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번의 처 정씨가 재산을 사위에게 주도록 한 남편의 유서를 고치는 일을 상언하다
앞서 이숙번(李叔蕃)의 처 정씨(鄭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의 부처(夫妻)는 노비(奴婢)·전지(田地)·가사(家舍)·재산(財産)을 함께 서명(署名)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맏사위인 전 현감(縣監) 강순덕(姜順德)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딸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내가 전의 문안(文案)을 고치고자 하여 강순덕으로 하여금 가져오라 하였으나, 강순덕이 이에 따르지 않으므로써 모자(母子)의 의리를 어기었습니다 또 그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수양(收養)755) 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고 칭탁하고, 노비를 마음대로 여러 조카에게 나누어 주면서, 나의 자손에게는 1구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남편의 원하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육조(六曹)와 대성(臺省)·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사철(李思哲)이 의논하기를,
"아내가 남편에 대한 것은 자식이 부모에 대한 것과 한 가지이니,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아내가 남편이 작성해 놓은 문서를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들이 부모의 문서를 고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정씨가 이숙번이 살았을 때 이미 함께 문서를 작성하여 전지와 노비와 가재(家財)를 여러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이숙번이 죽고 난 뒤에 이를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만약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들어주면 특별히 아내가 그 남편이 한 일을 고칠 수 있게 해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윤리(倫理)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간사한 아들이 아비의 죽음을 이용하여 그 어미를 꾀이고 농간질하여 아비와 함께 가진 어미의 재산을 침탈하게 되면 풍속을 해치게 되고 장차 분운(紛紜)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의 고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 아들이 법을 믿고 어미를 업신여겨 불순한 데 이르를 것이니, 이 문제는 실로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일로서 가볍게 처리할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는 이숙번의 문서에 따르고, 정씨의 토지와 노비는 정씨의 소원에 따르면 양쪽이 모두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형(尹炯)·참판(參判) 이사순(李師純) 등은 의논하기를,
"대저 부모가 자손에게 노비·전지·가사·재물을 마음대로 주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법입니다. 자손이 부모에게 어찌 불순할 이치(理致)가 있겠습니까? 강순덕은 정씨의 사위이고, 강희맹이 강순덕의 후계자이면 이들은 모두 정씨의 자손입니다. 이미 정씨 자손이 되었으면, 무릇 주고 빼앗는 일은 오로지 정씨에게 있습니다. 만약 정씨로 하여금 자기 집의 노비·전지·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한다면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인정과 이치에 합당치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에 옳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였으니, 하나같이 정씨의 정원(情願)에 따라야 강상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교화(敎化)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참판(參判) 정척(鄭陟)·참의(參議) 김유온(金有溫)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은 아내 정씨와 함께 지난 을미년756) 에 양가(兩家)의 노비를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숙번은 경신년757) 에 죽었고, 장녀(長女)인 강순덕의 아내가 후사(後嗣)가 없어서 강순덕은 아내 이씨와 함께 의논하여 지난 신유년758) 에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후사로 세워서 아들로 삼고 노비·전지·재물·가사를 모두 전해 받게 하였습니다. 이씨가 죽은 후 강희맹이 상복을 입고 상제(喪制)를 마친 후 지금까지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지금 정씨가 관부에 고발하여 다시 빼앗으려 하는 것은 오로지 장녀가 후사 없이 죽은 뒤 부부의 노비와 전장(田莊)이 자손 외의 사람에게 전해지고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꾀가 간사합니다. 그러나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모가 아들에게 노비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고 빼앗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러합니다. 