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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己未 4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어제 장헌 대왕 지문

해시(亥時)에 현궁(玄宮)을 내렸다. 천전(遷奠) 때가 되자 정해진 절차대로 예를 거행하였다. 천원 도감에서 발인할 때의 절차대로 흰빛의 의장(儀仗)과 각색 초롱을 벌려 놓았다. 방상씨(方相氏)가 퇴광(退壙) 위에 이르러 창으로 네 귀퉁이를 두드리고 나왔다. 증옥(贈玉)과 증백(贈帛)을 수도각 안의 동남쪽에 벌려 놓았다. 섭상례(攝相禮)가 무릎을 꿇고 고하여 상여에 오를 것을 청하자, 재궁을 받드는 관리가 조예 무신들을 데리고 재궁을 받들어 상여에 올리고 수도각으로 나아가 녹로차(轆轤車)에 올려놓았다. 【녹로차는, 예전에는 굴대와 정지하는 기구의 제도가 있어 《오례의(五禮儀)》에 나타나 있다. 이때에 이르러 별도로 한 제도를 만들었는 바, 먼저 좌우 받침대를 놓는데 길이가 9자, 너비가 9치, 두께가 6푼이다. 좌우 받침대의 양쪽 머리 부분에는 모두 기둥을 세우는데 높이가 2자 6치이고 받침대에 들어가는 부위는 너비가 5치 5푼, 두께가 2치 5푼이다. 기둥의 윗쪽 끝에는 가로와 세로로 2개의 홈을 파내는데, 세로 홈은 깊이가 5치로서 그 밑을 둥글게 만들어 축(軸)이 들어가게 하고, 가로 홈은 깊이가 1치 5푼으로서 가름대[橫架]가 들어가게 한다. 축은 길이가 9자, 둘레가 1자 2치로서 앞뒤의 기둥 끝을 관통한다. 세로 홈의 위쪽을 향하는 둥근 구멍은 축이 놓이는 구멍보다 2치 5푼을 줄이며, 가름대의 좌우 기둥 끝에 홈을 파는 것은 네 기둥을 받침대에 튼튼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갈고리쇠[句鐵]는 모난 갈고리로서 속명(俗名)이 등자철(鐙子鐵)이다. 두 다리를 받침대에 꽂으며 다리와 다리 사이에는 밧줄이 들어가게 하는데, 그 수는 8개로서 좌우로 서로 마주 향하게 한다. 하나의 받침대에는 4개의 갈고리가 있는데 그 간격은 1자이다. 쇠통[鐵筒]은 속명(俗名)이 토시쇠[套手鐵]인데, 모난 갈고리의 위에 둘러씌우되, 그 안둘레를 헐렁하게 하여 마음대로 돌아가게 한다. 좌우의 축에는 모두 튼튼한 쇠이빨[鐵牙]을 박는데 그 길이는 1치쯤 되게 하고, 두 이빨이 맞물리게 하며, 그 사이에도 밧줄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하나의 축에는 8개의 이빨을 박는데, 그 자리는 네모난 갈고리를 보아 정한다. 밧줄은 베로 만드는데, 네 끝을 세로로 주름을 잡아서 꿰매되 모두 8겹으로 하며, 두 끝은 도로 꺾어서 갈고리를 만들고, 나무비녀[木簪]를 가로질러 나머지 두 끝에 꿰여 왼쪽 쇠이빨에 건 다음, 아래로 향하여 왼쪽 모난 갈고리와 오른쪽 모난 갈고리에 꿰고, 갈고리 위의 쇠통에다 비스듬히 위로 향하여 오른쪽 쇠이빨에 건다. 나머지 세 밧줄도 똑같이 한다. 축의 두 끝에는 십자로 교차된 두 폭(輻)을 끼우고 바퀴폭[輪輻]을 만든 다음, 테두리처럼 네 끝을 붉은 실띠로 연결시킨다. 두 받침대를 광중(壙中) 위의 좌우로 오가게 된 판(板)에 놓고, 판의 두 끝에는 못을 박아서 흔들리거나 돌아가는 것을 방지한다. 십자형 바퀴 4개는 힘을 같이 받아, 늦추어지거나 팽팽해지거나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차이가 없도록 하는데, 바깥쪽을 향하여 회전하면 밧줄이 풀려서 아래로 내려 드리우며, 안쪽을 향하여 회전하면 밧줄이 감기면서 위로 올라간다. 받침대의 안쪽 끊어진 부분에 해당하는, 모난 갈고리가 놓이는 곳은, 둥그렇게 하여 밧줄이 오가기에 편리하도록 하고, 기둥 끝의 둥근 홈에는 기름과 밀랍을 두껍게 바르는데, 수월하게 회전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퇴광(退壙)의 굴대판[輪對板]에 내려놓고 싸맨 것을 풀었다.

장생전 제조(長生殿提調) 이문원(李文源)이 가하우판(假下隅板)을 열고 외재궁(外梓宮) 안을 깨끗이 닦은 다음, 집사(執事)되는 자가 관(棺)을 싼 헝겊을 벗기니, 식재궁관(拭梓宮官) 김종수(金鍾秀)가 수건으로 닦아냈고, 내시가 유의(遺衣)를 그 위에 놓았다. 집사되는 자가 세 겹으로 된 관싸개[棺衣]를 덮고 명정(銘旌)을 그 위에 씌웠으며, 보삽(黼翣)·불삽(黻翣)·화삽(畵翣)을 관싸개 좌우쪽에 그렸다. 때가 되자 관을 절차대로 내려놓았다. 상이 곡을 하며 하직하는 예를 거행한 후, 구슬과 비단을 전하는 자리에 나갔다. 봉증옥관(奉贈玉官) 이만수(李晩秀)와 봉증백관(奉贈帛官) 서매수(徐邁修)가 각자 무릎을 꿇고 구슬과 비단을 올리니, 상이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에게 친히 전하였는데, 이재협이 무릎을 꿇고 받아서 퇴광(退壙)의 서쪽에다 놓았다. 【예법에는, 의복과 평소 즐겨 지니던 물건이나 그릇 따위를 놓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번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실컷 곡을 하고 절을 하였다.

장생전 제조가 외재궁(外梓宮)의 밑바닥 판자를 닫고 옻칠한 베로 그 이음새 부분을 둘러쌌다. 영의정 이재협이 봉폐(封閉)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봉폐관(封閉官) 박성태(朴聖泰)가 "신이 삼가 봉(封)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도장을 찍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9삽의 흙을 덮자, 총호사가 역군들을 거느리고 앞쪽에다 회(灰)를 다지는 동시에, 퇴광에 관보다 낮게 회를 채우고 지석(誌石)을 묻었다.

어제(御製)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현륭원(顯隆園)수원부(水原府) 화산(花山)에 있는데 계좌 정향(癸坐丁向)입니다.

기유년 가을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옛 원(園)은 체제상 결함이 많다고 건의하면서 고쳐 쓰자고 청해서, 드디어 화산에다 자리를 잡았는데, 점을 친 사람의 말이, 그 곳은 서려있는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하였으며, 대소 관원이 따르고 일반 백성들도 동조하였습니다. 이에 이해 겨울 10월 기미일에 이장(移葬)하고 원의 이름을 ‘현륭’이라고 고쳤습니다. 아, 불효한 이 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럽고 모질게 목석마냥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사를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그 뜻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지극한 심정으로 비나니, 아, 하늘이시여.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늘이 들어주는 것인데, 이 소자는 감히 기필코 이렇게 해야만 소자가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천하 후세에 떳떳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덕행(德行)을 들어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현궁(玄宮)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휘(諱)는 이선(李愃)이고 자(字)는 윤관(允寬)이다. 숙종 원효 대왕(肅宗元孝大王)의 손자이고 영종 현효 대왕(英宗顯孝大王)의 아들로 영빈 이씨(暎嬪李氏) 소생이다.

삼가 행록(行錄)을 상고하건대, 태어나시기 수삼일 전부터 상서로운 빛과 구름이 보이더니, 태어나시자 해와 같은 자표(姿表)가 사람들에게 환히 비치고, 울음소리는 큰 종을 치는 것과 같았다. 이에 영묘(英廟)가 매우 기뻐하시면서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세 종통의 혈맥이 끊어질 뻔하더니,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시었다. 숙묘(肅廟) 경오년의 고사를 따라 곤전(坤殿)의 아들로 삼아 ‘원자(元子)’로 칭호를 정하도록 하였으니, 이때가 을묘년 정월 21일이었다.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중외에 대사령(大赦令)을 베풀었다. 뛰어난 자질이 숙성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벌써 두세 살짜리 아이와 같았는데, 영묘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들어와 보도록 명하시고는, 이어 가까이 모시는 신하더러 ‘성(誠)·경(敬)’ 두 글자를 써서 들어 보여주게 하였더니, 마치 조심스레 받듯이 자세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 보양관(輔養官)과 상견하는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효경(孝經)》의 장구(章句)를 뽑아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날마다 앞에서 외워 익히게 하였다.

병진년에 세자로 세웠는데 3월 15일에 의장과 호위를 갖추고 양정합(養正閤)에서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연신(筵臣)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저하(邸下)가 효묘(孝廟)의 모습을 매우 닮았으니 이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복입니다.’고 하였다. 영묘께서 궁관에게 문왕 세자편(文王世子篇)을 병풍에 써서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글자의 뜻을 이해하여 ‘왕(王)’ 자를 보고서는 영묘를 가리켰으며, ‘세자(世子)’라는 글자를 보고서는 자기를 가리켰다. 그 뿐만 아니라, 천(天)·지(地)·부(父)·모(母) 등 63자를 해득하였다. 정사년에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고 《효경》《소학》의 글을 뽑아 강독하였는데, 궁관의 진독(進讀)하는 것을 해득하고는, 손으로 ‘문왕(文王)’이라는 두 자를 궁관에게 짚어보이었다. 궁관이 소리내어 읽어보기를 청하니, 읽는 소리가 또렷하여 몇 줄을 읽도록 착오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큰 글씨로 다섯 글자를 썼는데 획이 힘차고 바르며 전실(典實)하였다. 궁중(宮中)에서 언젠가 한 번은 팔괘(八卦) 모양의 가루떡을 올렸는데, 이를 들지 않고 말하기를, ‘팔괘를 형상한 떡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복희도(宓羲圖)를 찾아보고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앞에 내걸도록 한 다음, 여러 번 절을 하면서 공경심을 나타내었다. 역학(易學)에 깊이 심취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 해 가을에 비로소 사부와의 상견례를 거행하였다. 천자문(千字文)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 자에 이르러서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를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다.’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 영묘께서 일찍이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물으니, 무명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으며, 또 어느 것을 입겠느냐고 물으니,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하였다. 영묘께서는 이에 기뻐하시고는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이와 같음을 말하였다. 자란 후에는 항상 무명옷을 입었으니, 검소한 덕행은 타고난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역적들의 음모에서는 도리어 화를 뒤집어씌울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이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어느날 하루는 저녁상을 받다가 영묘께서 부르시자, 입안에 넣었던 밥을 즉시 뱉고는 대답을 하면서 일어났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하고 물으니, ‘《소학》에 이르기를 입에 밥을 물었으면 뱉어야 된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영묘께서는 ‘이제 겨우 세 살 밖에 안 되었는데도 체인(體認)의 공부를 안다.’고 말씀하였다. 무오년에 영묘께서 빈청(賓廳)의 경연(經筵)에 임어하셨는데, 이조 판서 조현명이 앞으로 나서서 아뢰기를, ‘신은 빈청의 경연에 참여하는 관리로서 동궁(東宮)에 있는 세자를 바라보니, 슬기로운 자질이 뛰어나고 영특한 기개가 호방하여, 천고에 보기드문 기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육하는 방법에서 서두르거나 방치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성취에 대한 책임은 전하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그후 소조(小朝)가 말씀하시기를 풍원(豊原)058) 의 이 말은 나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우를 시종 일관 변함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고 하였다.

기미년에 영묘께서 묘당에 비망기를 내리어, 을유년의 옛 전례에 따라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지 이제 15년이다. 임금 자리를 마치 초개처럼 여기고 있는데, 다행히도 세자가 벌써 만 5세가 되었다. 내가 비록 자리를 내놓는다고 한들 어떻게 백성들을 홀시하겠는가. 송 태종(宋太宗)의 「나를 어떤 데에다 두려는가.」라는 말059) 은 이것이 무슨 마음인가.’라고 하였다. 명령이 내리자, 조정 신하들이 극력 간청하였으므로 그만 중지하고는, 이어 세자에게 명하여 시민당(時敏堂)에서 축하를 받게 하였다. 그것은 임금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바로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에 왕대비에게 휘호(徽號)를 올렸는데, 법복(法服)을 갖춰 입고 예식을 진행하는 동안, 동작에 법도가 있어 전연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궁중에서 다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였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궁관(宮官) 조중회(趙重晦)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을 단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기에 비상하여 의젓하기가 어른과 같으니, 이것은 정말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입니다. 4, 5일에 한 번씩 요속(僚屬)들을 만나며 8, 9일에 한 번씩 빈객을 만나는 것을 규례로 삼으소서.’ 하니, 그 의견을 따랐다. 이때부터 늘 서연에 나왔는데, 두어 번도 훑어보기 전에 벌써 암송을 해냈으며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임술년에 종묘에 참배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예식이 끝난 다음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곁에 있기에 언제 사묘(私廟)에 갈 것인가를 물었더니, 그가 8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예절을 표시하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사묘에 나아가 참배하였는데, 도성 백성들이 슬기로운 모습을 바라보고 춤을 추며 환성을 질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예의범절을 익히어 거동함에 착오가 없으니, 신령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해 3월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유생의 옷차림을 하고 문선왕(文宣王)에게 술을 따라 올린 뒤 명륜당(明倫堂)에 이르러, 박사(博士)의 자리 앞에 나아가 《소학》제사(題辭)를 강론하였는데, 반수교(泮水橋)를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한 번은 학문을 강론하다가 강관(講官)이 세자에게 평소에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요(堯)·순(舜)을 배우고 싶을 뿐이고 이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강관이 물러나와 말하기를, ‘삼대(三代) 때와 같은 태평 성대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효제(孝悌)와 성경(誠敬)에 힘쓰라고 권면하는 자가 있자, 즉시 이 네 글자를 써서 자리 곁에 붙여두었다. 강관이, 정성[誠]과 공경[敬]을 공부함에 있어 어느 것이 우선적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물으니, ‘정성과 공경은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둘로 가를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궁관(宮官)이 직접 지은 시를 보자고 청하여, 그 가운데 ‘해가 동방에 떠올라 온누리를 비추네.’라는 시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 시구의 기상은 예조(藝祖)일출시(日出詩)060) 와 꼭 들어맞는다.’고 하였다.

