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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65권, 선조 28년 7월 24일 乙未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대신들과 인견하다

특진관 이증(李增) 【사람됨이 흐리멍덩하여 본래 입각지(立脚地)가 없다. 】 아뢰기를,

"사변 초기 임진(臨津) 전투에서 유극량(劉克良)은 ‘왜적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예봉을 당해낼 수 없으니 우선 물러서서 그 형세를 살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고, 신할(申硈)은 ‘일부의 군대로 대전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왜적의 기병(騎兵)이 침입하자 우리 군대가 패배하여 사졸들이 모두 죽어 강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병법에서 꺼리는 바이지만 경거 망동하여 군대를 패배하게 만드는 것은 한 명의 군사도 잃지 않고 보존하여 조금 후퇴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토지 때문에 그 백성을 짓밝히게 하자 맹자(孟子)가 불인(不仁)하다고 지목하였으니, 전쟁을 일으켜 원수를 맺는 것이 어찌 제왕(帝王)의 뜻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요(帝堯)가 임금으로 있고 대우(大禹)가 장수가 되었을 때에도 묘민(苗民)들이 30일 동안이나 명령을 거역하였고, 공자(孔子)가 정치를 하고 계로(季路)가 장수가 되었을 때에도 맹씨(孟氏)가 성읍(成邑)의 성(城)을 헐려고 하지 않았으니, 나는 매우 이상하게 여긴다. 이는 사전(史傳)의 착오가 아닌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경전(經傳)에 기재된 것을 흠잡을 수는 없지만, 공자께서 소정묘(少正卯)를 사형시킨 일 등은 모두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대유(大儒)들이 부회(附會)한 말입니다. 어찌 모두 성현의 말씀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병란을 치른 후 호남(湖南)이 피해가 적다 하여 모든 지공(支供)을 전적으로 호남에 책임지웠습니다. 그러므로 호남의 피폐함이 다른 도에 비해 더욱 심하니 토적(土賊)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입니다. 방백(方伯)과 읍재(邑宰)는 마땅히 최대한 무마하면서 와서 편안히 살도록 위로해 줄 것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요즘 들으니 명사(明使)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열읍(列邑)의 수재(守宰)들이 교량을 수축하느라 힘을 다하였고, 도로는 8척으로 규정하여 마치 번화한 거리의 대로(大路)와 같이 만드느라 백성을 매우 고달프게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도 감사(監司)는 그러한 것을 보고도 다스리지 않고 어사(御史)는 그러한 소문을 듣고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더욱 고달퍼서 모두 조정으로 원망을 돌리고 있으니, 국사(國事)가 이 모양이 되어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운봉(雲峰) 팔량치(八良峙)는 실로 우리 나라의 요해지인데 지금 암석을 깎아내어 한 개의 대로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에서 요해지를 방수하는 뜻이겠습니까. 호남의 인심은 본래 강하고 사납다고 칭해지는데 영남(嶺南)과 비교하면 마치 초(楚)와 월(越)의 관계와 같습니다. 지난날 감사가 남원(南原)에서 숙박할 때 밤중에 한 사람이 창밖에까지 몰래 들어와 이방(吏房)을 칼로 찔렀는데, 감사도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떤 일을 성공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합니다. 이로써 보건대 호남의 일이 몹시 염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천하가 비록 편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로운 법인데, 우리 나라는 왜적과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모두 전쟁을 잊어버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왜적이 참지 못하고 재차 침범한다면 인심이 와해되어 버릴 텐데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대개 군사는 장수를 알지 못하고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니, 당초 신립(申砬)의 군사가 패배한 원인은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못할 군사는 없는 것이니, 장수가 참으로 훌륭하기만 하면 군졸들이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조헌(趙憲)으로 말하면,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깃발 아래에 서서 싸우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사졸들이 흩어져 도망치지 않고 심지어는 맨주먹으로 시퍼런 칼날을 대항하며 종일토록 힘을 다해 싸웠던 것입니다. 비록 조헌이 계책없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배를 면치 못하긴 하였지만 사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해 싸우고 물러서지 않게 한 것은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강한 왜적을 만났으므로 견고한 요충지를 빼앗기고 왜적들이 마치 무인지경처럼 승승 장구하였는데도 조헌이 스스로 군졸을 모집하여 의리로써 감동시켰으니, 그 기세가 다른 점이 있다. 병가(兵家)의 일이란 기세일 뿐이니, 어찌 일괄적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李鎰)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尙州)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의 군졸들은 통속(統屬)할 곳이 없었는데 이일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진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尹暹)박호(朴箎)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충주(忠州)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申砬)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釜山)에서 한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증(李增)이 아뢰기를,

