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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7일 기미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병조 전서 윤소종의 졸기

병조 전서 지제교 동지춘추관사(兵曹典書知製敎同知春秋館事) 윤소종(尹紹宗)이 졸(卒)하였다. 소종(紹宗)의 자는 헌숙(憲叔)이며,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문정공(文貞公) 윤택(尹澤)의 손자이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詩文)은 이미 노성(老成)했으므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보고 기이한 재주라고 칭찬하였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을사년에 나이 21세로서 을과(乙科) 제1인에 합격하여 대책(對策)067) 이 전배(前輩)보다 훨씬 뛰어났다. 드디어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에 임명되고, 관직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다.

이때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은 위력(威力)과 은혜를 제 마음대로 행하고, 교만하여 예절이 없었으며,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은 교사(巧詐)하여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 공역(工役)을 전장(專掌)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였다. 소종이 소(疏)를 초(草)잡아 남김없이 말하여 이들을 모두 물리쳐 제거하고자 하니, 동료(同僚)들이 이것을 알고는 병(病)을 일컫고 출근하지 않았다고 핑계하고서 그를 논핵(論劾)하여 파면시켰으므로, 소(疏)는 과연 올라가지 못하였다. 위조(僞朝)068) 기미년에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으로 임명되고, 전의 부령(典儀副令)·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로 천직(遷職)되었다. 신유년에 어머니 상사(喪事)를 만나 금주(錦州)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했으며,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남방(南方)의 학자(學者)들이 많이 따라와서 수업(受業)하였다. 병인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써 나라에서 소환(召還)하였다. 무진년 여름에 임금이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와 군사를 동문(東門) 밖에 주둔하고 있으니, 소종이 〈《한서》곽광전(霍光傳)을 품안에 품고 나아와서 뵈었다. 임금이 이미 최영(崔瑩) 등을 물리치고, 이에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는 일을 단행하면서 소종을 뽑아 올려 전리 총랑(典理摠郞)으로 삼고, 조금 뒤에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시켰다. 기사년 봄에 글을 올려 이인임(李仁任)을 논죄(論罪)하여 관(棺)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집터에 못을 파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겼다. 임금이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개혁(改革)하고자 하여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소종정도전 등과 더불어 힘써 청하여 이것을 개혁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좌상시 경연 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으로 임명되었다. 공양왕이 중[僧] 찬영(粲英)을 맞아 와서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므로, 소(疏)를 올려 이를 말렸더니, 공양왕이 불평(不平)을 품고서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조금 뒤에 금주(錦州)로 귀양보내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불러 와서 병조 전서에 임명하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열(參列)하게 하였다. 소종은 강개(慷慨)하고 큰 뜻이 있어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매양 임금에게 말할 때는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남김없이 진술하여 꺼리고 숨김이 없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산업(産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비록 자주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도 개의(介意)하지 아니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성리(性理)의 학문에 정통(精通)하였으며 이단(異端)069) 을 배척하는 데 매우 힘을 기울였다. 나이 49세에 병들어 죽으니, 사림(士林)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저술한 시문(詩文)이 8권인데 스스로 제목(題目)하여 《동헌집(桐軒集)》이라 하였다. 아들 윤회(尹淮)는 신사년 과거에 올라 지금 첨지승문원사(僉知承文院事)가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9면
  • 【분류】
    인물(人物) / 출판-서책(書冊)

  • [註 067]
    대책(對策) : 시정(時政) 또는 경의(經義)에 관한 과거(科擧) 문제의 답안.
  • [註 068]
    위조(僞朝) : 우왕(禑王).
  • [註 069]
    이단(異端) : 유교(儒敎)가 아닌 불교(佛敎)나 도교(道敎)와 같은 종교를 이르는 것인데, 여기서는 불교를 말함.

○兵曹典書、知製敎、同知春秋館事尹紹宗卒。 紹宗憲叔, 茂松縣人, 文貞公 之孫。 聰敏好學, 年未冠, 詩文已老成, 文忠公 李齊賢見而稱奇。 恭愍庚子, 中成均試, 乙巳年二十一, 中乙科第一人。 對策高出前輩, 遂拜春秋修撰, 累官至左正言。 時幸臣金興慶恣行威福, 驕傲無禮; 宦者金師幸巧詐逢迎, 專掌工役, 俱病國害民。 紹宗草疏極言, 欲皆斥去。 同僚知之, 托以稱疾不仕, 劾罷之, 疏不果上。 僞朝己未, 起爲典校寺丞, 遷典儀副令、藝文應敎。 辛酉, 丁母憂, 居廬錦州。 服闋, 南方學者多從而受業。 丙寅, 以成均司藝召還。 戊辰夏, 上回自威化島, 駐軍東門外, 紹宗《霍光傳》進見。 上旣執退崔瑩等, 乃行陞黜, 擢爲典理摠郞, 尋陞右司議大夫。 己巳春, 上書論李仁任, 請斬棺潴宅, 不允。 移成均大司成。 上與趙浚等欲革私田, 令百官議可否, 俱以爲不可, 紹宗鄭道傳等, 力請革之。 恭讓君立, 授左常侍、經筵講讀官。 恭讓欲迎僧粲英爲師, 抗疏止之, 恭讓積不平, 改禮曹判書, 尋竄錦州。 上卽位, 召拜兵曹典書, 許列原從功臣。 紹宗慷慨有大志, 常以格君心正風俗爲己任, 每當言路, 極陳得失, 無所忌諱。 其居家不治生産, 雖至屢空, 不以爲意。 博覽經史, 手不釋卷, 尤精於性理之學, 闢異端甚力。 年四十九, 病卒, 士林惜之。 所著詩文八卷, 自目曰《桐軒集》。 子登辛巳科, 今爲僉知承文院事。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9면
  • 【분류】
    인물(人物)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