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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1월 4일 陽曆 1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순명비의 묘지문

묘시(卯時)에 천전(遷奠)을 행하고 재궁(梓宮)을 현궁(玄宮)에 내렸다.

묘지문(墓誌文)에,

"순명비(純明妃)의 성(姓)은 민씨(閔氏)이고 본(本)은 여흥(驪興)이다. 시조는 민칭도(閔稱道)라는 이인데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상의 봉어(尙衣奉御)가 되었다. 3대를 내려와서 민영모(閔令謨)라는 이가 있었는데 벼슬이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상주국(上柱國) 태사(太師)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4대에 내려와서 민종유(閔宗儒)라는 이는 벼슬이 대광 찬성사(大匡贊成事)였으며 시호는 충순공(忠順公)이다. 문경공과 충순공은 고려의 역사에 전해지고 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민심언(閔審言)이라는 이는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였고 민충원(閔沖源)이라는 이는 은일(隱逸)로서 집의(執義)로 있었다. 3대를 내려와서 민제인(閔齊仁)이라는 이는 좌찬성(左贊成)이었으며 또 그로부터 4대에 내려와서 민광훈(閔光勳)이라는 이는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또 민유중(閔維重)이라는 이는 우리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낳아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에 책봉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인데 나라의 기둥이고 사림(士林)의 모범이었으므로 후에 효종(孝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또한 민진원(閔鎭遠)이라는 이는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한결같은 충성과 밝은 의리로 나라에 공로를 세웠으므로 영조(英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민형수(閔亨洙)라는 이는 관찰사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비의 5대조이다. 고조부(高祖父)인 민백상(閔百祥)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시호가 정헌공(正獻公)인데 세상에서 신사년(1761)의 세 정승이라고 칭하는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증조부(曾祖父)인 민홍섭(閔弘燮)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부(祖父)인 민치삼(閔致三)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인 민태호(閔台鎬)는 행 좌찬성(行左贊成), 대제학(大提學)이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문공(忠文公)인데 사림의 영수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전모(前母)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윤씨(尹氏)인데 부사(府使) 윤직의(尹稷儀)의 딸이고, 어머니는 정경 부인 송씨(宋氏)인데 목사(牧使)로 내부 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된 송재화(宋在華)의 딸이며, 계모(繼母)인 정경 부인 남씨(南氏)는 의관(議官) 남명희(南命熙)의 딸이다.

송씨가 임신년(1872) 10월 20일 신미일(辛未日) 술시(戌時)에 경사(京師)양덕방(陽德坊) 계동(桂洞)에 있는 집에서 비를 낳았는데 잠자리에 든 그날 저녁에 연기 같기도 하면서 안개는 아닌 오색구름이 집 주위를 휘황히 둘러싸서 수십 보 거리에서는 사람이 영롱한 채색 옷을 입은 것처럼 보여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이웃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비는 천성이 유순하고 화기로웠으며 덕스러운 용모를 타고났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법도에 맞았으므로 집에 드나드는 일반 부녀들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누구나 다 범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비는 총명하고 슬기로워 어린시절부터 《소학(小學)》이나 《여칙(女則)》과 같은 여러 가지 책들을 읽었는데 모사(姆師)가 그 대의를 해설하자마자 어느새 깊은 뜻을 파악하곤 하였다.

또한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에 말이 적었고 덤비는 일이 없었다. 조무래기들이 앞에서 무리지어 놀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떠들어대더라도 말투와 낯빛에 싫어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어 스스로 물러가게 하였다.

언젠가는 쌀 한 말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우리 집 식구가 이 낟알 수만큼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도량은 벌써 그만큼이나 컸다.

임오년(1882)에 빈(嬪)으로 뽑혀 별궁(別宮)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할 듯이 슬퍼하였다. 자기 방으로 들어올 수 없는 친척들을 불러다 이별하였는데 헤어지기 슬퍼하는 그의 심정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으니 이것은 어린 나이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2월 19일 을해일(乙亥日)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고 21일에 가례(嘉禮)를 하였으며 정유년(1897)에는 황태자비(皇太子妃)에 책봉되었다.

대궐에 들어와서부터는 세 분의 전하를 한결같이 섬겼으며 문안하는 일과 음식을 보살피는 데 혹시 미흡한 점이 있지 않나 걱정하면서 빈구석이 없도록 알뜰하게 하였다.

짐(朕)은 그가 연약한 체질에 수고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몸에 조금이나마 불편한 증세가 있을 것 같으면 사침(私寢)에서 푹 쉬면서 몸조리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몸단장을 하였고 무더운 여름에 반드시 성복(盛服)을 하였다. 밤이 되면 꼭꼭 곁에 와서 화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즐겁게 하여 주었는데 생각을 앞질러가면서 받들어주기를 마치 두 손과 같이 하였다.

