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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26권, 순조 23년 8월 2일 戊戌 1번째기사 1823년 청 도광(道光) 3년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들이 서얼들이 상소한 것에 대해 권당한 소회를 아뢰다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권당(捲堂)한 소회(所懷)에 의하여 아뢰기를,

"신 등은 수선지(首善地)121) 에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어지럽히는 일을 목격하고 모두 우려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충(忠)·질(質)·문(文)을 가감한 것은 바로 삼대(三代)122) 때 건국하였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질을 숭상하였던 정치가 문이 부족하다고 하여 변경하지 않았고, 문을 숭상하였던 정치가 질이 부족하다고 하여 고친 일이 없었던 것은 질가(質家)와 문가(文家)가 각각 정해진 바가 있어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에 관계되고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관계되어 천도(天道)가 유행되고 인기(人紀)가 확립되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 조정은 중국의 밖에 있는 문치를 숭상하는 소중화(小中華)입니다. 삼한(三韓)123) 시대와 신라·고려 사이에도 여전히 비루한 이속(夷俗)을 면치 못하다가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 태조태종께서 고려에서 숭불(崇佛)하던 뒤에 인륜을 밝히고 고려에서 멸유(蔑儒)하던 끝에 강상(綱常)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분(名分)’ 두 글자와 관계된 것은 그 엄중함이 분명하고 그 차등이 현격하여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어 마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때에 즈음하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께서 우리 나라에 예서(禮書)와 관상(冠常)의 제도를 내려 줌으로써 의절(儀節)의 가감과 명위(名位)의 등급이 정연히 구분이 있게 되어, 푼[分]은 치[寸]를 넘지 못하고 치는 자[尺]를 넘지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4백 년 기업(基業)을 유지해 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김희용(金熙鏞) 등의 상소가 나왔는데 그 기세가 필시 한 세상을 바꾸어 우리 조종께서 나라를 세우신 제도를 변경하고 말겠으니, 어쩌면 이토록 외람스러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상소 가운데의 내용으로 본다면, 실로 천지간에 지극히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는 가계(家系)를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는 사대부들과 같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므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하늘을 하늘로 부르고 있는데, 유독 서얼만 그의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고 있으니 그 원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비로 부르는 것은 애당초 나라에서 금지한 조항이 없었고 보면, 사대부들 집에서 적손과 서손의 구분을 엄히 한 소치로서 각기 그 아비가 아비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비가 허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 아비에게 간청하지 않고 임금에게 호소한단 말입니까? 자식으로서 가계(家系)를 계승하지 못한 것에 있어서는 역시 떳떳한 천리와 인정이 아니니, 그 아비의 피붙이로 할아버지와 아비의 가계를 계승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그의 말과 같이 원통하고도 원통한 일입니다. 또 적처나 첩에서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 후사를 세우게 한 조문이 과연 예전(禮典)에 실려 있으나, 이 역시 아비된 사람이 예전을 따르지 않고 후사를 세운 것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아비가 한 일을 가지고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아비가 자신이 낳은 아들에 대해 사랑하는 것이 귀천의 차이가 없는데 후사로 삼지 않은 것은 다만 막판의 폐단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른바 첩이란 것은 절차를 밟지 않고 만난 것입니다. 