"왜적은 접전할 때에 모두 조총(鳥銃)으로 선봉을 삼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오합지졸로 선봉을 삼고 용맹한 군사들은 뒤에 있게 하였으므로 선봉대가 무너지자 온 군대가 덩달아 도망쳤습니다. 강찬(姜燦)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과 접전하면서 잠시 전진하고 잠시 후퇴하면서 거짓으로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적의 탄환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보내어 짓밟았으니, 강궁(强弓)의 아래에서 전멸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잘것없는 적이니, 만약 세 부대로 나누어 차차 포(砲)를 쏘면서 교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더라면 어떻게 감히 당해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65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38면
  • 【분류】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인사-임면(任免)

    ○乙未/特進官李增 【爲人模稜, 素無立脚。】 啓曰: "變初臨津之戰, 劉克良以爲: ‘賊勢熾盛, 其鋒不可當。 莫如姑退, 以觀其勢。 申硈以爲: ‘不可偏師臨之。’ 賊騎來壓, 我軍敗北, 士卒殲盡, 水爲之不流。 逗留不進, 固兵法之所忌, 而輕擧妄動, 致師徒之撓敗, 則莫如全師少退之爲愈也。" 鄭經世啓曰: "梁惠王, 以土地之故, (縻)〔靡〕 爛其民, 孟子, 以不仁目之。 興兵構怨, 豈帝王之意哉?" 上曰: "帝堯在上, 大爲將, 而苗民三旬逆命; 孔子爲政, 季路爲將, 而孟氏不肯(隨)〔墮〕 城, 予甚怪焉。 無乃史傳之誤耶?" 鄭經世啓曰: "經傳所載, 不可瑕疵, 而至如孔子少正卯等事, 皆大儒附會之說。 豈皆聖賢之言乎?" 上曰: "此說是矣。" 鄭經世啓曰: "兵火之後, 湖南稍完, 凡百支供, 專責於湖南。 以故湖南凋弊, 比他道尤甚。 土賊之蠭起, 職此由也。 爲方伯、爲邑宰者, 當百分撫摩, 思所以勞來安集, 而近聞使南下之時, 列邑守宰, 修築橋梁, 不遺餘力, 道路則以八尺爲限, 有如通衢大路, 其勞民大矣, 而監司視之亦不治, 御史聞之亦不怪。 民生愈困, 怨歸朝廷。 國事如此, 極爲寒心。 雲峯 八良峙, 實東方阨塞之處, 今乃斲破岩石, 做出一大路。 是豈國家設險之意哉? 湖南人心, 素稱强悍, 比諸嶺南, 有同。 頃日監司宿南原時, 夜半有一人, 潛來窓外, 手刃吏房, 監司亦云: ‘人心如此, 何事能成?’ 以此觀之, 湖南之事, 極爲可憂。" 鄭經世啓曰: "天下雖安, 忘戰必危。 我國與賊相持, 皆有忘戰之心。 萬一賊謀叵耐, 再肆侵犯, 則人心瓦解, 孰能禦之? 大槪, 兵不知將, 將不知兵。 當初申砬之僨軍, 皆由於(比)〔此〕 。 然軍無不可用之軍。 將帥苟賢, 則軍卒不散矣。 以趙憲言之, 錦山之戰, 立於旗下, 戰不旋踵, 故士卒不潰, 至於張空拳冒白刃, 終日力戰。 雖趙憲無謀輕進, 未免敗衄, 而能使士卒, 力戰不退, 爲可貴也。" 上曰: "我國二百年, 不知兵革, 猝遇勁敵, 故金湯失守, 賊徒長驅, 如入無人之境, 而趙憲自募軍卒, 感動以義, 其勢有異矣。 兵家之事, 勢而已。 豈可以一槪論之哉?" 鄭經世啓曰: "近日中外之人, 多毁李鎰, 然尙州之民, 至今不忘。 變初, 嶺南之人, 顒望王師, 有如失母之赤子, 列郡之卒, 無所統屬, 及李鎰來到尙州, 發倉粟而饗士, 出誠言而曉諭, 一日之間, 得壯士三千人。 乃出陣于平野, 方爲習陣之際, 賊之先鋒, 已到前川, (濔漫)〔彌滿〕 於廣野, 顔色不動, 略無畏懼之形。 力戰移時, 尹暹朴箎, 皆死焉。 單騎突出, 退在忠州, 與申砬同日敗師。 然釜山一敗之後, 無一人拒之者, 而獨李鎰, 糾合軍人, 與之接戰。 終雖敗北, 其爲人也, 未易得也。" 李增啓曰: "倭奴接刃之時, 皆以鳥銃爲前鋒, 故所向無敵。 我國, 則以烏合之衆爲先, 以勇猛爲殿, 故前鋒旣潰, 擧軍望風而遁逃矣。 姜燦, 爲端川郡守時, 與賊交鋒, 乍進乍退, 佯若敗遁, 竢其鐵丸之已盡, 乃縱兵以蹂之, 强弓之下, 無不勦滅矣。" 上曰: "此乃零賊也。 若分三運, 次次放砲, 迭爲先後, 則何敢當哉?"


    • 【태백산사고본】 39책 65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38면
    • 【분류】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