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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1일(병진) 2번째기사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 진군하여 싸워 이긴 뒤 승첩을 상주하게 하다
다음날【6일.】 진군하여 평양(平壤)에 접근하였다. 제독이 대군을 서둘러 행군시키자 도원수(都元帥)도 제진(諸陣)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랐다.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니 적은 성에 올라가 굳게 지키면서 모란봉(牧丹峯)을 거점으로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댔다. 제독이 진정병(眞定兵)으로 하여금 올라다보며 공격하다가 못 이겨 퇴각하는 것처럼 하게 하자 적이 성을 넘어 쫓아왔는데, 명나라 군사가 다시 반격하니 적이 패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적이 유격 오유충(吳惟忠)의 진영을 침범하였는데, 오유충은 군사를 단속하여 조용히 있다가 일제히 화전(火箭)을 발사하니, 불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적이 도망하자 추격하여 10여 급(級)을 베었다.
7일 사시(巳時)에 3영(營)이 모두 군사를 내어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하니, 적이 성문을 열고 맞아 싸웠으나 명나라 군사가 30여 급을 베자 적은 도망하여 문안으로 들어갔다.
8일 제독이 3영에 명령을 전하여 일시에 군사를 전진시키고 성을 둘러 진을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는 남쪽 성에 육박하고 절강(浙江)의 군사는 서쪽 성을 공격하였는데, 제독은 말을 달려 오가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온갖 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대낮인데도 캄캄하였다. 이때 동풍이 갑자기 서풍으로 변하면서 불길이 번져 밀덕(密德) 토굴(土窟)을 태웠다. 적이 성가퀴 사이로 좇아 나와 포석(炮石)을 사용하여 항거하였는데,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한 사람을 손수 베어 돌려 보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낙상지(駱尙志)가 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오르고 절강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올라가 적의 기를 뽑아 버리고 명나라 기를 세웠다. 적이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후퇴하여 토굴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올라갔다.
제독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에 이여백(李如栢)함구문(含毬門)을, 양원(楊元)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승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1천 2백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수도 절반이 넘었는데, 이와 함께 왜적에게 투항했던 절강인(浙江人) 장대선(張大膳)을 사로잡고, 포로가 되었던 우리 나라 사람 남녀 1천 2백여 인을 구출하였으며, 노획한 마필(馬匹)과 기계(器械)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행장(行長)이 도망해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가 의거하였는데, 여러 왜추가 연달아 여러 굴에 의거하여 모두 비오듯 탄환을 발사하니 명나라 군사가 공격하다가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제독이 진영에 머물면서 장대선을 시켜 행장에게 회유하기를,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 없어 너희의 살길을 열어주니, 속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와서 약속을 들어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할 것이니, 뒷길을 차단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제독이 궁지에 빠진 적이 결사 항전할까 염려하였고, 휘하의 측근에서도 설득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에 행장의 청을 허락하고는 우리 군사에게 영을 전하여 일로의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이 언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중화(中和)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적은 먼저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보다 며칠 전에 유성룡이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김경로(金敬老)에게 비밀히 통보하여 적의 퇴로를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때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 유영경(柳永慶)해주(海州)에서 군사로 자신을 호위시키면서 또 김경로를 부르니, 김경로는 적과 더불어 교전하기를 꺼려 하여 바로 유영경에게 갔다. 행장 등이 밤새도록 도망쳐 군사가 피곤하여 부오(部伍)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시언은 군사가 얼마 안 되어 감히 접전하지는 못하고 단지 굶주리고 병든 낙오병 60급만을 베었으며, 황주 판관(黃州判官) 정엽(鄭燁)은 9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평양에 주둔한 지 8일 만에 체찰사 유성룡,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으로 하여금 먼저 가서 서둘러 꼴과 양식을 마련하고 부교(浮橋)를 조성케 하는 한편 장세작으로 하여금 선봉(先鋒)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였는데, 청석곡(靑石谷)에 이르러 적 수백 명을 만나 공격하여 30급을 베었다. 개성(開城)에 있던 적도 경성으로 돌아갔다.
