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교 의정부 우의정 노숭의 졸기
검교 의정부 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 노숭(盧嵩)이 졸(卒)하였다. 노숭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자(字)는 중보(中甫)이고 호(號)는 상촌(桑村)이었다. 감찰 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의 아들로서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여 청요(淸要)220) 를 두루 역임하였다. 관(官)이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러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것이 오로지 윤당(允當)하였다. 그때 위주(僞主)221) 가 반유(盤遊)222) 하기를 절도가 없이 하였는데, 어느날 명하여 어가(御駕)가 들[野]로 갔다가 마침 큰 비가 와서 냇물이 창일(漲溢)하니, 노숭이 힘써 화복(禍福)을 진달(陳達)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諫)하였으므로 위주(僞主)가 이에 돌아왔다. 그때 사람들이 그 경직(勁直)한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임술년에 동지밀직(同知密直) 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어느날 위주(僞主)가 말을 달려 노숭의 정원(庭園)에 들어갔다가 이것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종자(從者)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말을 채찍질하여 빨리 달려서 나가버렸다. 노숭이 자주 반유(盤遊)하는 것을 간(諫)하였기 때문에 위주(僞主)가 마음으로 이를 꺼려하였던 것이다. 기사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었는데, 그때 왜구(倭寇)가 끊이지 않아 바닷가의 주군(州郡)이 텅 비게 되니, 노숭이 허물어진 기강(紀綱)을 진작시켜서 위엄(威嚴)과 은혜(恩惠)를 아울러 행하고, 조정(朝廷)에 청하여 백성들의 조세를 3년 동안 면제하였다. 이 앞서 근해(近海)에 성(城)이 없어서 조세(租稅)를 수송할 때 조전(漕轉)하기를 기다리는 폐단을 백성들이 능히 견디지 못하였는데, 노숭이 알맞은 데를 상지(相地)하여 전주(全州)의 용안(龍安)과 나주(羅州)의 영산(榮山)에 성을 쌓아 조세를 운수(運輸)하여서 조전(漕轉)을 편하게 하였다. 또 여러 주(州)에는 옛날에 의창(義倉)이 없었는데, 또 조정에 청하여 비로소 이를 설치하였다. 을해년에 개성 유후(開城留後)가 되었을 때 태조(太祖)가 원종(元從)의 공(功)을 기록하고 토전(土田)과 장획(臧獲)223) 을 하사하였다. 정축년에 경기좌도 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었는데, 기내(畿內)의 땅이 달관(達官)의 별업(別業)224) 이 많았으나 노숭이 그 차역(差役)을 고르게 하고 청탁(請托)을 행하지 않았다. 경진년에 우리 전하가 즉위하자, 정헌 대부(正憲大夫) 삼사 좌사 지의정부사(三司左使知議政府事)로 발탁하였으니, 대개 재주와 식량(識量)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노숭이 어미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도하여 아침저녁으로 봉양하는 데 어김이 없었고, 어미가 나이 93세로서 죽으니 훌쩍훌쩍 뛰며 울부짖다가 기운이 꺾여서 쓰러졌으나, 상장(喪葬)은 예절을 다하였다. 신사년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니, 전(箋)을 올려서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갑신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천전(遷轉)되었다가 신묘년에 검교 의정부 우의정으로서 집에 거(居)하였는데,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 이하 나이와 덕이 함께 높은 수십여 노인과 더불어 기영회(耆英會)를 결성하여 한가롭게 노닐었고, 졸(卒)하던 해인 갑오년에 검교 우의정(檢校右議政)에 바꾸어 제수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제(賜祭)하여 치부(致賻)하고, 시호(諡號)를 경평(敬平)이라 하였다. 노숭은 품성과 자질이 순후(純厚)하였는데 성품을 그대로 길러 겸손하였다. 관(官)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고, 붕우(朋友)와는 공경하고 신의가 있었고,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는 엄하였으나 어질었다. 경사(經史)를 보기를 좋아하고 세속에서 서로 상대(相對)하는 문자(文字)를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검약(儉約)하는 것을 따르기에 힘쓰고 산업(産業)을 경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희유(嬉遊)225) 를 좋아 하지 않고 신불(神佛)을 섬기지 않아, 졸(卒)함에 임하여 여러 아들을 경계하기를,
"내가 일찍이 선유(先儒)의 의논(議論)을 보아서 죽음과 삶의 이치를 조금 안다. 내가 죽은 뒤에 불사(佛事)를 쓰지 말라."
하였다. 졸(卒)할 때 나이가 78세였고, 아들이 다섯이니, 노상인(盧尙仁)·노상의(盧尙義)·노상례(盧尙禮)·노상지(盧尙智)·노상신(盧尙信)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28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220]청요(淸要) : 중요한 직분을 갖는 지위.
- [註 221]
위주(僞主) : 우왕(禑王)을 가리킴.- [註 222]
반유(盤遊) : 즐겁게 나가 노니는 것.- [註 223]
○甲辰/檢校議政府右議政盧嵩卒。 嵩, 光州人, 字中甫, 號桑村, 監察持平俊卿之子。 中乙巳科, 累歷淸要, 官至知申事, 出納惟允。 時, 僞主盤遊無節, 一日命駕適野, 會大雨川漲, 嵩力陳禍福, 涕泣而諫, 主乃還, 時人嘉其勁直。 壬戌以同知密直, 兼大司憲。 一日, 僞主馳馬入嵩之園, 問此是誰家, 從者以實對, 策馬疾馳而出。 以嵩數諫盤遊, 主心忌之。 己巳爲全羅道都觀察使, 時, 倭寇絡繹, 濱海州郡蕭然, 嵩振起頹綱, 威惠竝行。 請于朝, 復民租三年。 先是, 近海無城, 輸租待漕之弊, 民不能堪。 嵩相地之宜, 城全之龍安, 羅之榮山, 輸租以便轉漕。 且諸州舊無義倉, 又請于朝, 始置之。 乙亥爲開城留後。 時, 太祖錄元從之功, 賜土田臧獲。 丁丑爲京畿左道都觀察使, 畿內之地, 多達官別業, 嵩均其差役, 請托不行。 庚辰, 我殿下卽位, 擢爲正憲三司左使、知議政府事, 蓋重才識也。 嵩養母至孝, 晨昏奉養無違, 母年九十三而終, 擗踊摧折, 喪葬盡禮。 辛巳起復, 參判承樞府事, 上箋乞終制, 不允。 甲申遷參贊議政府事。 辛卯以檢校議政府右政丞居家, 與昌寧府院君 成石璘以下, 年德俱高數十餘老, 結爲耆英會, 優游卒歲。 甲午改除檢校右議政, 至是以病卒。 輟朝三日, 賜祭致賻, 賜謚敬平。 嵩稟資純厚, 存養謙恭, 當官處事, 未嘗小怠, 孝親忠君, 一以至誠, 與朋友敬而信, 敎子孫嚴而恕。 喜觀經史, 不喜作世俗對偶文字, 治家務從儉約, 不以營産爲意, 不好嬉游, 不侫神佛。 臨卒戒諸子曰: "吾嘗觀先儒議論, 粗知死生之理。 吾死後毋作佛事。" 卒年七十八。 男五, 尙仁、尙義、尙禮、尙智、尙信。
- 【태백산사고본】 12책 28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