계해년 3월 17일에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는데, 법복(法服) 차림으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언제인가 한 번은 영묘(英廟)를 옆자리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영묘께서, ‘우리 나라의 조정 관리들은 예로부터 당파의 논의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만두게 할 수 있는가?’고 물으니, ‘똑같이 보고 함께 등용하면 될 것입니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영묘는 매우 기특히 여기고 기뻐하였다. 영묘께서 정사를 보면서 간혹 밤이 이슥할 때까지 있으면,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잠을 잤다. 또 글을 읽을 때면 반드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므로, 영묘는 늘 그만하도록 하곤 하였다. 병이 나서 영묘께서 임하여 살피시는 경우에는, 반드시 의복을 입고 일어나 앉았으며, 혹시라도 괴로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궁중기문(宮中記聞)》에 의하면, 갑자년 1월 11일에 혼례(婚禮)를 치렀는데, 영의정인 풍산 홍씨(豊山洪氏) 홍봉한(洪鳳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흘만에 빈궁(嬪宮)과 함께 임금을 따라 종묘에 참배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혜성의 이변이 발생하였는데, 혼례를 치를 때가 되자 혜성이 갑자기 없어졌다. 상이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061) 의 편제(篇題)를 써서 궁관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묻기를 ‘마음을 어찌하여 거울에다가 비기고 정성과 공경을 어찌하여 가는[磨] 일에다 비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공경은 위와 아래를 관철하는 수양이고, 정성은 진실함을 뜻하는 말로서, 정성과 공경이 곧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입니다.’고 하였다. 빈객(賓客) 이종성(李宗城)이 이어 이 설을 부연(敷衍)해서 대답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진지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성의에 감동되어 매우 융숭하게 대우를 하였다. 그해 겨울에 상이 편치 않다가 병이 낫게 되자, 진연례(進宴禮)를 거행하였다. 이윽고 강석(講席)에 임하시니, 강관이 묻기를, ‘서연에 나와 글을 읽는 것과 연회에 참가하여 음악을 듣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이치를 탐구하자는 것이고 음악을 듣는 것은 곧 어른을 모시고 즐기려는 것이니, 글을 읽는 것이 좋은 일임은 분명하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은 일이다.’고 하였다. 을축년에 상이 상훈(常訓)을 지어 가지고 읽으라고 명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글자의 음을 더듬거리지 않고 읽어내고, 부연해서 대답을 하는 말에도 근거가 뚜렷하니, 이야말로 신령이 말없이 돕고 요속(僚屬)된 자들이 잘 인도한 덕분이다.’고 하였다. 그해 봄에 주강(晝講)을 행하여 《소학》을 강론하면서, 북제(北齊)의 태자(太子)가 고윤(高允)을 두둔한 문제를 놓고 궁관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잘못한 것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고윤이 사실대로 쓴 것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의 원칙이고, 죽일 만한 죄가 아니다. 이러한 뜻으로 두둔하다가 태무(太武)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해도 될 일이다.’라고 하였다.

병인년 봄에 상을 모시고 후원에서 벼를 심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농사짓는 일이 어째서 힘들다고들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무더운 여름에 물이 펄펄 끓듯이 뜨거운데도 농사꾼들은 농기구를 가지고 일을 하니 그 고생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상이 풍경을 보고 시를 지어보라고 명하시고는, 이어 지은 시를 보고서 말씀하시기를, ‘수구(首句)는 가뭄을 걱정하여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고 낙구(落句)는 나더러 덕을 닦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넘어섰는데도 세자로부터 더 힘쓰라는 말을 들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갸륵하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이어 야대(夜對)를 행하고 말씀하시기를, ‘오늘 세자의 시를 보니, 뜻이 크고 원대하다. 「큰 비가 내린다.」는 한 구(句)는 대풍가(大風歌)062) 의 기상이 있으니, 나의 마음은 이로부터 믿을 데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궁관과 더불어 신축(辛丑)·임인(壬寅)년에 있었던 일063) 을 논하였는데, 의리(義理)의 근원을 환히 변론하였고, 이어 애일잠(愛日箴)을 내리어 자기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때 상이 몸조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약원(藥院)의 신하들을 불러 만나보자 부제조(副提調)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어제 세자가 밤이 새도록 곁에서 모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체로 효도라는 것은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종묘와 사직의 복입니다.’고 하였다. 또 상이 친히 권학가(勸學歌)를 지어 깨우치면서 말씀하시기를, ‘세자가 근래에 다시 글읽기에 열중하여, 비록 밤이 이슥해진 후에도 일어나 앉아 독서를 하고 있다. 내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세자의 글읽는 소리를 듣노라면, 기운이 한결 솟는다.’고 하였다.

정묘년에 궁중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慶德宮)에 피우(避寓)하도록 명하였으나, 매양 삼전(三殿)에 오랫동안 문안을 드리지 못하는 점을 염려하며 지냈다. 어떤 연신(筵臣)이 상에게 이 일을 아뢰자,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씨가 갸륵하다.’라고 하고는, 당장 그날로 임어하였다. 상이 대궐로 돌아올 때 미쳐 또 다시 몸소 문안을 드리겠다고 자주 청하므로, 상이 처소에 돌아오도록 특명하였다. 한 번은 친히 보리를 심으니, 묻기를, ‘심을 만한 물건들이 많은데 기이한 꽃이나 특이한 나무를 심지 않고, 꼭 보리를 심은 의도는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리는 곡물이므로 그것이 열매를 맺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해 5월에 상이 환경전(歡慶殿)에 납시어, 빈객(賓客)·춘방(春坊)·계방(桂坊)의 관원들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서연을 열고는 저녁이 다 되도록 강독하고 논란하다가 파하였다. 상이 대단히 기뻐하여 세자궁의 요속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겨울에 또다시 경덕궁으로 피접(避接)하였는데, 이듬해 무진년 봄에 이르러 궁관으로 하여금 문안드리겠다고 청하였으나, 상이 그만두라고 유시하였다. 문안을 드리는 궁관이 갈 때마다, 꼭 부주(附奏)하는 것을 으레 하는 일로 삼았다.

궁관 이이장(李彛章) 등이 고사(故事)를 진언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치고 누구인들 큰 효자가 아니었겠는가마는, 공자께서 유독 우순(虞舜)을 칭찬한 것은, 일반 사람의 심정은 사물의 변천에 쉽사리 동요되지만 우순은 온 천하를 가지고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칭송한 것이다. 거친 밥에 푸성귀를 먹고 살던 때이건, 임금이 되어 비단옷을 입고 거문고를 뜯던 때이건, 우순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윤(伊尹)은 이 도(道)로 백성들을 깨우쳤는데, 이 도라고 하는 것은 곧 요(堯)·순(舜)의 도이다. ·은 남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고 이윤·보다 늦게 깨달았으며, 백성들은 그보다 더 늦게 깨달았다. 깨닫는 데는 크고 작음과 얕고 깊음이 있으나, 깨달으면 마찬가지이고 도 또한 마찬가지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백리해(百里奚)우공(虞公)에게 간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맹자는 그를 슬기롭다고 칭찬하였으나 장남헌(張南軒)은 응당 간해야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간하지 않았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남의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남헌의 설을 옳게 여겨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진이를 좋아하는 성의가 있으면, 한 사람의 군자를 천거하는 것으로 충분히 수많은 소인들을 이겨낼 수 있다. 맹자설거주(薛居州)가 외톨이로 되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군자가 고립하게 되면 걱정스러운 점이 어찌 일개 설거주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기(氣)는 몸체에 차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잘 가꾸면 요(堯)·순(舜)이 되고 제대로 가꾸지 못하면 도리어 일에 해로우니, 예를 들면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그런 경우이다. 이는 기의 탓이 아니라, 요는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서연에 임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진 이와 사특한 이가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에는 나라의 흥망이 관계되어 있다. 곁에 있는 여러 대부들과 온 나라 사람들이 다들 말하는 이상, 쫓아내거나 승진시키는 데에 무슨 의심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신중하게 대하는 것은, 진정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과 공적인 것 사적인 것을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을 경우, 여론의 칭송과 비방을 또한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뭇사람이 비방하는 중에서도 광장(匡章)을 취하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중에서도 중자(仲子)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의 권도로써 판단을 내리고 취사를 한 다음에야, 주견이 흔들리는 것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지 않으면 태아검(太阿劍)을 거꾸로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화란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또 서연에 임어하여 맹자가 논한 바,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해 강론하면서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덕이 지극하여 온 천하가 다들 복종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들은 모두 못된 마음을 품고 백성들을 괴롭힌 자들이다. 천리(天吏)된 자로서 어찌 이런 자들을 정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일의 선비들이 반드시 「주(紂)의 못된 행실을 도와주었다.」거나, 「민심이 상(商)나라를 떠났다.」는 등의 말로 무왕(武王)을 위하여 변명하니, 이는 소견이 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선(善)이란 천하의 공리(公理)로서, 성심으로 즐겨 취한다면, 천하의 선은 모두 자기의 것이 된다. 이것은 위대하신 순임금의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아는 것이 명백하지 못하면 남의 착한 것을 알 수 없으므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식을 넓히는 것을 우선시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란 한 몸의 주재(主宰)인 셈이니, 잠깐 동안이나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 마음이 풀어지는 날이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利)치고 인의(仁義)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것이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의(義)와 이(利)로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맹자가 인의(仁義)만 얘기하고 이를 말하지 않았다는 이는 바로 의(義)·리(利)의 이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는 「관중(管仲)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맹자는 「관중이 쓰던 패도(覇道)는 증서(曾西) 같은 자도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때에 따라서 상황에 적절하게 한 말로 각각 일리가 있는 것이지, 공자맹자가 어찌 견해가 달랐겠는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군들 때를 제대로 파악한 그 뜻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죽었다. 이에 앞서 세자가 태어나시던 초기에 상께서 영빈(暎嬪)에게 말하기를,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는 것이니, 칭호를 정하는 이 초기에 마땅히 그 규모를 크게 하여, 일시의 보고 듣는 것을 존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백일이 지나자 세자에게 명하여 경묘(景廟)께서 전에 거처하시던 전각에 이어하도록 하고, 전각의 이름을 ‘저승전(儲承殿)’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관(女官)과 시인(寺人)들은 모두 전에 경묘를 섬기다가 갑진년과 경술년에 내보냈던 사람들로 충당하였는데, 그것은 누명을 벗겨 불안해하는 자들을 안심시킴으로써 화기(和氣)를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도리어 남몰래 자기들이 득세한 점을 다행으로 여기고서, 얼마 지나지 않자 주둥이를 놀리고 손뼉을 치면서 자기들 무리에게 타이르기를, ‘영빈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하였으나 이는 사친(私親)이다.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는 만큼 자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만날 때는 반드시 빈(嬪)으로서 정전(正殿)에 나아가 뵙는 예법을 적용하여 예절과 의식 절차 틈바구니에 제약을 받게 해놓았다. 그리하여 영빈은 자주 가보지 못하고 하루에 한 번이나 하루 건너 한 번, 또는 며칠 건너 한 번 가기도 하고, 간혹 한 달에 한두 번 가기도 하였다. 꾀가 이미 이루어지자 이번에는 또 대조(大朝)께서 자주 임어하시는 것을 꺼리어, 궁궐의 골목에다 사람들을 늘여세워 임금의 동정을 엿보았으며, 날마다 허튼소리를 퍼뜨려 현혹을 시켰다. 세자가 이런 상태를 상에게 자세히 아뢰자, 상이 그제서야 후회를 하였다. 그러나 여관과 시인들은 곧 경묘조 때에 있던 오래된 자들이었으므로 차마 사형에 처하지 못하였으나, 상의 뜻은 자연히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때에 옹주가 울면서 아뢰기를, ‘일이 경묘와 관계된다는 것은 그 혐의가 매우 적고, 세 종통의 혈맥은 관계된 바가 매우 큰 것인데, 어떻게 일시적으로 혐의를 없애기 위해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 때문에 두 궁(宮) 사이에는 화기가 점차 삭막해지고 있으니, 당장 통곡을 하며 세상을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고, 또 모빈(母嬪)에게 간절하게 간하였다. 이때 상은 집복헌(集福軒)에 있었는데, 저승전(儲承殿)과의 거리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묘년이 되자 경춘전(景春殿)에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거리가 가까운 편리함을 취하고 옹주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옹주는 갑자기 병이 나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다. 세자는 몹시 슬퍼하면서 변고에 대처할 방도를 깊이 찾았는데, 이 일을 아는 바깥 조정의 사람들은 다들 세자가 위태롭다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 우빈객(右賓客) 이종성(李宗城) 등이 위기에 임해 적절하게 호위할 것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였다.

기사년 봄에 세자에게 서정(庶政)을 대리(代理)하도록 명하였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정월 22일 밤 4경(更)에 상이 한 통의 봉서를 승정원에 내려보냈는데, 그것은 내선(內禪)에 관한 일이었다. 승지가 청대하여 되돌려 올리면서 아뢰기를, ‘조금 전에 덕성합(德成閤)을 지나왔는데, 세자가 벌써 등촉을 밝히고 앉아있었습니다. 그 놀라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이 더욱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윽고 세자가 대조(大朝)의 문 밖에 나아와서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입시하여 봉서를 뜯어보니, 처음에는 내선에 관하여 얘기했고 다음에는 대리(代理)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도로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세자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재차 명하였다. 세자가 어좌 앞에 나아가 엎드려 목메어 울면서 간곡히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부터 전례가 있던 일이니 놀라지 말라.’고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축년에 정사를 대리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서연에 임하였는데, 어찌하여 전하는 그날의 전하 심정을 가지고 세자의 오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임금이 비로소 깨닫고 명을 중지하였다. 이어 현명이 아뢰기를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도로 취소한다는 승인을 받았는데, 비록 두 번째 문제라고 하더라도 신들이 어찌 감히 받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세자가 여전히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상이 누차 명을 하자 비로소 물러갔다.

그로부터 6일 후에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대리 조참(朝參)을 행하였는데, 영지(令旨)를 내려 대소 신하들로 하여금 결백한 마음가짐으로 서로 협동하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보좌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도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업을 각별히 보살피도록 하였다. 또 경외의 혼례나 장례를 제 때에 치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청에서 돌보아주도록 하였다.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에게 아뢰기를 ‘신들이 초연(初筵) 때 내린 영지(令旨)를 보니, 누구인들 서로 전하며 고무되어 결백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합심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대리하라는 어명이 내렸을 때, 세자가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채 의롭게 대처하고 예절에 맞도록 한 일에 대하여, 외부 사람들이 듣고서 다들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세자가 나보다 낫다.’고 한 상의 하교로 인하여, 문수가 세자를 보살필 데 대한 말을 극력 진술하였으며, 또 며칠 뒤에는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을 돌봐주는 문제로써 면대(面對)하고 하교하시어 세자로 하여금 법을 따르게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의 가법(家法)은 엄격한 것이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줄곧 너무 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의 가법은 본래부터 이러하다. 옛날에 조심하는 마음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나 또한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서연(書筵)에서 《시경》을 강론하다가 궁관(宮官)에게 말하기를 ‘척호(陟岵) 편(篇)에서 자기가 부모를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만을 말하였다. 효자는 부모의 심정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며, 자기가 부모를 생각하는 심정도 자연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 《상서》를 강론하다가 말하기를 ‘요(堯)·순(舜)은 큰 성인인데도 그 신하는 오히려 게을리하지 말고 황탄(荒誕)하지 말도록 경계를 하였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고하는 도리는 응당 어려운 일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니 임금이 ·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신하가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은(殷)나라의 세 임금과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안일하지 아니한 까닭에 나라를 오랫동안 유지하였고, 순임금은 사람을 등용하여 일을 맡긴 까닭에 편안하여 임금 자리에 가장 오래 있었다. 이것이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안일하지 않아야만 편할 수 있는 법이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안일하지 않는 것을 제쳐두고 다른 무엇을 취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경오년 8월에 의소 세손(懿昭世孫)이 태어났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9월에 영묘께서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그 이튿날 비가 내렸다. 서울에 남아있는 대신(大臣)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을 불러 이르기를 ‘대가(大駕)가 떠나자마자 어제 비가 많이 내렸으니, 성상의 체후가 손상되셨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애가 타고 답답하여 경들을 불러 만난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어 서울에 머물러 있는 군사들을 위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로부터 대궐에 돌아올 때까지 거의 20일 가까이, 밤이면 옷을 단정히 가다듬은 채로 아침까지 밤을 새워 걱정하면서, 오랫동안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는 것 때문에 밤낮 그리워하며 걸핏하면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곤 하였다. 궁중에서 이를 매우 의아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이후로 부모와 처음 멀리 떨어지고 보니, 어버이가 그리운 마음에서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상의 수레가 돌아와서, 영묘께서 이 얘기를 듣고는 ‘세자의 일은 늘 상상 밖이다.’고 말씀을 하시었다.

기주(記注)에 의하면, 신미년 가을에 제도에 돌림병이 극성하자, 영지(令旨)를 내리어 방백(方伯)들에게 특별히 보살피고 돌봐주도록 신칙하였다. 임신년 봄에, 대조(大朝)께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제로 여러 날 정청(庭請)을 하니, 상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청명(請命)하는 거조를 행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울면서 내전(內殿)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가 편복(便服) 차림으로 걸어나가서, 임금 앞에 이르러 울면서 간청해 마지않으니, 자전(慈殿)에게만 존호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내전으로 돌아오자 세자가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날이 샐 때까지 합문(閤門)에 엎드려 있었다.

