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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82권, 선조 37년 12월 6일 辛亥 4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유영경·기자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복상(卜相)하였는데, 뽑힌 인물은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한응인(韓應寅)·심희수(沈喜壽)였다.

사신은 논한다. 산해는 문장가이다. 도량이 심후한 데다 청렴하고 근신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오랫동안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류(士類)들을 진출시켜 한때 인망이 높았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세상에 영합하여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비루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불초한 아들 경전(慶全)이 사람답지 못한 자들과 서로 결탁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었다. 성룡은 일찍부터 문아(文雅)하다는 명망이 있었고 청현(淸顯)의 관직을 역임하여 사류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기축 옥사(己丑獄事) 때 최영경(崔永慶)을 죽음에서 구원하지 않았고, 또 우성전(禹性傳)같은 괴벽한 사람과 서로 결탁했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이 점을 흠으로 여겼다. 임진 왜란 이후 7년 동안 요로에 있으면서 사당(私黨)을 세우고 맨 먼저 강화론을 주창함으로써 끝내 국가의 일을 그르쳤으니, 이는 대체로 기량이 협소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멋대로 행한 소치였다. 원익은 몸가짐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나오나 물러가나 나라를 걱정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을 영의정으로, 기자헌(奇自獻)을 좌의정으로, 심희수를 우의정으로, 최천건(崔天健)을 호조 참판으로, 박이장(朴而章)을 대사간으로, 이심(李愖)을 집의로, 【모습이 난장이 같았다. 】 오백령(吳百齡)을 응교로, 유영근(柳永謹)을 필선으로, 조탁(曺倬)을 사예로, 윤황(尹煌)을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102책 18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卜相, 李山海柳成龍李元翼李德馨李恒福韓應寅沈喜壽

【史臣曰: "山海, 文章之士也。 氣量寬深, 淸謹著名, 久秉銓衡, 引進士類, 一時重之。 晩節, 與世浮沈, 未免鄙夫患失之譏, 蓋由於不肖子慶全, 交結匪人, 造言生事之致也。 成龍, 早負文雅之名, 歷敭淸顯, 大爲士類所推許。 己丑之變, 不救崔永慶之死, 又交結禹性傳詭僻之人, 士論以此短之。 壬辰以後, 七年當路, 植立私黨, 首唱和議, 卒誤國事, 蓋由於器小量狹, 剛偏自用之致也。 元翼, 淸素持身, 進退憂國。"】

柳永慶爲領議政, 奇自獻爲左議政, 沈喜壽爲右議政, 崔天健爲戶曹參判, 朴而章爲大司諫, 李愖爲執義, 【狀如侏儒。】 吳百齡爲應敎, 柳永謹爲弼善, 曺倬爲司藝, 尹煌北靑判官。


  • 【태백산사고본】 102책 18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