짐으로서는 어린애를 대하듯이 살뜰히 보살피고 사랑해 주었는데 효성은 갈수록 지극하여질 뿐 게을러지는 때가 없었으니, 가풍이 서 있는 가문에서 훈계를 받은 것이 있는 데다 타고난 미덕까지 있었으므로 권면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어려운 일이 많이 있던 때였던 관계로 여러 차례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비는 그때마다 일을 처리하면서 행동을 바르게 하였다. 부정 세력이 맹렬히 퍼지며 날뛰던 때에 궁인(宮人)들이 몽땅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비는 경계하여 말하기를, ‘마음이 바르지 않고 생각이 똑똑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도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거늘 하물며 다급하고 위태하여 조금만 잘못을 저질러도 나라가 어김없이 망하는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갑신년(1884)에 충문공(忠文公)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피살되었을 때 전궁(殿宮)이 파천(播遷)하였는데 비는 예법대로 거애(擧哀)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통탄해하였다. 경인년(1890)에 신정 왕후(神貞王后)가 승하(昇遐)하자 아침과 저녁의 제전(祭奠)에 비는 꼭 곡을 하며 너무도 슬퍼하면서 마치 의지할 데 없어진 사람처럼 황황해하였다.

을미년(1895)에 이르러 흉악한 무리들이 대궐을 침범하였을 때 비는 명성 황후(明成皇后)를 보호하다가 그만 흉악한 무리들에게 앞길이 막혔으며 끝내 천고에 있어본 적이 없는 큰 참변을 당하였다. 비는 또 기막혀 쓰러지고 반나절이 지나간 다음에 시녀에게 전하와 황태자의 안부를 물어보고는 그길로 눈을 감은 채 깨어나지 못하였고 구급약을 갖추어 치료해서 새벽에야 소생하였다.

비는 이로 말미암아 언제나 마치 젖어미를 잃은 젖먹이마냥 정신없이 지냈으며 때로는 한창 음식을 들다가도 한숨을 쉬고는 슬픔에 겨워 목이 메곤 하였고 옷과 앞섶, 베개와 이불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적셨다.

짐이 가엾게 여겨 갈수록 더욱 어루만져 주고 위로의 말로 타일러 주어 만류하면 비는 일부러 기쁨이 어린 낯빛을 짓고 짐더러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라고 권고하기까지 하였지만 항상 슬픈 내심이 얼굴빛에 자연히 어리는 것을 가릴 수는 없었다. 평소에 비를 보살펴 준 명성 황후의 사랑이 비록 그의 골수를 적실만 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비가 갈수록 더욱 그리워한 것은 역시 천성적으로 효성을 다하려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비는 궁중 출입을 엄하게 단속하였으므로 부르지 않으면 친척들이 감히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 항상 옛글을 읽었고 거기에서 교훈으로 될 만한 것들은 그 요점을 구절구절 적어서 궤에다 보관하고 남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필체는 굳세고도 단정한 것으로서 마음을 반영한 것이므로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랫사람을 어진 마음으로 대해주면서 온정을 많이 베풀었고 때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꾸짖는 대신 그저 다시는 그러지 말게만 하였으므로 누구나 감복하여 감히 속이는 일이 없었다.

각성시켜 주는 말 한 마디가 매를 치는 것보다 더 위엄스러웠고 늘 여러 아우들에게 사치를 부리는 버릇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렴한 덕을 지키면서 오늘까지 왔다. 그 미풍을 훌륭히 고수하여 선대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 가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안부를 묻는 것 이외에는 더 다른 말이 한 마디도 없었고 어쩌다 뵙기를 간청하는 이가 있으면 말하기를, ‘나의 친척으로서 이 모양으로 청탁질을 하니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궁인(宮人)이 혹 말하기를, ‘무당이나 점쟁이도 신령스러운 것이 많아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라고 말을 하면 비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화와 복은 원래 분수가 정해져 있다.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해결된다면 세상에 어찌 가난한 사람이나 일찍 죽는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는 일찍이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에 대해 말하면서 이르기를,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이룩한 태평 시대는 물론 쉽사리 이룩하여 낼 수 없겠지만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하던 대로 해나가면 어느 정도 태평한 시대를 이룩할 수 있는데 이것은 힘쓰기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그의 심원한 식견은 규방의 여자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경지였다.

비는 이 해 8월부터 병상에 누웠다. 짐이 직접 가볼 때마다 고통스럽게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반드시 옷매무새를 바로잡곤 하였다. 바야흐로 몸이 위태로워지는데도 오히려 부축하여 일어나 앉았으며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성체(聖體)를 중하게 보존하고 백성과 나라가 태평하였으면 하는 것이 가슴속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비는 9월 28일 술시(戌時)에 경운궁(慶運宮)강태실(康泰室)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 슬프다! 또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초상부터 습렴(襲斂)·교금(絞衾) 등속을 모두 자내(自內)의 예(例)로 마련했는데 비가 평소에 절약을 숭상한 것을 생각하여 낭비를 줄인 것이다.

옛날의 시법(諡法)을 상고하여 보면 바르고 정한 것은 ‘순(純)’이라고 하고 사방에 빛나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므로 시호는 ‘순명(純明)’이라고 하였으며, 원호(園號)는 ‘유강(裕康)’이라고 하고 전호(殿號)는 ‘의효(懿孝)’라고 하였다.

양주(楊州) 용마산(龍馬山) 내동(內洞)의 묘좌원(卯坐原)에 복조(卜兆)하고 이제 11월 29일 계묘일(癸卯日) 묘시(卯時)에 그곳에다 장사를 지내려 한다.