이해 3월에 의소 세손이 죽었는데, 세자는 스스로 마음을 다지어 슬픔을 억제하고, 위로 삼전(三殿)을 위로하였다. 9월에 원손(元孫)이 태어나자 하교하기를 ‘오늘의 경사는 경오년의 경사보다 낫다.’고 하였다. 겨울에 세자에게 홍역의 증세가 있었으므로 약원(藥院)이 직숙(直宿)을 하였는데, 인접할 때이면 반드시 예절을 차리었다. 여러 신하들이 침실에서 누워 접견할 것을 청하자 ‘겹옷 하나 걸치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신하들을 누운 채로 만나겠는가.’고 하였다. 이 무렵 조정의 의논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영묘께서 약을 물리치니, 세자가 승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4년 동안 대리(代理)하면서 성교(聖敎)를 몸받지 못하여 약을 물리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는가.’라고 하였다. 11월에 상이 어떤 일로 격해져서 전선(傳禪)하겠다는 하교를 내렸다가 금새 도로 취소하였다. 12월에 송현궁(松峴宮)에 행차하여 또 전선(傳禪)을 명하였고, 며칠 후에는 선화문(宣化門)에 나아가 앞서의 명을 다시 선포하였다. 세자가 엎드려 눈물을 떨구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청명(請命)을 하였는데, 이마에서 흘러 떨어진 피가 자리를 적시었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세자가 비오듯 눈물을 흘리니, 그 성의와 효성이 지극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취소하도록 허락하신 이상 식언(食言)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감기라도 걸릴까 몹시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중한 병을 앓고 난 후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종성 등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육상궁(毓祥宮)에 가니, 세자가 옷자락을 잡고 극력 요청을 하려 했는데, 상은 즉시 행차를 돌려 창의궁(彰義宮)으로 가서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이날 밤 세자가 걸어서 대궐문 밖에 나아가 상소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새벽까지 명을 기다리다가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도로 취소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는, 서둘러 궁궐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 다음날 밤에 또 대궐문 밖에 나아가서 엎드려 있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돈화문(敦化門) 밖에 물러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렸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날 계속하였다. 상이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으로 가려 하자 세자가 울면서 승지에게 말하기를 ‘나의 죽고 사는 것이야 진실로 돌아볼 것도 못되나, 이처럼 몹시 추운 때를 당하여 성체(聖體)에 바람을 쏘이니,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고는, 즉시 약원(藥院)의 신하로 하여금 상에게 인삼차를 다시 올리게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상이 비로소 대궐로 돌아왔으며, 앞서의 명을 취소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이 무렵 화협 옹주(和協翁主)의 상사(喪事)가 있었는데, 애통하고 아쉬움을 억제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 누이에 대해 각별히 고념(顧念)하는 정이 있는데, 이제 갑자기 죽었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기겠는가. 직접 가서 슬픔을 쏟아내지 못하는 처지가 나의 지극한 아쉬움이다.’라고 하였다. 계유년 정월에, 영의정 이종성이 탄핵을 당하여 성밖으로 나갔다가,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향리(鄕里)에 돌아갔다. 이때에 문녀(文女)064) 가 잉태를 하였으므로 중외가 뒤숭숭하였는데, 이종성이 호위하자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하마터면 딴 뜻을 품은 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을 뻔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너무도 모해(謀害)가 더욱 심해져서 종성은 성문 밖까지 물러나갔으나 끝내 향리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3월 초에 문녀가 딸을 낳자 비로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만큼, 시속 사람들이 내쫓으려 한다는 이유로 나의 평소 뜻을 움직일 수는 없다. 설사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퍼붓더라도 오직 나아가는 것뿐, 물러설 수는 없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일 따름이다. 이제는 다행히 옹주가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내가 귀향할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는, 드디어 글을 올려 향리로 돌아가겠다고 고하였다. 이에 세자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제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더라도 문녀의 일에 대해서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한다.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일월처럼 밝으신 대조(大朝)께서 어찌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지 않으리라 걱정하겠는가. 단지 뭇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염려를 상신(相臣)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겨울에 명을 받들어 사형수(死刑囚)들을 세 번 심리하였는데, 죽지 않고 목숨을 보전하게 된 자들이 많았다. 이후로는 해마다 이렇게 하였다. 밤에 궁관을 불러 강론을 하다가 자정이 되자, 공물로 올라온 귤을 궁관에게 하사하였다. 귤을 다 먹자 쟁반 안에 시(詩)가 있었는데, 궁료들이 즉석에서 차운시(次韻詩)를 지어 화답하였다.

갑술년에 각도로 하여금 환곡(還穀)이 많은 데에서 모아 부족한 쪽을 보태주는 정사를 거행토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스런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으며, 대동 군포(大同軍布)를 돈으로 대납(代納)하는 방납(防納)은 금지시켰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재예(齋隷)가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가지고 밤에 나오다가 순찰 도는 군졸에게 붙잡혔다는 이유로, 드디어 식당(食堂)에 들어가는 일을 중지하니, 하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유생들을 중시하는 덕의(德意)가 얼마나 큰데, 감히 하찮은 일로 소란을 일으키어 성인의 사당에 사람이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병조의 장관을 엄중히 문책하겠다.’라고 하고는, 재유(齋儒)들을 권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일찍이 《논어》를 강론하다가 삼월 불위(三月不違) 장에 이르러, 강관이 아뢰기를 ‘이는 공자(孔子)의 말씀인 만큼, 안자(顔子)의 이름을 휘(諱)하는 것은 부당합니다.’고 하니, 말씀하기를 ‘공자가 말을 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하대의 사람이다.’ 하고는, 드디어 휘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또 영지(令旨)를 내리어 밖에 있는 서연관들을 모두 참가하게 하고는 사물잠(四勿箴)을 강론하다가 말씀하시기를 ‘대저 사욕(私慾)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고 작은 것과 얕고 깊은 것이 있지만, 하찮은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점차 큰 과오를 빚어낸다면, 그 해로움은 마찬가지이다. 소열제(昭烈帝)가 말하기를 「자그마한 악(惡)이라고 해서 그 악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더없이 지당한 말이다.’고 하였다. 상께서 이를 들으시고 가상히 여기어 ‘학문을 강론한 효력이 참으로 얕지 않다.’고 하였다. 또 《소학》을 강론하면서 말하기를 ‘애연(藹然)하게 사단(四端)이 느낌에 따라 나타나는데, 일단 나타나게 되면 넓게 확충해야 되며,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도 모름지기 공경을 위주로 삼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발로되지 않았을 때에 공경을 위주로 한 다음에야 절도에 알맞게 발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경한다는 것의 뜻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손사막(孫思邈)이 이르기를 「마음은 조심하면서도 담이 커야 한다.」고 하였다. 무왕(武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맹진(孟津)을 건넌 것은 바로 씩씩한 기상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두려운 심정이다.」고 하였으니, 성인의 심소 담대(心小膽大)한 점을 여기에서 역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날씨가 추우니,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을해년 역변(逆變) 때 상이 장전(帳殿)에 납시어 죄수들을 국문하면서, 세자더러 옆에서 모시라고 명하고는 하교하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에 상소하였던 여섯 명의 역적과 구(耉)·휘(輝)065) 를 이제야 비로소 역률(逆律)을 소급해 시행하였다. 이제부터 의리가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목(綱目)》을 강론하다가 말하기를 ‘즉묵성(卽墨城)이 굳게 버티어 함락당하지 않은 일은, 위왕(威王) 때 상을 받은 대부(大夫)가 일찍이 보장책(保章策)을 시행한 공이 있어, 이 날에 그 힘을 본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의 총애를 받는 아홉 신하가 이미 전단(田單)을 참소하였건만, 오직 초발(貂勃)만이 그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나섰다. 이때 제(齊)나라 임금은 의당 「전단에게 사심(私心)을 두어 두둔하는 것이 아닌가.」고 의심을 했을 법한데, 의심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등용을 하였으니, 제나라 임금은 참으로 현명한 군주이다.’라고 하였다. 또 민지(澠池)의 회합에 대하여 논하기를 ‘협곡(夾谷)에서 만났을 때 공자가 예의로써 임금을 인도한 결과 제(齊)나라 임금이 겁을 먹고 감히 노(魯)나라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였다. 과연 상여(相如)공자처럼 처음부터 예로 따졌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힘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어진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황(黃)·로(老)를 숭상하고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정하였으며, 가의(賈誼) 같은 훌륭한 인재가 있는데도 등용하지 못하였으니, 끝내 후세의 기의(譏議)를 면하기 어렵다. 다만 가의의 상소문은 한갓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본질적인 병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동자(董子)가 주장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논의」에다 비교할 때 자연히 차등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조정의 일은 재상에게 맡기고 변방의 일은 장수한테 맡기고는,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에 이른바 「어진 인재를 찾아내는 데에 애쓰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데서 몸이 편하게 된다.」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현종은 어진 이를 찾아내는 데에 애를 쓰지 못하고, 단지 사람에게 맡기면 편하다는 것만을 안 나머지 천보(天寶) 연간의 난리066) 를 초래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한휴(韓休)소숭(蕭嵩)을 논할 때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 사적으로 얘기를 한 것은, 그가 이미 성심껏 어진 이를 좋아하지 못하고 억지로 거스르는 뜻이 있었으니, 이것은 계속적으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 아니다. 그 정치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위(衛)나라의 사군(嗣君)은 선대 임금이 물려준 토지를 일개 죄수와 바꾸었는데, 법을 세운 것은 엄격하였으나, 경중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악의(樂毅)가 제(齊)나라를 정벌할 때, 극신(劇辛)은 고립된 군대를 끌고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논란을 하였다. 그러나 위(魏)나라는 송(宋)나라를 공략(攻略)하고, 조(趙)나라는 하간(河間) 지역을 거머쥐어, 충분히 제나라의 군대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거에 성공을 하였다. 이 때문에 병법에서는 형세를 살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날씨가 무더우니 궁관이 서연(書筵) 시각을 개정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명령하기를 ‘아침 저녁에는 조금 선선하므로 글읽기에 알맞을 뿐 아니라, 대조(大朝)께서 한낮에 주강(晝講)을 하시는데, 내가 어찌 감히 더운 것을 꺼리어 시각을 고치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허락하지 않았다. 서연관 송명흠(宋明欽)이 현(縣)의 관원이 되어 하직 인사를 하니, 특별히 소대(召對)를 명하여 《대학(大學)》의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을 토론하였는데, 조용하게 주고받는 말이 마치 메아리와 같았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설을 송(宋)나라 황제는 듣기 싫어하였는데, 저하(邸下)께서는 심오한 뜻을 밝히면서 꾸준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여기서 저하가 학문에 진실한 마음으로 노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맹자(孟子)》를 강론하다가 궁관에게 말하기를 ‘우(禹)임금용사(龍蛇)를 내몰아 진펄에다 살게 하였는데, 는 어떻게 용사를 내몰았는가. 가 이미 물길을 터서 길을 뚫음으로써 늪을 진펄로 만들고 나자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용사가 따라간 것으로서, 이는 저절로 내몰아 쫓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세가 그러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성인이 때를 살피고 기미를 살피어 어디를 들어가든지 터득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도 역시 그 형세에 순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의 기미를 아는 것은, 시중(時中)의 성인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 5월 낙선당(樂善堂)에 화재가 났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세자가 영지(令旨)를 내리어 ‘불초한 내가 외람되게 대리(代理)를 받든 지가 벌써 8년이 되었으나, 어느 일 하나 성상의 뜻을 제대로 받든 것이 없이 늘 성상의 마음에 걱정만을 끼쳐드리며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신하들을 대하기가 참으로 부끄럽다. 다행히 우리 성상의 지극하신 인애(仁愛)에 힘입어 지내고 있는데, 삼가 어제의 하교를 받들자, 감격과 송구스러움이 교차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조정에 있는 대소 신하들은 나를 변변치 못하다고 보지 말고, 일에 따라 올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상이 그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세자의 자신을 탓한 말이 어찌 덕이 없어서 그리된 것이겠는가. 조상의 신령이 돌보아주심을 받은 셈이니, 대소 신하들은 우리 세자의 이 뜻을 몸받아 지성으로 보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궁중기문》에 의하면, 세자가 본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점은 궁중의 대소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이때에 그와 상반된 말이 돌았다. 세자는 성인의 가르침에 힘쓰지 못했다는 내용의 지시를 내리어 반성하면서 자책을 하였고, 또한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고 상 앞에 말씀드렸다. 이때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없는 일을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된다.’고 말하자, 답하기를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명철하신 전하께서 스스로 그것의 허실을 판별할 수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얼마 후에 상이, 세자가 영지(令旨)를 내리어 자신을 책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런 말이 나도는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고 하면서 누차 감격하고 깨닫는 의사를 드러내 보였고, 그뿐만 아니라 성의(聖意)를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다.

이에 앞서 화재가 발생한 이튿날 상이 여러 신하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근래의 일을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조정 신하들 중에 믿을 만한 자가 없다.’고 하니, 적신(賊臣) 김상로(金尙魯)가 대답하기를 ‘세자도 역시 두렵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승지에게 물으니,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아뢰기를 ‘세상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장차 이런 신하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승지가 한 말이 과연 옳다.’라고 하였다. 이장이 또 아뢰기를 ‘아비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들이 간하지 않는 적이 없는 법이니,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아비에게 간쟁하는 아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비로서 나무라지 않는 적이 없는 법이니, 그래서 옛글에 이르기를 「어진 아버지와 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자간에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나무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이른바 「아비는 아들을 위하여 허물을 숨겨주고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허물을 숨겨준다.」는 것은, 간쟁하고 책망을 하되 다른 사람들이 그 간쟁하고 책망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허물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하신 말씀은 실로 성인의 「허물을 숨겨준다.」는 말과는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드디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아뢴 말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승지 같은 사람은 이처럼 걱정을 하지만, 고약한 무리들은 반드시 듣고서 기뻐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장은 오히려 본사(本事)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만 아뢰고 말았던 것이다. 세자의 영지(令旨)가 먼저 내리고 임금의 전교(傳敎)가 뒤이어 내리자, 궁중과 외정(外廷)에서 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를 축하하여 말하기를 ‘감동하고 깨닫게 된 것은 성상의 인자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감동하고 깨닫게 만든 것은 역시 세자의 효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지(令旨)를 내리어 올곧은 말로 극력 간할 것을 구하였으며, 중외에 신칙하여 농사를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의 고충을 알아보았다. 이해 겨울에 두환(痘患)을 앓다가 회복되자, 축하를 올리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정축년 2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세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슬퍼 어쩔 줄 몰랐다. 빈소를 차릴 때부터 발인을 할 때까지 다섯 번의 전(奠)과 일곱 번의 곡(哭)을 할 때마다 죄다 친히 참가하여 그 성의를 나타내었고, 밤낮으로 울음소리를 거의 그치지 아니하였다. 왕실 친척들과 의식을 거드는 집사(執事)들이 다들 감격하여 찬탄하였으며, 중외에서도 이를 듣고 역시 눈물을 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슬픔에만 겨워 지내지 않고 있는데, 지금 세자가 깊이 슬퍼하는 것을 보니 어찌 슬픔을 누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아뢰기를 ‘지난번 성후(聖候)가 불편하셨을 때 숭문당(崇文堂)에 입시하였다가 삼가 동궁을 우러러보니 밤새도록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큰 병환이 생길까 염려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감정대로 슬퍼하게 놔둔다면, 틀림없이 몸을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보살피셔야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해 3월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또 세상을 떠나자, 상이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였는데, 세자가 곁에서 모시면서 정례(情禮)를 다하여 위로를 하였다. 6월에 정성 왕후를 발인하였다. 궐문 밖에 이르러 곡을 하면서 하직하였는데, 그 슬퍼함이 좌우를 감동시켰으며, 서울의 사녀들이 서로들 모습을 보려고 눈물을 훔치며 앞을 막았다. 길잡이들이 그들을 밀쳐내자, 사람을 다칠까 싶으니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우반(虞返) 때가 되자 교차(郊次)에서 신연(神輦)을 맞이하여 한동안 슬피 곡을 하였는데 자리에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고, ‘장례 행렬이 나의 의장(儀仗)과 서로 막히어 바라볼 수가 없으니, 대오를 나누어서 가게 하라.’고 하였다.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친히 지어 간직해 두었는데, 바깥 신하들은 모두들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로 본래 앓던 병이 매우 위독하였으나, 병을 무릅쓰고 두 혼전(魂殿)에 일곱 번의 우제(虞祭)와 삭망제(朔望祭)를 거행하였는데, 병이 위독해질수록 슬픔도 더욱 더하였다. 이때 보덕 윤동승(尹東昇)이 보살피면서 주선한 힘이 매우 컸는데, 매번 말하기를 ‘동승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나의 정리를 환히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무인년 가을에 상이 혼전(魂殿) 뜰에 엎드리어 구두로 주달(奏達)하였는데,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으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도승지 채제공(蔡濟恭) 등이 여러 승지와 사관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전하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신하된 자로서 감히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보지 않아야 하는 일이니, 누가 감히 붓을 잡고 기주(記注)에 옮겨 적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되돌려 올리고, 물러가 엎드리어 처단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어 소매 속에서 구두 주달(奏達)의 등본(謄本)을 꺼내어, 무릎을 꿇고 상의 앞에 놓았다. 한참 지난 후에 상이 이르기를 ‘말인즉 옳다. 내가 마땅히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이달 그믐에 상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임어하였는데, 세자는 시민당(時敏堂) 뒷뜰에 거적자리를 깔고 대죄(待罪)하였다. 영부사 이종성(李宗城)이 구대(求對)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40년 동안 학문에 힘쓰고도 이제 군신 부자간에 처신을 이렇게 하시니, 이것을 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또 나를 탓하니, 나는 장차 물러가겠다.’라고 하면서 이어 일어서려고 하였다. 대신이 영부사가 한 말이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품고 있는 생각을 다시 진술하게 할 것을 청하자, 종성이 다시 말하기를 ‘신의 말이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신하로서의 의(義)는, 대조(大朝)에 있으면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고, 소조(小朝)에 있으면 세자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일에 대하여, 신들의 심정은 물론이고 비록 모든 군사와 만백성이라고 하더라도 목을 빼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은,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 종묘 사직과 신인(神人)이 의탁해 있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바라는 것은 오직 과실(過失)에 대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고, 불행하게 과실이 있더라도 또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천리나 인정상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이유를 말할 것 같으면, 바로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전하와 동궁은 바로 한 몸이나 같은데 어떻게 둘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한 몸을 둘로 나누어 보시니, 이것을 신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 간사한 자들을 멀리하고 참소하는 자들을 물리칠 데 대하여 말머리를 꺼낸 후, 다 마치지 않은 채 물러갔다. 제공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시민당 뜰에 돌아와서 세자를 만나니, 세자가 자신을 탓하고 도움을 바라는 하교를 내리므로, 종성제공이 성의를 쌓아 임금의 마음을 돌려세울 방도에 대하여 번갈아가며 진술하였다.