유성룡김경로를 베도록 청하니, 상이 선전관을 보내어 장차 형을 집행하려 하였는데,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말리므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명하였다.
적의 대장 중에는 행장청정(淸正)이 인물이었는데, 이때 청정은 북쪽에 있었다. 따라서 수가(秀嘉)는 직위가 높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어려 제대로 일을 주관하지 못하였으니, 만일 행장조신(調信)을 제거하고 진격하여 경성에 들이닥쳤다면 수가의 형세가 고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독이 이미 기회를 잃은 데다가 김경로마저 절도(節度)를 어기고 말았으므로 유성룡이 매양 이것으로 유영경을 허물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체직시키고 다시 이빈(李蘋)으로 대신하였다. 평양 전투에서 이일이 제독의 밀령(密令)에 따라 복병을 철수하여 길을 열어주자 용장(勇將) 김응서(金應瑞)박명현(朴名賢) 등은 팔을 걷어붙이며 분격해 하였다. 그런데 적이 도망가고 나자 명나라 장수가 도리어 퇴로를 차단하지 못하였다고 우리 군사를 공공연히 꾸짖었다. 상이 윤두수(尹斗壽)평양에 보내 조사 신문하여 장차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그를 놓아주었으니, 이는 그의 죄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장수가 ‘이일은 장수의 재목이 못 되니 이빈으로 대신하기를 청한다.’고 말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이빈을 순변사로 삼고 군사 3천 명을 뽑아 제독을 따라가게 하였다. 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우의정 유홍(兪泓)에게 명하여 따르도록 하고 역(驛)을 통하여 승첩을 상주하되 독부(督府)와 함께 상주하게 하였다. 주문(奏文)에,
“황제의 위엄에 힘입어 평양을 수복한 승첩을 급히 보고드리는 일입니다. 만력(萬曆) 751) 21년752) 1월 9일에 배신(陪臣)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馳啓)하기를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정문(呈文)과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신보(申報)를 받았다. 이에 의하면 「이달 6일에 흠차 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 어왜 군무 총병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總兵官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이 세력이 막강한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 밖에 도달하여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포위하였다.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牧丹峯)에 올라가 청·백기(靑白旗)을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총포를 쏘았다. 또 왜적 1만여 명이 성 위에 벌여 서서 앞에 녹각책자(鹿角柵子)를 세우고는 방패로 가리고 칼을 휘둘렀는데,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또 왜적 4, 5천 명이 대장기를 앞세워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성안을 순시하여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본성 안팎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형세상 갑자기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총병은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한밤중에 왜적 3천여 명이 함매(銜枚)753) 하고 몰래 나와 도독(都督)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의 진영을 습격하였다가 본관들이 거느린 군사들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7일 밤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진영을 습격했다가 또 본관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8일 동틀 무렵에 총병이 향을 피우고 날을 점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3영의 장관들과 더불어 각 해당 장령(將領) 및 관군(官軍)을 나누어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함구문(含毬門)·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친 다음, 총병이 친병(親兵) 2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지휘하니, 장수와 사졸들은 사기가 올라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진시(辰時)에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며, 각종 화기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온 들판이 캄캄하였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떨어지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거의 다 태웠다. 성 위에서 왜적이 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를 사용하여 죽기로써 항거하며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일제히 내미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빽빽하였다. 총병이 겁내는 자 한 명을 손수 베어서 호령하며 진중에 보이니, 모든 군사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접근하였다. 등에는 마패(麻牌)를 지고 손에는 창을 가지고서 일제히 돌진하며 활과 대포를 쏘기도 하고 성을 지키는 적을 올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가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입하였다. 명나라 군사의 1진은 본국의 관군과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밀덕(密德)의 동쪽 성에 올라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쳐죽이니 적들이 무너졌다. 