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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16일 정미 1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왕이 대신 및 비변사 당상을 불러 왜적을 방비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대신(大臣)및 비변사 당상을 명패(命牌)로 불렀다. 【영의정 유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晬), 예조 판서 홍진(洪進),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상호군(上護軍) 이일(李鎰), 상호군 최원(崔遠), 상호군 유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동지중추부사 노직(盧稷), 대사간 윤승훈(尹承勳). 】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험패(驗牌)는 비록 누구라도 주문(奏聞)하는 자가 쓰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병부(兵部)에서 쓰는데, 그곳의 인마(人馬)가 고르지 않아서 황급히 치문(馳聞)할 때에만 쓰고 있습니다. 지금 험패를 보낸 것은 급한 일을 고하는 것입니다. 대개 왜적이 가까이 있어 도모할 만한 형세이거나 갑자기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급함을 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성세(聲勢)가 이처럼 급한데도 손 경략(孫經略)이 때맞춰 군사를 출발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손 경략은 군사를 출발시키려고 하는데 석 상서(石尙書) 【석성(石星). 】 어렵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군사를 움직이기 전에 마땅히 중국군을 먼저 출발시켜 압록강에 유둔(留屯)해 왜적을 방비해야 한다. 만약 적이 움직인 후에야 급함을 고하면, 수천리 밖에서 군사를 출발시켜 어떻게 때맞춰 와서 구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듣건대, 일로(一路)에서는 이미 준비를 하고 군사를 조발하였는데, 단지 석 상서가 특히 어렵게 여기기 때문에 이처럼 늦어지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 경략이 나올 것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지금 밀운(密雲)에 머물고 있으니 세후(歲後)에는 마땅히 나와 봉황성(鳳凰城)에 머물 것이라 합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로는 지금 달리 해볼 만한 일이 없으니 마땅히 계속 급함을 고해야 합니다. 또 부산의 정세를 근래에는 전혀 들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지금 모름지기 거제(巨濟)에 군사를 주둔시켜 준비하고 정찰하게 하여야 합니다. 중국군 파발이 이미 부산을 떠났고, 우리 나라 백성들은 출입을 금하고 있어서 적의 강약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심사(沈使)가 그곳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언백(高彦伯)은 어찌 지금까지 보내지 않고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고언백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양주(楊州)의 백성들이 지금 부녀와 아이들을 이끌고 무기를 지고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어서 머물러 기르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덕형에게 이르기를,

"병조 판서는 어째서 군사를 일으켜 보내지 않는가? 설혹 군정(軍丁)이 일제히 도착하지 않았더라도 마땅히 차례로 대오를 나누어 보내는 것이 옳다. 지금 남쪽 지방의 일이 급한데 다 이르기를 기다려서 보내면 기회를 잃어 그르치고 만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즉시 내려 보내야 마땅한데 양식(糧食)이 조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때맞춰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초 약속할 때에도 의정(議定)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일은 번번이 이처럼 지체된다."

하고, 한참 동안 탄식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고언백이 거느리고 있는 양주(楊州)의 군사를 먼저 발송하고, 북도(北道)의 군사는 시재(試才)·논상(論賞)한 후에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고언백이 가더라도 반드시 수령이 된 뒤에야 의거하여 양병(養兵)할 수 있고 군현(郡縣) 하나라도 잘할 수가 있습니다. 방어사(防禦使)의 호칭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수령(守令)보다는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고언백은 후미에서 공격하여 목을 벤 공은 있으나 큰 싸움에서 대첩(大捷)한 공적은 조금도 없다. 초개(草芥)의 천례(賤隷)로 당상의 지위에 자리하여 겸손함은 날로 사라지고 교만함만 심해져 처음에는 읍재(邑宰)를 청했다가 되지 않자 또 내구마(內廐馬)를 청하여 타고 갔으니, 크게 인신(人臣)의 도리를 잃었다. 이런 조짐은 키워서는 안 된다. 】

상이 이르기를,

"허실간에 적의 형세가 이러하니 금년 농사는 백성들이 반드시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별도로 수령들에게 하유하여 각자 권장하게 하고 농사짓는 곳이 많은 곳은 읍재에게 상을 주어 힘써 안집(安集)시키게 해야 한다."

