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1월 24일 丁巳 1번째기사 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영중추부사 이시수 등이 왕세자의 관례에 대하여 의논하다

영중추부사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남공철 등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만약 선원 계파(璿源系派) 가운데에서 별도로 한 사람을 구하여 낙천군(洛川君)009) 의 후사로 정하고, 그 봉작(封爵)을 잇도록 허용한다면, 가장 변통의 적의(適宜)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김재찬(金載瓚)·한용귀(韓用龜)·김사목(金思穆)은 말하기를,

"일이 난중(難重)하고 조심스러워 감히 쉽사리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홍문 제학 김이교(金履喬)는 말하기를,

"왕세자의 관례는 소중한 예이며, 관례를 행하는 데 주인이 있음은 큰 의식입니다. 남연군(南延君)은 연고가 있고, 다른 종실에는 주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또 국가에 종반(宗班)이 없을 수 없다는 일로써 성유(聖諭)가 거듭 간절하여 심지어는 신 등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셨습니다. 명령이 내려진 이후 조정의 의논이 일제히 나왔습니다. 혹자는 ‘종반에게 봉작하고 대수를 늘여서 정하기를 성교(聖敎)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자는 ‘가까운 종친 가운데 후사가 없는 자에게 후사를 세우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 두 의논을 제외하고는 더 도리가 없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친족을 돈독히 하는 법에는 요(堯)임금이 구족(九族)을 친애한 것보다 앞설 것이 없습니다. 《서경(書經)》의 소(疏)에 이르기를, ‘구족은 고조(高祖)에서 현손(玄孫)까지의 친족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왕조에서 종친을 4대로 제한한 것 역시 이에서 본받은 것 같습니다. 주(周)나라는 동성(同姓)을 영세(永世)토록 봉건(封建)하였었는데, 그 형세가 소원(疏遠)한 데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친진(親盡)한 후손에게 비로소 봉건한 일은 없습니다. 한(漢)나라에 와서도 역시 그러하여 봉건은 영세(永世)에 미쳤으나, 종적(宗籍)에 속함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나라 조칙(詔勅)을 보더라도 친속(親屬)이 다하고 친속이 다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써 알 수 있습니다. 당(唐)나라·송(宋)나라로 내려오면서 봉건이 마침내 중지되고, 소원(疏遠)한 종성(宗姓)에게 봉작한다는 칭호는 대부분이 헛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희녕(熙寧)010) 때에 와서 단문친(袒免親)011) 외에는 명호(名號)를 내리거나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대수를 제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명(明)나라에서는 봉건에 친왕(親王)·군왕(郡王)의 구별이 있었고, 관작에는 장군(將軍)·중위(中尉)의 호칭이 있었으나, 적장(嫡長)의 세습이 아니면 증손 이하는 봉하여 작을 주지 않았으니, 이는 귀천으로 차등을 삼은 것입니다. 우리 왕조의 대군과 군은 명나라의 친왕과 군왕에 비기고, 정(正)과 수(守) 이하는 명나라의 장군·중위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4대로 제한하여 귀천으로 차등을 두지 않았으며, 봉작한 외에는 종실로 호칭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우리 조종조(祖宗朝)의 옛 법전입니다. 옛일을 인거(引據)하고 현재를 참고하며, 이것 저것을 헤아려 본다면 지난번에 아뢴 두 가지의 의논은 마땅히 가까운 종친에게 후사를 세우게 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집니다. 