아, 슬프다! 비의 순정하고 효성스러운 행실과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계책은 여인들의 본보기로 내세울 만한 것들이건만 여사(女史)가 쓴 것과 본 가에서 적어 들여온 것은 겨우 열 중의 한둘밖에 안된다. 그래서 짐이 슬픔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가운데 위와 같은 내용을 모아서 갑진년(1904) 음력(陰曆) 동짓달에 직접 기록하였다. 【이상은 어제(御製) 행록(行錄)이다.】 "

"아! 효성스럽고 순하며 공경스러운 것이 비의 덕이고, 유순하고 곧으며 고요한 것이 비의 성품이다. 기쁨을 드리는 속에서 사랑을 받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가운데서 충고도 주었다. 애써 화락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폐하가 즐거워하기에 만 년의 복락을 길이 함께 누려 가리라고 생각하였으니, 갑자기 오늘 같은 날이 올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우리 부황 폐하께서는 비를 가엾이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이 끝없어 곡을 할 때마다 옥음(玉音)이 밖에서 들렸고 비의 지난날의 생활에 대해 말할 때에는 어느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곤 하였다.

무릇 상례(喪禮)는 옛 규례에 따라 반드시 최선을 다하는 한편 성인(聖人)이 인정을 고려하여 원칙에 부합되게 조절한 것처럼 하기도 한 것은 실로 우리 가문에서 변함없는 법으로 삼아오는 것이다. 게다가 폐하가 슬픔에 잠겨 지내는 가운데 직접 지은 비의 행록은 확연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으로서 말은 간명하고 의리는 엄정하며, 내하(內下)한 행록을 그대로 묘지문으로 쓰는 것도 전례가 있는 일이다. 재궁의 상자(上字)도 폐하께서 직접 쓴 것으로서 은하수의 빛발이 모인 것 같아 땅속에서도 환하게 비칠 것이니 앞으로 저승에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 내가 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본 가에서 기록한 사적들은 궁중 안의 일에 대해서는 낱낱이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어렸을 때의 일들은 옛날의 종들이 전하여 궁인(宮人)들이 많이들 말을 하는 것이다. 한창 재롱스레 노닐던 철 이른 시절의 소소한 일들과 평범한 사실들일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그의 지취(志趣)를 엿볼 수 있겠기에 여인들의 모범으로 될 수 있는 것들을 들은 대로 모았으니 아마 기록하는 데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는 어렸을 때부터 행동이 단정하였으며 침착하고 조용하여 말이 적었으므로 남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남이 물어보기 전에 제가 먼저 남에게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을 때에는 오로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여 익혀 나갔으며 문 밖으로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일이 없었다. 혹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입에 올려 많이 읽어야만 글 뜻이 자연히 나타난다.’라고 말을 해주면, 비가 말하기를, ‘나는 늘 스스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곧 책을 잡고 검열해보게 하였는데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도 같이 배송(背誦)하여 한 자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소학(小學)》을 공부할 때에 모사(姆師)가 언해(諺解)에 의거하여 그 대의(大義)만을 이야기할 뿐 심오하고 미묘한 뜻을 살피지 못했는데 비는 곧 여러모로 따지고 근사한 일을 가지고 비유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게 하였다. 간혹 본뜻에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곧 생각해 내고 민첩하게 깨우쳐서 힐난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가인(家人)들이 하는 말이,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가르친다.’라는 것이었다.

빈으로 뽑혀 별궁으로 들어갈 때에는 오직 화장품함과 한 부의 《소학》뿐이었는데 《소학》을 섭렵하며 열심히 공부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자리에 들었다. 그러하여 집안사람이 식견 있고 경험도 있는 늙은 궁인(宮人) 한 명을 불러다가 입궁(入宮)하여 응대하고 만나보는 절차들을 이야기하게 해서 그것을 한 통 기록해두고 익혀나갈 것을 청하자 비가 말하기를, ‘모두 이 책에 있는 만큼 물어볼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경하지 못한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서, 설사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리 어긋나지는 않았다.

입궁한 뒤에는 행동과 얼굴빛이 법도에 알맞게 단정하였으며 세 분의 전하를 섬기어 새벽과 저녁마다 미흡한 구석이 있을세라 잠자리와 음식을 극진히 보살피면서 매일 밤이 깊어진 다음에야 사침(私寢)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시립(侍立)한 채로 진종일 보내거나 한밤을 다 지새우다가 부황 폐하가 그의 수고를 염려하여 쉬라고 명해야만 물러나왔다. 그러고서도 또 여러 가지 책들을 보곤 하기에 내가 권하면서 ‘곤하지 않으시오?’라고 하였더니 비가 말하기를, ‘좋아서 하는 일은 피곤한 줄을 모르는 법입니다.’라고 하였다. 간혹 몸이 불편하여 잠꼬대를 하면서 신음 소리를 내곤 하였지만 그래도 꼭꼭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성복을 하고 아침 문안을 하였으며 감히 지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은 충문공이 오랜 집안의 가풍에 의거하여 여인들이 지켜야 할 법도를 조정의 규범마냥 엄격하게 세운 결과 어린 나이에도 그러한 것들이 가정 교육을 통해서 몸에 완연히 배었기 때문이다.

임오년(1882)에 난병(亂兵)들이 대궐을 습격하여 전궁이 파천하였을 때에는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행처(行處)를 몰랐는데, 비는 음식을 대할 때마다 맨밥만을 들면서 고기 반찬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밤이 되면 반드시 노정(露庭)에서 하늘에 빌곤 하였다. 이불을 덮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쪽잠에 들곤 하였는데 명성 황후를 맞이하는 날까지 계속 그렇게 하였다.