어미가 비록 노비 1구와 물건 하나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식된 자가 어찌 원망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정씨의 고장(告狀)이 잘못된 것이라 하고 강순덕이 그대로 재물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하면 이것은 모자의 은혜를 해치는 것이고 강상(綱常)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숙번의 살아 생전에 일찍이 준 노비와 전장(田莊), 그리고 한천(韓蕆)이 준 노비와 전장을 추탈(追奪)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대로 강순덕에게 주어 강희맹에게 전하게 하고, 정씨의 자기 노비는 정씨가 구처(區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신(閔伸)·참의(參議) 변효경(卞孝敬)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이 정씨와 함께 의논하여 딸인 강순덕의 아내에게 작성해 준 노비 문권(文券) 안에는 자손 이외의 사람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없는데, 남편이 죽고 난 후 도로 빼앗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딸이 살아 있을 때 강희맹을 후계로 세웠는데,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까지 아울러 도로 빼앗으려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정씨의 노비·전지·가산은 그대로 강희맹에게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겸지사(兼知事) 이축(李蓄)은 의논하기를,
"정씨가 이숙번이 살아 있을 때, 같이 의논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또 강순덕 역시 이씨가 살아 있을 때 같이 의논하여 강희맹을 후사로 세웠는데, 강순덕은 지금 정씨가 딸이 죽고 또 후사가 없다는 것으로써 도로 빼앗고자 꾀하는 것이니, 다시 고치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극관(趙克寬)·참의(參議) 이인손(李仁孫) 등은 의논하기를,
"대저 노비를 주고 빼앗는 것은 재물 주인의 구처에 일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강순덕이 정씨의 사위로서 죽은 아내의 노비와 재산을 모두 가지고자 하여 장모[妻母]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비록 자기의 문서에는 간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모두 노비와 재물은 이미 그가 문권을 작성해 놓고 죽어서 정씨가 함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죽고 난 뒤에는 당연히 강희맹에게 전해지는 것이고, 만약 정씨의 노비와 재산을 그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한다면 인정과 이치에 합당치 않으니, 마음대로 구처하게 할 것입니다. 또 강순덕이 딸의 남편으로서 다만 오로지 갖고자 하여 장모[妻母]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아뢰어 분쟁을 일으킨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강희맹이 이미 후사로 세워졌다면 정씨의 외손(外孫)인데, 아직 가서 뵙지도 않았으니, 또한 불순(不順)합니다.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규명하여 과죄(科罪)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의논하기를,
"강순덕의 장모 정씨가 노비와 전지의 구처를 장고(狀告)한 것은 사리(事理)에 맞는 일이니, 그 소원대로 허락하소서."
하고, 대사헌(大司憲) 성봉조(成奉祖)·장령(掌令) 이보흠(李甫欽)·박대손(朴大孫)·지평(持平) 김윤복(金閏福)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정씨는 또한 강순덕의 아내가 후사 없이 이미 죽었으니, 부부가 함께 준 문권을 가지고 고치려 하는 것은 비록 불순한 것과 같으나, 그러나 정씨가 가난하여 자활(自活)할 수 없고 그 아들 이정(李楨)과 딸인 김해(金眩)의 아내가 모두 살기가 어려워 어미의 빈궁(貧窮)함을 구제할 수 없는데, 가령 강순덕의 아내가 생존해 있다면 그 어미의 정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비록 죽었더라도 그 전지와 노비를 그대로 가지고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서 생업이 이미 풍족하다면 강순덕의 정씨에 대한 모자의 의리가 오히려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정씨의 곤궁(困窮)함을 보았다면 진실로 호소(呼訴)를 기다리지 않고 의리상 마땅히 돌보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거의 돌보아 줄 마음은 없고, 진(秦)나라가 월(越)나라 보듯이 하다759) 가 호소를 하기에 이르러서도 주지 않으니, 이것은 장모와 더불어 쟁탈(爭奪)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근본[綱]이 되는 것이 비록 천하의 큰 법칙이지만, 아들의 어미에 대한 의리도 과연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풍속의 야박하고 잔악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이숙번이 오늘의 형세를 본다면 차마 죽은 딸을 사랑하고 살아 있는 처자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또 정씨가 강순덕의 전지와 노비·재물을 모두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주는 것은 참으로 많고 돌려 받고자 하는 것은 매우 적으며, 다른 무리들이 애증(愛憎)으로써 남편의 명령을 함부로 고치는 것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강순덕의 전지와 노비를 일체 정씨의 처분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모자 사이의 대의(大義)를 보존(保存)하게 하면 부부의 근본[綱]에 있어서도 또한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신석조(辛碩祖)·응교(應敎) 양성지(梁誠之)·교리(校理) 이예(李芮)·부교리(副校理) 유성원(柳誠源) 등이 의논하기를,
"부모가 이미 서로 의논하여 노비와 토지를 아들과 사위에게 나누어 준 뒤에 스스로 다시 고치는 자가 세상에 많이 있으니 잘못하는 일이 아니며, 이것은 스스로 한집안 일이니 재주(財主)760) 의 처분대로 맡기는 것이 상례(常例)일 뿐입니다. 이로써 논하면 정씨의 일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미 남편과 함께 문권(文券)을 작성하였다가 남편이 죽은 뒤에 아내가 마음대로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합니다만, 그러나 문권을 작성할 때 남편이 혼자서 하고 아내가 참여할 수 없었다면 논의할 만하지만, 이미 부부가 함께 재주(財主)가 되어 나누어 주었다면, 그 뒤에 다시 고치는 데에 어찌 불가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모는 일체(一體)이며 같은 재주인데 어찌 아비와 어미 사이에 〈권리〉의 무겁고 가벼움이 있겠습니까? 정씨가 구처하도록 맡기소서."
