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이 결정되었으나, 4가지 불가한 이유를 들어 태조가 반대하다
4월, 봉주(鳳州)에 머물렀다. 태조에게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
하니, 태조가 아뢰기를,
"지금에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弓弩]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
하니, 우왕이 자못 옳게 여겼다. 태조가 이미 물러나와서 최영에게 이르기를,
"내일 마땅히 이 말로써 다시 〈임금에게〉 아뢰시오."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밤에 최영이 들어가서 우왕에게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은 듣지 마소서."
하였다. 이튿날 우왕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가 없소."
하니, 태조가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큰 계책을 성공시키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에 어가(御駕)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출사(出師)하면, 볏곡이 들판을 덮어 많은 군사가 식량이 넉넉하게 되어 북을 치면서 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출사(出師)할 시기가 아니므로, 비록 요동의 한 성(城)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리므로 군대가 전진할 수도 없고 퇴각할 수도 없으며, 군대가 피곤하고 군량이 없게 되면 다만 화(禍)를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경(卿)은 이자송(李子松)의 일을 보지 못했는가."
하니, 태조는 아뢰기를,
"자송(子松)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뒷 세상에 전하지마는, 신(臣) 등은 비록 살아 있더라도 이미 계책을 잘못 썼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우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물러나와 울고 있는데, 휘하의 군사가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 이다지도 슬퍼하십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백성의 재화(災禍)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道)의 군사를 독려 징발하여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고, 또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를 만들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태조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보냈다.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이 합하여 5만여 명인데, 여러 사람이 10만 명이라 선전하였다. 군사가 출동하려 하는데 우왕은 술에 취하여 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아니하니, 여러 장수들이 하직하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술이 깨매, 석포(石浦)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와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여러 군대가 평양을 출발하는데, 최영이 우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大軍)이 출전하는 도중(途中)에 있는데 만약 열흘이나 한 달 가량 지체한다면 대사(大事)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신(臣)이 가서 이를 감독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경(卿)이 간다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政事)를 하겠는가?"
하였다. 최영이 굳이 청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과인(寡人)도 또한 가겠다."
하였다. 어느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요사이 요동(遼東)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중(城中)에는 다만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을 뿐이니, 대군(大軍)이 만약 이른다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최영이 크게 기뻐하여 그 사람에게 물품을 후히 주었다. 우왕은 홍무(洪武)의 연호(年號)를 정지시키고,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오랑캐 의복[胡服]을 다시 입게 하고, 상시 대동강(大同江)에 나가서 오랑캐의 음악[胡樂]을 부벽루(浮碧樓)에 베풀어 놓고 자기 스스로 호적(胡笛)을 불면서 즐거워하여 돌아올 줄을 잊고 있었다. 매양 나가서 놀 적에는 문득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창우(倡優)들로 하여금 갖가지 유희(遊戲)를 보이게 하여,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笛]를 불고, 임금과 신하가 주색(酒色)에 빠져 사람을 죽임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우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군사-군정(軍政) / 역사(歷史) / 인사(人事)
〔○〕四月, 次鳳州。 謂太祖曰: "寡人欲攻遼陽, 卿等宜盡力。" 太祖曰: "今者出師, 有四不可。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禑頗然之。 太祖旣退, 謂瑩曰: "明日, 宜以此言復啓。" 瑩曰: "諾。" 夜, 瑩入白: "願毋納他言。" 明日, 禑語太祖曰: "業已興師, 不可中止。" 太祖曰: "殿下必欲成大計, 駐駕西京, 待秋出師, 禾穀被野, 大軍足食, 可以皷行而進矣。 今則出師非時, 雖拔遼東一城, 雨水方降, 軍不得前却。 師老糧匱, 祇速禍耳。" 禑曰: "卿不見李子松耶?" 太祖曰: "子松雖死, 美名垂於後, 臣等雖生, 已失計矣, 何用哉!" 禑不聽。 太祖退而涕泣, 麾下士曰: "公何慟之甚也?" 太祖曰: "生民之禍, 自此始矣。" 禑次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又發僧徒爲兵。 加瑩八道都統使, 以昌城府院君 曺敏修爲左軍都統使, 太祖爲右軍都統使, 遣之。 左右軍共五萬餘人, 衆號十萬。 將出師, 禑醉日晏不興, 諸將不得拜辭。 及醒, 泛舟石浦, 至夕乃還, 飮諸將酒, 諸軍發平壤。 瑩啓曰: "今大軍在途, 若淹延旬月, 則大事不成, 臣請往督之。" 禑曰: "卿行則誰與爲政?" 瑩固請, 禑曰: "然則寡人亦往矣。" 有人自泥城來曰: "近遼東兵, 悉赴征胡, 城中但有一指揮耳。 大軍若至, 可不戰而下。" 瑩大喜, 厚給其人。 禑停洪武年號, 令國人復胡服。 常幸大同江, 張胡樂于浮碧樓, 自吹胡笛, 樂而忘返。 每出遊, 輒奏胡樂, 令倡優呈百戲。 瑩日領軍士, 出入吹笛, 君臣荒淫, 殺戮日甚, 百姓怨咨。 禑遣使賜諸將金銀酒器。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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