갑신년(1884) 여러 흉악한 무리들의 변란 때에 거가(車駕)가 자리를 뜨고 내가 신정 왕후(神貞王后)와 성모(聖母)를 모시고 동성(東城) 밖으로 피하였었는데 비는 밤에 소교(小轎)를 타고 액례(掖隷) 하나를 따라서 각심사(覺心寺)에 이르렀다. 성모(聖母)께서 전교하시기를, ‘나는 물론 여러 역적들의 사특한 행위가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였다. 다만 이 무리들만을 처단하면 저절로 무사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후에 과연 역적들이 평정되었으므로 비는 늘 말하기를, ‘우리 성모의 명석한 견해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바이다. 역적들이 난리를 일으키기 전에 벌써 난리가 일어났을 때의 일을 염려하였으니 아무리 옛날의 명철한 왕후라 하더라도 이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비는 충문공이 살해되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슬픔에 겨워 낯이 까맣게 질려가지고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손으로 싸쥐었다. 성모가 한 번 울음을 터뜨려보지도 못하는 그를 가엾게 여기자, 비는 대답하기를, ‘왜 아버지에 대한 슬픔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위태롭고 간고한 이런 경황에서 어찌 감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의 난리 때에 비는 성모를 막아나서 보호하다가 역적들에게 앞길이 막혀 그만 발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통에 허리를 상한 것이 그대로 고질병으로 되었다. 천하 만고에 있어보지 못한 큰 참변을 당한 때로부터 비는 늘 의식이 혼미하여 어지러웠으며 꿈속에서도 간혹 흐느끼다가 ‘아무개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고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가 하면 울음을 삼키면서 어깨를 들먹이곤 하였다. 간혹 교교한 정적이 깃든 밤의 전각에 등불 빛이 은은하게 흐를 때 마치 무엇을 보는 것 같았으니, 지성으로 애통해하고 그리워한 나머지 망자의 혼이 그 효성과 사모하는 마음에 감응하였던 것이리라.

아, 내가 자식으로서 상사를 당한 슬픔을 어찌 감히 한 순간인들 잊으랴만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몇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할 때마다 슬픔에 겨워, 비가 말하기를, ‘김홍집(金弘集)과 김병하(金炳夏)는 이미 처단되었으나 송길준(宋吉濬)과 이희연(李羲淵)의 무리는 아직도 도망간 채 잡히지 않고 있는데 강한 이웃 나라의 위협을 받아 목을 베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이 비치면 서리는 녹고 이슬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마땅히 부모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나라는 없어야 하는데 죄수를 도망가게 내버려둔 나라의 주인이 되어 천하에 대하여 큰 의리를 잃었으니, 이 역시 나라에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하나의 국가인데 어찌 한두 명의 혈기 있는 대장부가 없겠습니까? 장검(杖劍)을 가지고 가서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히면 저들은 필경 할 말이 부족할 것이고 그러면 여러 흉악한 역적들이 스스로 저들의 머리를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내가 밤중에 덮쳐가지고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것은 간사한 자객의 행위로서, 죄를 엄격히 다스려 나라의 법으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니 나라의 원수를 갚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는 태도는 강개하였으나 몇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나는 저도 모르게 실심하여 ‘나의 죄이다.’라고 하였다.

비는 본가(本家)에 계칙(戒飭)하기를, ‘모자라는 현상은 절약하지 않는 데서 생기고 절약하지 않는 현상은 사치를 부리는 데서 생긴다. 사치를 부리는 폐습은 반드시 곤궁한 지경에로 몰아넣어 못하는 짓이 없게 하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한도가 있는 재물을 가지고 무한정 쓰려들면 설사 날마다 천(千)으로 늘이고 만(萬)으로 늘인다 하더라도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품(祭品)이란 오직 깨끗이 해야 할 뿐 덮어놓고 풍성하게 하려고만 애쓴다면 그것은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쩌다가 친척들이 바치는 것이 있으면 곧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사사로운 저축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본 가에서 편지를 들여보내는 것이 있으면 그저 안부를 물은 대목만 보고는 곧 접어서 상자 안에 두고서 말하기를, ‘자질구레한 문제는 한갓 사람의 마음이나 어지럽힐 뿐이므로 볼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언젠가는 예나 지금의 정사의 잘잘못에 대하여 논하면서 말하기를,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것을 보아도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단지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좋은 점이다. 그렇게 하였을 따름인데도 후세에 그런 경지로 오르지 못하는 것은 당요(唐堯)나 우순(虞舜)처럼 한결같이 해나가지 못하여 적으나마 좋지 않은 점을 빚어내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위태로운 징조이지만 억지로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오직 한마음으로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면 당요나 우순이 이룩한 태평시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로 편안한 시대는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는 평소에 글씨에 대하여 그리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필치가 굳세어 마치 솜 속에 바늘이 박혀 있는 듯 하였으며 아무리 작은 종이라 하더라도 버리지 않고 붓이 가는 대로 글을 썼다. 그의 단정한 천품은 이것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하지 않아 필적도 많이 보존된 것이 없고 가끔 치장함과 같은 데서 조각이나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니 어찌 애석함을 누를 수 있겠는가?