하고, 부제학(副提學) 최항(崔恒)·직제학(直提學) 박팽년(朴彭年)·직전(直殿) 김예몽(金禮蒙)·응교(應敎) 이개(李塏)·교리(校理) 이승소(李承召)·부교리(副校理) 이극감(李克堪)·부수찬(副修撰) 한계희(韓繼禧)·최선복(崔善復)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남편이 이미 그 아내와 더불어 가산(家産)을 함께 나누어 자손에게 주었다면 그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부모의 명령이 혹 이치에 어긋나더라도 자손은 굽히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정씨가 이숙번(李叔蕃)이 죽고 난 뒤에 스스로 사의(私意)로써 이미 작성한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남편을〉 따르지 않는 아내가 되는 것이며 정씨가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데 강순덕이 거부하고 주지 않는 것은 불순한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혹 말하기를, ‘강순덕이 장모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진실로 모자의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이다.’ 합니다만, 정씨가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 것도 또한 부부의 근본인, 즉 삼강(三綱)의 하나를 잃는 것입니다. 어찌 전자(前者)의 과실만 중하고 후자의 과실이 가볍다 하겠습니까? 관부(官府)가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만이지만 깨닫고서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희맹의 경우는 이미 강순덕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정씨가 그 외조모가 되었으니, 외손으로써 논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정씨가 강희맹에게 허물을 돌리는 말은 그 뜻이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후사(後嗣)를 세우는 일은 중요한 법입니다. 어찌 이로 인하여 드디어 뒷날 법이 무너질 단서(端緖)를 열어 놓겠습니까? 마땅히 정씨로 하여금 남편의 명령을 함부로 변경시키지 못하게 하고, 강순덕을 죄 주어서 불순함을 징계하여야 합니다."
하고, 직제학 신숙주(申叔舟)가 의논하기를,
"이숙번이 살았을 때 작성해 둔 문권을 이숙번이 이미 죽었는데 참으로 정씨가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 집의 전지와 노비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정리(情理)에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는 그의 옛 문권에 따르도록 하고, 정씨가 자기집에서 상속 받은 전지와 노비는 그녀가 편할 대로 하도록 허락하면 인정이나 대의(大義)에도 거의 합당할 것입니다."
하고, 부수찬(副修撰) 서강(徐岡)은 의논하기를,
"부처(夫妻)가 문권을 함께 작성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후 그 아내로 하여금 다시 고칠 수 있게 한다면, 무식한 부인들이 남편이 살았을 때는 그 제대로 마음대로 나누어 주지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 마음대로 변경하여 나누어 주는데, 대개 애증(愛憎)에 따라서 많고 적고 무겁고 가벼움이 서로 크게 다릅니다. 자식 된 자는 비록 억울하여도 의리상 마땅히 스스로 직소하지 못하니, 이로써 관부(官府)에서도 이를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대저 자식이나 사위 된 자는 이미 그 어버이를 소송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어미나 장모로 하여금 그 문권을 고칠 수 있게 하면 이것은 무지한 부인의 마음에 따라 변경하는 단서를 크게 일으키는 일이 되어 그 폐단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정씨가 이숙번과 함께 문권을 같이 작성하여 강순덕에게 주었다가 이숙번이 죽고 난 뒤에 또 이를 빼앗아서 고치고자 하니, 이것은 사의(私意)입니다. 