《궁중기문》에 의하면, 이듬해 정월 영부사 이종성이 죽었는데, 죽을 무렵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제대로 죽을 수 없게 될 듯하다. 낙선당(樂善堂)에 입시하여 죽음으로써 스스로 밝히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명정전(明政殿)에 입시하여 또 죽음으로써 통렬히 진술하려 하였으나 그만 지레 물러나왔는데, 이제는 다 끝났다. 살아서는 나라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으니,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원혼(冤魂)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보고가 들어가자, 상이 놀라면서 오랫동안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었다. 세자는 흰 띠를 두르고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성복(成服)하는 날까지 고자(孤子)를 보살피고 제수(祭需)를 하사하기를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기묘년에 세손(世孫)의 책례(冊禮)를 행하였고, 중궁(中宮)의 책례를 행하였다. 행록(行錄)에 의하면, 세자는 중궁을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똑같이 섬겼으므로 궁중에서 모두들 효성(孝誠)이 독실하다고 우러러 보았으며, 영묘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세자가 내전(內殿)을 모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을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내전도 더없이 세자를 사랑하였다.

이 해에 훈국(訓局)에 《무기신식(武技新式)》을 반포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세자는 유년 시절부터 지도(志度)가 이미 뛰어나 놀이를 할 때면 반드시 병위(兵威)를 진설하곤 하였다. 상이 시험삼아 그의 소질을 떠보려고 물어보면 조목조목 대답을 해내곤 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일체의 행동 거지와 임기 응변하는 방도를 모두 손으로 그리고 입으로 대면서 혹시라도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병가(兵家)의 서적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당한 수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묘리(妙理)를 은연중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 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또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을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췄으며,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 그러자 궁중에서 서로들 말하기를 ‘풍원군(豊原君)이 연석(筵席)에서 효묘(孝廟)를 빼닮았다고 한 말에는 과연 선견 지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 장신(將臣)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책 하나를 엮어 이름을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고 달아 반포하였다. 이는 대체로 척계광(戚繼光)의 책에 실려 전하는 무예가 단지 여섯 가지 기예뿐으로서 곤봉(棍捧)·등패(籐牌)·낭선(狼筅)·장창(長槍)·당파(鐺鈀)·쌍수도(雙手刀)인데, 연습하는 규정에 그 방법이 대부분 잘못되었으므로, 옛책을 가지고 모조리 고증하여 바로잡았다. 또 죽장창(竹長槍)·기창(旗槍)·예도(銳刀)·왜검(倭劒)·교전 월도(交戰月刀)·협도(挾刀)·쌍검(雙劒)·제독검(提督劒)·본국검(本國劒)·권법(拳法)·편곤(鞭棍) 등 열두 가지 무예를 새로 만들어 도식을 그려가지고, 찌르고 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 책을 전서(全書)로 편찬하여 훈국(訓局)에 주어 연습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倭)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이니, 바로 옛날의 중원(中原)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변경에 경보가 없지만, 마땅히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하여야 한다. 더구나 효묘(孝廟)께서 뜻하신 일을 실현할 데가 없는 데다가, 북쪽 동산[北囿]의 한 자 되는 단(壇)은 나를 자다가도 탄식하게 한다. 아, 병기(兵器)는 비록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편안한 시기라고 하더라도, 성인들은 오히려 만들어 둠으로써 갑작스런 외적을 대처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에는 효묘께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도간(陶侃)이 매일 벽돌 1백 장씩을 날랐다는 말067) 을 외울 때마다 고요한 밤 한가한 때이면, 문득 스스로 시험하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술이라는 것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장부(臟胕)와 심장·간장을 비록 모조리 알기는 어렵지만, 모색(摸索)하고 유추(類推)하면 역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 나라를 치료하는 수법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진실로 약재(藥材)의 성질을 대강 알고 맥(脈)의 이치를 약간 안다면, 하루에 한 사람을 고치고 이틀에 두 사람을 고치면서 점차 숙련되어 자연히 한때의 명의가 될 것이다. 선비들의 학문도 의심을 가지는 데로부터 의심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인데, 더구나 의원이 의심을 가지고 의심을 풀어나가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처방만 내리면 당장 효험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재주라고 하여 유의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옛날에는 의복 제도가 각기 상징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 말하는 창옷[氅衣]과 소매가 둥근 옷[圓袂衣]을 나는 일찍부터 싫어했다. 창옷은 세 면이 막히고 뒤폭만 터졌는데, 그 형상이 음에 속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은 양에 속하고 이적(夷狄)은 음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창옷 제도가 나오자 비로소 북쪽으로 건주위(建州衛)와 통하는 조짐이 발생하였다. 둥근 소매 옷은, 앞면은 두 폭을 겹치고 뒤에는 한 폭을 늘어뜨렸으니, 이 역시 남쪽을 향하고 음을 등지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한가롭게 지낼 때이면, 반드시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학창의(鶴敞衣)를 입는데, 학창의는 사마광(司馬光)의 심의(深衣)를 모방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정복(正服)은 깃이 둥근 옷[團領]과 철닉[帖裏]인데, 깃이 둥근 옷은 바로 제왕들이 회동(會同)할 때 입는 옷이고, 철닉은 바로 황제(黃帝)의 의복 제도이다. 군복(軍服)의 경우, 소매가 좁은 것은 모두 옛 제도를 숭상한 것이고 싸울 때에 입는 옷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의 습속(習俗)에서는 미리 마련해두는 계책과 근검 절약하는 도리를 모른다. 미리 마련해두면 걱정이 없어지고, 검박하게 지내면 재물이 넉넉해진다. 지금의 의복과 그릇들 가운데, 화려하여 사치스런 감이 있거나 산뜻하여 몸에 편리한 것들을 나는 가까이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네들의 잘못을 나에게 와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고발한 사람과 고발당한 사람을 서로 대질시켜, 만약 증거가 없을 경우 고발한 사람을 죄주고, 설령 그런 사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양쪽을 다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남의 허물을 고자질하는 일이 조금 가라앉았다.’라고 하였다.

사직(司直) 박치원(朴致遠)이 글을 올려 힘쓸 것을 진언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답하였다. 후에 중신(重臣) 서지수(徐志修)가 연석(筵席)에서 진계(陳戒)한 것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전후로 세자의 덕(德)에 관련된 말을 한 자들은 다들 장려하는 말씀을 받았다.

일찍이 계방(桂坊)의 나삼(羅蔘)이 전에 서연(書筵)에서 입바르고 강직한 말이 많았다 하여 후에 궁료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안부를 묻곤 하였다. 하루는 궁관(宮官)이 시사의 염려스러운 것에 대하여 물어보는 자가 있자, 매우 엄하게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두 궁(宮)을 이간시키는 것이다. 도적이란 지목은 바로 이런 무리들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주(記注)에 의하면, 이때에 대궐 하인들 중에 영(令)이 내렸다는 핑계하에 민간에 나가 횡포를 부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일이 드러나자 즉시 유사(有司)에게 넘기게 하고는, 이어 영지(令旨)를 내리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이후로도 이런 폐단이 없을지 알 수 없다.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사(法司)가 곧장 스스로 판단하여 잡아다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진년 가을에 상이 경희궁(慶熙宮)에 이어(移御)하였다. 7월에 온천에 행행하였다가 8월에 환궁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이때에 세자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으므로 영묘께서 온천에 가서 목욕하라고 명하였다. 행차가 강가에 이르니 물이 불어나서 뱃길이 안전하지 않으므로, 날이 저문 후에야 비로소 건넜다.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 등과 함께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는 설(說)을 강론하였다. 그 이튿날 수원부(水原府)에 이르렀다. 부의 소재지 북쪽에 화산(花山)이 있었는데, 바로 기해년에 영릉(寧陵)을 표지해 둔 곳이었다. 거기에 올라가서 두루 둘러보고 좋은 곳이라고 감탄을 한참 하다가 처소에 돌아왔다. 산성에서 무예를 열병하였다. 행차가 지나는 길가에서, 부로들이 에워싸고 막아서서 다투어 바라보면, 번번이 행차를 멈추고 질고를 물어보고는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하였으므로, 일로가 크게 기뻐하였다. 어느 호위 군사의 말이 달아나 콩밭에 들어가서 마구 짓밟고 뜯어먹었는데, 지방관을 불러 밭 주인에게 값을 후하게 갚아주라고 하였으며, 호위 군사의 죄를 다스렸다. 고을 안의 나이 많은 자들을 돌봐주었으며, 시골에 파묻혀 있는 선비들을 간곡히 불렀다. 온천에 도착하여서는 날마다 강론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역대 임금들이 온천에 갔을 때에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던 옛일을 따른 것이었다. 절구시(絶句詩) 1수를 내리어 궁관에게 화답하라고 지시하였다.

달이 바뀌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것의 당부(當否)를 궁료에게 묻고, 이어 말하기를 ‘오랫동안 서울 궁궐을 떠나 있자니, 그리운 심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날 드디어 행차를 돌렸으며 곧바로 경희궁에 나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려 하였는데, 영묘지신(知申)068) 을 보내어 성밖에서 마중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앓고 난 뒤에 말을 달려 왔으니 마땅히 바로 돌아가서 몸조리를 하고, 조금 지난 후에 차차 와서 만나도록 하라.’고 하였다. 상신(相臣)이 나아가 뵙고 아뢰기를 ‘학어(鶴御)069) 가 한 번 임하자, 호중(湖中)의 인사들이 비로소 세자의 덕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부로나 서인들치고 덕의를 찬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신민의 행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번 행차 때 궁궐에서 나갈 때부터 행차가 돌아올 때까지 번번이 수봉(壽鳳)으로 하여금 경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농사에 손상을 입힌 것을 살피도록 하였다. 또 날씨가 몹시 무더운 때였으므로 약원(藥院)에 명하여 약을 조제하여 도중에서 더위를 먹은 장수와 병졸들을 구료하게 한 결과 돌아온 뒤에 한 사람도 앓는 자가 없었다.

신사년에, 당시에 조치해야 될 계책에 대해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대신들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관서(關西)의 고을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이는 상에게 명을 청하여 도적들의 모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신(賊臣) 홍계희(洪啓禧)가 내부에서 변란을 저지르려 하자, 세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재촉하여 곧장 돌아왔다. 이때 한 승지가, 상에게 아뢰어 조정 신하가 세자에게 올린 글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는데, 세자가 몸소 임금 앞에 나아가, 변란을 처리하려 했던 본의를 빠짐없이 고하니, 상이 그제서야 의심이 풀렸다. 후에 세자가 빈연(賓筵)에 임어하였을 때 상이 말하기를 ‘세자 또한 임금이다. 명색은 신하로서 섬긴다고 하면서 간악한 음모를 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역적 계희(啓禧)가 무엄하다는 내용의 하교를 잇따라 내리어 한(漢) 무제(武帝) 때의 간신 강충(江充)에게 비기었다. 이때로부터 음모가 더욱 긴박해졌다.

임오년 5월에 적인(賊人)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되었다. 기주(記注)《궁중기문(宮中記聞)》에 의하면, 경언이 형조에 글 한 통을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는 ‘전하의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불충한 생각을 품고 있어 변란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형조의 관리가 본조의 좌석으로부터 그 글을 소매 속에 넣고 청대를 하였는데, 이때 역적 계희는 기백(畿伯)으로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이 모두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고, 이어 형조의 관리가 그 글을 상에게 고하자, 상이 크게 놀라서 내시에게 묻기를 ‘경언은 대궐 하인 나상언(羅尙彦)의 족속인가?’라고 하니, 내시가 대답하기를 ‘상언의 형으로서 전에 대궐 하인으로 있던 자입니다.’고 하였다. 상이 역적 계희에게 묻기를 ‘궁성을 호위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니, 역적 계희가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궁성을 호위하는 일은 무신년에도 이미 행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즉시 성문을 닫고 군사를 동원하여 궁문을 파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사복시에 나아가 경언을 국문하자 경언이 옷의 솔기 안에서 또 하나의 봉서를 꺼냈는데, 길이는 5치를 넘고 둘레는 한 줌이 차는 것이었다. 그것을 올리니, 상이 보고 나서 좌상(左相)에게 보였는데, 좌상이 겨우 두어 줄을 보자마자 소리를 내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먼저 죽어야 하겠습니다. 동궁이 만약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신이 가서 위로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謩) 등이 말하기를 ‘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상을 속여 세자를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 죽여야 마땅합니다. 엄하게 국문하여 법대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니, 상이 비로소 형장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사서(司書) 임성(任珹)이 분연히 나서서 익모에게 말하기를 ‘흉악한 말을, 어찌 경언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익모가 또 사주한 자를 한시바삐 사핵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노하여 익모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대사간 이심원(李心源)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다.