하니, 윤두수유성룡이 함께 아뢰기를,

"청야(淸野) 한 가지 일은 민심을 소란하게 할 것이니, 백성을 안집시키고 그 계책은 그만두게 하소서."

하자, 상이 그리하라고 일렀다. 정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궁마(弓馬)는 천하에 제일이고 산천의 형세도 매우 험고하니, 이런 조건으로 적을 제압하는 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임진년의 일은 인심이 안일에 젖어 일패 도지(一敗塗地)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저 적들이 어떤 적이기에 경은 두려울 게 없다고 하는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난번 윤찬(尹巑) 등이 군문(軍門)에서 와 말하기를, 군문이 병으로 좌당(坐堂)하지 못하고 그에게 우리 나라의 정세를 써 오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윤찬은 무인으로서 배우지 못하여 사실을 다 써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문이 출병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병부(兵部)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군사를 조발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배신(陪臣)이 별도로 정문(呈文)하여 군사를 청하면 군문은 반드시 그 글을 근거로 병부에 전보(轉報)하여 군사를 출동하게 할 것입니다. 또 험첩(驗帖) 하나를 보내어 고급(告急)할 때 쓰게 하였으니 【헌첩(憲帖)으로 즉 우리 나라의 초료(草料)이다. 】 그가 우리 나라를 위하여 힘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문관(文官)을 별도로 보내 정문하여 군사를 청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옳다. 군문의 군사가 다 우리 나라에 오지는 못하더라도 모름지기 압록강 건너편에 주둔하였다가 우리 나라의 위급을 대비해 달라고 계속 고하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노직(盧稷)이 아뢰기를,

"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산해관(山海關)길에서 군문을 만났는데 남병(南兵)이 모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병이 반(叛)하여 토평(討平)한다고 하더니, 그러한가?"

하자, 노직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초에 남병이 먼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웠는데도 이 제독(李提督)이 녹공(錄功)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병이 원망하는 자가 많아 제독의 기패(旗牌)를 【벼슬 이름이다. 】 잡아다 수죄(數罪)하고 효수(梟首)했기 때문에 제독이 난병(亂兵)이라 하여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녹공을 하지 않아 그렇게 되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매월 주는 은(銀)을 주지 않은 일로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제독은 우리 나라 경주(慶州) 안강(安康) 【속현(屬縣)이다. 】 싸움에서 패한 것을 남병의 죄로 돌려 오유충(吳惟忠)을 파척(罷斥)했으므로 오유충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손 군문(孫軍門)오유충에게 권해 군문에 머물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문창(石門倉)의 말에 의거하면 【남병을 가리킨다. 】 도독이 석문창을 죽일 것이 틀림없다."

하니, 유영순(柳永詢)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남병이 이 제독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남병을 살해한 일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석 상서(石尙書)와 이 제독(李提督)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노직이 아뢰기를,

"신이 중국에서 길을 가다 선비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선비가 말하기를 ‘석 상서가 주화(主和)하는 일을 하는데 못하는 짓이 없어 공격을 너무 심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남방의 의논이 매우 분열되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참으로 큰 기회(機會)가 있는 말이다. 이는 바로 우상(右相)의 【이원익(李元翼)이다. 】 장계인데, 처음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은 그 실정이 아니었다. 대개 병력이 고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서 만약 한번 군사의 형세가 무너지면 후에 비록 다시 떨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 그 소견이 그래서 그러한 말을 했던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요즈음 인심을 보건대 모두 싸움터에 달려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장래의 일이 점점 뜻대로 되지 않고 있어 염려스럽습니다. 경성에 방호 대장(防護大將)을 두었는데 대장이 자주 체직되니, 누가 방호하는 책임을 맡으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임무를 이천(李薦)에게 책임지워선 안 된다. 【이천이 대장이 되어 상의 명(命)을 어겼다. 이천은 사나운 무인이다. 지난 무자년에 왜구(倭寇)가 호남(湖南)을 침범했을 때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관계 없는 일로 수령(守令)을 장살(杖殺)하였다. 그의 광기(狂氣)를 상이 통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다. 】 장수는 반드시 제대로 사람을 얻은 뒤에야 책임을 지울 수 있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 경성 순검사(京城巡檢使)가 더러 궐원이 있는데 채우지 않고 있다. 봄 추위가 풀렸는데도 왜 아직껏 조처하지 않고 있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유영립(柳永立)이 비록 죄를 입어 견책을 당했지만, 전에 종성(鍾城)에 있을 때 일찍이 도적 막을 준비를 했었으니 수성(守城)하는 직임을 맡겨도 됩니다." 【유영립이 계미년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어 오랑캐를 막은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영립이 임진년에 북쪽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왜적에게 사로잡혔는데 응자(鷹子)를 뇌물로 주고 빠져 나왔기 때문에 대간(臺諫)이 논죄하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않았는데 유성룡이 거두어 쓰고자 하여 아뢴 것이다. 】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정원(政院)이, 상의 결정이 없음으로 해서 취품(取稟)하였으나 역시 답하지 않았다. 】 상이 이르기를,

