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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실록 소개

해제

명·청실록 해제

구범진(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실록(實錄)이라는 편년체 역사 기록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실록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록은 이미 남북조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왕조의 실록 편찬이 제도화된 것은 당대(唐代) 이후이다. 실록 편찬 제도는 일본과 한국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육국사(六國史)’ 속에 두 종의 실록이 현존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면, 중국과 한국에서 역대 왕조의 실록은 대개 역사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다만 한국의 《조선왕조실록》과 중국의 《명실록》・ 《청실록》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역사 연구의 기본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근년 들어 한국의 연구자 가운데 《명실록》・ 《청실록》 수록 기사를 활용하는 사례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두 실록이 우리의 《조선왕조실록》과 거의 같은 시간대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명실록》・ 《청실록》에 대한 관심의 제고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명실록》・ 《청실록》 역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현존 《명실록》・ 《청실록》의 유래를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실록 사료에는 최초의 편찬 시점에서 이미 원시 자료의 취사선택과 편집에 의한 ‘왜곡’이 개입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명실록》・ 《청실록》의 일부는 심한 경우 여러 차례에 걸친 개수(改修)를 거친 탓에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한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두 실록 사료의 가치와 한계를 전면적으로 다룰 수는 없겠지만, 이하에서 《명실록》・ 《청실록》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에 앞서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기본적인 사항을 짚어보기로 하겠다.

1. 명실록

《명실록》은 명대(明代) 역조(歷朝) 황제의 통치 내용을 기록한 관찬(官撰) 편년체 사서로 모두 십삼조(十三朝) 실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대에는 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감수(監修), 총재(總裁), 찬수(撰修) 등을 임명하여 전조(前朝)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현존하는 《명실록》은 그러한 편찬 작업의 산물이다. 명의 실록 편찬 제도에 따르면 실록은 정본(正本)과 부본(副本)을 작성하여 따로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본은 처음에 내부(內府)에 보관하다가 가정(嘉靖) 13년(1534) 이후 황사성(皇史宬)에 보관하였고, 처음에 고금통집고(古今通集庫)에 보관하던 부본은 나중에 문연각(文淵閣)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이러한 정본・부본 외에 열람용으로 대본(大本)을 따로 만들어 건청궁(乾淸宮)에 보관하였으며, 어람용으로 소본(小本)도 제작하였다. 역조(歷朝) 실록의 정본・부본・대본・소본은 명조가 멸망하면서 일부 훼손되었지만 청조(淸朝)에 인수되어 《명사》 편찬을 위해 설치한 명사관(明史館)에 보관되었다. 청조의 명사관(明史館)은 《명사》를 편찬하면서 《명실록》의 네 가지 초본을 종합해서 새로운 초본을 만들었다. 이 명사관(明史館) 초본은 건륭(乾隆) 48년(1783) 기존의 네 가지 초본을 전량 폐기한 이후 가장 양질의 선본(善本)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청조 멸망 이후 북평도서관(北平圖書館), 즉 오늘날의 중국국가도서관(中國國家圖書館)에서 보관하게 된 명사관 초본은 보통 “홍격본(紅格本)”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국가가 작성하여 보관하던 초본 외에, 만력(萬曆) 연간 이후 실록의 각종 초본이 만들어져 세상에 유전되기 시작하였는데, 초록 과정에서 권질(卷帙), 내용, 자구 등의 출입이 적잖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홍격본(紅格本)” 외에도 대략 십여 종의 초본이 현존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명실록》의 초본 두 종이 영인되었다. 최초의 영인본은 1941년에 남경(南京) 국학도서관(國學圖書館) 소장 초본을 영인한 것이다. 두 번째 영인본은 1962년 대만(臺灣)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에서 출판한 것으로, 민국 시대부터 북평도서관(北平圖書館) 소장 “홍격본”을 저본으로 삼아 각종 초본과의 대조와 교감 작업을 수행한 결과물이다. 현재 연구자들이 주로 쓰고 있는 통행본은 1962년의 영인본이다. 십삼조(十三朝) 실록의 구성과 서술 시기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太祖實錄⌋ 257권 : 元 至正 10년(1351)~明 洪武 31년(1398)