강순덕이 문권을 〈정씨에게〉 바치지 않은 것은 혹 불순이라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사위가 장모에게 또한 당연히 직소하지 못하는 것은 어미와 아들의 예로써 논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정씨가 이숙번의 문권을 고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임효인(任孝仁)·지 사간원사(知司諫院事) 김길통(金吉通) 등이 의논하기를,
"부부는 일체이며 죽은 아내의 물건은 남편이 주인이 되며 죽은 남편의 물건은 아내가 또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정씨는 이미 남편 이숙번과 함께 의논하여 문권을 작성하였는데, 자기의 노비도 역시 아울러 기재(記載)하였습니다. 어찌 오로지 이숙번만의 문서로 보고 정씨를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강순덕은 정씨에게 있어서 실로 자식의 도리가 있습니다. 지금 정씨가 원래의 문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강순덕이 명을 어기고 돌려주지 않는 것은 지극히 불순한 일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문서를 고칠 수 없다고 하여 정씨로 하여금 다시 주고 빼앗지 못하게 한다면 남편이 죽고 난 뒤에 한 아들만 혼자 부유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가난하여 그 어미가 비록 노비를 고쳐 나누어 주고자 하더라도 〈부유한〉 아들이 강순덕의 예를 반드시 빌어서 거절하고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니, 어미와 아들의 도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차 이로 말미암아 아비가 죽고 나면 자식이 문득 어미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 두려우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혹은 말하기를, ‘부자(父子)와 부부(夫婦)는 함께 삼강(三綱)에 들므로 부인의 도리가 남에게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는데 있다면 아내가 남편의 문서를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하지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부부 사이는 만나고 헤어짐이 있으나 부자 사이에는 도리를 끊을 수가 없으니, 어찌 가볍고 무거운 구분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정씨는 남편의 문서를 불의(不義)를 물리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허물을 돌려서 고치려 하는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이 되면 누가 즐겨 남의 후사가 되려 하겠는가? 후사를 세우는 법이 이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후사를 세우는 법은 국가가 자식이 없는 사람을 동정한 데서 나왔을 뿐입니다. 형제나 친척의 아들로써 후사 세우기를 원하는 자는 스스로 자식이 없음을 슬퍼할 뿐이며 자기의 아들을 형제나 친척의 후사로 허락하는 자도 또한 그 형제나 친척의 자식이 없음을 동정한 것뿐입니다. 어찌 노비와 전장을 전해 주는 것이 없겠으며, 후사가 된 사람도 또한 어찌 이것을 바라고 아들 노릇을 하겠습니까? 강순덕 부부의 노비와 재물을 지금 혹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강희맹이 또한 상속받을 것이 없다 하여 후사가 된 것을 그만두겠습니까? 만약 어떤 자의 말과 같이 지금 남의 후사가 된 자가 모두 이익을 탐내어 어버이를 꺼리고 친상(親喪)을 낮추어 입는다면 슬프게도 비루한 일입니다.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강순덕의 처가 이미 강희맹을 아들로 삼았으니, 그 노비는 반드시 강희맹에게 전해 주고자 할 것이지, 어찌 형제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가?