비는 병상에 누워있을 때에도 나를 대할 적마다 반드시 의지하여 일어나 앉아 옷매무새를 바로잡곤 하였다. 병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정신은 깨끗해서 나에게 권하기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백성들을 부탁받은 중책이 오직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우리 황제의 훌륭한 정사를 도와 만년무강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을 뿐 본 가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비의 재주와 덕은 하늘이 준 것인데 수명만은 주지 않았으니, 아, 애석하다. 광무(光武) 8년 갑신년(1884) 음력(陰曆) 동짓달에 지었다. 【이상은 예제(睿製) 행록(行錄)이다.】 "

하였다.

"신 이근명(李根命)은 삼가 순명비(純明妃)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의 명을 받들었습니다만 신이 어찌 감히 이런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두렵기 그지없어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삼가 조지(詔旨)를 받드니, ‘행록(行錄)을 지문(誌文)으로 그냥 쓰는 것은 전례가 있다. 이제 행록을 내려 보내니 지문의 내용에 포함시킬 것이다. 동궁 또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모아 한 통 엮었으니 아마 미흡한 구석을 메워 보다 세밀하게 되어 아름다운 덕과 꽃다운 계책들도 후세에 길이 전하기에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문의 뒤에다가 다같이 새겨넣는 동시에 제술관에게 그 사실을 상세히 기록해서 그 아래에다 첨부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인사를 올린 다음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받아가지고 경건한 심정으로 읽어보았는데 삼가 흠모와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른바 ‘이(理)’라는 것이 있고 ‘운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가 밤낮으로 천지(天地) 사이에서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맑은 것과 흐린 것, 순수한 것과 잡스러운 것 등 서로 구별이 있어서 기를 받고 태어나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기에 따라서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만일 맑고 깨끗한 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타고난 천성이 반드시 어질고 명철하며 복락을 누림에 있어서도 명예와 장수를 다같이 누립니다. 이것은 ‘이’의 정상적인 발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어질고도 명철한 천품을 타고났지만 복락을 누림에 있어서는 간혹 명예는 누리면서도 장수는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운수의 변화인 것입니다.

지금 비는 충성스럽고 곧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총명하고 어진 성품을 타고났으며 유순하고 공손할 뿐 아니라 무슨 행동이나 법도에 들어맞아 우리 황태자 전하의 짝으로 되어 지금껏 20여 년 동안 말없이 내조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밤낮으로 받들어 세 분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춘추(春秋)》의 의리는 을미년(1895)에 절통하게도 깊었는데 어려운 형편에 처할수록 더욱 곧았습니다. 아랫사람들을 어진 마음으로 대해주고 친척을 통제하며 미신을 배척하였고 옛 글들을 즐겨하며 옛 사람들의 교훈을 명심하고 정사의 원칙을 환히 통달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찬양하곤 하였습니다. 지어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일도 배우지 않았지만 능하였습니다.

대체로 하늘은 비범하고 뛰어난 천품을 지닌 사람을 우리나라에 주어 상서로운 일들을 많이 하게 해서 만세토록 번창할 나라의 행운을 불러오도록 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려 끝내 중년 나이도 되기 전에 한생을 마치는 것입니까?

아, 어질고도 명철할 뿐 아니라 명예까지 지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만은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앞에서 말한 운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와 같이 하늘로부터 목숨을 받아 안고 태어난 사람이 어찌하여 ‘이’의 정상적인 경지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어이 운수가 변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아! 통탄할 노릇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황상 폐하는 두터운 자애심으로 끝없이 슬퍼하면서 상사(喪事)와 관련된 모든 예(禮)를 최선을 다하여 치렀고 또 명성 황후의 지문(誌文)을 쓰던 때처럼 직접 행록을 지어 지문으로 삼게 함으로써 온갖 의행(懿行)을 대서특필하여 세상에 밝혔습니다. 그리고 우리 황태자 전하도 슬픈 마음으로 뒤이어 글을 지었는데 확연한 실적으로 앞뒤를 밝혔습니다.

이제부터는 규중에서 닦은 비(妃)의 미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천하에 빛을 뿌려서 영영 천하 후세의 후비들의 규범으로 되었으니 이것은 비의 일생이 비록 33세로 끝났지만 그의 꽃다운 명예는 천지와 더불어 영원무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이제야 사람에게 있는 하늘의 이치는 사라지지 않고 빛난다는 것을 알겠으니 이른바 운수라는 것이 논할 만한 것이겠습니까?

신은 지문을 읽고 나서 슬픔을 더욱 금할 수 없어 몇 마디 말을 간단히 엮어 뒤에다 첨부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식견이 부족하고 말이 졸렬하여 비의 덕행을 만 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했으므로 실로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의정(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지었다.】 "

하였다.