  • ⌈太宗實錄⌋ 130권 : 洪武 31년(1398) 윤5월~永樂 22년(1424) 8월
  • ⌈仁宗實錄⌋ 10권 : 永樂 22년(1424) 8월~洪熙 원년(1425) 5월
  • ⌈宣宗實錄⌋ 115권 : 洪熙 원년(1425) 5월~宣德 10년(1435) 정월
  • ⌈英宗實錄⌋ 361권 : 宣德 10년(1435) 정월~天順 8년(1464) 정월
  • ⌈憲宗實錄⌋ 293권 : 天順 8년(1464) 정월~成化 23년(1487) 8월
  • ⌈孝宗實錄⌋ 224권 : 成化 23년(1487) 8월~弘治 18년(1505) 5월
  • ⌈武宗實錄⌋ 197권 : 弘治 18년(1505) 5월~正德 16년(1521) 3월
  • ⌈世宗實錄⌋ 566권 : 正德 16년(1521) 4월~嘉靖 45년(1566) 12월
  • ⌈穆宗實錄⌋ 70권 : 嘉靖 45년(1566) 12월~隆慶 6년(1572) 5월
  • ⌈神宗實錄⌋ 596권 : 隆慶 6년(1572) 5월~萬曆 48년(1620) 7월
  • ⌈光宗實錄⌋ 8권 : 泰昌 원년(1620) 8월~泰昌 원년(1620) 12월
  • ⌈熹宗實錄⌋ 84권 : 天啓 원년(1621) 정월~天啓 7년(1627) 12월
위의 십삼조(十三朝) 실록은 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태조실록(太祖實錄)》은 건문(建文) 연간에 최초 완성되었지만, 영락(永樂) 연간에 이르러 두 차례 개수되었다. 두 차례의 개수를 통해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홍무제(洪武帝)나 영락제(永樂帝)에 관련된 부정적 사실이 대거 삭제되었다. 둘째, 《태종실록(太宗實錄)》은 오늘날 성조(成祖)라는 묘호로 알려진 영락제 시기를 기록한 실록이지만, 영락제의 원래 묘호가 태종(太宗)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태종실록(太宗實錄)》이라고 부른다. 영락제의 묘호가 성조(成祖)로 바뀐 것은 실록의 완성으로부터 100년 이상이 지난 뒤인 가정(嘉靖) 17년(1538)의 일이다. 셋째, 명의 두 번째 황제는 건문제(建文帝)이지만 그 시기에 대한 실록은 《태종실록(太宗實錄)》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물론 영락제에게 제위를 찬탈당한 건문제가 오랫동안 황제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서 건문(建文) 연간의 기사에는 건문 연호를 쓰지 않았고, 영락제가 즉위한 건문 4년(1402) 7월부터 12월까지는 홍무(洪武) 35년으로 기년(紀年)하였다. 넷째, 《영종실록(英宗實錄)》은 연호를 기준으로 정통(正統)・경태(景泰)・천순(天順) 등 세 시기를 기록한 것이다. 가운데 낀 경태 연간의 황제 경태제(景泰帝)는 영종(英宗)[정통(正統)과 천순(天順)]의 복벽(復辟)으로 인해 건문제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실록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다섯째, 현존 《희종실록(熹宗實錄)》에는 천계(天啓) 4년(1624)과 천계(天啓) 7년(1627) 6월이 누락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 순치(順治) 연간 《명사》 편찬의 총재(總裁)를 맡았던 대학사(大學士) 풍전(馮銓)이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감추기 위해 《희종실록》 의 두 시기 부분을 폐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섯째,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실록은 왕조의 멸망으로 인해 정식으로 편찬되지 못하였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명실록》 이 명대 역사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사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명대의 당안(檔案) 문서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명실록》 의 사료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청실록

《청실록》은 《명실록》과 마찬가지로 청대 역조(歷朝) 황제 재위 기간의 사적을 기록한 관찬 편년체 사서이다. 청대 황제는 태조(太祖) 누르하치부터 마지막 선통제(宣統帝)까지 모두 12명이었지만, 청대에 공식적으로 편찬된 실록은 목종(穆宗), 즉 동치제(同治帝)까지의 심조(十朝) 실록이다. 덕종(德宗), 즉 광서제(光緖帝) 시기의 실록은 1920년대에 편찬되었으며, 선통제의 경우는 실록과 같은 체례(體例)로 《선통정기(宣統政紀)》가 편찬되었다.
