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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2월 25일 庚子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청송부원군 심온의 졸기

이양(李揚)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심온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니, 선지(宣旨)하기를,

"심온은 비록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내지 못할지라도, 또한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장사지낼 땅을 가려 정하게 하고, 수원부(水原府)에 명하여 장사(葬事)를 치르게 하며, 또 관곽(棺槨)·종이·석회(石灰)를 내려 주고, 내관(內官)을 보내어 장사를 돌보게 하고, 있는 곳의 관원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심온의 자(字)는 중옥(仲玉)이니, 경상도 청보군(靑寶郡) 사람으로, 증조(曾祖) 심연(沈淵)고려의 합문지후(閤門祗候)요, 조부 심용(沈龍)고려의 증 문하 시중(贈門下侍中) 청화 부원군(淸華府院君)이요, 아버지 심덕부(沈德符)는 본조(本朝)의 좌정승(左政丞) 청성백(靑城伯)이요, 어머니는 인천 문씨(仁川門氏)이니, 낭장(郞將) 문필대(門必大)의 딸이다. 심온은 나이 11세에 고려의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국초(國初)에 병조와 공조의 의랑(議郞)을 역임하였다. 공정왕(恭靖王)147) 이 왕위에 오르매, 보공 장군 용무사 대호군(保功將軍龍武司大護軍)에 제수(除授)되고, 신무사 대호군(神武司大護軍)으로 옮겼다가, 태종(太宗)의 초기에 본직(本職)으로서 지각문사(知閣門事)가 되고, 4년에 대호군으로서 간판내시다방사(幹辦內侍茶房事)가 되고, 조금 후에 용양사 상호군(龍驤司上護軍)에 승진되어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를 겸하였다. 7년에 승정원 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발탁되어, 여러 번 승진하여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조금 후에 가선 대부좌군 동지총제(嘉善大夫左軍同知總制)에 임명되고, 11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풍해도 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고, 조금 후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14년에 자헌 대부 형조 판서(資憲大夫刑曹判書)가 되었다가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여러 번 한성 판윤(漢城判尹),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좌군 도총제(左軍都總制)를 역임하고, 정헌 대부 이조 판서(正憲大夫吏曹判書)가 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국구(國舅)로서 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하고, 조금 후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44세이다. 심온은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하여 물정(物情)에 거슬리지 않았다. 평소에 심온하윤(河崙)과 뜻이 서로 맞지 않았는데, 어느날 심온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하윤이 빈객(賓客)과 많이 교통하고 뇌물을 많이 받아들이며, 대낮에 첩의 집에 드나드니, 추잡한 행실이 이와 같습니다."

하면서, 장차 밀계(密啓)하고자 하므로, 임금이 상세히 상왕에게 아뢰니, 상왕이 말하기를,

"신하가 밀계(密啓)함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며, 또 외인(外人)의 의심을 초래(招來)하게 될 것이다."

하여, 마침내 불러 보지 아니하였다. 양녕(讓寧)이 덕을 잃으매, 여러 신하들이 다 임금에게 마음이 돌아가게 되며, 양녕도 가끔 임금의 어진 덕행을 말하니, 상왕이 이를 듣고 매우 불평하게 여기고, 인하여 심온에게 경계하여, 감히 공공연하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인(士人)을 널리 접촉하지 말고 조심하여 법도를 지키라."

고 하였다. 구종수(具宗秀)의 일이 발생하자, 종수의 형 구종지(具宗之)가 의금부에 고하여 말하기를,

"전일에 심 판서(沈判書)가 나에게, ‘네가 신자(臣子)가 되어 동궁(東宮)에 교통하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였다."

하고, 양녕도 말하기를,

"종수가 일찍이 나에게 말하되, ‘심 판서는 내가 동궁(東宮)에 출입하는 것을 알고 일찍이 꾸짖어서 내가 심히 두려워하였다. ’고 하더라."

고 하였다. 의금부에서 이를 갖추어 아뢰니, 상왕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내가 심온에게 그처럼 경계하였는데도, 이런 사람들과 교통하고, 또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하였다. 일찍이 어느날 임금이 심온과 더불어 손[客]을 서교(西郊)에서 전송하는데, 종수심온을 따라가다, 길에서 심온종수와 방종(放縱)하게 농담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종수가 죄를 얻게 되었는데, 양녕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네가 손을 전송하던 날의 일을 종수가 나에게 상세히 말하더라."