익모 등이 이미 쫓겨난 다음, 경언이 세자를 무함하였다고 자복을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이구 동성으로 극률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동의금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여느 사람을 무함해도 오히려 역적이 되는데, 더구나 세자를 무함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악한 말은 이미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고 죄인이 이미 자복을 하였으니, 이러한 역적과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나서서 극력 말하였는데, 책망하는 하교가 누차 내렸건만 말은 갈수록 강직하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세자가 대궐문 밖에 걸어가서 대명(待命)하고 있다가, 상이 들어오라고 명하자 드디어 대궐 뜰에 나아와 엎드렸는데, 흐르는 눈물이 도포자락을 적시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정휘량(鄭翬良)이 비로소 접견을 청하여 아뢰기를 ‘죄인이 이미 세자를 무함했다는 네 글자를 가지고 자복한 이상 그 죄를 단 하루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에 경언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세자가 환궁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지극하신 자애심 덕분에 함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윤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궁묘(宮墓)의 호칭을 ‘수은(垂恩)’이라고 내려주었다. 7월 23일에 양주(楊州)의 배봉산(拜峰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사 지내는 날에 상이 광중(壙中)에 임어하여 어필로 신주를 썼다. 그 다음달에 조재호(趙載浩)를 북쪽 변방에 귀양보내었고 또 그의 조카인 조유진(趙維鎭)이 죄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대신(臺臣)이 법대로 처단하자고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저 동룡(銅龍)070) 을 쳐다보면 나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여러 신하들로서는, 마땅히 차마 말하지 못하는 나의 심정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라고 명하였고, 이어 말한 자에게 죄를 주었다. 유진은 여러 번 고문을 받았으나 항언을 하면서 두말을 하지 않았고, 원지(遠地)에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죽었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윤 5월 13일에 검열 윤숙(尹塾)이 대궐 뜰에 내려가니, 세자가 이마를 두드려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으므로 호위 구역 밖으로 뚫고 나가 의관(醫官)을 불러 약을 구해 가지고는 소조께 올렸다. 이때에 여러 대신들이 합문(閤門) 밖에 있으면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윤숙이 호위 군사들을 꾸짖고 몸을 빼어 뛰쳐나가서는 대신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왔다. 윤숙신만(申晩) 등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처럼 위급한 시기에 대신들이 대궐 섬돌에 머리를 찧고 죽기로 작정하면서 힘껏 간하지 않는다면, 장차 대신을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적신(賊臣) 구선복(具善復)홍인한(洪麟漢) 등이 각기 음흉한 꾀를 부리는 바람에, 윤숙은 마침내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이 사람이 아깝다고 연신 말을 하였다.

분사(分司)의 한림 임덕제(林德躋)가 뒤이어 뜰 아래에 엎드린 채 곁에서 떠나지 않으니, 상이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도 땅에 버티어 앉은 채 일어나지 않자 호위 군사가 끌어내려 했는데, 덕제는 꾸짖어 말하기를 ‘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잘릴지언정 끌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의현(旌義縣)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윤숙덕제를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후에 덕제를 등용하였다.

궁관 임성(任珹)·권정침(權正忱) 등은 한사코 나가지 않았으며, 분주서(分注書) 이광현(李光鉉)도 몸을 빼어 뛰쳐나가 의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사코 간쟁을 하니, 상이 노하여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일단 나갔다가 다시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자, 울면서 말하기를 ‘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겠습니다. 감히 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나가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패초(牌招)를 명하였으나 끝내 나아오지 않았다. 후에 묘소의 공사를 감독하는 직임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는데, 송영중(宋瑩中) 등이 대간(臺諫)으로서 다른 말을 꾸며 규탄을 하니, 상이 영중 등을 엄하게 배척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며, ‘나라가 어지러우니 어진 정승이 생각난다.’는 하교가 있었다.

분사(分司)의 제조 한광조(韓光肇)는 대궐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와서 관을 벗고 울부짖으니, 상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광조가 말하기를 ‘신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신이 한 마디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또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광조는 통곡을 하면서 기어나갔다. 그의 아비는 말하기를 ‘머리를 부딪쳐 죽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조신(朝臣)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반교(頒敎)하는 데에 불참하였다. 광조대정현(大靜縣)에 귀양갔다가 곧이어 석방되었다. 후에 상이 말하기를 ‘얼마 전의 처분을 내 자신이 뉘우친다.’라고 하였다. 광조가 세상을 떠나자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그 제문에는 ‘부자가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뜨거운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어 그의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승지 조중회(趙重晦)는 눈물을 흘리면서 극력 진술하니, 섬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가 곧이어 도로 취소하였다. 중회는 또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어 항언하며 굽히지 않다가, 원지(遠地)에 귀양을 당하였다. 후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야 꺾이지 않는 굳센 풀을 알 수 있다.’는 하교가 있었으며, 누차 승진을 시키어 이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제학 한익모는 소명을 다섯 번이나 어기면서 교문(敎文)을 짓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명분과 의리상 그럴 수 있는 것이니,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또 치사(致詞)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으나, 소패(召牌)가 모두 여덟 번이나 내렸어도 끝까지 나아오지 않고, 의금부에서 짚자리를 깔고 대죄하다가 삭직을 당하였다. 후에 누차 그를 칭찬하였으며, 발탁하여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승지 이익원(李翼元)은 극력 항거하면서 전교를 쓰지 않았으며, 승지 정순검(鄭純儉)은 전각(殿閣)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을 죽여 주소서. 신이 비록 죽을지언정, 감히 이 하교를 반포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총관 이태화(李泰和)는 관을 벗고 머리를 부딪치면서 극력 간하였는데, 후에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갑신년 가을에 입묘례(入廟禮)를 행하였는데, 상이 임어하여 살펴보았다. 을유년 5월에 제삿날을 하루 앞두고 시사(視事)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조정 신하들에게 윤음을 내리기를 ‘작년 이후 처음으로 이날을 맞는다. 경연을 정지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편함을 위한 것이겠는가. 아, 마음이 이와 같지 않다면 부모가 아닐 것이고, 또 어떻게 영혼을 위로하겠는가. 아, 신하들이 80을 바라보는 자기 임금의 오늘 심정을 알고 신하로서의 분수를 지킨다면, 부산을 떨고 세력 다툼을 벌이는 마음은 마치 봄눈이나 봄얼음과 같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고 하였다. 대신 등이 정섭(靜攝) 중에 계신 만큼 즉시 상선(常膳)을 드시라고 청하였다. 그 이튿날 또 수은묘(垂恩墓)의 헌관 홍낙인(洪樂仁)에게 명하여, 제사를 행한 후에 국내(局內)를 간심하고 돌아와 아뢰도록 하였다. 낙인이 연석(筵席)에 오르자,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상세하게 물었다.

가을이 되자, 상이 어의궁(於義宮)에 행차하여 세손(世孫)더러 사당에 가서 참배하라고 명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보내고는 옛일을 추억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이어 후원의 기슭에 걸어 올라가서, 담장에 기대어 한동안 멀리 바라보았다. 이후로는 매일 밤중에 번번이 문지방을 두드리면서 한탄하기를 ‘옛적에 사자궁(思子宮)망사대(望思臺)가 있었는데 내가 어찌 스스로 이런 처지를 당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때의 조정 신하들 가운데 과연 안금장(安金藏)071) 과 같은 충성심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이제 와서 협잡하여 다시 제기하는 것은 억하 심정인가.’라고 하였다.

무자년에 상이 전각 뜰에서 향 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는데, 효장묘(孝章廟) 이하 각묘의 향축(香祝)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압존(壓尊)이라는 이유로 즉시 몸을 굽히지 않자, 상이 성난 소리로 배참(陪參)한 신하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고, 이어 병조 판서와 시위(侍衛)한 신하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한 모퉁이의 푸른 언덕[靑丘]은 바로 조선이다. 세자의 신령을 맞이하는 의식을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감히 하지 아니하는가. 아, 수은(垂恩)아. 오늘의 여러 신하들 중에는 10년 동안 신하로서 섬기던 자가 많으니, 세자가 죽어서 무심하다고 말하지 말라. 무심 두 글자를 이런 경우에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자정전(資政殿)에 돌아와 대신과 제신들을 전각 앞에 불러놓고, 칙유(飭諭)를 내리어 10년 동안 신하로서 섬긴 의리를 알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에 대정(大政)을 행하였는데, 또 대소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아, 임오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자질(姿質)이 훌륭하였건만, 내가 정말 인자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인년에 왕부(王府)에 임어하여 하교하기를 ‘지난 일을 새삼스레 제기하여 나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은 반역하는 심보이다.’라고 하였다.

갑오년 여름에 가뭄이 들었는데 친히 묘소에 나아가 제문을 친제(親製)하고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세손(世孫)이 뒤를 따라갔다.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오늘 단비가 내릴 것이다.’고 말하고는, 이어 찬례(贊禮) 이하 행차를 따라간 근신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병신년 봄에 이르러 《정원일기(政院日記)》와 공가(公家)의 문적 중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의 차마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 내용은 모두 세초(洗草)하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세손(世孫)의 이 상소문을 보고 특별히 그의 청을 허락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슬픔을 견딜 수 없다.’라고 하고는, 옥루(玉淚)를 비오듯이 떨구었다.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밤낮으로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조종(祖宗)이 물려준 나라에 있다. 금번의 이 조처는 실로 나이 어린 아들을 위한 것이다. 아, 임오년 윤5월의 일기에 대하여 사도(思悼)가 까마득한 저승에서나마 아는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눈물을 삼키면서 「내가 장차 여한이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 때의 일기를 실록의 규례에 따라 승지와 주서가 함께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하도록 하라. 아, 내가 덕이 없는 탓에 만고에 없는 일을 당하였는데 말세의 인심이 수선을 떨고 있다. 비록 일기를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문자(文字)를 다시 제기하고 나선다면, 마땅히 무신년 못된 무리들의 잔당으로 쳐서 엄하게 징치할 것이다. 더구나 훗날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 임오년의 일을 언급할 경우, 마땅히 역률로 논죄할 것이니, 모두가 이것을 듣고 나라의 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어린 아들이 이미 면유(面諭)를 받들었으니, 내 이제는 마음놓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또 세손(世孫)에게 명하여, 묘소에 가서 전배(展拜)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누워서 세손의 오늘날 심정을 생각해 보건대, 어찌 다만 어린 자식의 심정뿐이겠는가. 나의 심정 또한 어떻겠는가. 오늘날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라 하였다.

《궁원의(宮園儀)》를 살펴보면, 병신년에 ‘장헌(莊獻)’이라는 시호(諡號)를 소급하여 올리고, 궁호(宮號)를 ‘경모(景慕)’, 원호(園號)를 ‘영우(永祐)’라고 고치었다. 계묘년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수덕 돈경(綏德敦慶)’이라고 하였으며, 갑진년에 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홍인 경지(弘仁景祉)’라고 하였다. 사당 내의 제례(祭禮)는 태묘(太廟)보다 한 등급 낮추었으며, 원의(園儀) 또한 이에 준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소세손(懿昭世孫)으로서 휘(諱)가 이정(李琔)이고, 차남은 바로 소자로서 이름은 이산(李祘)이다. 딸들은 광산(光山) 김기성(金箕性)오천(烏川) 정재화(鄭在和)에게 출가하였다. 서자가 3명 있는데 이인(李䄄), 이진(李禛), 이찬(李禶)이고, 서녀 하나는 당성(唐城) 홍익돈(洪益惇)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자손들에 대한 기록은 우선 옛 행장을 따라 간략히 쓰니, 오르내리는 신령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9면
  • 【분류】
    왕실(王室)

  • [註 058]
    풍원(豊原) : 조현명의 봉호.
  • [註 059]
    송 태종(宋太宗)의 「나를 어떤 데에다 두려는가.」라는 말 : 이는 송나라 태종이, 순화(淳化) 연간에 수왕(壽王) 항(恒)을 태자로 세운 후, 태자가 종묘에 알현하는 행차를 구경하던 서울 사람들이 ‘소년 천자(少年天子)’라고 추켜세우며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유쾌한 심정이 되어 측근에 있던 구준(寇準)을 불러 말하기를 "인심이 벌써부터 태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떤 지경에다 두려고 이러하는가."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송사(宋史)》 권281 구준열전(寇準列傳).
  • [註 060]
    예조(藝祖)의 일출시(日出詩) : 예조는 송 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을 가리킨다. 그가 아직 세력을 얻기 이전에, 어떤 자가 해돋이를 구경하면서 그에게 시를 읊어보라고 하였는데, 즉시 읊어내기를 "태양초출광혁혁 천산안산여화발 일륜경각상천구 축퇴군성여잔월(太陽初出光爀爀 千山萬山如火發 一輪頃刻上天衢 逐退群星與殘月)"이라 하였는 바, 이 시를 후인들이 일출시(日出詩)라고 일컬었다. 《경계시화(庚溪詩話)》 권상(卷上).
  • [註 061]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옛 성현들의 잠(箴)·명(銘)·찬(贊) 77수를 모아 엮은 책. 책이름은 주자(朱子)의 임희지를 전송하는 시[송임희지시(送林熙之詩)] 가운데 "고경중마요고방 안명편여일쟁광(古鏡重磨要古方 眼明偏與日爭光)"이라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책의 서두에 영조(英祖)의 어제(御製) 편제(篇題)와 시가 실려 있다.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 [註 062]
    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칭제(稱帝)한 후, 고향인 패현(沛懸)에 가서 옛 친구들을 불러모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면서 부른 노래로서, 내용은 "대풍기혜운비양 위가해비혜귀조향 안득맹토혜수사방(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이다. 《사기(史記)》 한고조본기(漢高祖本紀).
  • [註 063]
    신축(辛丑)·임인(壬寅)년에 있었던 일 : 1721년(경종 1)과 그 이듬해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당화(黨禍)를 가리키며, 일명 신임 사화(辛壬士禍), 임인 옥사(壬寅獄事)라고 불린다. 《당의통략(黨議通略)》.
  • [註 064]
    문녀(文女) : 숙의(淑儀) 문씨(文氏).
  • [註 065]
    구(耉)·휘(輝) :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 [註 066]
    천보(天寶) 연간의 난리 : 천보(天寶)는 당 현종(唐玄宗) 말기의 연호(年號)이다. 초기에는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개원 지치(開元之治)’라 불리는 유례가 드문 태평 성대를 이룩하였던 현종이, 나중에는 양귀비(楊貴妃)에게 혹(惑)하여 정사를 소홀히 하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을 초래하여 피난을 떠나는 등 말정(末政)이 불미(不美)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권5 현종기(玄宗紀).
  • [註 067]
    도간(陶侃)이 매일 벽돌 1백 장씩을 날랐다는 말 : 도간은 진(晋)나라 때 반양(鄱陽) 태생으로, 자는 사행(士行)이다. 그는 광주 자사(廣州刺史)로 재임하면서 업무가 한가한 때이면 아침에 벽돌 백 장을 손수 집 밖에 날라다 두었다가 저물녘이 되면 다시 집 안에 날라 들여놓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한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진서(晋書)》 권66 도간전(陶侃傳).
  • [註 068]
    지신(知申) : 도승지.
  • [註 069]
    학어(鶴御) : 세자의 행차.
  • [註 070]
    동룡(銅龍) : 동룡문(銅龍門)의 약칭. 동룡문은 한(漢)나라 때 태자궁(太子宮)의 문 이름이다. 여기서는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살던 집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
  • [註 071]
    안금장(安金藏) : 당(唐)나라 측천 무후(則天武后) 때의 충신. 당시 황사(皇嗣)로 있던 예종(睿宗)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誣告)가 일어나 황사의 측근들이 국문(鞫問)을 받던 중 다들 형신(刑訊)을 견디다 못해 자무(自誣)를 하려 하였다. 이에 안금장이 칼로 배를 그어 창자를 꺼내어 보임으로써 황사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권191 안금장전(安金藏傳).