청대의 실록은 만(滿)・몽(蒙)・한(漢) 세 가지 언어로 편찬되었으며, 각각 정본(正本) 4부와 부본(副本) 1부가 작성되었다. 정본은 다시 대릉본(大綾本) 2부와 소릉본(小綾本) 2부로 나뉜다. 대릉본 2부 가운데 하나는 북경(北京)의 황사성(皇史宬)에 보관하였고, 다른 하나는 성경(盛京), 즉 오늘날 심양(沈陽)의 숭모각(崇謨閣)에 보관하였다. 소릉본 2부 가운데 하나는 건청궁(乾淸宮)에, 다른 하나는 부본인 소황릉본(小黃綾本)과 함께 내각(內閣)의 실록고(實錄庫)에 보관하였다. 민국(民國) 연간에는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태조(太祖)부터 목종(穆宗)까지 십조(十朝) 실록의 만・몽・한문본이 각 4부씩 있었고, 성경(盛京) 숭모각(崇謨閣)에 만・한문본이 각 1부씩 있었다. 각 5부씩 남은 만문본(滿文本)과 한문본(漢文本) 실록은 장황의 재질과 대소에 맞추어 대홍릉본(大紅綾本), 소홍릉본(小紅綾本), 소황릉본(小黃綾本) 등으로 불리며, 중국제일역사당안관(中國第一歷史檔案館), 요녕성당안관(遼寧省檔案館), 고궁박물원도서관(故宮博物院圖書館) 등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덕종실록(德宗實錄)》은 현재 2부가 남아 중국제일역사당안관(中國第一歷史檔案館)과 요녕성당안관(遼寧省檔案館)에 보관되어 있지만 모두 잔질본이다. 그러나 북경대학도서관(北京大學圖書館)에 《덕종실록》의 정고본(定稿本)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선통정기(宣統政紀)》는 현재 대황릉본(大黃綾本) 1부가 요녕성당안관(遼寧省檔案館)에, 정고본(定稿本) 1부가 북경대학도서관(北京大學圖書館)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밖에 1934년 요해서사(遼海書社)에서 청사관(淸史館) 고본(稿本)을 영인한 43권본이 있다.
《청실록》은 1936년 ‘만주국’에서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이라는 이름으로 영인한 바 있으며, 1986년에 북경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황사성(皇史宬) 대릉본(大綾本)을 비롯한 각종 판본을 상호 대조하여 《청실록(淸實錄)》이라는 이름으로 영인・출판하였다. 이 중화서국본(中華書局本)을 기준으로 《청실록(淸實錄)》 통행본의 구성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滿洲實錄》 8권, 《太祖實錄》 10권
  • 《太宗實錄》 65권
  • 《世祖實錄》 144권
  • 《聖祖實錄》 300권
  • 《世宗實錄》 159권
  • 《高宗實錄》 1500권
  • 《仁宗實錄》 374권
  • 《宣宗實錄》 476권
  • 《文宗實錄》 356권
  • 《穆宗實錄》174권
  • 《德宗實錄》 597권
  • 《宣統政紀》 70권
청대에는 명대와 달리 찬탈(簒奪)이나 복벽(復辟)이 없었기 때문에 역조(歷朝) 실록의 서술 시기는 각 황제의 재위 기간과 일치한다. 그러나 역조 실록은 수록 기사의 구체성에 출입이 적지 않고, 특히 18세기 이후로는 실록보다 가치가 높은 원시 자료 및 편찬 사서가 다수 남아 있기 때문에, 명대의 실록과 비교해서 사료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록이 청대 역사 연구의 기본 사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편 《청실록》의 이용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유념할 점이 있다.