대체로 대수를 늘려서 정하자는 의논은 친족의 정의가 끊어져 소원한 뒤에는 다시 봉작을 의논할 수 없고, 근거가 될 만한 것은 오직 희녕의 단문례인데, 늘린 바는 1대[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옛 법전을 변통하는 것은 마침내 정중(鄭重)한 데에 관계되는 일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가까운 종친을 후사로 세우게 되면 이미 친진(親盡)이 아니어서 소원한 족속(族屬)이 아니고 후사를 잇는 데에 뜻이 있어서 변통하는 혐의도 없습니다. 신이 삼가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상고하건대, 귀종(貴宗)은 친진하여 모두 여러 대가 지났고, 오직 낙천군(洛川君)이 후사가 없으니, 지금 귀종의 후손으로 그 뒤를 세운다면 종친에 있어서 귀하게 되고, 족속(族屬)에 있어서 또 가까워지게 되며, 친진의 한계가 아직도 2대가 남게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낙천군에 후사를 세우는 것이 조가(朝家)의 경상(經常)의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성상이 종친에게 돈독하신 전지(傳旨)에도 맞습니다. 일의 편의함이 아마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규장각 직제학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동궁의 관례는 곧 나라의 막대한 경사이며 조계(阼階)에서 빈(賓)에게 읍하는 것은 곧 예문(禮文)의 소중한 절차입니다. 마침 종반의 사람이 핍절한 때를 당하여 심지어 세대를 늘려 정하자는 의논이 있기까지 하였고, 성교가 간절하여 자순(諮詢)이 널리 미치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종친의 적(籍)을 4대로 제한한 것은 곧 바꿀 수 없는 제도이며, 봉작의 예전(禮典)을 1대[一世] 연장하는 것은 진실로 비상한 조치에서 나온 일입니다. 무릇 드문 일이란 반드시 정확한 근거가 있어야만 현재에 있어 처음으로 만들어 시행한다는 혐의가 없고, 후세에 있어 장애가 될 우려가 없습니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는 아마도 이와 같은 사례가 없는 듯싶으니, 실로 인용하여 비유하기 어렵습니다. 송나라 대관(大觀)012) 때의 일을 상고하면 복왕(濮王)013) 의 후손은 대부분이 가난하였습니다. 조칙(詔勅)을 내려 ‘사(士)’ 자를 ‘중(仲)’ 자에 의하여 자(字)를 하지 않았었는데, 그 아들에 미쳐서는 모두 ‘사(士)’ 자에 의하여 은수(恩數)의 조례(條例)로 삼았습니다. 대체로 ‘중(仲)’ 자의 항렬(行列)은 곧 안의왕(安懿王)의 손자이며 ‘사(士)’ 자의 항렬은 곧 ‘중(仲)’ 자의 아들이니, 이것이 종적(宗籍)에서 세[世]를 끌어내린 한 증거입니다. 또 상고하건대, 경력(慶曆)014) 때에 종성(宗姓)에는 왕이 된 자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제서(制書)를 내려서 항렬이 높고 나이 많은 자를 택하여 봉(封)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혹은 친비(親比)로, 혹은 나이와 항렬로 하였고, 일찍이 친소(親疎)를 묻지 않고 범연히 항렬을 연장한 예는 없습니다. 지금 여러 종성의 자손 가운데에서 족속이 약간 가깝고 항렬이 가장 높은 자 1인을 가려서 특별히 봉작하신다면 옛날을 참고하고 현재를 참작하며, 시대의 적의한 제도에 의하여 아마도 일거 양득이 될 것이며, 정해진 제도를 삼가 지키는 한 가지 정밀한 뜻이 스스로 그 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 참판 윤익렬(尹益烈), 참의 한기유(韓耆裕)가 말하기를,

"나라의 큰 예로는 춘궁의 삼가례보다 중대한 것이 없습니다. 길일이 이미 선정되었고, 성대한 의식을 장차 거행하게 되어 빈(賓)과 찬(贊)의 여러 신하들은 각각 그 소임을 맡았으나 유독 종친 가운데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 옛날 한가할 때에 들은 바를 생각하시고 요즈음 종실의 조잔(凋殘)함을 민망히 여겨 특별히 종반의 세대를 늘여 정하자는 하교를 내리시고, 널리 조정의 의논을 자순한 말씀이 간절하셨으니, 신 등은 진실로 그지없이 흠송(欽誦)합니다. 삼가 《예경(禮經)》을 상고하건대, 5대까지 친등(親等)을 따짐은 주(周)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역대에 이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속적(屬籍)에는 5등이 있어 단문친(袒免親)이 아니면 명호(名號)를 내리거나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습니다. 