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에는 강순덕의 처의 노비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마땅히 마음대로 구처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강순덕의 장모가 본래의 재주(財主)이니, 주고 빼앗을 권한이 그 손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남편이 생전에 작성한 문서는 지극히 공정한 것인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부인이 혹 사사로운 정으로 이를 다시 바꾸는 폐단은 염려할 바가 있다.’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어미가 하는 일이 비록 혹 고르지 않더라도 감히 입을 열어 다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천하에 나쁜 부모는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식이 그 어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단지 아비의 문서만을 채택하고 어미의 시비(是非)를 다투는 아들이 계속해서 세상에 나올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이숙번의 노비는 옛 문서에 그대로 따르고 정씨의 노비는 그 마음대로 구처하기를 허락하라.’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정씨가 만약 이에 따르지 않고 이숙번의 노비까지를 화회(和會)해서 다시 나눈다면 그 아들 된 자가 어미의 잘못을 지적하여 관청에 고발할 수 있으며, 관청에서는 또한 이것을 청리(聽理)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수양자(收養子)761) 나 시양자(侍養子)762) 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은 고쳐 줄 수 있게 하는 법식이 《육전(六典)》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모의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은 처음부터 언급(言及)하지 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 정씨의 청원에 따르면 인륜(人倫)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좌헌납(左獻納) 송인창(宋仁昌)·우헌납(右獻納) 조원희(趙元禧)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은 이미 아내 정씨와 함께 의논하여 노비와 전지를 자식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문권을 작성하였습니다. 지금 이숙번이 이미 죽었으니, 정씨가 함부로 고칠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가령 이숙번이 살아 있어도 정씨의 뜻과 같을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순덕의 처가 아들이 없어서 장차 강희맹을 후사로 삼아 집에 데려다 길렀고 이숙번도 이것을 눈으로 보았으며, 죽을 때까지 감히 이의가 없었습니다. 정씨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함께 의논하여 문서를 고치지 않다가 오늘에 이르러 문득 다른 마음이 생겨서 강희맹을 보고는 자기에게 아무 관계가 없다 하고, 죽은 남편이 이미 작성한 문서를 고치고자 하니, 부인으로서 남편을 따르는 의리가 어떠하겠습니까? 후사를 세우는 법으로 말한다면, 강희맹은 이미 강순덕의 처를 어미로 삼았으니, 이숙번은 그의 외조부이며, 정씨는 외조모입니다. 어찌 자기에게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국가가 법을 세운 뜻이 특히 후사가 없는 것을 동정하여 〈후사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한 것뿐인데, 어찌 노비의 상속이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렸겠는가?’