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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 2월 29일 정사 2번째기사 1763년 청 건륭(乾隆) 28년

송명흠이 동국을 보도하는 요령에 대해 상소하다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상소하여 동궁을 보도(輔導)하는 요령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신의 선조(先祖) 신 송준길(宋浚吉)효종(孝宗)께 품(稟)하여 좌강(坐講)의 제도를 정하였는데, 당시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니, 신은 실로 개탄하고 애석해 합니다. 삼가 주자(朱子)와 여러 선정(先正)이 논한 바에서 한두 가지 긴요한 말을 상소 끝에 써 올리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재단해 취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어 고사(故事)를 상고해 내도록 명하시어 다시 좌강의 제도를 정하시되 그 연체(筵體)를 간략히 하여 정지(情志)가 유통되게 한다면, 어찌 보도하는 데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며 답하고, 좌강의 제도를 회복시키라 명하였다.

송명흠의 원소(原疏)의 부록에 이르기를,

"주자가 말하기를, ‘근세(近世)에 제왕(帝王)들이 자식을 가르치는 법이 소략하다. 무릇 용모와 말씨, 의복과 기용(器用)은 지극히 사치스러우나 일찍이 억제한 적이 있지 아니하고, 요속(僚屬)은 인원을 갖추었으나 보부(保傅)의 엄격함이 없으며, 강독(講讀)은 예(禮)를 갖추었으나 잠규(箴規)의 이익됨이 없으니, 이는 집에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壁)이 있는데도 이를 네거리의 길섶에 버린 것과 같다.’고 하였고,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말하기를, ‘후세에 저궁(儲宮)을 가르치는 법이 진실로 몹시 소략하니, 반드시 도덕이 있는 선비를 선택해 스승으로 삼아 보고 느끼며 모범을 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요속(僚屬)은 모두 단정하고 학문에 뜻을 둔 선비를 선발해 좌우에서 협보(夾輔)하여 세자(世子)로 하여금 마음이 항상 겸손 신중하며 스스로 게을러질 겨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학문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고 덕이 날로 향상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 조광조(趙光祖)는 아뢰기를, ‘원자(元子)를 교양(敎養)하는 것은 그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모름지기 재상 가운데서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 친근(親近)하게 하고 훈자(薰炙)되게 만들어 덕성(德性)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경연(經筵)에서는 좌석 곁에서 조정의 시비와 민생(生民)의 휴척(休戚)을 듣게 하여 어려서부터 조신(朝臣)을 몸소 접근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지금의 교양(敎養)은 급박하게 하는 데 지나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조용히 훈회(訓誨)하여 차츰차츰 성취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이 여덟 가지 규잠(規箴)을 만들어 올리며 이르기를, 「신이 삼가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건대, 삼대(三代)039) 의 제왕들이 세자를 가르칠 적에 반드시 예악(禮樂)으로 하였으니, 태부(太傅)는 앞에 있고 소부(少傅)는 뒤에 있었으며, 들어가면 보(保)가 있고, 나가면 사(師)가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교유(敎諭)하여 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유의하시어 무릇 교양·교유하는 방도를 한결같이 삼대의 법과 같이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여러 설(說)을 살펴보건대, 바르게 교양하는 방도와 몸소 가르치는 뜻에 정성스러워 거의 여온(餘蘊)이 없되, 조광조가 진달한 바 ‘지금의 교양은 급박하게 하는데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니, 마땅히 조용히 훈회(訓誨)하여 차츰 차츰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고 한 것이 더욱 깊고 간절합니다. 강학(講學)의 과정(科程)에 이르러서는 또한 혹시라도 몸을 옴츠리며 싫어하고 괴로와한다면 흥기(興起)하고 기뻐하는 맛이 없게 되어 덕과 학문을 성취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될 것입니다. 신은 지나치게 헤아려 보는 근심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이와 같이 덧붙여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10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2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註 039]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前贊善宋明欽, 上疏陳輔導東宮之要, 其略曰:

"昔臣先祖臣浚吉, 稟于孝廟, 定爲坐講之制, 當時稱爲美事。 今則不然, 臣實慨惜。 謹以朱子及諸先正所論一二切要語, 錄進于疏末焉, 伏願殿下留神裁採。 仍命考出故事, 復定坐講, 簡其筵體, 使情志流通, 則豈不有補於輔導之萬一耶?" 上賜批褒答, 命復坐講之制。 明欽原疏附錄曰:

"朱子曰, ‘近世帝王敎子之法踈略。 凡容貌辭氣, 衣服器用, 則雖極奢侈, 未嘗有以裁之, 僚屬具員, 而無保傅之嚴, 講讀備禮, 而無箴規之益, 是猶家有明月之珠, 夜光之壁, 而委之衢路之側也’, 先正臣李珥曰, ‘後世敎儲之法, 固甚踈略, 必擇道德之士, 爲之傅, 觀感取法。 僚屬皆選端方志道之士, 左右夾輔, 使世子心常謙愼而不暇自逸。 然後學可就德日躋矣’, 先正臣趙光祖啓曰: ‘敎養元子, 其事至重, 須擇宰相中賢德者, 使之親近薰灸, 以成德性。 而且於經筵, 使在座側, 與聞朝廷是非, 生民休戚, 自少親接朝臣可也’, 又曰: "今之敎養, 不可過於急迫。 當從容訓誨, 使之浸潤成就可也。’ 又曰. ‘先正臣李彦迪, 進修八規曰, 臣謹稽《禮經》, 凡三王敎世子, 必以禮樂, 太傅在前, 少傅在後, 入則有保, 出則有師。 是以敎諭而德成也。 伏願聖明留意, 凡敎養敎諭之方, 一如三代之法焉’, 臣謹按諸說, 惓惓於養正之方, 身敎之義, 殆無餘蘊, 而趙光祖所陳今之敎養, 不可過於急迫, 當從容訓誨, 使之浸潤成就云者, 尤爲深切。 至於講學科程, 亦或局促厭苦, 則無興起悅豫之味, 而最有妨於將就德學矣。 臣不勝過計之憂, 附陳如右。"


  • 【태백산사고본】 69책 10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2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