(表文)을 올려 입공(入貢)한다 일컫고는 매양 말[馬]을 가져오면서, 말을 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징발하여 보니, 말이 모두 둔하고 타서 지친 것들 뿐이며, 이번에 바친 말 중에는 다리가 병들고 이[齒]가 없는 것과 길들이지 않은 것이 반이나 되며, 그 나머지는 비록 관절병(關節病)은 없지마는, 또한 모두 둔하여 지성으로 바친 물건이 아니니, 이런 것으로써 업신여기고 화단(禍端)을 만드는 것보다는 어찌 줄여서라도 물건이 좋고 뜻이 성실한 것만 같겠는가?’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소국에서 생산되는 말이 본래 작고 둔하므로, 무릇 공헌(貢獻)할 때를 당하게 되면 힘을 다하여 가려서 바치게 되는데, 대개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다리가 병들고 피곤해 약한 것도 있을 것이오나, 소방(小邦)이 어찌 감히 업신여기겠습니까?

1관(款)은 ‘국호(國號)를 고치는 한 가지 절차는 사람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청하므로 혹은 조선(朝鮮)을 계승하든지, 이미 자기가 하도록 허가하고 즉시 정명(正名)하게 하였는데, 지금 이미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고치고서도 표문(表文)에는 그전대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일컫게 되니, 무슨 계획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간사한 짓을 서서 계획을 부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은 저들의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홍무(洪武) 26년(1393) 2월 15일에 배신(陪臣) 한상질(韓尙質)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면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사온데, 그 칙지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는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由來)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서 본받아, 하늘의 뜻을 본받고 백성을 잘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는데, 삼가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쳐 일컬은 외에, 신은 생각하기를 국왕(國王)의 명작(名爵)을 내리지 않았다고 여겨, 감히 함부로 왕(王)이라 일컫지 못한 것이며, 실로 업신여기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지금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즉시 명칭을 바루어야 된다.’ 하였으며, 또 도독부(都督府)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면,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니 이에 준하여 사은 표전(謝恩表箋)의 수찬(修撰)을 제폐하라.’ 하기에, 삼가 위의 명에 의거하여 시행하였으며,

1관(款)은 ‘이미 국호(國號)를 고치도록 허가했는데 사자(使者)가 돌아간 뒤에 오래 되도록 소식이 없었으며, 먼저 사람을 요왕(遼王)영왕(寧王)의 곳에 보내어 행례(行禮)하면서 조선국 권지 국사(朝鮮國權知國事)라 일컫고, 한달 후에야 겨우 표문(表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존비(尊卑)의 구분을 고의(故意)로 먼저 하고 뒤에 하였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국호(國號)를 고치고 사은(謝恩)하는 일은 홍무(洪武) 26년 3월 초9일에 문하 평리(門下評理) 이염(李恬)을 파견하여 표전(表箋)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가게 했는데, 간 뒤에 요왕(遼王)영왕(寧王)이 봉작(封爵)을 받고 도래(到來)하였다는 것을 들어 알았습니다. 신은 소방(小邦)이 요(遼)·녕(寧)과 경계가 서로 가까우므로 특별히 조정(朝廷)을 중시(重視)함으로써 마땅히 행례(行禮)해야 되겠기에, 그해 4월 초6일에 전 밀직 사(密直使) 박원(朴原)과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운(柳雲) 등을 파견하여 요왕영왕 전하(殿下)에게 가서 행례(行禮)하게 하였는데, 위의 항목의 이염(李恬)은 대개 경사(京師)에 가는 길이 매우 멀고 또 진헌(進獻)할 안자(鞍子)와 예물(禮物)을 가져가기 때문에 시일을 오래 지체하여 서울에 이르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고의로 먼저 가고 뒤에 간 것이겠습니까?