"수군을 초출(抄出)하는 일은 비록 한때의 형세가 마침 그러해서이나 수군이 죽으면 잇따라 다른 사람을 쓰고 있다. 봄·여름 사이에 일의 성패가 있으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서로 버티면서 결정나지 않고 세월만 허송한다면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절로 입이 쓰니 매우 민망하다. 또 수군은 그렇더라도 육군(陸軍)은 도원수가 다시 징집(徵集)하는데 그 형세가 반드시 궤멸될 것이다. 적의 대군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지만 대마도에 앉아서 냉소하며 우리가 저절로 멸망되는 것을 지켜 볼 것이다.

한강(漢江) 이남은 역시 중국 장수들을 지공(支供)하느라 백성들의 힘이 곤핍할 것이니, 온갖 일이 다 걱정스럽다. 더구나 양 사신(楊使臣)은 봉명한 책사(冊使)로서 부마(夫馬) 2천, 차량(車輛) 40을 징발하여 하루에 1백 20여 리를 가니 그사이 수령들이 비록 주선을 잘하더라도 형세가 그렇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됨이 영민하지 못하여 우리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와서 도리어 나라의 근본을 손상시키고 있다."

하니,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암말[雌馬]를 많이 몰고 가서 길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 암말은 우리 나라 말인가?"

하니, 윤승훈(尹承勳)이 아뢰기를,

"중강 개시(中江開市)에서 암말을 많이 팔고 있으니 그 길을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都監)에서는 좌장(坐匠)의 공역(工役)을 날짜를 계산하여 책임량을 주는가, 아니면 공연히 세월만 허비하고 있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날짜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일은 이른바 관가 돼지가 배 앓는다는 격이다. 모든 기계가 정밀하지 못하니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이는 바로 유사(有司)의 일이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김응서(金應瑞)의 항왜(降倭)가 조총(鳥統)을 잘 만든다고 하니, 모름지기 올라와 제조하게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올라올 것이 없다. 우리 나라 공장(工匠)들 역시 잘 만든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몰래 왜적과 장사한 일은 분명한데, 김담(金談)이란 자는 문자를 누설한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마땅히 삼성(三省)이 다스려야 합니다. 이억수(李億壽)및 도피했던 사람을 【김담이 도망해 있을 때이다. 】 아울러 삼성에서 해야 합니까, 아니면 금부(禁府)에서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승훈이 앞으로 나와 소리를 가다듬어 아뢰기를,

"중외의 인심이 모두 분개하면서 스스로 군대에 응모하겠다고 말하여 비록 10여 세된 여자들까지도 모두 원수 갚기를 생각하고 있어 의기(義氣)를 고무함이 적지 않습니다. 섭상(葉鱨)이 이런 일을 듣고는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때가 너희 나라가 회복할 기회이다.’ 하였습니다. 만약 이런 때를 인하여 상께서 분발하시는 기색을 보이면 난을 평정할 수가 있습니다. 근래에 순검사(巡檢使)가 이미 차출됐는데, 상께서 할 수 없다고 여기시기 때문에 순검사가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수성(守城)하실 뜻을 가지고 계시면 누가 감히 경성(京城)을 사수(死守)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군사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여 지킬 수가 없다면 누가 군부(君父)를 위태한 곳에 방치하겠습니까. 이제 대신들이 이곳에 모였으니, 모름지기 마땅한 일을 강구해야 합니다. 적의 정세는 비록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지만 조석간에 충돌해 올지도 모르니, 마땅히 미리 방비하여 침략에 경계하여 민심을 결집시켜야 합니다. 지금 국도(國都)도 수비하지 못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산성(山城)을 지키라고 하기는 역시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복수군(復讎軍)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곡절(曲折)을 듣고자 한다. 승지(承旨) 역시 동맹에 참여했으니 【승지는 바로 유영순(柳永詢)인데 그의 부형(父兄)의 복수를 위해 동맹에 참여하였다. 】 상세히 아뢰라."

