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19일 甲辰 1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운암원에서 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중국군의 무기, 군량, 병력 등을 논의하다

국역

미시(未時)에 상이 운암원(雲巖院)에 나아가 지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우승지 유몽정(柳夢鼎), 주서 심언명(沈彦明), 대교 조수익(趙守翼), 검열 조유한(趙維韓)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독이 무엇 때문에 회군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군량과 마초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황해도는 비록 분탕되었어도 남은 곡식이 조금은 있으나 경기는 모두 분탕되어 마을이 폐허화하여 보기에 참혹했습니다. 정월 27일, 조승훈(祖承訓)·사대수(査大受)·장언충(張彦忠)·이영(李寧) 등이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벽제(碧蹄)로 갔는데 적과 마주쳐서 한 사람이 60급(級)이나 40급을 참하기도 하여 총계가 1천여 급이나 되었습니다. 사대수가 제독에게 와서 적의 형세를 보도록 청하니 진시(辰時)에 제독이 단기로서 달려갔습니다. 신이 혜임령(惠任嶺) 에 나아가 종사관 및 군관 1인에게 먼저 벽제에 가서 지공(支供)을 준비하라고 했는데 관군이 급히 돌아와서 하는 말이 ‘수많은 왜적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군사들의 후미에서 바라보니 적병의 수는 중국군의 10배나 되어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크게 놀라 달려가보니 제독의 말이 넘어져 다리를 다쳐 한참 만에야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독만 혼자 가고 장세작 등은 따라가지 않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세작도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접전할 때에 경이 보았는가? 적이 활을 가지고 있던가, 총통(銃筒)을 가지고 있던가? 기병이던가, 보병이던가? 접전할 때 먼저 무슨 병기를 사용하던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제독이 몸을 빼어 혼자 나아갔기 때문에 화포 등 기구는 모두 운반해 가지를 못하여 신기전(神機箭)만 발사했는데, 적은 포를 쏘며 먼저 진격해 왔습니다. 중국군이 바로 돌격해 격전하자 적이 조금 물러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적이 좌충우돌하며 일시에 진격해 오자 중국군이 대적하지 못하여 한편으로는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게 하고 한편으로는 피로한 병졸들을 먼저 후퇴시켰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군사들은 가지 않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빈(李蘋)신원(新院) 근처에 있었고, 도원수는 1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군의 후방에 있었습니다. 중국군이 후퇴할 때에 군량과 기기를 낭자하게 버려 말이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혜임령에 올라가 보니 제독과 여러 장수들이 싸우면서 후퇴하는데 중국군 3백여 명이 왜적과 육박전을 하다가 패퇴할 즈음 파발의 독촉으로 남병(南兵)이 와서 구원했습니다. 만약 이 군사들로써 진격했더라면 승첩할 형세였습니다. 그런데 제독은 수하의 많은 가정(家丁)들이 전사하고 이문승(李文升) 또한 전사했기 때문에 통곡하며 슬퍼하여 진격하지 않고 파주로 군사를 되돌렸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버린 물건을 주워 모은 것이 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빈(李蘋)의 군사가 군량 약간과 갑옷 2백여 벌을 주워 제독에게 바치니 제독은 갑옷 10여 벌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되돌려 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의 전사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적과 사상한 숫자가 서로 엇비슷하여 거의 5∼6백 명에 이릅니다. 