국조(國朝) 종친 세대의 한계가 대체로 이에서 비롯되었고, 봉작이 4대에 그침은 공가(公家)와 친족(親族)의 세대가 4등에 내려가기까지 녹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선조(先朝)의 성교를 신도 삼가 받들었는데, 비록 이러한 하교는 있었으나 마침내 성명(成命)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때의 예를 행하기 위하여 정하여진 오랜 제도를 갑자기 변경한다면 아마도 경상(經常)의 법을 지키고 경장(更張)을 삼가는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또 어리석은 소견이 있습니다. 옛날 영묘조(英廟朝) 때에 특명으로 은신군(恩信君)015) 에게 연령군(延齡君)016) 의 제사를 받들라 하였고, 선조(先朝) 초년에 예조에 명하여 입안(立案)을 발급하도록 하였습니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함에 있어 ‘은신군낙천군의 뒤를 이어야 마땅하다.’고 아뢰니, 성비(聖批)에 이르기를, ‘다만 연령군의 제사만을 받들게 하고, 낙천군의 뒤를 잇게 해서는 부당하다.’고 하셨었습니다. 그후 대신이 아뢰기를, ‘은신군연령군에게 소목(昭穆)의 차례에 어긋납니다. 광평 대군(廣平大君)017)무안 대군(撫安大君)018) 을 곧바로 이은 전례와 같이 한다면 낙천군의 일은 난처하게 됩니다. 영묘(英廟)의 하교에 의하여 다만 제사만 맡게 하소서.’ 하니, 성비에 이르기를, ‘은신군은 비록 왕손이나 왕자의 예를 사용하므로, 뒤를 잇게 하기 어려움은 낙천군이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하였으나, 조금 뒤에 또 연령군의 봉사(奉祀)를 곧바로 정하는 명이 계셨습니다. 두 성조(聖朝)의 하교가 이와 같이 친절하므로 은신군연령군의 제사를 받듦은 더 의심할 것이 없으니, 낙천군은 드디어 후사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낙천군낙천군이 된 것은 곧 연령군의 계자(繼子)이기 때문입니다. 은신군이 이미 연령군의 제사를 받들었으니, 낙천군은 예법(禮法)에 있어 본종(本宗)으로 돌아가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 속적(屬籍)을 그대로 두어 《선원보(璿源譜)》에 기재되어 있으니, 비록 제사는 받들지 않았더라도 연령군의 아들이 됨은 진실로 본디 그대로 입니다. 그 종족을 돈독히 하는 지극한 인덕(仁德)이 있어 마땅히 끊어짐을 잇는 특은(特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친등(親等)의 한계가 이미 지난 여러 지손(支孫)에게 세대를 늘이기보다는 차라리 세대가 다하지 않은 가까운 종친에게서 후사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 여러 선원 계파 가운데 별달리 한 사람을 구하여 낙천군의 후사로 정하고 그 봉작을 잇도록 한다면 은신군에게는 대신 제사지낸다는 혐의가 없고, 낙천군에게는 의지할 데 없다는 탄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남연군(南延君)은 지금 비록 연고가 있기는 하나 낙천군을 이은 자가 자리를 갖추어 조계에서 빈에게 읍하는 반열(班列)에 진참(進參)할 수 있으니, 오직 이 한 가지 일이 때에 따라 변통하는 방법이 될 듯싶습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세대를 늘리는 일을 여러 의논들이 모두 난중(難重)하게 여기니, 경솔히 논의할 수 없다. 낙천군으로 연령군의 뒤를 잇도록 하는 의논은 비록 편의한 듯하나, 은신군연령군의 제사를 받듦은 곧 두 성조(聖朝)의 처분이므로, 경솔히 고칠 수는 없다. 지금 낙천군으로 뒤를 잇게 하고 연령군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함도, 예절에 있어서 어떠한지를 알 수 없으니, 이것도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인(主人) 문제는 다시 하교할 것이니, 이 수의(收議)는 우선 보류해 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43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註 009]
    낙천군(洛川君) : 이온(李縕).