1관(款)은 ‘지난해에 왕창(王昌)020) 으로 하여금 내조(來朝)하기를 청하므로 허가하지 아니하고, 그 뒤에 왕요(王瑤)021) 에게 국사(國事)를 맡겼더니, 또 내조(來朝)하기를 청하므로 역시 허가하지 아니하였는데, 드디어 요(瑤)의 아들 석(奭)으로 하여금 내조(來朝)하게 하고서, 조정(朝廷)022) 에 이르자 도로 돌려보내고는, 그 부자(父子)가 부도(不道)하다고 일컬어 마침내 시역(弑逆)023) 을 행하였으니, 그들이 여러 번 내조(來朝)하기를 청한 것은 마음속으로 중국에서 정벌할까 두려워한 까닭으로, 이 일을 가탁(假託)하여 신용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가만히 보건대, 전대(前代)의 신창(辛昌)왕요(王瑤) 등이 여러 번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였으며, 요(瑤)가 아들 석(奭)을 보내어 친히 천조(天朝)에 조회하고 환국(還國)하여, 그 아버지와 더불어 부도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반역을 꾀하기까지 하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여 사저(私邸)로 물러가게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신을 왕으로 추대하여 조정(朝廷)에 주달(奏達)하니, 성자(聖慈)께서 그 사정을 환하게 아시고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였으니, 그 왕요(王瑤) 부자(父子)는 현재 단란(團欒)하게 모여 살게 하여 타고난 수명(壽命)을 보전하도록 하였으며,

1관(款)은 ‘국호(國號)를 고친 데 대한 사은(謝恩)하는 표전(表箋) 내에 업신여기는 언사(言辭)를 섞었으니, 소국(小國)으로써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이 과연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소방(小邦)이 먼 지방에 궁벽하게 있어서, 언어(言語)도 통하지 못하고 문견(聞見)도 넓지 못하여, 문자(文字)를 대강 익혀서 사정을 겨우 말하게 되므로, 표전(表箋)을 제작(製作)하는 데 있어서 체제와 격식을 잘 알지 못하여 잘못된 것이고, 감히 고의(故意)로 모만(侮慢)한 것은 아닙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5면
  • 【분류】
    외교-명(明)

  • [註 015]
    조정(朝廷) : 중국.
  • [註 016]
    주본(奏本) :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
  • [註 017]
    주즙(舟楫) : 배를 운행하는 일. 곧 수전(水戰).
  • [註 018]
    조정(朝廷) : 중국.
  • [註 019]
    본주(本州) : 영해주(寧海州).
  • [註 020]
    왕창(王昌) : 창왕(昌王).
  • [註 021]
    왕요(王瑤) : 공양왕.
  • [註 022]
    조정(朝廷) : 중국.
  • [註 023]
    시역(弑逆) :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

○己丑/朝廷使臣金仁甫張夫介還。 上撰奏本一道, 就附以進, 率群臣送至宣義門。 其奏曰:

洪武二十六年十二月初八日, 欽差內史金仁甫等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節該: "奈何高麗 【諱。】 , 自生邊釁, 連年不已? 其量不過恃滄海以環疆, 負重山以爲險。 所以數逞兇頑, 視我朝調兵如。 且之將, 長騎射短舟楫, 故涉海艱辛, 兵行委曲。 朕自平華夏胡虜, 水陸通征。 舟師諸將, 豈比之爲! 若不必師至三韓, 將前後所誘女眞大小送回, 及將誘引女眞守邊千戶發來。 是後毋造詐謀, 以生邊釁, 使彼國之民妥安, 方可爲東夷之主, 而後嗣亦昌。" 欽此竊惟, 小邦臣事天朝, 至誠無二, 安敢自生邊釁? 壤地褊狹, 人民鮮少, 區區山海, 何足負恃, 以逞兇頑? 前後女眞, 實無誘引。 今來欽奉前因, 兢惶殞越, 措身無地。 念臣先世, 本朝鮮遺種, 至臣二十二代祖, 仕新羅爲司空, 及新羅亡, 六代孫兢休高麗兢休十三代孫安社仕于前, 是臣高祖。 自後不受高麗官爵, 及季兵興, 臣父子春, 率臣等避地東來。 當其時, 適有倭寇作耗, 又有毛原帥關先生納哈出相繼入侵。 以臣粗習武才, 置臣行伍, 然臣官未顯達。 自高麗 恭愍王薨逝, 至僞姓辛禑十六年間, 權臣李仁任林堅味廉興邦等相繼用事, 流毒生民, 罪盈惡稔, 自取誅戮。 以臣素心謹愼, 無有他過, 擧臣爲門下守侍中, 方與國政, 不圖崔瑩反肆狂謀, 與辛禑興兵攻。 臣以小國不可侵犯上國之境, 諭衆以大義, 領兵回還, 辛禑知罪, 崔瑩伏誅。 國人以宗室王瑤, 權署國事, 以鄭夢周爲門下侍中。 夢周不誡崔瑩之覆轍, 與王瑤復謀攻, 國人以爲不可, 王瑤退歸私邸, 夢周伏誅。 國人以爲王氏之宗, 無有可當輿望者, 軍國之務, 不可一日無統。 於是大小臣僚、閑良、耆老等、以臣有事大之忠, 咸共推戴, 以權軍國, 隨卽奏聞, 欽蒙兪允。 臣本武夫, 實無知見, 且臣先世, 在於高麗, 全無憑藉之勢。 幸賴聖恩, 致有今日, 感戴之誠, 有如天日。 況崔瑩夢周, 明鑑不遠, 臣若踵其邪謀, 聖恩雖欲恕臣, 國人豈肯恕之? 臣非木石, 何敢枉勞心力, 爲此無益之釁, 自速禍殃! 臣如欺罔, 天地鬼神, 臨之在上。 今將條款情由, 逐一開坐, 謹具奏聞。 一款節該: "朝廷每命將守, 彼卽遣人, 以布帛金銀之類, 假以行禮爲由, 意在誘我邊將。"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凡遣使赴京, 必須經由遼陽前去, 特以朝廷爲重, 或以土産布匹行禮。 此乃出於人情, 豈有相誘之理! 一款節該: "近遣人至齊王處行禮, 所遣之人, 假爲異詞, 自謗彼國, 意在覘王動靜。"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但凡遣使赴京, 經由齊府前去, 就於齊王殿下行禮。 且如其間或有言辭之失, 蓋是承差員人之過失, 非小國所知。 一款節該: "已前數請願聽, 約束旣久, 去後輒違前約。 暗誘女眞, 帶家小五百餘名, 潛渡鴨綠。 果是願聽約束乎? 罪之大者, 無出此釁。"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國軍民, 節續逃往遼東, 投充軍丁者, 或暫居住者, 本無誘引, 懷思鄕土, 還復逃來, 山谷之間潛住。 臣初不知, 近據遼東都司來文, 差人捉獲到小旗李閑你等幷妻子二十三名, 起解遼東都司去。 後洪武二十六年五月十三日, 欽奉手詔, 隨卽於槪管西北面各府州郡縣, 緝獲到原係本國人朴龍等, 帶家小三百八十八名, 幷把截千戶金完貴等, 責差前密直副使曹彦管押。 及將取勘到原居女眞仇乙土等一百一十六名, 就付差來千戶王脫歡不花管領。 俱於洪武二十六年八月內, (根)〔眼〕 同欽差內使黃永奇崔淵等, 解付遼東都司交割了訖。 一款: "近日遼東來奏: ‘今年七月內, 獲到劫賊一名, 審係高麗 海州 靑山把截千戶哈都干下民名張葛買。 說稱: 「高麗王將黑布三十筒, 著落哈都干, 撥船一十七隻, 每船軍四十名, 搖櫓人十八名, 百戶一名, 差燕江 吳千戶管領, 於七月初五日, 起程。 船上人都做倭賊打扮, 船都刷黑, 詐作買賣, 哨探聲息。 