하니, 유영순이 재배(再拜)하고 눈물을 삼키면서 나아와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부터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임이 기밀(機密)에 참여하고 있어 모사(謀事)할 겨를이 없었으니 효성이 부족하였습니다. 또 혼자서 성공하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실마리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성교(聖敎)를 받드니 황공하여 감읍(感泣)합니다. 신이 김시헌(金時獻)·송순(宋諄) 등과 함께 종루(鍾樓)에 모여 깃발 하나를 세우고 이름하기를 ‘복수소모지기(復讎召募之旗)’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본 바로는 부형 자제(父兄子弟)의 원수가 있는 자는 귀천과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호곡(呼哭)하면서 응모해 왔고, 늙은이와 과부·병약자는 혹 군량을 가지고 오거나 혹은 군기(軍器)를 가지고 왔고, 장정과 벼슬한 자는 모두 이름을 적어 응모해, 혹은 화살을 지기도 하고 혹은 노예를 내기도 하여 하루 사이에 군사 3백 명과 양식 90여 석(石)이 되어 신들은 매우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수일 뒤에 이르러서는 응모하는 군중이 비록 첫날 같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문적(文籍)에 성명을 기록한 자가 5백여 명이고, 군량은 4백 석입니다. 신이 근밀한 직임에 있어 직무에 방해로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문관(文官) 가운데서 신처럼 어버이에 대한 원수를 지닌 사람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한가한 몸으로 친히 하삼도로 가서 군정(軍丁)을 모집하고자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옳다. 해직(解職)할 것 없이 바로 가도 괜찮다. 경외(京外)의 군사는 일시에 조치해서는 안 되고 먼저 의기(義氣)를 거양하여 정하게 뽑고 장수를 정하여 원수(元帥)와 체찰사(體察使)에게 소속시켜 역시 경성에 유둔(留屯)시켰다가 나누어 내려보내 성세(聲勢)를 돕게 하는 것이 옳다. 일을 속히 서둘러 하라. 조정에서도 미포(米布)와 병기(兵器)를 내어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유응수(柳應秀) 【어버이의 원수를 지닌 자이다. 】 북병(北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 사람을 장수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송순이 아뢰기를,

"이번 복수군 안에다 당상과 낭청을 설치하고 국(局)을 설치해 행인(行印)도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비변사에서 지휘하라."

하였다. 윤승훈송순이 아뢰기를,

"양예수 등 4명이 시약(侍藥)했다는 작은 공로로 후하게 작질(爵秩)을 더한 것은 매우 외람됩니다. 그래서 신들이 여러 날 동안 논집(論執)하였고 여론이 분노하고 있으니 빨리 개정(改正)을 명하소서. 장춘열(張春悅)은 장죄(贓罪)로 안율(按律)했었는데 진 유격(陳遊擊) 때문에 면했고 또 그의 청으로 아울러 녹안(錄案)에 참여하여 완전히 석방되자, 물의가 더욱 놀라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의 중병(重病)이 나았다. 세자는 종사(宗社)의 근본이니 그에게 가자(加資)한 것이 무엇이 아까운가. 장춘열은 이미 중국 장수와 대면해서 허락했는데 그가 물러가자 바로 개정하는 것은 사체로 보아 마땅치 않으니 모두 따를 수 없다."

하였다.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환도(還都) 이후에 종묘(宗廟)를 살펴보는 일은 친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계청(啓請)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그날 비가 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그후에는 날씨가 추워서 다시 품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점차 따뜻해지고 있으니 다시 별제(別祭)할 날을 잡아 친히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묘(廟) 안이 매우 좁아서 행례하기가 불편하니, 영녕전(永寧殿)을 터서 10실(室)로 만들면 공역(工役)도 많이 들지 않고 일 역시 매우 쉽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의논하여 처리하라. 제사날을 잡는 것과 개수(改修)하는 일은 대신에게 의논해 처리하라."