○亥時, 下玄宮。 遷奠時至, 行禮如儀。 遷園都監陳素儀仗、各色燭籠, 如發靷儀。 方相氏至退壙上, 以戈擊四隅而出。 陳贈玉、贈帛於隧道閣內東南。 攝相禮跪, 贊請陞輴。 舁梓宮官率助舁, 武臣奉梓宮陞輴, 詣隧道閣, 陞轆轤車, 【轆轤車, 舊有回梁拘捧機制, 見《五禮儀》。 至是, 另創一制。 先置左右臺, 長九尺, 廣九寸, 厚六分。 臺兩頭, 皆植柱, 高二尺六寸, 入於臺, 廣五寸五分、厚二寸五分。 柱上端刳作縱橫二括, 縱深五寸, 其底圓以受軸, 橫深一寸五分, 以受橫架。 軸長九尺, 圓尺二寸, 貫前後柱端。 縱括之仰圓竅, 軸當竅處, 刳減二寸五分, 左右柱端橫括, 所以牽聯四柱兩臺也。 句鐵爲方鉤, 俗名爲鐙子鐵。 兩股揷于臺, 股間容繂, 其數八, 左右相對。 一臺四鉤, 間一尺。 鐵筒, 俗名套手鐵, 周篐方鉤之上, 寬其內圍, 使遊移活轉。 左右軸, 皆竪鐵牙, 其長寸許, 二牙爲比, 其間亦容繂。 一軸八牙, 其位照方鉤, 繂以布爲之。 四端縱摺而縫, 凡八重。 兩端反屈爲句子, 以木簪橫貫, 以貫餘兩端, 撘左鐵牙, 向下, 貫左方鉤、右方鉤, 挨當鉤上鐵筒, 向上, 撘右鐵牙。 餘三繂同。 軸兩端交午貫兩輻, 爲十字輪輻, 四端以紅線絛聯絡之, 如繅車。 安兩臺於壙上左右來往板, 板兩端着隱釘, 以防游動旋轉。 十字輪四輪齊力, 緩緊徐疾, 毋相先後。 向外旋則繅解而下垂, 向裏旋則繂纏而上收。 臺裏端折隅當方鉤處, 剡使圓, 便繂之往來, 柱端閫括, 厚塗脂蠟, 取其潤滑不聲軋也。】 降安于退壙輪對板, 解結裹。 長生殿提調李文源, 開假下隅板, 淨拭外梓宮, 內執事者撤棺衣, 拭梓宮官金鍾秀, 以巾拭之, 內侍以遺衣安于上。 執事者以三重棺衣覆冒之, 銘旌加於其上, 黼翣、黻翣、畫翣, 畫于棺衣左右。 時至, 下玄宮如儀。 上行哭辭禮, 就傳玉帛位。 奉贈玉官李晩秀、奉贈帛官徐邁修, 各以玉帛跪進, 親傳于領議政李在協, 在協跪受奠于退壙之西。 【禮有服玩明器, 而今不用。】 哭盡哀, 贊拜。 長生殿提調, 閉外梓宮下隅板, 以漆布匝其縫。 領議政李在協監封閉, 封閉官朴聖泰書臣謹封, 署押。 右議政金鍾秀覆土九鍤, 摠護使率役夫, 築前面旁灰, 仍實退壙灰比下玄宮, 埋誌石。 御製誌文曰

顯隆園水原府花山癸坐丁向。 己酉秋, 錦城尉 朴明源建言舊園體制多疵纇, 請改厝, 遂卜于花山。 卜云盤龍弄珠之象。 卿士從, 庶民從, 乃移葬于是年冬十月己未, 改上園號曰顯隆。 嗚呼! 小子不肖, 抱徹天極地之冤, 不死至于今, 冥然苟然頑然如土石者, 且有待於錫胤而托重, 得遂誕報之大願至祝。 天乎天乎! 人欲天從, 小子敢於此, 取必焉。 夫然後, 小子之生, 始可永有辭於天下後世也耶? 仍擧狀德之狀, 泣血謹識于玄宮狀曰, 諱, 字允寬肅宗元孝大王之孫, 英宗 顯孝大王之子, 暎嬪 李氏所誕也。 謹稽行錄曰: "自誕前數日, 有星雲之瑞, 及誕, 日表照人, 聲音如洪鍾。 英廟喜甚, 謂大臣曰: ‘三宗血脈將絶, 今則有歸拜列祖之顔矣。’ 命遵肅廟庚午故事, 坤殿取以子之, 定號爲元子, 卽乙卯正月二十一日也。 告廟社, 大赦中外。 睿質岐嶷, 未踰數月, 已如二三歲兒, 命諸臣入瞻, 仍令近侍, 書誠敬二字, 擧而示之, 諦視若謹受者。 秋, 行輔養官相見禮, 命抄《孝經》章句, 使左右日誦習于前。 丙辰, 立爲世子, 以三月十五日, 備儀衛行冊禮于養正閤。 筵臣趙顯命曰: ‘邸下克肖孝廟典型, 實宗社無疆之休也。’ 英廟命宮官書《文王世子篇》于屛以進之。 及是, 已解字義, 見王字, 指英廟, 見世子字, 自指之。 又解天地、父母等六十有三字。 丁巳, 始開書筵, 講《孝經》《小學》, 抄解宮官進讀, 仍手拈文王二字, 以示宮官。 請授音, 讀聲明亮, 至數行無錯, 又寫五大字, 心畫强正典實。 宮中嘗以八卦粉糕進, 不御曰: ‘形象八卦, 其可食乎?’ 尋見《宓羲圖》, 命左右, 揭于前, 屢拜而致敬。 邃於《易學》, 權輿乎此。 秋, 始行師傅相見禮。 讀《千字文》, 至侈字, 指所御半臂衣及紫羅珠帽曰: ‘此侈也’, 卽去之。 英廟嘗問紬與綿孰勝, 對曰: ‘綿勝。’ 又問服何者, 對曰: ‘當服綿。’ 英廟喜而對諸臣言如此。 及成長, 常御綿衣, 昭儉之德, 根自天稟, 而賊謀反以爲媒禍之階, 此國人之所共知也。 一日, 對夕饌, 英廟命呼, 卽吐哺, 應聲而起。 左右曰: ‘何遽也?’ 曰: ‘《小學》曰: 「食在口則吐之。」’ 英廟曰: ‘年纔三歲, 能識體認之工矣。’ 戊午, 英廟御賓筵, 吏曹判書趙顯命進曰: ‘臣待罪賓僚, 瞻望東宮, 睿質絶異, 英儁豪爽, 有凌駕千古之象。 蒙養之方, 宜不激不隨, 將來成就, 責在殿下。’ 後小朝敎曰: ‘豐原此語, 有心界之脗合者。 所以眷待之終始靡替也。’ 己未, 英廟下備忘記于廟堂, 準乙酉舊典, 行內禪之擧, 敎曰: ‘予卽位今十五年。 九五之位, 視若草芥。 幸有元良, 已滿五歲。 予雖釋負, 豈忽元元? 太宗置朕何地之說, 是何心也?’ 命下廷臣, 力請乃止。 仍命小朝受賀于時敏堂。 蓋因內禪之旋寢也。 夏, 上徽號於東朝, 具法服行禮, 進退有度, 未或失儀, 宮中咸嘖嘖。" 按記注曰: "宮官趙重晦疏言: ‘天日之表, 一瞻可知。 視瞻非常, 儼然若成人, 此實天縱之聖。 請以四五日一接僚屬, 八九日一接賓客爲式。’ 從之。 自是, 每臨講筵, 未過數遍, 已成誦, 久而無遺。 壬戌, 行廟見禮。 禮罷, 上敎曰: ‘元良侍傍, 問以私廟之行, 將在何日? 彼八歲猶欲伸禮。’ 後數日, 詣私廟, 展拜。 都民仰瞻睿姿, 蹈舞歡呼。 上曰: ‘世子禮容閑習, 儀度無錯, 陟降豈不悅豫乎?’ 三月, 行入學禮。 御儒衣冠, 酌獻于文宣王, 至明倫堂, 就博士席, 講《小學》 《題辭》, 環橋而觀者, 凡千萬計。 嘗講學, 講官仰問平日所欲學者, 答曰: ‘願學, 外此則不知已。’ 講官退語曰: ‘三代之盛, 可復見也。’ 又有以孝悌誠敬仰勉者, 卽書四字, 付之座右。 講官質以誠敬用功之先後, 答曰: ‘誠敬如車輪鳥翼, 不可分而二之也。’ 宮官請見睿藻詩中, 有日出東方明四海之句, 宮官賀曰: ‘此詩氣像, 同符藝祖日出詩。’ 癸亥三月十七日, 行冠禮, 以法服, 朝謁于大朝, 退受百官賀。" 按行錄曰: "嘗侍英廟坐, 英廟問曰: ‘我朝搢紳, 自古有黨論, 何以則已乎?’ 對曰: ‘一視竝用則可。’ 英廟大加嘉歎。 英廟視事, 或至夜分, 必整衣端居, 候就寢乃寢。 每讀書, 必竟晷忘倦, 英廟常令止之。 有疾, 英廟若臨視, 必進衣起坐, 未或以憊色, 見於外。" 按《宮中記聞》曰: "甲子正月十一日, 行嘉禮。 娶領議政豐山 洪公鳳漢之女。 粤三日, 與嬪宮, 從上行廟見禮。 先是, 有星孛之異, 至嘉禮時星忽不見。 上書《古鏡重磨》方篇題, 命宮官進講。 上問曰: ‘心何比於鏡, 誠敬何比於磨?’ 對曰: ‘敬爲徹上徹下之工, 誠是眞實之謂也, 誠敬, 乃治心之方也。’ 賓客李宗城, 仍敷衍以對, 言甚懇摯。 自是, 感其誠意, 際遇甚隆重也。

冬, 上違豫, 及瘳, 行進宴禮。 旣而臨講, 講官仰問曰: ‘臨筵讀書, 與參宴聽樂, 孰好?’ 答曰: ‘讀書, 所以窮理; 聽樂爲是侍懽。 讀書固好, 聽樂亦自爲好也。’ 乙丑, 上製常訓, 命進讀, 敎曰: ‘字音能續, 敷對有據, 寔賴陟降之陰隲, 爲僚屬者, 亦善導也。’ 春, 行晝講, 講《小學》北齊太子救高允事, 謂宮官曰: ‘太子非矣。 以子而欺父, 烏乎可也? 高允之直書, 史體也, 非可死之罪。 以此意救之, 太武如不從, 涕泣而諫亦可。’ 丙寅春, 陪上觀種稻于後苑。 上問曰: ‘稼穡奚謂艱難?’ 對曰: ‘盛暑水熱如湯, 而農人襏襫耕鋤, 艱難可想也。’ 上命以卽景賦詩, 敎曰: ‘首句卽憫旱望雨, 落句卽勉予修德。 予年已踰五旬, 而得元良加勉之語, 可愧亦可嘉也。’ 仍行夜對, 敎曰: ‘今日見東宮詩, 意思宏遠。’ 大雨行’ 一句, 有大風歌氣象, 予心自此有所恃也。’ 嘗與宮官, 論辛、壬事, 洞卞義理源頭, 仍下《愛日箴》以示意。 上在靜攝, 召接藥院諸臣。 副提調洪象漢曰: ‘昨見世子達夜侍側。 夫孝者, 百行之源, 而沖年能如此, 實宗社之福也。’ 上親製《勸學歌》以諭之, 仍敎曰: ‘元良近又勤讀, 雖於夜深之後, 起坐讀書。 予無寐, 時聞元良讀書聲, 氣益勝矣。’ 丁卯, 宮中有痘患, 命避寓于慶德宮, 每以久曠三殿起居爲憂。 筵臣有以白上者, 上敎曰: ‘沖年愛親之心可尙’, 卽日駕臨。 及還宮, 又以躬詣承候, 屢請, 上特命還次。 嘗親自種麥, 上問曰: ‘物之可種者多, 不種奇花異木而必種麥, 其義何取?’ 對曰: ‘以其爲穀而欲觀其成實也。’ 上大喜。 五月, 上御歡慶殿, 命賓客、春ㆍ桂坊入侍, 開書筵, 講讀論難, 竟夕而罷。 上大悅, 賞賜宮僚有差。 冬, 又移寓于慶德宮, 至翌年戊辰春, 令宮官, 請承候, 上諭止之。 每於問安, 宮官之行, 輒附奏以爲常。 宮官李彛章等, 進故事, 答以: ‘自古聖王, 孰非大孝, 而鄒聖之獨稱大舜者, 常人之情, 易隨物遷, 而則以天下不移也, 故稱之。 飯糗而茹草, 被袗衣鼓琴, 何與焉?’ 又曰: ‘伊尹, 以斯道覺斯民, 道也者, 卽所謂之道。 , 覺之先者也。 伊尹之覺, 後於, 而斯民又晩覺者。 覺有大小淺深, 覺則一也, 道亦一也。’ 又曰: ‘百里奚不諫虞公, 而孟子稱其智, 然張南軒謂使在當諫之地而不諫, 是爲不忠。 人臣事君之義, 當以南軒之說爲正。’ 又曰: ‘人君有好賢之誠, 則擧一君子, 足以勝衆小人。 孟子薛居州孤立無助爲憂, 君子孤立, 則可憂者, 豈獨一居州也?’ 又曰: ‘氣, 體之充也。 善養則爲, 不善養則反爲害事。 如 是已。 此非氣之罪也。 要在養之如何耳。’ 嘗臨筵敎群臣曰: ‘賢邪進退, 係國興喪。 左右諸大夫、國人固言之矣, 黜之、陟之, 更有何疑, 而猶且難愼者, 苟不明辨於好惡與公私之分, 則輿誦衆謗, 亦不可泥看。 此孟子所以取匡章於衆謗之中, 譏仲子於輿誦之際也。 須以吾之權度, 裁制取捨, 然後庶可免於搖奪。 不如是則太阿將倒柄矣。’ 御書筵, 講孟子論攸不爲臣之義, 敎曰: ‘德至矣, 天下咸服。 當是時, 不爲臣者, 是皆稔惡害民者也。 爲天吏安得不征之? 後儒必以助、離等語, 爲武王分疏, 其見局矣。’ 又曰: ‘善者, 天下之公理, 誠心樂取, 則天下之善, 莫非已有。 此大舜至公無私之心也。 然知不明則無以知人之善。 故爲學必先致知。’ 又曰: ‘心者, 一身之主宰, 不可斯須放失。 此心一放, 甚事可做?’ 又曰: ‘利莫大於仁義。 此《易》所謂: 「美利利天下也」 孟子言仁義而不言利, 政謂美利之利也。’ 又曰: ‘孔子則曰: 「微管仲, 吾被髮左袵」, 孟子則曰: 「管仲, 曾西之所不爲」, 隨時立言, 各有所當。 豈有異哉? 非聖人, 孰能知時之義乎?’ 是年夏, 和平翁主卒。 先是, 誕彌之初, 上敎暎嬪曰: ‘不重則不威。 當此定號之初, 宜大其規模, 以尊一時瞻聆。’ 過百日, 乃命小朝, 移御于景廟舊御之殿, 殿名曰儲承也。 女官、寺人, 皆以逮事景廟, 而逬出於甲辰、庚戌者, 悉充之。 蓋滌染汚安反側, 以導迎和氣也。 此輩乃反陰幸其得志, 居無何, 鼓吻抵掌, 戒其徒曰: ‘暎嬪雖誕世子, 卽私親也。 有君臣之義, 勿使之頻見’, 見必用嬪御謁正殿之禮, 以拘制於禮數儀節之間。 於是, 暎嬪不能頻造, 或日一至, 或間日間數日至, 或月一再至。 計旣成, 又忌大朝之頻臨, 列人宮巷中, 覘上動靜, 日以蜚語眩惑之。 小朝以此狀, 細陳於上, 上始悔之。 然女官、寺人, 卽景廟朝舊物, 不忍寘之辟, 而聖意自不得若常也。 時, 翁主泣陳曰: ‘事關景廟, 其嫌甚少, 三宗血脈, 所係甚大。 豈可以一時銷刻, 不念宗社之重乎? 以是兩宮之間, 和氣漸至索然, 直欲痛哭而溘然也。’ 又切諫於母嬪。

是時, 上在集福軒, 與儲承殿, 距甚遠。 及丁卯, 命移次于景春殿, 蓋取其便近而從翁主請也。 至是, 翁主忽有疾不起。 小朝痛悼衋傷, 深究處難之方。 外廷之知此事者, 莫不爲東宮危之。 豐原府院君 趙顯命靈城君 朴文秀、右賓客李宗城等, 發臨機衛護之議。