첫째, 《만주실록(滿洲實錄)》의 독특한 형식이다. 누르하치 시기의 사적을 기록한 편년체 대사기(大事記) 《만주실록(滿洲實錄)》은 한 페이지를 상・중・하 세 단으로 나누고,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만주어, 한문, 몽골어로 각 단에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누르하치의 무공을 표현한 그림을 삽입하였다. 《만주실록(滿洲實錄)》은 천총(天聰) 9년(1635)에 최초로 완성되었고, 건륭(乾隆) 44년(1779)에 2부, 건륭 46년(1781)에 1부가 추가로 만들어졌다. 4부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은 건청궁(乾淸宮), 상서방(上書房), 성경(盛京), 피서산장(避暑山莊) 등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상서방(上書房) 보관본만이 현존한다.
둘째, 태조(太祖)・태종(太宗)・세조(世祖)의 삼조(三朝) 실록의 개수이다. 삼조 실록은 최초 편찬 후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이로 인해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의 표기가 변경 내지 통일되었지만 일부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의 첨가나 삭제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연구자가 순치(順治) 연간까지의 사실을 다룰 때에는 《청실록》 통행본의 개찬 가능성을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각각의 개수 연혁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누르하치 시기의 실록은 숭덕(崇德) 원년(1636)에 최초 편찬되었다[《태조태후실록(太祖太后實錄)》]. 순치(順治) 연간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의 명령으로 개수가 한 차례 이루어졌고, 순치 친정(親政) 이후 다시 수정이 진행되어 순치 12년(1655)에 완성되었다[《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 그러나 강희(康熙) 연간에 다시 세 차례의 개수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10권)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이어서 옹정(雍正) 12년(1734)에 다시 교정이 시작되어 건륭(乾隆) 4년(1740)에 완성되었다[건륭(乾隆) 중수본(重修本)].
다음으로 홍타이지 시기의 실록(《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은 도르곤 섭정 시기인 순치(順治) 6년(1649)에 최초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적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이어서 순치 친정 시기인 순치 9년(1652)에 편찬이 재개되어 순치 12년(1655)에 완성을 보았다[순치(順治) 초찬본(初纂本)]. 《태종실록》은 강희 12년(1673)에 개수가 시작되어, 강희 21년(1682)에 완성되었다. 이어서 옹정-건륭에 걸쳐 다시 교정이 이루어져 건륭 4년(1740)에 완성되었다[건륭(乾隆) 중수본(重修本)].
끝으로 순치제(順治帝) 시기의 실록(《세조실록(世祖實錄)》)은 강희 6년(1667) 편찬이 시작되어 강희 11년(1672)에 완성되었지만, 역시 옹정-건륭에 걸쳐 교정이 이루어졌다[건륭(乾隆) 중수본(重修本)]. 이상과 같은 개수 과정을 거친 삼조(三朝) 실록의 현재 통행본은 모두 건륭(乾隆) 중수본(重修本)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의 순치(順治) 중수(重修) 만문본(滿文本)과 한문본(漢文本), 《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의 순치(順治) 초찬(初纂) 만문본(滿文本)과 한문본(漢文本)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강희 연간에 개수된 삼조(三朝) 실록의 만문본(滿文本)과 《태종실록》의 몽문본(蒙文本)이 남아 있으며, 비록 원본이 아닌 사본이어서 오자나 탈자 및 자구상 출입이 있기는 해도 한문본 몇 종이 일본으로 흘러들어 현존하고 있다. 그 밖에 《태조실록》의 경우는 강희 연간에 만들어진 고본(稿本)이 불완전하게나마 남아 있다(《태조고황제실록고본삼종(太祖高皇帝實錄稿本三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