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미 후사를 세우는 법을 베풀어서 모든 집안 일에 있어서 모두 자기 아들과 같이 하는데, 어찌 아들이 되었으면서 부모의 노비를 물려받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강순덕 부부의 장획(臧獲)763) 은 강희맹이 참으로 당연히 물려받는 것입니다. 만약 정씨의 소원을 따르면, 신 등은 간악한 무리가 이것을 빙자하여 그 아비가 죽은 후에 어미를 꾀어 남편이 작성한 문서를 어지럽게 변경하게 하고, 심지어는 동기(同氣)를 서로 죽이며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습속(習俗)을 어지럽히는 자가 계속해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또 남의 후사 된 자가 하나뿐이 아닌데, 간혹 정씨와 같은 자가 있어서 이를 본받고 모방하여 딸의 노비를 모두 빼앗으면 그 분운(紛紜)함을 수습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이숙번이 이미 작성한 문서에 따라서 부인이 남편을 따르는 의리를 나타내고, 국가의 후사하는 법을 무겁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씨가 또 상언하기를,
"육조(六曹)와 대성(臺省)에서 의논하여서 계달한 후 지금까지 구처함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부모가 자손에게 노비·전지·가재를 마음대로 주고 빼앗으면 자손은 한결같이 부모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고금의 상사(常事)입니다. 강순덕이 정씨의 사위로서 정씨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분재 문권(分財文券)764) 을 감추어 두고 내어 놓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남이 매우 심합니다. 정씨의 노비와 가재를 모두 정씨의 구처에 따르며, 이숙번의 노비와 농사(農舍)는 정씨가 생전에는 가지고 있다가 죽고 난 뒤에는 이숙번의 문건에 의하여 물려주고, 한천(韓蕆)의 노비와 가재는 정씨의 정원(情願)에 의하여 구처하며, 또 강순덕의 불순의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추핵(推劾)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51면
- 【분류】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윤리-강상(綱常)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註 755]수양(收養) : 거두어서 기르는 것.
- [註 756]
을미년 : 1415 태종 15년.- [註 757]
경신년 : 1440 세종 22년.- [註 758]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759]
월(越)나라 보듯이 하다 : 약진시월(若秦視越):진(秦:춘추 시대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나라)이 월(越:춘추 시대 절강성(浙江省)에 있던 나라)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관심이 없이 본다는 뜻으로, 아무 이해 관계가 없이 무심하게 보는 것을 말함.- [註 760]
재주(財主) : 재산의 임자.- [註 761]
수양자(收養子) : 양사자(養嗣子)를 할 목적으로 나이 세 살 전에 거두어다 기르는 아이를 말함.- [註 762]
시양자(侍養子) : 양사자를 할 목적이 아니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을 가리지 않고 기르는 아이. 대개 권귀(權貴)의 자제를 맡아서 기르던 경우를 말함.- [註 763]
장획(臧獲) : 노비.- [註 764]