己巳春, 命小朝代理庶政。 按記注曰: "正月二十二日夜四更, 上下一封書于政院, 蓋內禪事也。 承旨請對繳還曰: ‘俄過德成閤, 東宮己明燭而坐。 其驚隕罔措, 尤當如何?’ 已而, 邸下進至大朝戶外, 俯伏涕泣。 領議政金在魯等入侍, 坼見封書, 卽首擧內禪, 次及代理也。 諸臣迭請還寢。 上命邸下來前者再。 邸下進伏於御座前, 嗚咽垂涕請懇, 上曰: ‘自有古例, 須勿驚也。’ 右議政趙顯命曰: ‘辛丑聽政命下之時, 殿下垂涕臨筵, 何不以殿下其日之心, 度東宮今日之心乎?’ 上始感悟, 止命代理。 顯命曰: ‘第一件幸蒙還收, 而雖第二件, 臣等豈敢奉承?’ 上不聽。 邸下猶俯伏涕泣, 上屢命, 始退。 粤六日, 御時敏堂, 行代理朝參, 下令旨, 俾小大臣工, 精白寅協, 一心輔國。 又令諸道, 懷保民生。 又令京外婚葬過時者, 自官顧恤。 右參贊元景夏白上曰: ‘臣等見初筵令旨, 孰不相傳鼓舞, 而思所以精白寅協之道耶?’ 戶曹判書朴文秀曰: ‘代理命下之時, 東宮涕泣滿面, 處義中節, 外人聞之, 皆以爲慶幸矣。’ 後數日, 因上敎中元良勝予之敎, 文秀力陳調護之說。 又數日, 請以用人恤民等事, 願賜面敎, 使小朝遵法。 後又言: ‘帝王家家法嚴截, 雖美事, 不可一向太嚴矣。’ 上曰: ‘我朝家法, 本自如此。 體昔年小心, 予亦至于今日。’" 按《宮中記聞》曰: "書筵講《詩經》, 敎宮官曰: ‘陟岵, 不言己之思親, 只言親之念己。 孝子以父母之心爲心。 其說如此, 而自己思親之情, 自在其中’ 講《尙書》, 敎曰: ‘, 大聖也, 其臣猶以無怠無荒戒之。 人臣告君之道, 宜主責難。 況不及, 而臣無讜直, 其可爲國乎?’ 又曰: ‘三宗、 文王, 所其無逸而享國長久, 帝舜, 逸於任人, 而歷年㝡多。 雖若異然, 無逸而後乃逸。 人君之道, 捨無逸奚以?’ 庚午八月, 懿昭世孫誕生, 告廟頒赦。" 按行錄曰: "九月, 英廟幸溫泉, 其翌日雨。 召留都大臣領議政趙顯命等敎曰: ‘大駕纔發, 昨日雨甚, 聖候不瑕有損, 用是燥鬱, 召見卿等矣。’ 仍命勞留都軍兵。 自是至還宮, 幾近二旬, 夜必整衣達朝, 以久違天顔, 日夕慕戀, 輒不禁涕下。 宮中甚訝之, 問其故。 敎曰: ‘自余生來, 初當遠離, 思親之心, 不得不然。’ 及回鑾, 英廟聞此, 敎曰: ‘元良事, 每出意想之表。’" 按記注曰: "辛未秋, 以諸道癘疫之熾盛, 下令旨, 飭方伯, 別加周恤。 壬申春, 以大朝上號, 庭請屢日, 上詣皇壇, 有請命之擧, 諸臣泣請還內, 不許。 小朝便服步出, 至上前, 泣懇不已。 命只行慈殿進號。 上還內, 小朝詣明政殿月臺伏閤, 至明發。 三月, 懿昭世孫薨逝。 小朝克自寬抑, 上慰三殿。 九月, 誕元孫, 敎曰: ‘今日之欣慶, 勝於庚午。’ 冬, 睿候有紅疹之漸, 藥院直宿, 引接必備儀。 諸臣請於臥內召接, 敎以 ‘着一重衣何難, 而臥接臣隣乎?’ 時, 廷議岐貳, 英廟却藥, 小朝謂承旨曰: ‘余代理四年, 不能仰體聖敎, 至有却藥之擧, 余何心服藥乎?’ 十一月, 上因事激惱, 下傳禪之敎, 旋卽還寢。 十二月, 幸松峴宮, 又命傳禪。 過數日, 御宣化門, 復宣前命。 小朝俯伏涕泣, 稽首請命, 額血沾于席。 領議政李宗城曰: ‘東宮泣涕滂沱, 誠孝極至。 殿下旣許反汗, 不可食言。 如此深冬, 觸寒甚悶。 況重病之餘乎?’ 命宗城等中途付處。 翌日, 駕臨毓祥宮, 小朝將執裾力請。 上旋駕臨彰義宮, 閉閤。 是夜, 小朝步至宮門外, 上疏不答, 待命至曉, 排闥入請還寢, 不從, 仍促命還宮。 及翌夜, 又詣宮門外俯伏。 上不許, 退至敦化門外, 席藁待命。 如是者屢日。 上將臨北漢行宮, 小朝涕泣謂承宣曰: ‘余之死生, 固不足恤, 當此嚴冱, 聖體觸冒, 中心如割, 不能按住’, 卽令藥院之臣, 更進蔘茶於上。 過數日, 上始還宮, 寢前命。" 按《宮中記聞》曰: "時有和協翁主之喪, 慟惜不自勝。 敎曰: ‘吾於此姊, 別有顧念之情, 而今忽奄逝, 此慟何比? 無以躬臨洩哀, 卽余至恨。’ 癸酉正月, 領議政李宗城遭彈出城, 至三月始還鄕里。 時文女有娠, 中外遑遑, 宗城力主衛護之論。 前年冬, 幾爲異志者所擠, 至是下石益急, 宗城退至城外, 終不還鄕。 至三月初, 文女生女, 始曰: ‘吾家世受國恩, 不可以時人之欲逐, 動吾素志。 雖拳踢交加, 惟知有進無退, 一死而已。 今幸聞翁主生, 自此吾可決歸。, 遂上書告退還鄕里。 小朝曰: ‘百人雖言, 文女之事, 余則曰決無是。 設有之, 以大朝日月之明, 豈患其不賜嚴斥乎? 但群下依違之計, 賴有相臣得以鎭安’ 云。

冬, 承命行三覆決死囚, 全活者多。 自後每歲如之。 夜, 召宮官, 講論至漏分, 賜貢橘于宮官。 橘盡, 盤中有詩, 宮僚卽席拚和。 甲戌, 令諸道還穀, 行裒益之政, 俾除小民切痼之瘼, 禁大同軍布代錢防納。 太學儒生, 以齋隷持御賜銀盃而夜出, 爲邏卒所捕, 遂捲食堂, 敎曰: ‘大朝重儒之德意何如, 敢因微事起鬧, 致令聖廟無人可乎? 重推本兵長’, 仍命勸入齋儒。 嘗講《論語》, 至三月不違章, 講官奏曰: ‘此孔子言也, 顔子名不當諱也。’ 敎曰: ‘孔子雖言之, 讀之者, 後人也’, 遂諱而不名。 下令旨, 在外書筵官幷敦勑赴召, 講《四勿箴》, 敎曰: ‘夫私慾之發, 有大小淺深, 而略於小失, 馴致大過, 則其害均耳。 昭烈曰: 「勿以惡小而爲之」, 此誠至言。’ 上聞之嘉賞曰: ‘講學之力, 誠不淺。’ 講《小學》, 敎曰: ‘藹然四端, 隨感而見, 旣見則擴充之, 未見時, 亦須有主敬工夫。 未發時, 主敬然後, 可以發皆中節。 敬之旨, 先要分明識得。’ 又曰: ‘孫思邈云: 「心欲小而膽欲大。」 武王師渡孟津, 政是發揚奮勵氣象, 而猶曰: 「夙夜祗懼」, 聖人之心小膽大, 此亦可見。’ 冬以日寒, 放輕囚。 乙亥逆變, 上御帳殿鞫囚, 命小朝侍坐, 敎曰: ‘辛壬疏下六賊及, 今始追施逆律。 自此義理始明, 不可不知也。’ 講《綱目》, 敎曰: ‘即墨之堅守, 不下, 似是《威王》時受賞之大夫, 嘗有保障之功, 得力於是日矣。’ 又曰: ‘幸臣九人, 旣讒田單, 惟貂勃訟其冤。 君宜疑以有私乎田單, 而不但不疑, 乃反用之, 君誠賢矣。’ 又論澠池之會曰: ‘夾谷之會, 孔子以禮導君, 君慴服不敢有加於。 果使相如以禮爭之於初, 則必不如是費力也。’ 又曰: ‘ 文帝可謂賢君, 而尙制短喪, 有賈誼而不能用, 終難免後世譏議。 但賈誼之疏, 徒規規於時政得失, 不及本源之病, 較諸蕫子正君心之論, 自有差等矣。’ 又曰: ‘ 玄宗謂, 朝事付宰相, 邊事付將帥, 朕復何憂?’ 此與古所云勞於求賢, 逸於任人者, 似不相悖, 而玄宗則不能勞於求賢, 但知逸於任人, 馴致天寶之亂, 可不懼哉? 且其論韓休蕭嵩時, 私語左右者, 己不能誠心樂賢, 有勉强拂戾之意, 此非可繼之道, 可知其治之不終矣。’ 又曰: ‘嗣君, 以祖宗土地, 易一胥靡, 立法則嚴矣, 謂之知輕重則未也。’ 又曰: ‘樂毅, 劇辛以孤軍深入難之。 然地, 河間, 足以牽制師, 一擧成功。 是故兵貴審勢。’ 夏甚熱, 宮官請改書筵時刻, 令曰: ‘早暮稍涼, 正宜誦習, 且大朝晝講以午時, 余何敢憚熱而改時乎?’ 遂不許。 書筵官宋明欽, 以縣官陛辭, 特命召對, 討論《大學》誠正之義, 從容咨訪, 酬酢如響。 明欽曰: ‘誠正之說, 帝之所厭聞, 而邸下闡發微奧, 亶亶不倦, 此可見睿學之實心用工矣。’ 講《孟子》, 敎宮官曰: ‘龍蛇而放之菹。 何以驅逐龍蛇耶? 旣疏水通道, 瀦爲沮澤, 則水之所歸, 龍蛇隨之, 自然有驅逐之勢也。 故曰勢而已。 聖人審時察幾, 無入而不自得者, 亦惟曰順其勢。 知進退、存亡之幾者, 時中之聖人也。’ 丙子五月, 樂善堂火。" 按記注曰: "下令旨曰: ‘余不肖, 濫承代理已八年, 無一事仰體聖意, 每貽憂於聖心, 至于今日, 實羞對臣僚。 幸賴我聖上至慈至仁, 伏承昨日下敎, 感惶交極, 不覺涕下。 在廷大小臣僚, 勿以余不敏, 隨事匡救。’ 上聞之, 敎曰: ‘元良責己之言, 豈否德攸致? 荷陟降之眷佑。 大小臣工, 體我元良此意, 至誠輔導。’" 按《宮中記聞》曰: "小朝素不近杯酌, 宮中大小之所知, 而時有相反之說。 小朝以聖訓無勉之意, 下旨反躬自咎, 亦以過飮, 告于上前。 左右以無是, 而曰有是, 反爲不誠。 答以: ‘至慈至明, 自可辨燭其虛實, 我何敢以自明之說, 發諸口乎?’ 俄而, 上聞下旨責躬, 甚嘉悅, 敎曰: ‘此等辭說之流行, 皆予之過。’ 屢示感悟之意, 又下傳敎, 示聖意於中外。 先是, 火起之翌日, 上責群下曰: ‘近來事, 無人告予, 朝臣無可恃矣。’ 賊臣金尙魯對曰: ‘小天亦可畏, 故不敢矣。’ 次詢承旨, 承旨李彛章奏言: ‘世豈有如此道理? 殿下將安用如此之臣乎?’ 上曰: ‘是矣。 承旨言果是矣。’ 彛章又言: ‘父有過失, 子未嘗不諫, 故古語曰: 「父有爭子。」 子有過失, 父未嘗不敎責, 故傳曰: 「人樂有賢父兄。」 父子間有過, 諫之責之, 固也, 而聖人所謂父爲子隱, 子爲父隱者, 諫之責之, 而使外人不知其諫其責, 是之謂隱。

今朝辭敎, 實有違於聖人一隱字, 此何事耶?’ 上遂怡然曰: ‘所達出於至誠。 如承旨者, 如是憂之, 而不逞輩必聞而喜之。’ 彛章猶不悉本事, 故所奏止於此。 及令旨先降, 傳敎繼降, 宮中與外廷聞者相賀曰: ‘感悟由於聖慈, 所以感悟, 亦由於睿孝’ 云。 又下令旨, 求直言極諫, 飭中外勸農賑乏, 咨訪民隱。 冬, 患痘候, 及平復, 陳賀頒赦。 丁丑二月, 貞聖王后昇遐, 小朝號呼攀擗, 皇皇若靡洎。 自殯至靷, 五時之奠, 七時之哭, 罔不躬將而致其誠, 曉夜朝晡, 幾不撤聲。 戚畹、執事者, 皆感激讃歎, 中外聞之, 亦莫不揮涕。 上敎諸臣曰: ‘予則無所疚懷, 而今見元良哀毁之狀, 將何以抑遣乎?’ 判府事兪拓基奏曰: ‘向來聖候未寧, 入侍崇文堂, 竊仰東宮, 達曙焦熬, 或慮有大病患。 今若任情哀疚, 則傷損必至。 惟望聖念之加護也。’ 至三月, 仁元王后又昇遐, 上哀毁逾節, 小朝左右寬譬, 情禮咸備。 六月, 貞聖后靷啓, 至闕門外哭辭, 哀動左右, 都人士女, 爭覩容光, 掩泣攔前。 前驅辟之, 令曰: ‘止之。 恐傷人也。’ 至虞返, 迎神輦于郊次, 哀哭移時, 涕流席如雨。 敎曰: ‘廞儀與余儀仗相隔, 無以瞻望, 其令分隊而行。’ 親撰幽宮之文以藏之, 外臣皆不得知之。 自後寢疾甚篤, 而力疾行兩魂殿七虞及朔望祭, 疾愈篤而哀愈毁。 時, 輔德尹東昇調護周旋之力居多, 每敎曰: ‘非東昇, 曷勝導達昭暴乎?’" 按記注曰: "戊寅秋, 上俯伏魂殿庭口奏, 卽不敢聞之敎。 仍命史官書之, 命罷領議政李天輔職。 翌朝, 都承旨蔡濟恭等率諸承旨、史官奏言: ‘殿下何爲而有此擧耶? 爲臣子者, 不特不敢見, 亦當不忍見, 孰敢搦管移書於記注乎? 臣等冒萬死繳還, 退伏鈇鉞之誅。’ 仍自袖中, 奉出口奏謄本, 跪置于上前。 良久, 上曰: ‘言則是矣。 予當受之。’ 至是月晦, 上御明政殿月臺, 小朝席藁時敏堂後庭。 領府事李宗城求對言:殿下典學四十年, 而今乃處君臣父子之間如此, 此臣之所痛心也。’ 上曰: ‘今又責予, 予將退歸矣’, 仍欲起立。 大臣奏以領府, 辭不達意, 請令更陳其所懷。 宗城曰: ‘臣之言, 非辭不達意也。 人臣之義, 在大朝, 則責難於大朝, 在小朝則責難於小朝。 今日之事, 毋論臣等之心, 雖六軍萬民, 莫不延頸願死者, 爲是吾君之子也。 惟其有宗社神人之托, 故日夜所冀望, 惟願過失之無聞, 不幸有過失, 亦不欲彰著者, 卽天理人情之自然。 若言其所以然之由, 卽是爲吾君之子也。 殿下之於東宮, 卽是一體, 何可分而二者耶? 以一體而分以二, 視之, 此臣之所痛心也。’ 仍以遠佞斥讒之意發端, 語未卒而退。 濟恭與諸大臣, 還至時敏堂庭進對, 小朝下責躬求助之敎, 宗城濟恭迭陳積誠回天之方。" 按《宮中記聞》曰: "翌年正月, 領府事李宗城卒, 臨死語人曰: "吾恐死不得其所矣。 樂善堂入侍, 欲以死自明而不得, 明政殿入侍, 又欲以死痛陳而徑退。 今己矣。 生爲負國之人, 死爲不瞑之鬼。’ 報聞, 上驚悼嗟惜久之。 小朝御素帶素膳, 至成服日, 恤孤賜祭需, 終三年。 己卯, 行世孫冊禮, 行中宮殿冊禮。" 按《行錄》曰: "小朝事中宮, 一如貞聖王后, 宮中咸仰誠孝之篤。 英廟歎曰: ‘予見元良事內殿, 誠無間然。’ 以是內殿, 亦備盡慈愛。