若遇官軍, 只說是船, 沿路劫掠, 捉去安置, 火者九名, 殺死一名, 放回六名, 存留二名引路。 於七月二十八夜, 到金州衛島(梢)〔稍〕 泊, 吳千戶發放每船留軍一十名看守, 其餘軍人, 自引上岸, 燒劫新市軍屯, 擄去軍人幷家屬共四名, 殺死二名, 殺傷三名。」’" 一款: "又假作倭賊, 撑駕船隻, 於山東寧海州登岸, 劫殺本州人民。 致被原拏去火者逃回, 說知前情。" 欽此前件事理, 竊念小邦臣事聖朝, 至誠不二, 何敢用遣小民, 撑鴐船隻, 假作倭賊, 往金州山東等處, 登岸作賊, 殺傷人命? 其張葛買所稱詐作買賣, 哨探聲息, 臣實不知葛買是何等人。 且如作賊刦殺, 人情阻隔, 何緣得探事情? 其爲虛詐, 不辨自明。 前者尹彛李初逃赴京師, 罔構是非, 欽蒙聖鑑明見萬里, 尹彛李初已伏其罪。 臣恐張葛買亦係此等不逞之徒, 被捉到官, 却行虛捏。 小國遣使, 如此冤枉, 上有天日, 口難控訴。 伏望聖慈, 欽差朝官, 將見獲刦賊張葛買發來, 與國人辨對, 便見虛實。 一款節該: "表稱入貢, 每以馬至, 令豢馬者調之, 馬皆駑下及乘乏勞倦者。 今次所貢馬內, 瘸病無齒及不馴者居半。 其餘雖無節病, 亦皆駑下, 非至誠之物。 與其以此肆侮構禍, 孰若減少, 物精而意誠!"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國所産馬匹, 本來矮小駑下, 凡遇貢獻之時, 儘力選辦進獻, 蓋由道路窵遠, 慮恐瘸病疲弱者有之。 小邦安敢肆侮! 一款節該: "更國號一節, 遣人請旨, 或祖朝鮮, 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旣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非但用奸肆謀, 實彼不祥之兆。" 欽此前件事理, 洪武二十六年二月十五日, 陪臣韓尙質回自京師, 齎捧到禮部咨, 欽奉聖旨: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欽此, 國號欽依改稱朝鮮外, 臣愚以爲未蒙頒降國王名爵, 未敢擅便稱王, 實無奸侮之心。 今來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 "卽合正名。" 欽此, 又準都督府來咨內: "右咨朝鮮國王 。 準此, 除修撰謝恩表箋。" 依上欽遵施行。 一款節該: "旣許更國號, 使者回後, 杳無消息。 先遣人遼王寧王處行禮, 稱朝鮮國權知國事。 一月之後, 方纔進表謝恩, 尊卑之分, 故意先後。" 欽此, 前件事理照得, 爲更國號謝恩事, 於洪武二十六年三月初九日, 差門下評理李恬, 齎擎表箋禮物, 赴京去後, 聞知遼王寧王受封到來。 臣以小邦與境壤相近, 特以朝廷爲重, 宜當行禮, 於當年四月初六日, 差前密直使朴原、前密直副使柳雲等, 赴遼王寧王殿下行禮。 上項李恬, 蓋緣京師道路窵遠, 又兼將齎進獻鞍子禮物, 以致遷延到京。 何敢故意先後! 一款節該: "往歲, 請令王昌來朝, 不許, 其後以王瑤任國事, 又請來朝, 亦不許, 遂令之子來朝。 及至朝廷遣還, 却稱其父子不道, 遂行弑逆。 觀其數請來朝者, 意恐中國征伐, 故假此以取信耳。" 欽此前件事理, 竊見前代辛昌王瑤等, 數請親朝, 乃遣子, 親覲天朝。 還國, 與其父恣行不道, 至謀叛逆, 國人厭之, 退歸私邸。 國人咸共推戴於臣, 奏達朝廷, 欽蒙聖慈, 灼知其情, 許臣權知國事。 其王瑤父子, 見令團圝完聚, 保養天年。 一款: "更國號謝恩表箋內, 雜以侵侮之辭。 以小事大之誠, 果如是乎?"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僻處荒遠, 言語不通, 聞見不博, 粗習文字, 僅達事情。 其於製作, 未諳體格, 以致錯誤, 非敢故爲侮慢。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5면
  • 【분류】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