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84권, 영조 31년 5월 21일 갑오 1번째기사 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신치운에게 형을 가하고 복주하다

역적 신치운(申致雲)이 복주되었다. 임금이 또 형을 가하도록 명하니, 신치운이 공초하기를,

"신과 같은 당에 또 이거원(李巨源)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죄인 신치운은 장전(帳殿)에서 친히 하문했을 때에 감히 차마 무신년178) 역적의 망측한 말을 다시 거론하였다. 이번 심정연의 흉서를 그가 주장하였다고 자복하였으니, 음참하고 부도한 말 역시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역률(逆律)로 정법(正法)하고 처노(妻孥)는 역적 이괄(李适)의 예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숭례문의 누각에 나아가 복주(伏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세도가 불행하여 난역(亂逆)이 거듭 일어나 아주 흉악하고 절패(絶悖)하였는데, 신치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갑진년179) 8월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다 낫지를 않고, 수라(水剌)를 들기 싫어하는 징후가 점차 더했기 때문에 궁중에서 근심한 나머지 20일에 어주(御廚)에서 수라에 게장을 올렸었다. 이는 가을철 신미(新味)인데, 경묘께서 이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었다. 그후에 지나치게 많이 들었다는 말이 밖으로 전해지자 이유익(李有翼)박필현(朴弼顯)의 무리가 이를 가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말을 만들어 내고, 몰래 심유현(沈維賢)을 사주하여 전파시켰다. 또 이천해(李天海)를 꾀어 어가(御駕) 앞에서 난언(亂言)을 하게 하여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를 핍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역적 신치운의 흉언의 근본인데, 게장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천해 같은 흉역도 말하지 못한 바였다. 아! 통분스럽다. 그 역시 사람인데 차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 동조(東朝)께서 설사 게장을 보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예사 일이요, 더군다나 올린 바가 또 어주(御廚)에서 올린 것이겠는가? 오직 우리 동조의 인자한 덕은 우리 경묘와 전하를 돌보아 사랑하는 깊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경묘의 천성은 효심이 돈독하고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여, 어린 나이부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임오년180) 이후에는 또 인현 성모를 모시던 것으로써 우리 자성(慈聖)을 지성으로 받들어 애경(愛敬)을 다하였다. 즉위한 후에는 전하께서 진현(進見)할 때마다 기쁘고 사랑하는 뜻이 애연(藹然)하게 얼굴에 나타났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효제(孝悌)와 지성(至誠)이 천성이어서 정성을 바침이 성실하고 한결같아 한 때 잠시라도 늦추지 않았고, 삼가고 예를 갖춤이 자세하고 간곡해 역시 한 가지 일도 미진함이 없었으니, 옛사람이 말한 바, ‘효제(孝弟)가 신명(神明)에 통하였다.’라고 한 것은 우리 전하를 두고 한 말이다. 경묘께서 이미 후사가 없어서 위로 자성의 교책(敎冊)을 받들어 전하께서 세제(世弟)가 되었으니, 그 의리가 정대하고 주고받는 것이 광명(光明)하여 참으로 천지 사이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質正)해도 의심이 없어 백세 후에라도 미혹됨이 없다. 그런데 저 흉당(凶黨)들이 우리 전하가 저위(儲位)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반드시 위란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에 흉패한 말로써 성궁(聖躬)을 욕한 것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또 저위를 세워 대리시키라는 전교가 모두 우리 자성에게서 나왔는데도,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차마 이처럼 음참하고 망측한 말을 돌려가면서 서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신치운에게 이른 것이다. 그들이 우리 전하가 저위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전하가 숙묘의 아들이며 경묘의 아우로서 반드시 숙묘경묘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게 되면 그들에게 불리해서이고, 그들이 우리 자성의 지극히 인자한 덕(德)을 무함함은 바로 경묘의 지극히 효성스런 덕을 무함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자성과 전하의 역신(逆臣)일 뿐만 아니라 실로 숙묘경묘의 역신인 것이니, 아! 통분스럽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신치운은 출신(出身)하는 처음에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아첨해 붙어 그들의 비호를 받아 박필몽이 사관(史官)의 천거를 주관하면서는 신치운을 말천(末薦)으로 하는 데에 이르렀다. 신치운은 성품이 본디 사납고 요망한데, 그가 대관(臺官)이 되자 선정(先正)을 더럽게 무함하여 사문(斯文)에 죄를 얻어 더욱 세상의 배척을 받았다. 마침내 마음에 차지 않고 원망하게 되어 몰래 다른 뜻을 쌓아 역얼(逆孼)이나 폐족(廢族)인 윤상백(尹尙白)·김도성(金道成)·심정연(沈鼎衍)의 무리와 역모를 체결하였으니, 윤상백이 공초한 바, ‘신치운이 불우하게도 세상에 쓰임 받지 못하게 되자 경상(卿相)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하였다. 처음 국문을 받게 되자 거짓 풍(風)으로 말을 못하는 형상을 짓다가 다시 국문하기에 미쳐서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는 이에 이천해의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언을 답습하여 그의 역심(逆心)을 드러내려 하였다. 처음 김일경과 박필몽이 감히 함부로 무핍(誣逼)하여 갑진년 전에 역모를 빚어낼 때에 이유익심유현이 흉언을 만들어 내어 갑진년 이후에 역적 이천해를 꾀었으니, 그 근본과 맥락이 본래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치운은 이미 김일경과 박필몽의 심복이요, 이유익·심유현과는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한 벗이었다. 그가 또 공초하기를, ‘유봉휘(柳鳳輝)와 마음이 같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신문을 받아 장차 죽게 되었을 즈음에 함부로 흉악을 부린 것에서 난역과 심술이 한 테두리 안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가 이미 무신년에 통고문(通告文)을 찬진(撰進)할 때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이제 천고에 없는 대역(大逆)으로서 스스로 천벌을 받게 되고, 효경(梟獍) 같은 성품과 시랑(豺狼)같은 마음은 본디 스스로 교화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어찌 이처럼 음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역적이 또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60책 84권 20장 A면
  • 【국편영인본】 43책 579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