분재 문권(分財文券) : 재산(財産)을 자신이나 가족에게 나누어 상속(相續)하기 위하여 부모가 만들어 놓은 문안(文案)."臣夫妻, 將奴婢、田地、家舍、財産, 同署名立券, 分與長女壻前縣監姜順德, 夫及女子俱死, 女欲改前文案, 令順德持來, 順德不從, 有乖母子之義。 且姪子姜希孟, 稱收養立後, 又將婢奴任意, 分與諸姪子, 至於女之子孫, 則不給一口, 竝非家翁願意。" 令六曹、臺省、集賢殿議之。 工曹判書李思哲議曰: "妻之於夫, 子之於父母, 一也。 夫死之後, 妻不得改, 夫所爲之書, 猶子之不得改, 父母之書, 今鄭氏當叔蕃生存之時, 旣共置書, 分田民、家財於諸子, 叔蕃死而欲改之, 苟聽其所爲, 則非特以妻改夫之所爲, 有悖於倫理。 姦黠之子, 利父之死, 誘弄其母, 侵奪同産, 傷風敗俗, 將不勝其紛紜矣。 然悉不聽之, 則恐有逆子恃法慢母, 以至於不順者, 此實關於世敎, 不可一向輕處。 乞叔蕃田民, 從叔蕃之書, 鄭氏田民, 從鄭氏之願, 庶幾兩便。" 戶曹判書尹炯、參判李師純等議曰: "大抵父母之於子孫, 奴婢、田地、家舍、財物, 任意與奪, 古今通典。 子孫之於父母, 安有不順之理? 姜順德, 鄭氏之女壻, 姜希孟, 順德之繼後, 則俱爲鄭氏子孫, 旣爲鄭氏子孫, 則凡所與奪, 專在鄭氏, 若使鄭氏, 將自家奴婢、田地、財物, 不得擅便, 則綱常倒置, 情理不合。 且古人云: ‘天下無不是底父母。’ 一從鄭氏情願, 益篤綱常, 以敦風化。" 禮曹判書李承孫、參判鄭陟、參議金有溫等議曰: "李叔蕃與妻鄭氏, 去乙未年, 兩家奴婢, 分給子女, 叔蕃於庚申年身死, 而長女姜順德妻無後, 順德與妻李氏同議, 去辛酉年, 以姪子姜希孟立後爲子, 奴婢、田地、家財、家舍, 竝令傳持, 李氏身死後, 希孟服喪終制, 至今奉祀。 今鄭氏之告官還奪, 專以長女無後身死, 而夫妻奴婢與田莊, 傳於孫外, 不傳於子孫也, 其謀計譎矣。 然臣等竊謂, 父母之於子, 奴婢、財物, 任意與奪, 古今皆然, 母雖不給一口、一物, 爲子者, 安有怨訴之理? 若以鄭氏之告狀爲非, 而順德之仍執爲是, 則是母子傷恩, 而有乖於綱常矣。 其叔蕃生前, 曾給奴婢、田莊, 及韓蕆所給奴婢、田莊, 則追奪未便, 仍給順德, 傳之希孟, 其鄭氏自己奴婢, 許令鄭氏區處, 何如?" 吏曹判書閔伸、參議卞孝敬等議曰: "李叔蕃與鄭氏同議, 女子姜順德妻成給奴婢文券內, 無勿與孫外之辭, 而夫死後, 乃欲還奪, 未可也。 且女子生時, 立希孟爲後, 幷叔蕃田民還奪, 尤爲不可。 請鄭氏奴婢、田地、家産, 則從情願區處, 李氏奴婢、田地、家産, 則仍給希孟。" 兼知事李蓄議曰: "鄭氏當叔蕃生時, 同議立券, 且順德亦於李氏生時, 同議立希孟爲後。 今鄭氏以女子死且無後, 謀欲還奪, 不可更改。" 刑曹判書趙克寬、參議李仁孫等議曰: "大抵奴婢與奪, 一聽財主區處。 今順德, 以鄭氏女壻, 欲專執亡妻奴婢、財産, 不從妻母之令, 雖不干自己之書, 亦皆隱藏不出, 甚爲悖理。 叔蕃奴婢、財物, 則已成文券而死, 非鄭氏所得擅改, 死後當傳希孟, 若鄭氏奴婢、財産, 則不得擅便, 不合情理, 令任意區處。 且順德, 以女子夫徒欲專得, 不順妻母之令, 以啓爭端, 甚爲不當。 希孟旣立爲後, 則鄭氏外孫也, 而未嘗進見, 亦爲不順。 事關綱常, 宜令憲府推明科罪。" 兵曹判書鄭麟趾議曰: "姜順德妻母鄭氏, 狀告奴婢、田地區處, 合於事理, 許從所願。" 大司憲成奉祖、掌令李甫欽ㆍ朴大孫、持平金閏福等議曰: "鄭氏亦以姜順德之妻, 無後已死, 欲將夫妻同給文券而改之, 雖若不順, 然鄭氏貧不自存, 其子楨及女金眩之妻, 俱不聊生, 不能救母之貧窮。 假使順德之妻生存, 則其不從母之情乎? 妻雖死, 其田民仍執驅使, 産業旣足, 則順德之於鄭氏, 母子之義, 猶未絶也, 若見鄭氏窮困, 則固不待號訴, 義當扶恤。 今略無扶恤之意, 若秦視越, 以至號訴而不與, 是與其妻母爭奪也。 夫爲妻綱, 雖天下之大防, 子之於母, 義果若是乎? 風俗薄惡, 莫此爲甚, 假使叔蕃坐視今日之勢, 則其忍愛旣亡之女子, 而不恤生存之妻子乎? 且鄭氏, 非欲盡奪順德之田民、財物也, 仍給者固多, 欲還者甚少, 非他徒以愛憎, 擅改夫命之比也。 臣等竊謂, 順德田民, 一從鄭氏區處, 以存母子之大義, 則於夫婦之綱, 亦無所虧。" 集賢殿副提學辛碩祖、應敎梁誠之、校理李芮、副校理柳誠源等議曰: "父母旣相同議, 分奴婢、土田, 以給子壻, 後自更改者, 世多有之, 而不以爲非者, 此自一家事, 聽財主區處, 常例耳。 以此論之, 則鄭氏之事, 處之不難。 或曰: ‘旣與夫同作文券, 夫死後妻自擅改, 不可也。’ 然作文券之時, 夫獨爲之, 妻不得與去, 則猶有可議。 旣已夫婦同作財主而分與, 則其後更改, 何不可之有? 父母同一體也, 同是財主也, 豈於父母, 輕重之哉? 聽鄭氏區處。" 副提學崔恒、直提學朴彭年、直殿金禮蒙、應敎李塏、校理李承召、副校理李克堪、副修撰韓繼禧、崔善復等議曰: "夫旣與其妻, 同分家産, 以給子孫, 則其妻不可於夫死後, 有所變更。 且父母之命, 雖或悖理, 子孫不可不曲爲順從。 今鄭氏於叔蕃死後, 自以私意, 欲改已成文券, 是不從之婦也。 鄭氏欲取文券, 順德拒而不與, 是不順之壻也。 順德之罪, 在所當治, 而鄭氏亦不得無罪矣。 或謂順德不從姑命, 固違母子之道, 然鄭氏欲改文券, 亦失夫婦之綱, 三綱一也, 豈可重此而輕彼乎? 官府不覺則已, 覺則不可不治。 若希孟旣爲順德之子, 以鄭氏爲外祖母, 則其不可不以外孫論, 明矣。 鄭氏歸咎希孟之辭意, 其出於私意耳。 立後, 大法也, 豈可因而遂開後日廢法之端乎? 宜禁鄭氏, 使不得擅更夫命, 罪順德, 以懲不順。" 