  • [註 010]
    희녕(熙寧) :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 [註 011]
    단문친(袒免親) : 상례(喪禮) 때 단문복을 입는 친족. 곧 종고조부(從高祖父)·고대고(高大姑)·재종 증조부(再從曾祖父)·재종 증대고(再從曾大姑)·삼종 조부(三從祖父)·삼종 대고(三從大姑)·삼종 백숙부(三從伯叔父)·삼종고(三從姑)·사종 형제 자매(四從兄弟姉妹) 등의 총칭. 무복친(無服親).
  • [註 012]
    대관(大觀) :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
  • [註 013]
    복왕(濮王) : 송나라 영종(英宗)의 아버지.
  • [註 014]
    경력(慶曆) :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 [註 015]
    은신군(恩信君) : 진(禛).
  • [註 016]
    연령군(延齡君) : 이훤(李昍).
  • [註 017]
    광평 대군(廣平大君) : 이여(李礖).
  • [註 018]
    무안 대군(撫安大君) : 이방번(李芳蕃).

○丁巳/領中樞府事李時秀, 〔右〕 議政南公轍等議: "今若於璿派中, 別求一人, 定爲洛川之後, 許襲其封爵, 則最合變通之宜云," 判中樞府事金載瓚韓用龜金思穆以爲: "事係難愼, 不敢容易議到云。" 弘文提學金履喬以爲: "王世子冠禮, 禮之重也。 冠而有主人, 儀節之大也。 而南延君有故, 無他宗室, 可爲主人。 且以國家之不可無宗班, 聖諭諄複, 至令臣等博議。 命下以來, 廷議齊發。 或曰 ‘宗班封爵之延定代數, 如聖敎爲宜。’ 或曰 ‘近宗之無後者, 爲之立後爲宜,’ 捨此兩議, 更無道理。 臣伏而思之, 敦親之典, 莫先於親九族。 而《書》疏曰, ‘九族, 高祖至玄孫之親。’ 我朝宗親四代之限, 似亦取法於此也。 之同姓, 封建永世, 其勢不得不至於踈遠。 然未嘗始封於親盡之後也。 至亦然, 封建則永世, 屬籍則有限。 觀於詔, 屬盡屬未盡等語, 可知也。 以來, 封建遂息, 疏封之號, 多爲虛名, 故至熙寧中, 令袒免親外, 不賜名授官, 此其代數爲限之始也。 皇朝則封有親王郡王之別, 爵有將軍中尉之號, 而非嫡長世襲, 則自曾孫以下, 不封而爵, 此則以貴賤爲差等也。 我朝之大君與君, 視皇朝之親王、郡王、正守以下, 視皇朝之將軍中尉。 然限以四代, 不以貴賤爲差, 封爵之外, 不以宗室爲稱, 此實我祖宗朝舊章也。 引古參今, 左右思量, 向所陳兩端之議, 似當以近宗立後爲長。 蓋代數延定之議, 則親盡疏遠之後, 不可更議封爵, 可據者惟熙寧袒免之例, 而所延不過一世。 且況通變舊章, 終涉鄭重者乎? 若就近宗而立後, 則親旣不盡, 非疏遠之屬, 而義在繼絶, 無通變之嫌。 臣謹稽《璿源譜略》, 貴宗親盡, 皆過數代, 惟洛川君未有繼嗣, 今取貴宗之後, 爲立其後, 則於宗旣貴, 於屬又近, 親盡之限, 尙有兩代。 臣謂洛川君立後, 無違朝家經常之制, 有合聖上敦敍之旨。 