제독이 파주에 도착하여 세 대장과 의논하기를 ‘이곳은 전장으로 부적당하고 군량의 운반 또한 이어지지를 않으니 동파(東坡)에 물러가 주둔하려 한다.’ 하고 다음날 동파로 물러가 주둔했습니다.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또 비가 올 징후가 있었으므로 개성부로 회군했습니다. 군색한 일이 많았지만 제독은 이미 우리 나라가 분탕된 것을 알고 허물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치한 군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천리의 거리에 군량을 운반하게 되니 궁핍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형세인데 조정에서 잘 처리하지 못하여 군량과 마초가 잇달지 못하고 심지어는 회군하기에 이르게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교동(喬桐)·강화(江華)·통진(通津) 등 고을의 마초를 모은다면 충족시킬 수가 있는데 권징(權徵)은 자신은 순찰사라고 하면서 절제(節制)만 할 뿐이고, 감사는 권징이 군량과 마초 등의 일을 관장한다고 하며 서로 미루면서 마련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강화에는 여유 있는 양곡이 수천 석 있는데 권징이 모두 사용(私用)했다 합니다. 제독이 개성부를 떠날 때에 인민들이 길을 막고 통곡하고 신 역시 울면서 머물러 있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행군이 안성참(安城站)에 이르렀을 때, 도원수가 보고하기를 중국군을 청하여 왜적을 공격하려 한다고 하기에 신이 그 서장을 제독에게 품(稟)하니, 제독은 ‘주린 군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승전보가 이르렀기에 또 제독에게 드리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들 ‘조선인들은 속임수가 있어 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다가 사대수(査大受)의 첩보를 보고서야 비로소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즉시 정병 3천 명을 선발, 가서 임진(臨津)을 방어하게 했습니다. 제독이 용천(龍泉)·안성(安城) 등지에 군량과 마초가 많이 쌓인 것을 보고는 ‘만약 개성부에서도 이와 같았다면 여러 군사들이 어찌 굶주림을 하소하며 물러가기를 청했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성부에 비축된 군량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군량 3천 석이 충청도로부터 와서 후서강(後西江)에 정박했다고 하는데 이후에 후속될 곡식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주에 있을 때에 항상 군량 비축하는 일을 말하면 조정에서는 저절로 해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군량이 부족하여 군사와 말들이 굶주려서 물러나 주둔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제독의 허물이 아니다. 군량도 없이 머물기를 청하는 것은 바로 앉아서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제독 역시 ‘군사와 말이 굶어 죽는데도 억지로 머무르게 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조롱 속의 새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 또한 제독의 처사가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역자(避役者)들이 많이들 의병에 투신한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강화 한 고을은 피난민과 피역자들이 눈앞의 안일만을 도모하는 곳입니다. 