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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8일 갑신 2번째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공신을 책정하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의로운 일을 일으킨 공을 의논하여 3등으로 나누었는데, 유자광(柳子光)·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장정(張珽)·홍경주(洪景舟)를 1등으로,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심순경(沈順徑)·변수(邊脩)·최한홍(崔漢洪)·윤형로(尹衡老)·조계상(曺繼商)·유순(柳洵)·김수동(金壽童)·김감(金勘)·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이계남(李季男)·구수영(具壽永)·덕진군(德津君) 이활(李𤂾)를 2등으로, 고수겸(高守謙)·심형(沈亨)·황탄(黃坦)·유세웅(柳世雄)·유계종(柳繼宗)·윤사정(尹士貞)·이심(李𦸂)·이식(李軾)·민회발(閔懷發)·민회창(閔懷昌)·허상(許磉)·장온(張溫)·구현휘(具賢暉)·백수장(白壽長)·이극정(李克正)·이석번(李碩蕃)·김우증(金友曾)·이손(李蓀)·신준(申浚)·정미수(鄭眉壽)·박건(朴楗)·송일(宋軼)·강혼(姜渾)·한순(韓恂)·유경(柳涇)·김수경(金壽卿)·정윤겸(鄭允謙)·김경의(金敬義)·이함(李菡)·심정(沈貞)·변준(卞儁)·변사겸(邊士謙)·한숙창(韓叔昌)·박이검(朴而儉)·유영(柳濚)·성희옹(成希雍)·윤형(尹衡)·신윤문(辛允文)·홍경림(洪景霖)·강지(姜漬)·윤금손(尹金孫)·유응룡(柳應龍)·윤탄(尹坦)·신수린(申壽麟)·조세훈(趙世勳)·한세창(韓世昌)·이맹우(李孟友)·윤여필(尹汝弼)·손동(孫仝)·유승건(柳承乾)·안현수(安賢守) 성동(盛同)·이종의(李宗義)·허광(許礦)·이한원(李翰元)·유홍(柳泓)·이기(李夔)·성율(成瑮)·조원륜(趙元倫)·김선(金瑄)·민효증(閔孝曾)·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김극성(金克成)·황맹헌(黃孟獻)·성몽정(成夢井)·이세응(李世應)·장한공(張漢公)·한사문(韓斯文)·김임(金任)·박영창(朴永昌)·박영분(朴永蕡)·조계은(曹繼殷)·수안군(遂安君) 이당(李𧭢)·박이온(朴而溫)·이희옹(李希雍)·이성언(李誠彦)·신은윤(辛殷尹)·윤희평(尹熙平)·강윤희(康允禧)·이창(李敞)·최유정(崔有井)·채수(蔡壽)를 3등으로 하여 아뢰었다.