  • 【원본】 49책 4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58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의식(儀式)

四日。 卯時, 行遷奠, 下玄宮。 誌文曰:

純明妃閔氏, 籍驪興。 肇祖曰 稱道, 仕高麗爲尙衣奉御。 三世而有曰令謨, 官集賢殿大學士、上柱國太師, 諡文景。 四世而曰宗儒, 官大匡贊成事, 諡忠順文景忠順, 史有傳。 入本朝曰審言, 開城副留守, 曰沖源, 逸執義。 三世而曰齊仁, 左贊成, 又四世而曰光勳, 觀察使贈領議政。 曰維重, 誕生我仁顯聖母, 封驪陽府院君, 贈領議政, 諡文貞, 柱石王國, 楷範士林, 追腏孝宗廟庭。 曰鎭遠, 左議政諡文忠, 精忠明義, 功留宗祊, 配享英祖廟庭。 曰亨洙, 觀察使贈領議政, 寔妃五世祖也。 高祖百祥, 右議政諡正獻, 世所稱辛巳三相之一, 配享莊祖廟庭。 曾祖弘燮, 吏曹參判贈左贊成。 祖致三, 贈領議政。 考台鎬, 行左贊成大提學, 贈領議政, 諡忠文, 宗匠詞林, 忠藎公國。 前母贈貞敬夫人尹氏, 府使稷儀女, 母貞敬夫人宋氏, 牧使贈內部協辦在華女, 繼母貞敬夫人南氏, 議官命熙女。 宋氏以壬申十月二十日辛未戌時, 誕妃于京師 陽德坊 桂洞寓第, 載寢之夕, 有光繞屋, 似烟非霧, 五彩焜耀, 數十步之間, 見人衣衫玲瓏。 移時不散, 隣閈皆異之。 妃姿質柔和, 德容天成。 自幼齡動止有度, 雖尋常婦女之出入閨門, 一見皆知爲不凡。 妃性聰敏明慧, 甫髫齔, 讀《小學》《女則》, 諸書姆師, 纔說其大旨, 而輒了其深義, 又沈靜寡辭。 未見有急遽。 小丫鬟群嬉于前, 噪閙甚劇, 至不可耐, 而不以聲色加之, 惟徐曉之, 使自退去。 嘗摩挲斗米曰: ‘吾家眷口, 當如此粒之數’, 其度量已如此。 壬午膺德選, 將館于別宮, 拜辭家廟, 悽悵如不忍訣。 速親黨之不得入內者, 與之別, 繾綣依戀之意, 令人感歎。 此非沖年所能爾也。 二月十九日乙亥, 冊封爲世子嬪; 二十一日, 行嘉禮; 丁酉, 冊封爲皇太子妃。 旣入宮, 事三殿如一, 問寢視膳, 洞屬如不及。 朕念其質弱而勞瘁, 或見其微有體中不佳時, 使之休息調養於私寢。 而雖寒節, 侵晨盥櫛, 暑月必盛服。 至夜分每侍側, 雍容怡愉, 先意將承, 如左右手。 朕恩勤慈愛, 惟若提孩, 而孝敬愈摯, 不少惰倦。 法家庭誡, 厥有所受, 亦稟賦之美, 不待勉强而然矣。 因時多難, 屢經艱險, 而妃隨時處變, 跬步不失于正方。 其猖獗之中, 宮人皆顚倒罔措, 妃戒之曰: ‘是心不正, 思慮不明, 平夷之地, 亦未免躓錯。 況於蒼黃嶔崎, 一有差謬, 安危攸判乎?’ 甲申, 忠文被害于奸黨時, 殿宮播遷, 妃以不得如禮擧哀爲至慟。 庚寅, 神貞聖母昇遐, 朝夕祭奠, 妃必哭泣盡哀, 遑遑若靡所依恃。 及乙未, 凶徒犯于宮掖, 妃遮護明成后, 被凶徒阻搪, 竟遭天下萬古所未有之大變。 妃亦昏仆氣塞, 半晌, 問女侍以大小朝起居, 仍復闔眼不省, 以備急藥救之, 質明乃蘇。 妃由是, 常惚惚如幼兒之失乳, 或方食而歔唏悲咽, 衣襟枕褥, 淚痕縱橫。 朕心憐之, 撫字愈至, 慰諭而裁抑之。 妃修飾悅豫之容, 亦勉朕以無過度於思念, 而恒見其愁慘之色, 自然形外, 不能掩矣。 明成后之於妃, 平日慈愛之恩勤顧復, 有可以浹於肌髓。 而妃之孺慕於愈久, 亦以孝思之根於性矣。 椒塗嚴密, 非有召呼, 戚畹不敢輒入。 常襯書史, 其可以爲鑑戒者, 節錄其要義, 藏弆巾笥, 不以示人。 而書法遒勁端正, 得其心劃, 非可學而能也。 御下以仁, 恩意藹如, 時有過誤, 不爲誚呵, 但令勿復爲此, 皆感服無敢欺罔。 一言之戒, 威於箠楚, 恒令諸弟, 無爲華靡之習。 曰‘吾家世守淸德, 式至于今, 惟當克遵美規, 無累於先可也。’ 通書本家安否外, 更無一字, 或有懇謁, 則曰‘以吾親屬, 躁競如此, 他人當何如哉?’ 宮人或言巫瞽亦多靈異, 可以回災爲福, 妃笑曰: ‘爾輩癡絶, 災福之來, 自有分定。 若因祈禳而得之, 世間寧有貧且夭者?’ 妃嘗言古今治亂曰: ‘郅隆, 固未易跂及, 而守文繼體, 差可少康, 在乎勉焉矣。’ 其識見之深遠, 有非閨房之言矣。 妃自本年八月寢疾。 朕每臨視, 雖委苦不克轉動, 而必整其衣裳。 方危㞃而猶扶持起坐, 攢手而言曰: ‘聖體保重, 民國泰平, 是所心心祝天。’ 妃竟以九月二十八日戌時, 薨于慶運宮康泰室。 嗚呼! 哀哉! 又安可得哉? 自初喪、襲斂、絞衾之屬, 皆自內備念, 妃平日尙節約省煩費也。 考古諡法, 中正精粹曰純, 照臨四方曰明, 諡號曰‘純明’, 園號曰‘裕康’, 殿號曰‘懿孝’。 卜兆于楊州 龍馬山 內洞卯坐原。 將以十一月二十九日癸卯卯時, 而葬焉。 嗚呼! 哀哉! 惟妃純孝之行, 嘉言芳猷, 可爲閨範, 而書之女史者, 本家錄入, 僅十得一二。 而朕於悲疚之中, 亦無以收拾神思, 只採綴如右, 甲辰仲冬, 親誌。