是年, 頒《武技新式》于訓局。" 按《宮中記聞》曰: "小朝自幼時, 志度已英爽, 遊嬉必陳兵威。 上試叩其所存, 有問輒條對甚悉。 凡坐作進退, 緩急虛實之方, 皆手劃口授, 無或差爽。 又喜讀兵家書, 奇正變化之竗, 無不默識精通。 孝廟嘗喜武技, 暇日御北苑, 輒馳馬試藝, 所御靑龍刀、鐵鑄大椎, 尙在儲承殿。 武士之有膂力者, 莫能運, 小朝自十五六歲, 已皆擧而用之。 又善射御, 執矢發鵠, 發必中心, 臨轡飛鞚, 悍馭亦馴。 宮中相語曰: ‘豐原筵奏, 克肖孝廟之說, 果有先見’ 云。 至是, 憂將臣之不閑武技, 編成一書, 名以《武技新式》以頒之, 蓋戚光所載武技所傳者, 只六技。 曰棍捧、曰藤牌、曰狼筅、曰長槍、曰鎲鈀、曰雙手刀, 而演習之制, 多失其方, 就舊書悉證正之。 又以竹長槍、旗槍、銳刀、倭劍、交戰月刀、挾刀、雙劍、提督劍、本國劍、拳法、鞭棍凡十二技, 創演爲圖, 以示擊刺之勢。 彙成全書, 付之訓局, 使肄習之。 嘗敎曰: "我國偏小, 用武無地。 然東接, 北隣胡, 西南大洋, 卽舊時中原。 今雖邊塞無警, 宜講苞桑之謀。 況孝廟志事, 無處可伸, 而北囿尺壇, 愾我寤歎。 噫! 兵器雖在安謐無虞之時, 聖人猶且制置, 以待暴客, 況我國地方, 兼有孝廟志事乎?" 每誦陶侃日運百甓之語, 靜夜宴閒,輒自試之。 又敎曰: ‘醫者, 疑也。 人之臟腑、心肝, 雖難盡知, 而摸索推類, 亦可理會。 醫國之手, 尙矣, 苟能粗解藥性, 稍辨脈理, 一日醫一人, 二日醫二人, 漸就鍊熟, 自當爲一時名醫。 儒者之學, 自有疑求無疑。 況醫家之以疑決疑者乎?’ 自是, 凡有指畫, 莫不立效。 然以其小技, 不屑留意也。 又敎曰: ‘古者衣服之制, 各有攸象。 今所謂氅衣與圓袂衣, 余嘗惡之。 氅衣則塞三面而通後幅, 其象屬陰。 古人云: 「中國屬陽, 夷狄屬陰。」 東國氅衣之制出, 而始有北通建州之漸。 圓袂衣則前疊二幅, 後拖一幅, 亦非面南背陰之義也。’ 宴居必御臥龍冠、鶴氅衣, 而鶴氅, 倣司馬光深衣之制也。 又敎曰: ‘我國正服, 是團領與貼裏團領, 乃王朝會同之服也。 貼裏, 卽黃帝衣裳之度也。 至於戰服狹袖, 俱是尙古制而禦戎事之衣也。’ 又敎曰: ‘近俗不知備豫之謨, 節儉之道。 豫則無憂, 儉則裕財。 今之服着器用, 華睆而近奢, 捷利而便體者, 余未嘗近之。’ 又敎曰: ‘宮中人, 有以自中過失, 來告余者, 輒使告人、被告人, 相與辨質, 若無驗則罪告人, 雖或有實, 必兩治之, 自是告訐者小息。’ 司直朴致遠上書陳勉, 優批答之。 後因重臣徐志修筵席陳戒, 敎曰: ‘是, 誠愛我。’ 前後以睿德言事者, 咸被嘉奬之敎。 嘗以桂坊羅蔘, 曾於冑筵, 多有鯁直之言, 後對宮僚, 必問安否。 一日宮官, 有以時事之憂虞仰問者, 大加嚴責曰: ‘此間我兩宮也。 宵小之目, 政謂此輩。’ 按《記注》曰: "時, 掖隷有憑藉下令, 橫濫民間者, 事覺卽令出付有司, 仍下令旨曰: ‘近來紀綱解弛, 此後之無此弊, 未可知。 更有犯者, 法司直爲自斷捕治。’ 庚辰秋, 上移御慶熙宮。 七月, 幸溫泉, 八月還宮。" 按《行錄》曰: "時, 小朝久有寢疾, 英廟命浴溫井。 駕到江頭, 水漲, 船路不固, 至晩始渡。 在船上, 與宮官李壽鳳等, 講君舟民水之說。 翌日, 至水原府。 府治之北, 有花山, 卽己亥寧陵置標地也。 登臨周覽, 嘆賞良久, 還次山城, 閱武技。 輦路所過, 父老擁遮爭瞻, 輒住駕, 詢疾苦, 命減征徭, 一路大悅。 有一衛士馬, 逸入菽田, 蹂且吃, 招地方官, 厚償田主, 治衛士。 存恤邑中高年, 敦召遺逸之士。 及到溫泉, 逐日開講筵, 遵列朝溫幸時, 召對玉堂官故事也。 下絶句一篇, 命宮官和之。 及月, 改行望闕禮當否, 詢于宮僚, 仍敎曰: ‘久離京闕, 慕戀難耐。’ 是日, 遂還駕, 將直詣慶熙宮承候。 英廟遣知申, 迎諭于城外曰: ‘病餘驅馳, 宜直還調養, 竢間來見。’ 相臣進對奏曰: ‘鶴御一臨, 湖中人士, 始識睿德之度越, 父老、士庶, 莫不讃頌德意, 實臣民之幸也。’ 是行自出宮至還駕, 輒令壽鳳馳還, 所過地方, 慰諭居民, 仍察傷稼。 又以時値極暑, 命藥院劑藥, 以救將卒之在道中暍, 及還, 無一人病者。 辛巳, 問時措之策于大臣, 大臣不能對。 遂有西邑之行, 蓋欲請命於上, 以沮賊謀也。 賊臣洪啓禧欲從中構亂, 小朝聞之, 促御徑還。 時有一承宣, 白於上, 請覽廷臣章疏之上小朝者。 事機急迫, 小朝躬詣上前, 悉告以處變之本意, 上始釋然。 後小朝臨賓筵, 敎曰: ‘儲君, 亦君也。 名以臣事, 包藏奸謀可乎?’ 仍以逆之無嚴, 荐下嚴敎, 比之江充。 自是謀益急。 壬午五月, 賊人羅景彦伏誅。"

《記注》《宮中記聞》曰: "景彦投呈一狀于刑曹。 狀中有殿下肘腋之臣, 皆懷不忠, 變在呼吸之語。 刑官自曹坐, 袖其狀請對時, 逆伯, 先爲來待。 上竝命入侍, 刑官以狀告。 上大驚, 問內侍曰: ‘景彦, 是掖隷尙彦之族乎?’ 內侍對以卽尙彦之兄, 而曾屬掖隷者。 上問逆曰: ‘宮城扈衛可乎?’ 逆進前奏曰: ‘國家有變, 扈衛宮城, 戊申亦已行之。’ 上卽命閉城門, 發兵把守宮門。 仍御太僕, 鞫景彦景彦自衣縫中, 又出一封書, 長過五寸, 圍盈一握。 因上之, 上覽已, 示左相。 左相纔見數行, 失聲號泣曰: ‘臣請先死。 東宮若聞此, 當作何心? 臣請往慰之。’ 上曰: ‘唯。’ 判義禁韓翼謩等言: ‘景彦譸出凶言構誣, 上逼東宮, 其罪當戮。 請嚴鞫正法。’ 上始命加刑。 司書任珹, 奮然謂翼謩曰: "凶言, 豈景彦所自爲耶?" 翼謩又請亟覈指嗾。 上怒罷翼謩職。 大司諫李心源翼謩, 又罷職。 翼謩等旣黜, 景彦以誣陷東宮, 服。 於是, 諸臣同聲請置極律。 同義禁李彛章曰: ‘誣人猶當爲逆, 況誣貳君乎? 凶言旣皆歸虛, 罪人今已輸款, 不可與此賊俱生’, 進前力言。 責敎荐下, 而言愈截直, 不少沮。 時, 小朝步往胥命于闕門外, 上命入來, 遂進伏于庭, 涕淚沾袍, 群下莫敢仰視。 夜將曉, 鄭翬良始請對奏曰: ‘罪人旣以四字自服, 罪不可一日容貸。’ 上乃命景彦正刑。 翌朝, 小朝始還宮, 泣謂諸臣曰: ‘賴有止慈, 得免駭機。’ 閏五月二十一日, 薨逝, 賜諡思悼, 賜宮、墓號曰垂恩。 以七月二十三日, 葬于楊州 拜峰山甲坐之原。 葬之日, 上臨壙, 以御筆題主。 翌月荐棘趙載浩于北邊, 其姪維鎭株連繫獄, 臺臣請寘法。 上敎曰: ‘瞻彼銅龍, 予意若何? 在諸臣, 宜思不忍言之心。’ 命亟停, 仍罪言者。 維鎭屢被拷掠, 抗言無二辭, 遠配道死。" 按《記注》曰: "閏五月十三日, 檢閱尹塾下庭, 叩額血流被面, 潰出衛外, 招醫官, 持藥以進。 時諸大臣在閤外, 不得入。 叱衛士, 挺身躍出, 執大臣手偕入。 申晩等曰: ‘當此危急之時, 大臣不能碎首天陛, 以死力爭, 將焉用大臣爲哉?’ 賊臣具善復洪麟漢等, 各逞凶圖, 竟坐謫黑山島, 而上猶稱此人可愛可愛。 分司翰林林德躋隨伏庭下, 不離左右。 上命逐出, 猶據地不起, 衛士曳而黜之, 德躋叱曰: ‘吾手秉史筆。 此手可斷, 不可曳也。’ 命竄旌義, 尋命德躋放宥。 後, 德躋甄用。 宮官任珹權正忱等, 拚死不出。 分注書李光鉉, 亦挺身率醫官以入。 都承旨李彛章, 叩頭涕泣, 抵死爭難。 上怒命付軍門梟首。 旣出, 又排閽以入, 伏地痛哭。 命書傳敎, 泣曰: ‘臣當就死, 不敢聞命’, 趨而出, 俟命于金吾門外。 命牌招, 終不進。 後命差墓所敦匠之任。 宋瑩中等, 以臺諫構他語, 彈之, 上嚴斥之。 及卒, 卽命錄用其子, 有國亂思良相之敎。 分司提調韓光肇排闥直入, 免冠號泣, 上命罷職。 光肇曰: ‘臣不惜死, 臣有一言。’ 又命推出。 光肇痛哭匍匐而出。 其父曰: ‘未能碎首辦死, 何以參班?’ 遂不參須敎。 光肇坐謫大靜, 尋放。 後, 敎曰: ‘頃者處分, 予自悔矣。’ 及卒, 親製文, 祭之曰: ‘父子同朝, 一片忠赤’, 仍錄其子。 承旨趙重晦涕泣力陳, 命島配旋寢。 重晦又進伏, 抗言不撓, 坐遠竄。 後, 有烈風知勁草之敎, 屢陞爲冡宰。 提學韓翼謩, 五違召命, 不製敎文, 敎曰: ‘分義似然, 其勿招。’ 又命製進致詞, 召牌凡八下, 終不進。 席藁金吾坐削職。 後, 屢加嘉歎, 擢拜上相。 承旨李翼元, 力抗不書傳敎。 承旨鄭純儉, 上殿大聲曰: ‘請殺臣。 臣雖死, 不敢頒此敎。’ 坐罷職。 摠管李泰和免冠叩頭極爭, 後, 特命加資。 甲申秋, 行入廟禮, 上臨視。 乙酉五月, 忌辰前一日, 命停視事。 下綸音于廷臣, 若曰: ‘昨年後初當此日。 停經筵, 豈自便也? 嗚呼! 心不若此, 非慈也, 又何以慰靈? 吁嗟臣工, 知望八其君今日之心, 而若有臣分, 浮囂躁競之心, 若春雪春氷自消解。’ 大臣等, 仰請靜攝中卽進常膳。 翌日, 又命垂恩墓獻官洪樂仁, 行祀後看審局內回奏。 及登筵, 詳詢樹木長養。

至秋, 上幸於義宮, 命世孫, 往拜廟宮, 垂涕送之, 多有追思之敎。 仍步登苑麓, 倚墻遙望者移時。 自後, 每於中夜, 輒叩閾歎曰: ‘古有思子宮望思臺, 予豈料自踐斯境乎?’ 又敎筵臣曰: ‘伊時廷臣, 能有安金藏之忠乎? 到今挾雜更提, 抑何心腸乎?’ 戊子, 上御殿庭, 行香祗迎禮。 至孝章廟以下各廟香祝, 諸臣以壓尊, 不卽鞠躬, 上厲聲, 命陪參諸臣罷其職, 仍命拿入兵曹判書及侍衛諸臣。 下敎若曰: ‘嗚呼! 一隅靑丘, 卽朝鮮而已。 貳君祗迎, 諸臣焉敢不爲? 吁嗟垂恩, 今日諸臣, 十年臣事者多, 莫曰無心。 無心二字, 此等處, 豈宜恕乎?’ 還御資政殿, 召大臣、諸臣於殿前, 飭諭以俾知十年臣事之義。 粤二日, 行大政。 又諭大小臣僚曰: "嗚呼! 忍說壬午事乎? 姿質美而予實不慈矣。’ 庚寅, 御王府, 敎曰: ‘追提往年事, 使予聞之, 逆心也。’ 甲午夏旱, 親臨墓所, 親製文行奠酌禮, 世孫隨焉。 顧敎諸臣曰: 今日, 當得甘雨矣。’ 仍命贊禮以下隨駕近臣賞賜有差。 至丙申春, 命《政院日記》及公家文蹟之自丁丑至壬午事關不忍言之文字, 竝洗草, 敎曰: ‘聞世孫此疏, 特許其請。 此時予心, 不堪傷惻,’ 仍玉淚汍瀾。 命書傳敎曰: ‘今予夙夜一心, 在於宗國。 今者此擧, 寔爲沖子。 嗚呼! 壬午閏五月日記, 思悼冥冥有知, 必也飮涕, 以爲余將無恨’ 云。 其時日記, 依實錄例, 承旨注書同詣遮日巖洗草。 嗚呼! 因予涼德, 遭萬古所無之事, 而末世人心浮囂。 雖及見日記者, 更提文字, 則當以戊申梟獍餘種嚴懲。 況他日乎! 此後語及壬午事, 當以逆律論, 咸須聽此, 莫犯邦憲。 沖子旣承面諭, 予將高枕矣。 翌日又命世孫, 往墓所, 展拜行祭。 敎曰: ‘臥思世孫今日之心, 豈特沖子心? 予心若何? 今日用心, 果生來初也。’" 按《宮園儀》曰: "丙申, 追上諡號曰莊獻, 改宮號曰景慕, 園號曰永祐。 癸卯, 追上尊號曰綏德敦慶。 甲辰, 又追上尊號曰弘仁景祉。 廟中祭禮, 降太廟一等, 園儀亦準此。" 按《行錄》曰: "有二男二女。 長懿昭世孫, 諱, 次卽小子。 女嫁光山 金箕性, 烏川 鄭在和。 有庶男三, 。 庶女一, 適唐城 洪益惇云。 子孫錄姑從舊狀, 以待陟降之垂隲。"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9면
  • 【분류】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