事之便宜, 恐不出此。" 奎章閣直提學朴宗薰以爲, "東宮冠禮, 乃邦家莫大之慶, 阼階揖賓, 卽禮文所重之節。 適値宗班乏人, 至有延定之議, 聖敎懇惻, 諮詢廣及。 第伏念親籍之限四代, 自是不易之制, 封典之展一世, 亶出非常之擧。 凡係希曠之事, 須有的確之據然後, 在今無創行之嫌, 在後無掣礙之慮。 而國朝典故, 恐無似此事例, 實難援以爲比。 若稽 大觀中, 以濮王之後, 率多貧乏。 詔士字依仲字, 不字及其子幷依士字恩數條例。 蓋仲字行, 卽安懿王之孫, 而士字行, 卽仲字之子, 此爲宗籍引世之一證。 又稽慶曆中, 以宗姓無一王者, 制擇其行尊齒宿者封之。 以此觀之, 或以親比, 或以齒行, 未嘗有不問親踈泛延世行之例矣。 今若取諸宗子支中, 取其屬稍近行最高者一人, 特加封爵, 則援古酌今, 因時制宜, 庶乎兩得, 謹守定制之一副精義, 自在其中矣。" 禮曹判書李晩秀, 參判尹益烈, 參議韓耆裕以爲, "國之大禮, 莫有重於春宮, 三加之禮。 吉日已涓, 縟儀將擧, 賓贊諸臣, 各執其職, 而獨無宗親主事之人。 乃我殿下追昔年燕閑之承聆, 愍近日麟趾之凋零, 特降宗班世代延定之敎, 博詢廷議, 辭旨懇惻, 臣等誠不勝欽誦萬萬。 而謹稽《禮經》五世敍親, 自周道已然, 歷代因之, 屬籍凡有五等, 非袒免親, 不賜名授官。 國朝宗親世代之限, 蓋昉於此, 而封爵之止於四世, 如公與族食世降四等也。 先朝聖敎, 臣亦祗承, 而雖有是敎, 竟無成命。 則今爲一時之行禮, 遽變久遠之定制, 恐有違於守經法愼更張之義。 抑有一得之愚見, 昔在英廟朝, 特命以恩信君延齡君祀, 先朝初元, 命禮曹, 成給立案。 宗簿寺修《璿源譜略》, 以 ‘恩信當繼洛川之後’ 仰稟, 則聖批若曰, ‘只當奉延齡之祀, 不當爲洛川繼後,’ 其後大臣, 奏言 ‘恩信之於延齡, 昭穆違序。 若如廣平大君直繼撫安大君之例, 則洛川事難處。 請依英廟下敎, 只令主祀,’ 聖批, 若曰: ‘恩信雖王孫, 禮用王子, 難於繼後, 以洛川爲禰故耳。’ 尋又有直定延齡奉祀之命。 兩聖朝下敎, 旣若是丁寧, 則恩信之奉延齡祀, 更無可疑, 而洛川則遂爲無後之人矣。 夫洛川之爲洛川, 卽以延齡之繼子也。 恩信旣奉延齡祀, 則洛川, 法當歸本宗, 而至于今仍其屬籍, 載在《璿譜》, 雖不奉祀, 而爲延齡之子, 固自如也。 其在敦宗之至仁, 宜有繼絶之特恩。 與其延世於限已過之諸支, 莫如立後於代未盡之近宗。 今若於諸璿派中, 別求一人, 定爲洛川之後, 許襲其封爵, 則恩信無攝祀之嫌, 洛川免靡托之歎。 而南延今雖有故, 繼洛川者, 自可備位, 進參於阼階揖賓之班, 惟此一事, 庶或爲隨時變通之道。" 云。 敎曰: "延代諸論, 皆難愼則不可輕議。 洛川繼後之論, 雖似便好, 而恩信之奉延齡祀, 卽兩聖朝處分, 則不可輕改。 今繼洛川之後, 而不使奉延齡祀, 亦不知於禮如何, 此亦不可爲也。 然則主人一款, 更當下敎, 此收議, 姑置之。"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43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