소위 의병이라고 하는 자들은 제각기 호령하여 통령(統令)이 없어 사대부집 부녀들을 강간하기도 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는 등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작당하여 도둑질을 할 근심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독의 용병술(用兵術)은 어떠한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제독은 대단한 호인이나 다만 남병과 북병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제독을 욕하는 자가 또한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북 군사가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 논공을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장세작(張世爵)과 제독은 동향인인가? 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가한 일이나 수공(首功)에 기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남병은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바로 전진하는데 오유충(吳惟忠)의 공이 최고입니다. 사대수는 부박하고 황탄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번 벽제에서의 패전은 대수가 경솔히 진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작이 대군 철수의 의논을 힘써 주장했다고 합니다. 군중의 일을 남병들이 매양 송 시랑(宋時郞)에게 비밀히 통지하기 때문에 제독이 역관에게 말하기를 ‘송야(宋爺)는 조정의 명을 받고도 즉시 도강하여 책응하지도 않고, 조정에서 보낸 전마(戰馬) 1천 필을 빼앗아 머물려 두고, 군공의 주본(奏本) 또한 막고서 방해하니 통분하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북도(北道)에서 치계(馳啓)한 것을 덕형에게 내려주면서 이르기를,

"북적이 안변(安邊)을 향하여 나갔다고 하는데, 필시 위세에 눌려서 도망친 것이다. 제독의 군중에 남방 포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남방 포수가 5천 명이라고 합니다. 때맞추어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속히 송 시랑과 이 제독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덕형이 또 아뢰기를,

"제독이 처음에는 국왕과 회의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다가 신이 당도하자 ‘내가 가게 되면 인심이 의구(疑懼)할 것이고, 국왕께서 이곳에 오시면 또한 폐단이 많을 것이니, 만나보고 싶지 않다.’ 하였습니다. 개성부는 새로 병화(兵火)를 겪었고, 또 대군이 주둔하고 있어 지공(支供)하고 안무(安撫)하는 등의 일을 위촉하는 것이 긴급한데 경력(經歷)은 일 처리가 오활하고, 도사(都事) 이눌(李訥)은 혼암 용렬하여 무용하니, 모두 갈고 따로 가려서 보내소서. 경기의 좌·우도 감사는 각기 자기 경계만 지키면서 서로 돌보지를 않으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좌·우 감사를 나누어 둔 것은 왜적이 가득 차서 소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한 것이지 어찌 오래도록 할 수 있겠는가?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황해도 수안 군수(遂安郡守) 한수진(韓守眞), 토산 현감(兎山縣監) 이희원(李希愿), 재령 군수(載寧郡守) 윤선원(尹善元)은 모두 근면하고 능력이 있어 백성을 잘 다스립니다. 수진이 대간의 논박을 받아 체직된다고 하기에 소신이 감사에게 말하여 그대로 유임하도록 청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34장 A면
  • 【국편영인본】 21책 63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특수군(特殊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원문

