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개수실록 16권, 현종 8년 1월 11일 병술 3번째기사 1667년 청 강희(康熙) 6년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책례할 때에 세자가 쓸 관(冠)을 의논하여 결정하고자 경들을 인견한 것이다. 경들은 예조의 초기(草記)를 보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면복(冕服)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른바 면복이란 평천관(平天冠)이 아니다. 평천관은 관례를 치루기 전에 쓸 수 없으므로 책례 때는 공정책(空頂幘)을 쓰기로 일찍이 의논하여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쌍동계(雙童髻)만으로 정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위에 쓰는 것이 없어서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공정책에 대해서는 어찌 거론하지 않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예조가 면복(冕服)이 면(冕)과 복(服)인 줄을 모르고 의복이라고 오인하였으니, 살피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평천관은 체모가 중하므로 공정책이 편리할 듯합니다.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제도를 널리 상고하여 속히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옷은 칠장복(七章服)을 쓰고 관은 공정책을 쓰도록 해조에 말하여 거행하게 하고, 적말(赤襪)과 적석(赤舃)도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만들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원 사람이, 자기 아들이 구문치(具文治)에게 피살되자, 이일선(李一善)에게 글을 보내어 원수를 갚으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도망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부사 김시진(金始振)이 그 사람을 잡아다가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죽였다 합니다. 대개 그의 뜻은 뒷날 일이 생기면 잘못을 국가에 돌리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먼저 처참하고 뒤에 아뢴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그것이 온당한 처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나름대로의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혁연이 이미 언문 서찰을 써 준 사람을 가두어 놓았는데, 이는 비록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글 내용이 몹시 흉칙합니다. 절도에 정배하여 후일을 징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上受鍼, 引見領議政鄭太和、左議政洪命夏。 上曰: "欲議定冊禮時世子所着之冠, 引見卿等矣。 卿等見禮曹草記乎?" 太和曰: "無乃冕服事乎?" 上曰: "然。 所謂冕服者, 非平天冠也。 平天冠則未加冠前不當用, 故冊禮時, 則曾以空頂幘議定矣。 今則只以雙童䯻定之, 如此則上無所着, 似未妥當。 空頂幘何不擧論乎?" 太和曰: "該曹未諳其冕服之爲冕與服, 而誤認爲衣服, 可謂不審矣。 平天冠則體重, 空頂幘似便。 令儒臣博考制〔度〕 , 宜速精造。" 上曰: "衣用七章服, 冠用空頂幘, 以此言于該曹擧行, 赤襪、赤舃, 亦令尙方造入。" 太和曰: "水原人, 以其子被殺於具文治, 通書於李一善, 謀欲報怨, 事覺逃躱。 今聞府使金始振, 捕捉其人, 不告於朝, 擅殺之。 蓋其意以爲, 日後生事, 不欲歸咎於國家, 有此先斬後啓之擧也。 雖未知其穩當, 而亦不無意見也。" 上曰: "然。" 太和曰: "柳赫然已囚書給諺札之人, 此則雖不至於必死, 然其書辭極兇。 宜定配絶島, 以懲日後矣。" 上允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