영의정 유순·우의정 김수동이 아뢰기를,

"박원종 등은 감히 스스로 자기의 공을 의논할 수 없으므로, 아뢴 바가 아와 같습니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은 제일 먼저 큰 계책을 결단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그 서차가 마땅히 자광의 위에 있어야 합니다."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수린성희안의 매부다. 공을 논할 때, 희안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박원종·유순정과 저 세 사람의 자제들이 모두 공신 등록에 참여하였으되, 저희 자제가 가장 많았습니다. 수린은 나이가 젊어서 사세상 입을 열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그 말을 듣고 그 어머니가 곧 노하여 누우며 ‘내 다시는 네 낯을 보지 않으리라.’ 하였다. 이튿날, 희안이 어머니의 말로 원종 등에게 청하여 덧붙여 기록하였다. 그 이웃 마을이나 족속들이 수린을 지목하여, 노와 공신(怒臥功臣)이라 하였다. 기타 외람되게 참여한 자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또 논한다. 연산 말년에 장차 복망(覆亡)할 화가 있었으나, 조정에 있는 뭇 신하는 한 사람도 계교를 내어 의를 외치는 일이 없었으되, 전라도에서는 유빈(柳濱) 등이 거사(擧事)할 것을 같이 모의하여 서울과 지방에 격문을 띄웠고, 경상도에서는 조윤손(曹潤孫) 등이 가까운 친척인 윤탕로(尹湯老)와 더불어 기병(起兵)할 것을 협모(協謀)했으나 거사하기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마침 박원종 등이 먼저 대의(大義)를 세움에 힘입었으니, 삼공 육경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족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훈맹(勳盟)에 참여해서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또 자제를 하여금 훈적(勳籍)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공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라 연줄로 인하여 참여하기를 청한 자가 얼마인지를 모르겠으니, 이와 같은 유는 족히 말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우의정 김수동은 한때의 명류(名流)로 어머니의 복제 중이었으니, 추대한 뒤에는 곧 돌아가 상제 노릇하는 것이 옳거늘, 공을 논한 뒤에 조용히 집으로 물러나 유자광에게 묻기를, ‘아우 김수경은 어떤 등급의 공에 기록되었느냐?’라고 하였다. 수동은 조금 지식이 있으면서도 탐욕스러움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75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朴元宗成希顔柳順汀等, 論擧義之功, 分爲三等, 以柳子光辛允武朴永文張珽洪景丹爲一等, 以雲水君 孝誠沈順徑邊脩崔漢洪尹衡老曹繼商柳洵金壽童金勘雲山君 李季男具壽永德津君 爲二等, 以高守謙沈亨黃坦柳世雄柳繼宗尹士貞李𦸂李軾閔懷發閔懷昌許磉張溫具賢暉白壽長李克正李碩蕃金友曾李蓀申浚鄭眉壽朴楗宋軼姜渾韓恂柳涇金壽鯽鄭允謙金敬義李菡沈貞卞儁邊士謙韓叔昌朴而儉柳濚成希雍尹衡辛允文洪景霖姜漬尹金孫柳應龍尹坦申壽麟趙世勳韓世昌李孟友尹汝弼孫仝柳承乾安賢守盛同李宗義許礦李翰元柳泓李夔成瑮趙元倫金瑄閔孝曾尹璋曹繼衡李堣金克成黃孟獻成夢井李世應張漢公韓斯文金任朴永昌朴蕡曹繼殷遂安君 𧭢朴而溫李希雍李誠彦辛殷尹尹熙平康允禧李敝崔有井蔡壽爲三等以啓。 領議政柳洵、右議政金壽童啓曰: "朴元宗等不敢自議己功, 故所啓如此。 朴元宗成希顔柳順汀首決大策, 立定大功, 其序次當在子光之上。" 傳曰: "知道。"

【史臣曰: "申壽麟, 成希顔妹夫也。 論功時, 希顔告其母曰: ‘朴元宗柳順汀與吾三人之子弟, 皆參錄功, 而吾之子弟最多。 壽麟年且少, 勢不可開口。’ 其母聞言卽怒臥曰: ‘吾不復見汝面。’ 翌日, 希顔以母言, 請于元宗等, 添錄之。 其隣里族屬, 目壽麟曰: ‘怒臥功臣。’ 其他濫與者, 亦多類此。" 又曰: "燕山末年, 將有覆亡之禍, 在朝群臣, 無一人出計倡義。 而全羅柳濱等, 同謀擧事, 移檄京外, 慶尙曹潤孫等, 與近戚尹湯老, 協謀起兵, 未及擧事, 適賴朴元宗等, 先建大義, 三公、六卿, 得保首領足矣。 及參勳盟, 不以爲愧, 又使子弟, 竝參勳籍, 其所謂功, 不知爲何事也。 不特此也, 因緣請參者, 不知其幾, 如此之類, 不足道也。 右議政金壽童以一時名流, 方持母服, 推戴後卽還居憂可也。 論功之後, 從容退家, 問柳子光曰: ‘弟壽卿, 錄何等功乎?’ 壽童稍有知識, 貪冒如此, 況他人乎?"】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75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