直提學申叔舟議曰: "李叔蕃生時所置文券, 叔蕃旣死矣, 固非鄭氏所得改也, 然鄭氏身存, 而自家田民, 亦不得自便, 是不合於情理。 叔蕃田民, 從叔蕃舊券, 鄭氏自家有傳繼田民, 許鄭氏任便, 於人情、大義, 庶幾兩便。" 副修撰徐岡議曰: "夫妻共成文券, 夫死後, 許其妻使得更改, 則無識婦人, 於其夫生時, 爲其所制, 不得自異。 及其死後, 任情變更, 其所分給, 率以愛憎, 多寡輕重, 大相懸絶。 爲其子者, 雖或負屈, 義不當自直, 以此官府無從覺察。 夫爲子壻者, 旣不得訟其親, 又使母姑得改其文券, 則是大啓無知婦人, 率意變更之端, 其弊不少。 今鄭氏旣與叔蕃共成文券, 以給順德, 叔蕃死後, 又欲奪而改之, 是其私意也。 順德不納文券, 雖或不順, 然壻之於姑, 亦不當直以母子例論也。 乞禁鄭氏, 不得改叔蕃書。" 左司諫大夫任孝仁、知司諫院事金吉通等議曰:"夫婦一體, 亡妻之物, 夫可主之, 亡夫之物, 妻亦可主。 況鄭氏旣與家翁李叔蕃, 同議作文, 而自己奴婢, 亦幷載焉, 豈可專以叔蕃之書目之, 而以鄭氏外之乎? 姜順德之於鄭氏, 實有子道焉。 今鄭氏責還元文, 而順德違命不還, 不順之至也。 若曰: ‘妻不可改夫之書。’ 使鄭氏更不得與奪, 則世有夫亡之後, 一子獨富, 餘子貧寒, 其母雖欲改分奴婢, 子必援引順德之例, 拒而不從矣, 其於子母之道, 何如? 將恐由此, 父沒則子便有輕母之心, 非細故也。 或曰: ‘父子、夫婦, 同爲三綱, 而婦人之道, 適人從夫, 則妻而改夫之書, 可乎?’ 臣等謂, 夫婦有離合, 父子無絶道, 豈無輕重之分? 況今鄭氏, 亦非以夫書, 斥爲不義, 歸咎而改之也。 或又云: ‘如是, 則誰肯爲人後哉? 立後之法, 因此自毁。’ 臣等謂, 立後之法, 國家哀其無嗣者而已。 其以兄弟族親之子, 願立爲後者, 自悶其無嗣而已。 其以自己之子, 許立爲後者, 亦憐其兄弟族親之無嗣而已, 豈爲奴婢、田莊之無其傳哉? 爲之後者, 亦豈慕此, 而稱子乎? 順德夫妻奴婢、財物, 今或被奪於他人, 則姜希孟, 其亦以爲無所傳得, 而罷不爲後乎? 若如或者之說, 今之爲人後者, 皆是貪利忘親, 而降服親喪者矣, 嗚呼, 鄙哉! 安有是理? 或又云: ‘順德之妻, 旣以希孟爲子, 其奴婢必欲傳於希孟, 豈欲傳於同産乎? 有違人情。’ 臣等謂, 順德之妻奴婢, 若出於他人, 則宜爲所自區處, 此則順德妻母, 元是財主, 而與奪在手乎? 或又云: ‘夫之生前所成之書, 至爲公正, 夫亡之後, 婦人或以私情, 更改之, 弊有可慮也。’ 臣等謂, 母之所爲, 雖或不均, 不敢開口爭者, 誠以天下無不是底父母, 故子不得非其母也。 今只用父書, 不用母書之法立, 則父母之間, 相去懸絶, 與母爭差之子, 接跡於世, 可不懼哉? 或又云: ‘叔蕃奴婢, 仍依舊書, 鄭氏奴婢, 許令任意區處。’ 臣等謂, 鄭氏若不依從, 而叔蕃奴婢和會改分, 則爲其子者, 其可指母爲非, 而告於官乎, 官亦聽理乎? 是故收養、侍養奴婢分給之法, 改許與之式, 備在《六典》, 而父母奴婢分給之法, 初不及之意, 可見矣。 一從鄭氏情願, 人倫幸甚。"
"李叔蕃旣與妻鄭氏同議, 奴婢、田地, 均給子息, 以成文券。 今叔蕃已歿, 則鄭氏不得而擅改也。 議者曰: ‘使叔蕃在, 亦必如鄭氏之意。’ 臣等以爲不然, 姜順德之妻無子, 將以希孟爲後, 養之於家, 叔蕃於是目見, 而至于身歿, 不敢有異議。 鄭氏不於家翁生時, 同議改文, 而乃至今日, 輒生他意, 視希孟爲無與於己, 欲改亡夫已成之書, 其於婦人從夫之義, 何如? 以立後之法言之, 希孟旣以順德之妻爲母, 則叔蕃, 外祖也, 鄭氏, 外祖母也, 烏可以無與於己而視之乎? 議者曰: ‘國家立法之意, 特哀其無嗣, 而使之奉祀耳, 豈計奴婢之傳否乎?’ 臣等以謂, 旣設立後之法, 而一應家事, 皆如己子, 安有爲子, 而不傳父母之奴婢哉? 以此觀之, 則順德夫妻之臧獲, 希孟固當傳之矣。 若從鄭氏之願, 則臣等恐姦惡之徒, 以此籍口, 乘其父歿之後, 敎誘其母, 使其變亂, 家翁之成書, 甚至同氣相戕, 敗常亂俗者, 接踵而起矣。 又恐立後者非一, 而間有如鄭氏者, 亦以此効倣, 盡奪女子之奴婢, 將不勝其紛紜矣。 乞依叔蕃已成之書, 以示婦人從夫之義, 以重國家立後之法。" 至是, 鄭氏又上言: "六曹、臺省擬議啓達後, 至今未蒙區處。" 下議政府議之, 議政府啓曰: "父母之於子孫, 奴婢、田地、家財, 任意與奪, 子孫則一從父母之命, 古今常事。 順德以鄭氏之壻, 而不從鄭氏之令, 分財文券, 藏匿不現, 悖理莫甚。 鄭氏奴婢、家財, 一從鄭氏區處, 叔蕃奴婢、農舍, 鄭氏生前執持, 身後, 依叔蕃文券傳給。 其韓蕆奴婢、家財, 依鄭氏情願區處。 且順德不順之罪, 干係綱常, 不可不懲, 請令司憲府推劾。"
從之。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51면
- 【분류】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윤리-강상(綱常)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註 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