양가(良家)의 여자를 맞는 경우는 10분의 1, 2에 불과하고 공사간의 여종으로 첩을 삼은 것은 10분의 8, 9나 되는데, 만일 첩에서 난 자식으로 계속 후사를 삼는다면 후사가 된 자의 어미 쪽과 처의 쪽이 모두 척속(戚屬)이 되므로 결국에는 전부가 상천(常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첩의 아들로 적통을 계승하는 길을 터놓으면 다시 사대부 집의 모양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한 집이 적통을 계승하고 내일 또 한 집이 적통을 계승한다면, 몇 년이 안되어 구분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차츰차츰 인륜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아비가 서자를 후사로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손이 벼슬길을 사대부와 같이 나가지 못한 것은, 적통을 계승하지 못한 소치인데, 그 길이 다르고 그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4백 년 이래 열성조에서 극도로 고루 감싸주고 진념해 주셨으며 여러 명신(名臣)들도 매우 불쌍히 여기고 애석하게 여겼으나 끝내 소원대로 들어주지 못한 것은 나라를 세울 때의 제도를 변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비록 매우 사정(私情)이 원통하더라도 어찌 감히 경장(更張)이니 변통이니 하는 등의 말로 번거롭게 소를 올려 요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준수나 경장이 각기 여건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준수하고 경장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세도가 쇠퇴하고 인심이 천박하여 윤상과 기강이 날로 퇴패해지고 있는 때에 또 이와 같은 상도에 어긋난 상소가 나왔으니, 이것이 무슨 꼴이며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입니까? 수만 수천으로 무리를 지어 그 기세가 두려우니, 신 등은 걱정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명교상(名敎上) 단연코 빨리 상소를 올려 그들의 외람됨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전원이 입을 모아 회좌(會坐)하여 상소의 논의를 확정지으려 하였는데, 저들의 상소를 잘 알았다고 통보하기 전에 장의(掌議) 신(臣) 이재신(李在臣)이 스스로 경망하고 성급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대로 합사(合辭)하여 그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상소를 초안할 때에 갑자기 대사성 정기선(鄭基善)이 거재 유생들이 자기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임의로 장의에게 벌을 주었다고 하여 유생들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또 지금 장의 이원응(李源膺)이 재실(齋室)에 들어왔기에 상소하는 일을 결정지으려고 합사(合辭)하여 절충하였더니, 석전(釋奠)이 끝난 뒤에 확정하자고 약속하고는 정작 석전을 끝낸 뒤에는 그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한나절을 서로 버티다가 결국 지루함에 화가 나서 동재(東齋)는 전원이 재실에서 나갔고 서재(西齋)에서는 반수(班首)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동재와 서재에 대한 벌이 풀리기는 하였으나, 신 등이 유생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전에는 대사성이 준 벌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였고 뒤에는 장의에게 벌을 준 일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마음 가득히 부끄럽고 쑥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처지로 어떻게 태연히 당(堂)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집으로 물러나와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서류(庶類)가 하소연하는 것은 열성조에서 늘 있었던 일이었으나, 그때 권당(捲堂)하고 시끄럽게 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옛날의 유생이 어찌 지금 사람보다 못해서 그랬겠는가? 비록 소회로 말하더라도 이미 ‘천지간에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 ‘떳떳한 권리와 인정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유생들도 도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생들은 윤리를 밝히고 선행을 으뜸으로 하는 자리에 있으니, 의당 ‘하소연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해야 하고, 또한 ‘떳떳한 천리와 인륜으로 돌이켜 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모순되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불평만 일삼고 있으니, 옳은 일인가? 또 대사성이 벌을 준 것은 무슨 일로 그러했는지 모르겠으나 한번 벌을 주었다고 해서 거리낌없이 대사성의 잘못을 열거했으니, 어찌 사유(師儒)를 대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유생을 위하여 깊이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이로써 효유하여 즉시 들어오도록 권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3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가족-가족(家族) / 신분(身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21]
    수선지(首善地) : 성균관을 말함.
  • [註 122]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123]
    삼한(三韓) : 마한·변한·진한.