하였다.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시사(視事)를 오래 폐했던 것은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지금은 날씨가 따뜻하니, 청컨대 자주 경연(經筵)을 열어 성학(聖學)을 강명(講明)하소서."

하였다. 사시(巳時)말에 마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4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상업-시장(市場)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農業) / 공업(工業) / 구휼(救恤) / 과학-천기(天氣)

○丁未/上命牌招大臣及備邊司堂上。 【領議政柳成龍、判中樞府事尹斗壽、知中樞府事鄭琢、慶林君 金命元、戶曹判書金睟、禮曹判書洪進、兵曹判書李德馨、上護軍李鎰、上護軍崔遠、上護軍柳永慶、吏曹參判李廷馨、同知中樞府事盧稷、大司諫尹承勳。】 上御別殿, 謂諸宰臣曰: "驗牌, 雖某人, 持奏聞者, 則用之乎?" 成龍曰: "兵部用之, 而此處人馬不齊, 而有星火馳聞事, 則用之, 故今驗牌之送, 實爲告急事也。 大槪賊, 近有可圖之勢, 若遽爲渡海, 則告急可也。" 上曰: "賊聲如此其急, 而經略發兵, 趁不爲之, 何以處之?" 成龍曰: "孫經略欲爲發兵, 而石尙書 【星。】 持難云矣。" 上曰: "賊未及動兵, 而當先發天兵, 留屯鴨江, 以備盜, 可也。 若賊動之後, 告急而發兵, 數千里之外, 豈可及期來救乎?" 成龍曰: "似聞一路, 已爲設備調兵, 而只以石尙書持難之故, 如是稽遲云爾。" 上曰: "經略出來耶?" 曰: "今住密雲, 歲後當出, 箚鳳凰城云矣。" 成龍曰: "我國今無可爲之事, 宜連絡告急。 且釜山情形, 近來邈不聞知。 今須住兵巨濟, 設備候察。 唐撥已離釜山, 我民不許出入, 賊之强弱, 不可詳知, 而使徘徊, 亦必有由。" 上曰: "高彦伯何以迄今不遣?" 成龍曰: "彦伯來言于臣曰: ‘楊州民, 今當提挈婦兒, 負羽南下, 留養極難。’ 云矣。" 上謂德馨曰: "兵判何以不爲起送? 設或軍丁, 不盡齊到, 當次第分運以送可也。 今方南圉事急, 而待其畢至而送, 則失誤機事爾。" 德馨曰: "當卽下送, 糧食未及措置, 故不得趁時下送。 當初約束時, 亦爲議定矣。" 上曰: "我國事每每如是遲緩", 嗟歎良久。 德馨曰: "彦伯所率楊兵, 先爲發送, 而北道之兵, 則試才論賞後, 下送何如?" 上曰: "然矣。" 斗壽曰: "彦伯雖去, 必須作宰, 然後可以據而養兵, 雖一郡縣, 可以爲也。 防禦之號雖美, 不如守令之爲愈, 蓋欲自爲也。" 上不答。 【彦伯雖有尾擊斬級之功, 語其大戰大捷之績, 蔑如也。 以草芥賤隷, 崛起貂蟬之右, 謙遜日去, 驕亢滋蔓, 始請邑宰而不得, 又請內廐而出騎, 殊失人臣之道, 其漸不可長也。】 上曰: "虛實間, 賊勢如此, 今年耕作, 民必不力, 宜另下諭于守令, 各自勸課, 起耕多處, 則褒賞邑宰, 務爲安集可也。" 斗壽成龍皆曰: "淸野一事, 民心波蕩。 請令安集百姓, 以寢其計。" 上曰: "然矣。" 鄭琢曰: "我國弓馬, 甲於萬國, 山川形勢, 極爲險阻。 以此制敵, 何畏之有? 