【以上御製行錄。】

嗚呼! 孝順恭敬, 妃之德也; 柔閒貞靜, 妃之性也。 承慈愛於供愉, 寓箴規於湛樂。 斑彩聯翩, 天顔怡如, 共擬長奉萬年之懽。 豈謂遽有今日耶? 惟我父皇陛下, 哀憐妃不已, 每哭臨, 玉音出於軒欞, 語到妃平日, 輒淚下不忍究。 凡於喪葬之禮, 援引於古, 必用其極。 亦有聖人緣情起義, 洵爲我家金石。 又於聖心悲疚之中, 親製妃行錄, 典誥渾噩, 辭簡義嚴, 內下行錄之仍用爲幽誌, 爰有已例。 梓宮上字亦親書, 雲漢昭回, 燭於玄隧, 其將感泣於冥冥矣。 嗚呼! 予又何言哉? 而本家所錄, 其於宮掖之內, 或不能悉, 而其幼小時事, 舊日婢僕之所傳, 宮人多能言之。 雖於提携嬉戲, 冗屑尋常之事, 亦有可見其志趣, 而作爲閨房模楷者, 隨聞採輯, 庶或爲補錄矣。 妃自幼齡, 動止端凝, 沈靜寡言, 與人居非有問焉, 則罕有先以語人。 對案讀書, 惟潛心熟翫, 聲音不出戶外。 或人言‘讀書必多讀上口, 然後文義自見’, 妃曰: ‘我常自讀矣。’ 乃使執卷驗之, 背誦如流, 不錯一字。 讀《小學》時, 姆師惟據諺解, 而說其大旨, 不能窺其微奧。 妃乃反覆論難, 以近事譬喩, 令人易曉。 或未必切中於本義, 而才想敏慧, 有未暇詰焉。 家人爲之語曰: ‘師非教弟子, 弟子乃教師。’ 及膺選, 館于別宮, 惟匳具與《小學》一部而已, 涉獵尋溫, 至夜分乃寢。 家人請召一老宮人諳鍊閱歷者, 講劘入宮應對酬接節次, 錄爲一通以演習之, 妃曰: ‘皆在此書, 不必問矣。 且毋不敬三字, 常存於心, 則雖不中不遠矣。’ 旣入宮折旋動容, 閒雅中矩, 奉三殿晨昏寢膳, 洞屬如不及, 每夜深後乃歸私寢。 或侍立竟晷徹明, 父皇陛下念其勞, 命休息, 然後乃退。 亦復披覽諸書, 予勉之曰: ‘得無憊乎?’, 妃曰: ‘心乎好矣, 不知疲矣。’ 或體中微愆, 寤囈有呻吟之聲, 而亦必昧爽便起, 盛服而朝, 不敢見困倦之色。 蓋忠文承藉古家法度, 閨門嚴整, 儼若朝典, 薰陶涵沐於髫齔之前, 所受於庭誡者如此。 壬午, 亂兵犯闕, 殿宮播遷, 不知明成聖母行在, 妃每食惟噉飯, 不嘗魚肉, 夜必露庭祝天。 不設衾幬, 和衣假寐, 以及奉迎之日。 甲申諸凶之變, 車駕離次, 予奉神貞聖后曁我聖母, 避于東城外, 妃夜乘小轎, 從一掖隷至覺心寺。 聖母敎曰: ‘吾固疑諸賊有詐。 但殺此輩, 自可無事。’ 已而賊果平, 妃常言‘我聖母明見, 人所不及料。 賊於未亂之前, 慮事於已亂之中, 雖古哲后, 無以加焉。’ 始妃聞忠文遇害投地, 一聲面慘, 墨侍于前, 俛首以自掩。 聖母憫其不得一洩哀, 妃對曰: ‘倫彝之至, 豈不霣慟? 方玆危難之際, 何敢言私?’ 乙未之難, 妃遮護聖母, 被賊阻攩, 跌墜傷腰, 仍作痼病。 自遭天下萬古所未有之大變, 妃常惚焉怳焉, 寢夢之間, 或號泣曰: ‘某在斯。’ 因怵然驚覺, 眼淚淋浪, 咽咽之音, 猶在喉中。 或夜殿深幽, 燈穗輝輝, 髣髴如有見焉。 至誠慟慕, 宜其感孝思於影響矣。 嗚呼! 予小子苫戈之思, 曷敢一息忘之? 而因循荏苒, 屢經歲年, 每相對於邑。 妃曰: ‘弘集秉夏, 旣已就戮, 而吉濬羲淵輩, 尙在漏網, 被强隣挾持, 不得馘致。 日月所照, 霜露所墜。 宜未有無父母、無君上之國, 而乃爲逋逃主, 失大義於天下, 其亦國無人焉。 我邦亦萬乘之國也, 豈無一二血氣丈夫哉? 杖劍而往, 聲明《春秋》之義, 彼必辭絀矣, 然則諸兇自可援首矣。 若其昏夜揜取, 一夫剚刃, 此奸人剌客之事也, 非所以明正其罪, 誅以王法也, 不足以雪國讎矣。’ 辭氣慷慨, 泣數行下。 予不覺憮然曰: ‘予之罪也。’ 妃戒飭本家曰: ‘不足生於不節, 不節生於奢侈。 奢侈之弊, 必至於困窮而無所不爲矣, 可不懼哉? 以有限之財, 用之無限, 則雖日增千萬, 亦將不足矣。 且祭品惟宜蠲潔, 若徒欲務爲豐備, 則非所謂誠敬也。’ 或有戚里之進獻, 輒却之曰: ‘吾何以私蓄爲也?’ 有書自本家入者, 但見有平安二字, 便卽拉置箱中曰: ‘細瑣事徒攪人懷, 不必看之。’ 嘗論古今治亂曰: ‘治天下, 亦無別般道理。 只是不作不好底。 但不作不好底, 便是好處。 如是而已, 後世不及焉者, 以不能如之純一, 未免些有不好處。 若其全無好處, 則危亡之機, 惟黽勉勵精, 一心求治, 則雖未可跂及郅隆, 亦可以小康矣。’ 妃平居不甚留心於觚墨, 而書畫遒勁, 如綿中裹鍼, 雖小赫蹄, 未常放過心而縱筆作書。 其姿性之端莊貞一, 此可見矣。 惟不喜示人, 筆蹟亦無多存, 時於巾衍得碎金, 可勝愴情? 妃於寢疾中, 每對予必扶起正衣裳。 疾將革, 神識猶朗然, 勉予曰: ‘宗社、生民託付之重, 惟在於殿下, 輔翊我聖人昇平之治, 萬年無疆’, 更無一語及本家事。 嗚呼! 惟妃之才之德, 天旣與之, 而獨不與其年。 嗚呼! 惜哉! 光武八年甲辰仲冬撰。