명나라 군사가 당시 전투에서 참획한 수급(首級)이 1천 2백 85과(顆)였는데, 조사해 보니 그 속에는 적추(賊酋) 평수충(平秀忠)·평진신(平鎭信)·종일(宗逸) 등 25인의 수급도 들어 있었다. 왜적 2명과 통사(通事) 장대선(張大膳)을 사로잡고, 말 2천 9백 85필과 왜적의 기물 4백 52건을 노획하였으며, 본국에서 사로잡혀간 남녀 1천 15명을 구출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적이 숨어 들었다가 타 죽은 자가 약 1만여 명이나 되어 그 냄새가 10여 리에 풍겼다. 잔적이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총병이 시초(柴草)를 가져오게 해서 사면에 쌓아놓고 화전(火箭)을 쏘니, 일시에 타버려 모두 재가 되었다. 또 남은 적이 성을 뛰어넘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에 있던 여러 왜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견고하여 공략할 수 없었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밥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적은 필시 밤에 도망할 것이다.』 하고 즉시 부총병(副總兵)·참장(參將) 등의 관원을 보냈다. 이영(李寧)·조승훈(祖承訓)·갈봉하(葛逢夏)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하였고, 총병은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 등 세 부장(副將)과 함께 큰 길로 추격해 갔는데,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하다가 이영 등의 매복에 걸려 요격을 당하였다. 이때 수급 3백 59과를 참획하고, 왜적 3명을 생포하였다. 남은 적들은 병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하였으니, 절령(岊嶺) 754) 이서(以西)가 모두 평정되었다.」 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평양부(平壤府)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으로서 성지(城池)가 험고한데 흉악한 적이 저돌적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는 소굴로 만들었다. 즉일로 천병(天兵)이 진격하여 북소리 한 번에 소탕하니, 흉악한 잔적은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다. 본국이 재조(再造)되는 기미가 실로 여기에 있었다. 신은 이원익 등과 각처의 마초 및 군량을 독려 운반하여 본성에 들여보내어 독부에서 쓰도록 하였다. 승첩의 사유를 이렇게 갖추 아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치계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건대, 소방(小邦)은 군병이 약하여 날이 갈수록 국토가 깎이고 평양은 성이 험고하여 쉽게 수복할 수 없었으므로 밤낮 근심하며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성명(聖明)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왕조의 옛일을 곡진히 생각하시어 신의 잘못을 죄주지 않고 남북의 정병(精兵)을 동원하여 도탄에 빠진 소방을 구제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군량이 부족할까 염려하시어 먼저 은냥(銀兩)을 하사하시고, 군량과 마초가 모자랄까 걱정하시어 계속해서 군수품을 수송해 주셨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구는 등 신의 허물로 말미암아 이토록까지 천조(天朝)에 근심을 끼쳐드렸으니 신은 감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사(王師)가 정벌함에 천리(天吏) 앞에는 대적할 자가 없는 법입니다. 금년 정월 8일 평양에 진공하여 하루아침에 성을 깨뜨렸는데,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적들도 혼이 빠져 도망갔으니, 그 군위(軍威)의 성대함과 전승(戰勝)의 신속함은 옛 역사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과 대소 배신(陪臣)들은 처음 첩보(捷報)를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聖天子)의 성덕(盛德)이 널리 퍼지고 신무(神武)가 멀리 뻗친 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잘 돕고, 병부(兵部)에서 전략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은 기무(機務)에 전심하여 방략을 지시함에 있어 계책이 부합하여 특별한 공을 이루었습니다. 총병(總兵) 이여송(李如松)은 군사들에 대한 맹세가 강개하고 그 의기(義氣)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군사들이 지나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전장(戰場)에 임해선 독전하여 여러 장교에 솔선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말이 총탄에 맞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더욱 기운을 가다듬었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던 날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封)했으며, 부상자를 어루만지고 전사자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는 한편,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환과고독(鱞寡孤獨)들을 위문했으니, 비록 배도(裵度)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755)
부장(副將)·참장(參將)·유격(遊擊)·도사(都司) 이하 각 장령(將領)들도 용감하기가 마치 범이 포효하는 듯 신(神)이 도와주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큰 돌이 쏟아져 내려오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성 위로 올가간 자도 있고, 가슴에 탄환을 맞고서도 계속 왜적을 죽인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장졸(將卒)들은 팔짱만 끼고 놀라 움츠린 채 감히 그 사이에 돕지도 못하고 그저 철기(鐵騎)의 발굽에 들판 가득 먼지가 날리고 화전(火箭)에 맞아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포로 방책을 쏘아 맞히니 깃털이 날리듯 산산조각이 났고 창으로 적을 찌르는데 민첩하기가 마치 나는 송골매와 같았습니다. 비린내나는 연기는 공중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으며, 천지는 갈라지고 산과 물이 뒤바뀌었습니다. 