고 하였다. 후에 심온이 이 말을 듣고 뉘우쳐 한탄하며 말하기를,

"그 사람을 믿기가 이와 같이 어려운 줄을 나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구나."

고 하였다. 심온중국 서울에 갈 적에 상왕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네 왕비의 아버지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 매양 세말(歲末)이 되니, 친히 왕비의 종족과 더불어 그 집에 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할 것이라."

고 하더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심온이 아뢰기를,

"지금의 사대부들이 나를 보면 모두 은근(慇懃)한 뜻을 보내니, 내가 심히 두렵습니다. 마땅히 손[客]을 사절(謝絶)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즉시 이 말을 아뢰었더니, 상왕이 심히 옳게 여겼다. 이 때에 이르러, 상왕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심온이 전일에 손을 사절하고 조용하게 지내겠다는 뜻을 내가 심히 옳게 여겼더니, 지금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고 하였다. 상왕이 임금에게 매양 이르기를,

"네 비(妃)의 집은 상패(喪敗)하였으나, 오직 안수산(安壽山)만이 홀로 남아 있으니, 마땅히 고관 대작(高官大爵)에 임명해야 할 것이다."

고 하므로, 수산이 얼마 아니 가서 중추부(中樞府)로 들어왔다. 심온의 세 아들은 심준(沈濬)·심회(沈澮)·심결(沈決)이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94면
  • 【분류】
    인물(人物)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李揚還啓: "已自盡。" 宣旨: "雖不可禮葬, 亦不可不厚。" 乃遣李陽達卜葬地, 命水原府辦葬事, 又賜棺槨紙石灰, 遣內官護葬, 令所在官致祭。 仲玉, 慶尙道 靑寶郡人。 曾祖 高麗閣門祗候, 祖, 高麗贈門下侍中淸華府院君, 父德符本朝左政丞靑城伯, 母仁川 門氏, 郞將必大之女。 年十一, 中高麗監試, 國初歷兵工二曹議郞。 恭靖王卽位, 除保功將軍龍武司大護軍, 移神武司大護軍。 太宗初, 以本職知閣門事。 四年以大護軍, 幹辦內侍茶房事, 尋陞龍驤司上護軍, 兼判通禮門事。 七年擢承政院同副代言, 累陞左副代言, 尋拜嘉善大夫、左軍同知摠制。 十一年拜嘉靖大夫豐海道都觀察使, 入爲參知議政府事, 俄拜司憲府大司憲。 十四年拜資憲刑曹判書, 移判戶曹。 自是, 累歷判漢城、議政府參贊、左軍都摠制, 加正憲吏曹判書。 上卽位, 以國舅封靑川府院君, 俄領議政府事, 至是死, 年四十四。 性慈順不忤物, 素與河崙不相能, 一日, 白上曰: "多通賓客, 多納賄賂, 白晝出入妾家。 醜行如此, 將欲密啓。" 上具以聞, 上王曰: "臣有密啓, 不爲好事, 且致外人之疑。" 竟不召見。 讓寧失德, 群臣皆歸心於上, 讓寧往往言上之賢德, 上王聞之, 甚不平, 仍誡毋敢顯言, 且曰: "勿廣接士人, 謹守法度。" 及具宗秀之事發, 宗秀之兄宗之白義禁府曰: "前日, 沈判書責我曰: ‘汝爲臣子, 交通東宮可乎?’" 讓寧亦曰: "宗秀嘗言於我曰: ‘沈判書知我出入東宮, 嘗叱之, 我甚懼之。’" 義禁府具啓, 上王謂上曰: "予誡如彼, 而交通此等之人, 且所言如此何哉?" 嘗一日, 上與送客西郊, 宗秀而往, 路上宗秀縱戲謔, 不久而宗秀得罪。 讓寧謂上曰: "汝送客之日之事, 宗秀謂我具言之。" 後聞之, 且悔且恨曰: "其人之難保如是, 而我曾不知也。" 之赴京也, 上王謂上曰: "汝妃父使還, 每當歲抄, 親與妃族至其家, 設宴以慰之。" 未還而獄起。 上之在東宮也, 白曰: "今之士大夫, 見我皆致慇懃之意, 我甚懼之。 要須謝客安閑, 以度餘生。" 上卽以聞, 上王甚善之。 至是, 上王謂上曰: "前日謝客安閑之意, 予甚善之, 今乃如此何哉?" 上王每謂上曰: "汝妃家喪敗, 惟安壽山獨在, 當拜高官大爵。" 故壽山不久而入樞。 子三人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94면
  • 【분류】
    인물(人物)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