○未時, 上御雲巖院, 引見知中樞府事李德馨、右承旨柳夢鼎、注書沈彦明、待敎趙守翼、檢閱趙維韓。 上曰: "提督, 何以回軍?" 德馨曰: "因糧草不敷。 黃海道則雖已蕩敗, 稍有餘粟, 而京畿則盡經焚蕩, 村落丘墟, 所見慘酷。 正月二十七日, 祖承訓査大受張彦忠李寧等, 率三千餘兵, 往碧蹄, 與賊相値, 一人或斬六十級, 或四十級, 通計千餘級矣。 査大受請提督來觀賊勢形止, 辰時, 提督以單騎馳往。 臣進往于惠任嶺, 令從事官及軍官一人, 先往碧蹄, 措辦支供矣, 官軍急馳還來言, 賊無數出來云。 臣在軍後望見, 則賊數十倍天兵, 無慮累萬。 臣大驚馳往, 則提督馬蹶傷股, 良久而起矣。" 上曰: "提督獨往, 而張世爵等不隨去乎?" 德馨曰: "世爵往矣。" 上曰: "接戰時, 卿見之乎? 賊持弓矢乎? 持銃筒乎? 騎乎? 步乎? 接戰, 先用何技?" 德馨曰: "提督挺身獨進, 火砲諸具, 竝不輸去, 只放神機箭, 賊則放砲先來。 天兵直突搏戰, 則賊少退。 未幾, 賊左衝右突, 一時直前, 天兵不得抵敵, 一邊使諸將, 領兵結陣, 一邊使疲卒先退矣。" 上曰: "我軍不往乎?" 德馨曰: "李蘋新院近處, 都元帥率軍百餘, 在天兵之後矣。 天兵退還時, 軍糧器具, 棄置狼藉, 馬不得馳。 臣上惠任嶺, 見提督與諸將, 且戰且退, 天兵三百餘名, 與搏戰, 退北之際, 擺撥急督, 南兵來救。 若以此兵進擊, 則勢似可捷。 而提督以其手下家丁多死, 李文升又戰亡, 故痛哭悲傷, 因不進兵, 還師坡州矣。" 上曰: "天兵所棄之物, 有收聚者乎?" 德馨曰: "李頻軍, 得軍糧若干, 甲二百餘部, 納于提督, 則提督只留甲十餘部, 其餘則還給矣。" 上曰: "天兵之死者, 其數幾何?" 德馨曰: "與賊, 死傷相當, 幾至五六百矣。 提督到坡州, 與三大將議曰: ‘此地不合戰場, 糧運不繼, 欲退屯東坡。’ 云, 翌日退屯東坡。 人馬飢饑, 且有雨徵, 以此回軍于開城府。 事多艱窘, 而提督則已知我國之蕩敗, 故不以爲咎。" 上曰: "糧餉措置幾何?" 德馨曰: "千里運糧, 勢必匱乏, 而朝廷不爲料理, 使糧草不繼, 至於回軍, 甚無謂也。 喬桐江華通津等邑馬草聚合, 則可以取足, 而權徵則自謂巡察使, 但節制而已, 監司則以爲權徵句管糧草等事, 互相推諉, 無意措辦。 江華有餘糧數千石, 權徵盡爲私用云云。 提督離發開城府也, 人民遮道而哭, 臣亦哭而請留, 不應。 行到安城站, 都元帥報請天兵, 欲擊倭賊, 臣將其書狀, 入稟提督, 則曰: ‘飢兵不可送。’ 云。 翌日捷報來到, 又呈於提督, 則諸將皆曰: ‘朝鮮人詐譎, 此言不可信也。’ 及見査大受捷報, 始有喜色, 卽抄精兵三千, 往禦臨津矣。 提督, 於龍泉安城等路, 見糧草多積, 謂曰: ‘若使開城府如是, 則諸軍豈有告飢請退之理乎?’" 上曰: "開城府所儲糧餉, 幾何?" 德馨曰: "軍糧三千石, 自忠淸道, 來泊於後西江云, 此後隨到之穀, 則未能知也。" 上曰: "在義州時, 常以措備糧餉爲言, 則朝廷以自然爲之爲對。 而今者糧餉匱乏, 士馬飢困, 至於退屯, 此非提督之咎也。 無糧而請留, 則是欲使坐而飢死也。" 德馨曰: "提督亦曰: ‘士馬飢餓, 而强使欲留, 是欲使我, 如籠鳥之待死也。’" 上曰: "予意, 提督之事, 不爲非矣。 避役者多投義兵云, 然耶?" 德馨曰: "江華一府, 避亂避役, 偸安之地。 所謂義兵, 各自號令, 無所統令, 故或强奸士女, 或㤼掠民財, 無所不至。 若此不已, 則不無相聚爲盜之患也。" 上曰: "提督用兵如何?" 〔德馨曰:〕 "提督, 甚好人, 而但南北兵不相得, 詬罵提督者亦多矣。" 上曰: "南北之不相得, 予己知矣。 其論功, 何如是乎?" 上曰: "張世爵與提督, 同鄕人耶? 謂有功則可矣, 至錄於首功, 則未可也。" 德馨曰: "南兵不顧生死, 一向直前, 吳惟忠之功最高, 査大受浮誕愚人也。 今此碧蹄之敗, 大受輕進。 故世爵力主大軍撤回之議云。 軍中之事, 則南兵每密通於宋侍郞, 故提督言於譯官曰: ‘宋爺受朝廷命, 不卽渡江策應, 而朝廷所送戰馬一千匹, 奪而留之, 軍功奏本亦爲壅遏, 可爲痛憤。’ 云。" 上, 以北道馳啓, 下德馨曰: "北賊出向安邊云, 必是畏威遁去。 提督軍中, 南方砲手, 幾何耶?" 德馨曰: "南方砲手五千云矣。 及時進取之意, 急急移咨於宋侍郞李提督可也。" 德馨曰: "提督初言欲與國王相會議事, 而及臣之來, 曰: ‘俺往則使人心疑懼, 國王來此, 亦必多弊, 不欲相會。’ 云。 開城府新經兵火, 且大軍留駐, 凡支供安撫等事, 委屬緊急, 經歷沈禮謙處事迂闊, 都事李訥昏庸無用, 竝遞差另爲擇遣。 京畿左右監司, 各守其界, 不相顧護, 殊爲未妥。" 上曰: "當初分設左右監司者, 爲賊充斥, 聲聞不通, 故不得已爲之也, 豈可久乎? 同是國事, 豈容如是?" 德馨曰: "黃海道 遂安郡守韓守眞兎山縣監李希愿載寧郡守尹善元, 皆勤幹善治。 而守眞因臺諫所啓見遞云, 小臣言於監司, 請仍任矣。"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34장 A면
  • 【국편영인본】 21책 63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특수군(特殊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