但壬辰之事, 只緣人心, 狃於恬憘, 以至一敗塗地。" 上笑曰: "彼賊如何賊, 而卿言不足畏耶?" 德馨曰: "前者尹巑等來自軍門曰: ‘軍門以病不得坐堂, 使書我國情狀以來’ 云。 , 武人不學, 不能盡實書示。 然軍門欲爲出兵, 而特以兵部不許之故, 不敢擅便調發矣。 若陪臣, 另爲呈文乞兵, 則軍門必憑其書, 而轉報兵部, 使之發兵耳。 且付送一驗帖, 以爲告急之用, 【憲帖也, 卽國草料也。】 其用力於我國者, 可見也。 今宜另遣文官, 呈文乞兵似當。" 上曰: "此言甚可。 軍門之兵, 雖不可盡來于我地方, 須於鴨江越邊留屯, 待我救急事連絡, 告之無妨。" 曰: "臣奉使上國, 路逢軍門於山海關, 則南兵盡死云矣。" 上曰: "南兵叛, 討平之云, 然耶?" 曰: "不然。 當初南兵, 先登有功, 而李提督不爲錄功。 是以南兵多怨懟者, 拿致提督之旗牌, 【官名。】 數罪梟首, 故提督以爲亂兵, 介介鏖劉云矣。" 上曰: "不爲錄功而致此耶?" 德馨曰: "以月銀不給事, 人多怨詈, 而李提督以我慶州 安康 【屬縣名。】 之戰敗, 歸罪於南人, 罷斥吳惟忠, 惟忠將罷歸鄕里, 孫軍門惟忠, 留軍門云矣。" 上曰: "據石門倉云, 則 【指南兵。】 都督必殺石門倉矣。" 永詢曰: "然矣。 南兵不得志於提督, 故至於如此。 殺害南兵之事, 天下莫不怨罵石尙書李提督矣。" 曰: "臣道逢儒士於中原, 儒士說: ‘石尙書主和之事, 無所不至, 攻擊已甚。’ 以此見之, 南方之論, 極分矣。" 上曰: "此誠一大機會之言。 此乃右相 【李元翼。】 狀啓也。 初意不然之言, 非其情也。 蓋因兵力孤弱之故, 而若一跌兵勢, 後難復振。 其見如是而爲之也。" 成龍曰: "近以人心見之, 皆思死戰, 而向來時事, 漸不如意, 深可慮也。 京城設防護大將, 而大將數遞, 誰任備禦之責乎?" 上曰: "此任不可責於李薦 【薦爲大將, 上命遞之。 薦, 頑悍武人也。 昔在戊子, 倭寇湖南之日, 薦爲助防將, 以不干之事, 杖殺守令。 其爲狺暴, 自上痛燭, 故有是敎。】 將必得人而後, 可以責望成效也。 且京城巡檢使, 或有闕員, 而不爲塡差。 今此春汛已解之後, 何以迄不措置?" 成龍曰: "柳永立雖被罪譴, 前在鍾城, 已嘗備盜, 可以任守城之職。" 【永立, 癸未間, 爲鍾城府使, 有禦胡之勞, 故有是說, 而永立在壬辰中, 爲北伯, 而被擒於倭賊, 賂鷹子得脫, 故臺諫論罪罷職不敍也。 成龍欲爲收敍, 故啓之。】 上不答。 【政院以無發落取稟, 則亦不報。】 上曰: "水軍抄出之事, 雖因一時勢所適然, 而水軍盡則繼以他人。 春夏之內, 事有成敗則已, 如其相持不決, 曠延日月, 不可支勝。 一念來, 不覺口苦, 誠可憫也。 且水軍則如此, 而陸軍則都元帥, 又爲徵集, 其勢必潰。 賊之大兵, 雖不出來, 坐其對馬, 冷笑而看我自滅。 漢江以南, 則亦以支供唐將, 民力自涸, 百事皆可憂憫。 況且使以奉冊之使, (懲)〔徵〕 發夫馬二千、車輛四十, 日行一百二十餘里, 其間邑倅, 雖善周旋, 勢不可及, 其爲人不通矣。 以救我國之故來, 而反傷邦本。" 憲國曰: "雌馬優數持去, 彌滿一路。" 上曰: "吾未聞此言。 雌馬卽我國馬耶?" 承勛曰: "中江開市, 多賣雌馬。 宜阻此路。" 上曰: "都監, 坐匠工役, 而計日責功耶? 無乃虛費日月耶?" 德馨曰: "計日矣。" 上曰: "我國之事, 所謂官猪腹痛。 凡器械不精, 何以用之? 此乃有司之事。" 