○戊戌/成均館, 以居齋儒生捲堂所懷, 啓以爲: "臣等忝居首善之地, 目見乖亂世道之擧, 咸懷憂歎。 竊伏惟念忠質文所損益, 卽三代創國之規度。 而尙質之治, 不以文不足而有所變更, 尙文之治, 不以質不足而有所改易, 所以質家文家之各有攸定, 而禮樂文物之所關, 尊卑貴賤之所係, 天道行而人紀立焉。 猗歟! 本朝, 海外尙文之小中華也。 三韓之際, 之間, 猶未免夷俗之陋, 逮夫我太祖, 太宗, 明倫於勝國崇佛之後, 陳常於勝國蔑儒之餘。 凡係名分二字處, 其嚴有截, 其等有隔, 一洗舊染, 如日中天。 際於其時, 大明 高皇帝, 頒我以禮法之書, 賜我以冠裳之制, 儀節之隆殺, 名位之等級, 井井有區域, 分不得踰寸, 寸不得踰尺, 維持我四百年基業者, 專由於此。 今忽金熙鏞等疏出, 而其勢必將至於易一世, 而變更我祖宗立國之制, 何其濫猥之至此也? 以其疏中辭意觀之, 則固嘗天地間至冤事也。 其所切懇者, 有三件節, 一是不得呼父也, 一是不得爲嗣也, 一是不得與士夫, 通同仕路也。 天地之於萬物, 爲大父母則人無貴賤, 竝不諱天字之釋, 獨孼子之於其父, 諱其父字之稱者, 其冤之固也。 雖然, 呼父一款, 初無朝家之禁條, 則特士夫家嚴嫡庶之致, 而各爲其父者之不受其呼也。 父之不受, 何不懇之於其父, 而訴之於君上也? 至於爲子而不得爲嗣者, 亦非天理人情之常, 以其父之血脈, 不得承祖禰之統者, 誠如渠言, 而固冤之又冤者也。 且嫡妾俱無子, 許令立後之文。 果載禮典, 而此亦各其爲父者之不遵禮典, 而立後者也。 父之所事, 誰怨誰咎? 父之於已出, 愛無貴賤, 而不以爲嗣者, 特慮其末流也。 所謂妾也者, 奔則爲之者也。 聘之以良家女者, 十之一二, 而公私婢之爲妾者, 十之八九矣, 終若以妾所産, 繼之嗣焉, 則爲嗣者之母一邊妻一邊, 皆爲戚屬, 而盡歸常賤也。 一開承嫡之路, 則無復士夫家樣子。 今日一家承嫡, 明日一家承嫡, 不幾年而混淆無別, 駸駸然入於蔑倫之域, 故所以父不得子其庶子也。 若其仕路之通同, 則由此不承嫡之致, 而其岐旣殊, 其窠自在。 雖以四百年來列聖朝均覆軫念之極, 諸名臣哀矜憫惜之深, 竟不得如願副之者, 爲其創國之制治, 不可移動故也。 渠輩雖極私情之痛冤, 何敢以更張移易等說, 瀆浼於章疏之間乎? 遵守與更張, 各有攸宜, 當遵而不當更正, 謂今日事也。 世道衰微, 人心汚下, 倫常紀綱, 日漸敗落之際, 又有此乖常之疏者, 是何光景, 是何道理? 萬千爲群, 氣勢可怕, 臣等不勝憂惋。 亟上一疏, 斥其猥屑, 在名敎斷不可已, 故學一齋同聲, 會坐停當, 疏論彼疏謹悉之前, 掌議臣李在臣, 自歸輕先之失, 故仍以合辭施罰。 而方始治疏之際, 忽地大司成臣鄭基善, 以齋儒之不稟擅罰, 施罰諸生。 又於今掌議臣李源膺之入齋, 以疏事停當, 合辭往復, 則以釋奠罷齋後停當之意爲約, 及乎罷齋, 以其違約之致, 半日相持, 終激支離, 東齋則全房出齋, 西齋則施罰班首矣。 及還其家也, 雖解兩齋之施罰, 臣等廁在縫掖之列, 由前則泮長之罰, 有難自伸, 由後則掌議之罰, 亦難自恕, 滿心慙恧, 措躬無所, 以此情踪, 何敢晏然入堂乎? 退伏私次, 恭竢處分云。" 敎曰: "庶類之訴冤, 卽列朝常有之事, 而未聞其時, 有捲堂起鬧之擧。 古之儒生, 豈不及今人而然乎? 雖以所懷言之, 旣曰天地間至冤之事, 又曰亦非天理人情之常云爾, 則諸生亦知之矣。 然則諸生在明倫首善之地, 宜曰訴冤之無怪, 亦宜以反天人之常爲說, 而今乃不顧其言之矛盾, 惟事噴薄可乎? 且泮長之施罰, 雖未知因何事端, 而以一施罰之故, 臚列泮長, 無所顧忌, 豈待以師儒之道理乎? 爲諸生深庸慨惜, 以此曉諭, 卽爲勸入。"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3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가족-가족(家族) / 신분(身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