조총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돌멩이를 날리는 적들은 정말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아서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정예로운 군사와 기계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도의 힘을 다 기울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도모하지도 못했었는데, 승전하여 수복한 뒤에 그들의 수비 시설에 대해 들어보니 소방의 병력으로는 결코 쳐서 함락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 번 떨쳐지자 여러 적들이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이미 파죽지세가 되었으므로 황해도 동쪽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으니, 구도(舊都)를 머지않아 수복하여 종묘 사직을 차례로 청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영혼이 지하에서 감격할 것과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가슴에 교차하여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 주신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정말 통쾌합니다. 저 조무라기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게딱지만한 섬나라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의 위력을 모른 채 여러 번 미친 소리를 지껄였으므로 신은 가슴이 아팠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추악한 무리들이 본색을 드러내다가 천벌을 자초하여 온 섬나라가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소방의 수치만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역대 제왕들의 공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소원이 있을 때 곡진하게 이루어주는 것이 천지의 큰 덕이고 호소할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자(臣子)된 사람의 지극한 정이라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 흉악한 적이 소탕된 것은 오로지 왕사(王師)가 출동했기 때문으로서 소방은 털끝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천장(天將)이 회군(回軍)하여 소방이 외롭고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재차 침략할 흉계를 꾸며낼텐데 그때에 가서는 재난이 더욱 심해져 막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성상께서 동방을 돌보는 걱정을 하시게 하고 미신(微臣)은 왜적 방어를 잘못한 죄를 거듭 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비옵건대 성상께서는 해동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천조(天朝)의 은혜로운 인정을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 제독부(提督府)에 명을 내리셔서 강서(江西)절강(浙江)의 포수 5천 명을 적당히 뽑은 뒤 한두 장수에게 소속시켜 연해의 요해처인 부산 등지에 몇 달 동안 나누어 주둔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방의 군민(軍民)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게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은 길이 하늘의 위엄에 의지하여 마무리 수습을 해서 후일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미 국토를 수복하고서도 또 마무리를 잘해주시도록 바라기까지 하니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소방을 구휼하심이 이미 내국보다 더함이 있는데, 소방이 천조에 하소연하는 일을 어찌 감히 외국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스럽습니다.
신은 인력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는 한편, 병사와 말을 조달하여 왕사와 협동해서 경성을 탈환할 계획인데, 이와 함께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적에도 대비할 것입니다. 신은 수복이 끝나는 대로 경성에 돌아가서 관군(官軍)을 위로한 다음 곧이어 전후로 은혜받은 사실을 갖춰 별도로 사은을 행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한 승첩의 사유를 속히 보고드려야 하겠기에 삼가 갖추 적어서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제독(提督)이 거느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공을 다투었는데, 제독은 북군을 편들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게 주문(奏文)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호민(李好閔)에게 주문을 짓게 하니 이호민이 야간에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양편 군사의 공로에 대하여 골고루 빠짐없이 기술하였으므로 남·북군의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장 A면
【영인본】 25책 635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王室)






[註 755] 배도(裵度)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평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을 비유함. 배도는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당시 회서지방의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자, 조정에서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인 이소(李愬)가 오원제를 사로잡아 난이 평정되었다. 《신당서(新唐書)》 배도전(裵度傳). 조빈은 오대(五代) 말기 사람으로 후주(後周)에 벼슬하다가 조송(趙宋)에 귀부(歸附)하였는데, 960년(건륭 1) 강남을 토벌하여 이듬해 11월 이욱(李煜)의 오(吳)를 항복받았다. 《송사(宋史)》 조빈전(曹彬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