斗壽曰: "應瑞之降, 善鍊鳥銃云, 須上來造作, 可也。" 上曰: "不必上來。 我國工匠, 亦善爲之。" 成龍曰: "潛商事分明, 而[談] 者解文字, 亦多漏通矣。 彼二人, 當以三省治之。 李億壽及逃走【金(淡) [談](在逃時也。】 人, 幷爲三省乎? 自禁府爲之乎?" 上曰: "如啓: "承勛進前颺言曰: "中外人情, 皆爲自憤, 以自募之事言之, 雖十歲, 十餘歲女子, 皆思報讎, 鼓動義氣, 不爲不小矣。 葉鱨聞此事歎曰: ‘此爾國恢復之秋。’ 若因是時, 自上有奮發之色, 則可以濟亂。 近來巡檢使已出, 而自上以爲不可爲, 故巡檢不知所爲矣。 若殿下有守城之志, 誰敢不欲死守京城乎? 兵孤勢弱, 將不可守, 則誰令君父, 置之危處? 今者大臣會此, 須講究事宜。 賊之情形, 雖難遙度, 朝夕衝突, 亦難期指, 宜預修繕, 以戒陰雨, 爲今繫民心之地可也。 今其國都, 不事守備, 而責下之力守山城, 其亦難矣。" 上不報。 上曰: "復讎軍事, 何以爲之? 曲折願聞之。 承旨亦預盟中, 【承旨卽永詢, 以父兄之讐故參盟。】 其詳啓知。" 永詢再拜飮泣而進曰: "臣等曾有是意思, 而職忝機密, 無暇謀事, 誠孝不足。 且難獨成, 久未成緖, 今承聖敎, 不勝惶恐感泣。 臣與金時獻宋諄等, 會議于鍾樓, 竪一幡名曰: ‘復讐召募之旗。’ 其日聞見, 而有父兄子弟之讎者, 無論貴賤老少, 皆呼哭來募。 老者、嫠者、病者、弱者, 或軍糧, 或軍器; 壯者, 仕者, 皆籍名應募, 或負羽, 或納奴。 一日之間, 軍三百, 糧需九十餘石, 臣等深以爲幸。 至於數日之後, 則應募之衆, 雖不如初日, 而今之籍記姓名者, 五百餘人, 軍糧四百石矣。 臣忝在近密, 職事有阻, 不得專意, 臣欲與文官中, 如臣有親讎者, 解官偸閑, 親往下三道, 募集軍丁爾。" 上曰: "是言則然矣, 不須解職而乃可往也。 京外之兵, 不可一時措置。 莫如先擧義氣, 精抄定將, 屬於元帥、體察, 亦於京城留屯, 分運下送, 以助聲勢可也。 事在作速爲之, 自內亦欲出米布、兵器, 以動耳目。" 永詢曰: "柳應秀 【有親讐者。】 將北兵, 以此人爲將何如?" 上曰: "然。" 宋諄曰: "今此復讐軍中, 設堂上郞廳, 設局行印。" 上曰: "是備邊可以指揮。" 承勛宋諄曰: "楊禮壽等四人, 以侍藥微勞, 重加爵秩, 猥濫極矣。 臣等論執累日, 群情忿激。 請亟命改正。 張春悅以贓按律, 而初以陳遊擊免, 而又因其請, 幷與錄案而全釋, 物議益駭。" 上曰: "世子病重而愈。 世子, 宗社之本, 渠之加資, 何足惜? 春悅旣對唐官面許, 退卽改之, 事體殊常, 皆不可從。" 洪進曰: "還都以後, 宗廟視事, 不可不親, 故前者啓請蒙允, 而其日雨不克祀, 厥後日寒, 不得更稟。 今則漸暖, 更卜別祭, 親行何如? 且廟中窄甚, 不便行禮, 通永寧殿爲十室, 則工役不多, 而事亦便易。" 上曰: "禮曹議處。 祭則某日卜爲, 而修改事, 則議大臣處之。" 以恭曰: "頃以日氣甚寒, 視事久廢者, 未安之甚也。 今則日暖, 請頻數經筵, 講明聖學。" 巳末罷黜。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4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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