【以上睿製行錄。】

根命, 伏奉純明妃誌文製述官之命。 臣何敢當是任? 慙惶汗流, 不知所圖。 又伏奉詔旨, 若曰: ‘行錄之仍用爲誌文, 爰有已例。 今下行錄, 以誌文入用。 東宮又攈拾其所聞覩, 綴爲一通, 庶補未盡而加詳焉。 懿德芳猷, 亦可以無憾於傳美永遠矣。 一體入刻于誌文之後, 亦令製述官, 詳載其事實, 附記于下。’ 臣拜手稽首祗受而敬讀, 欽仰讚歎。 竊惟天地之間, 有所謂‘理’者焉, 有所謂‘數’者焉。 今夫陰陽五行之氣, 日夜流行于上下之間。 有淸濁粹駁之別, 而人之受是氣而生者, 隨其所値而如之。 若夫受淸粹之氣者, 其品質也必爲賢爲哲, 其福祉也必得名得壽。 此其理之常也。 然而人於是, 有不盡然者。 夫旣稟得賢哲之質矣, 而其福祉或得於此, 而不得於彼。 此其數之變也。 今妃生忠貞之門, 稟聰仁之姿, 溫惠莊敬, 百度咸宜, 以誕配我皇太子殿下, 前後二十餘年之間, 所以陰助之者深。 晨昏之奉, 誠動三殿, 《春秋》之義, 慟深乙年。 處難愈貞, 臨下以仁, 裁抑親屬, 屛絶祈禳。 篤好書史, 佩服古訓, 明達治體, 動稱。 至於書字之類, 亦不學而能之。 蓋天將以非常超異之資, 用畀我國家, 誕毓慶祥, 以延宗祊萬世之昌運。 而奈何一朝之間, 忽嬰旡妄, 竟止未中歲之年? 嗚呼! 夫旣爲賢爲哲矣, 又得其名, 而獨不得於年壽, 此曷故焉? 豈向所謂數者非耶? 若妃之稟命于天者, 其胡不出於理之常, 而必出於數之變也耶? 嗚呼! 慟哉! 伏惟我皇上陛下, 以慈愛篤摯之情, 悲疚不已, 喪葬之禮, 咸用其極。 又用明成皇后誌文已例, 親製行錄, 仍以爲誌, 凡百懿行, 大書特書, 揭諸日月。 而我皇太子殿下, 以悲悼之睿衷, 又從以紹述之, 典誥渾噩, 前輝後光。 自玆以往, 妃之德之行之修於閨閫中者, 可以播於一世, 顯於天下, 永永爲天下後世后妃之規範。 是則妃之年壽, 雖止於三十三, 而其令名芳譽之永遠, 可與天壤而同久也。 嗚呼! 懿哉! 而今以後, 又以知天理之在人者, 昭昭不泯, 而所謂數者, 可足論耶? 臣讀誌之餘, 尤不勝感慟, 略綴數言, 附於末光。 而學識鹵莽, 文辭拙澁, 不能形容懿德之萬一, 實以爲愧懼焉。

【議政李根命製。】


  • 【원본】 49책 4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58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