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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2월 16일 癸卯 3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유학 이국주의 상언으로 진안 대군의 묘를 수축하고, 어제비를 세우다

진안 대군(鎭安大君)의 묘를 수축하고 어제비(御製碑)를 세웠다. 유학(幼學) 이국주(李國柱)가 상언하기를,

"15대조 진안 대군풍덕(豊德)에다 장사지냈는데, 병자년 난리 뒤에 자손들이 유랑하다가 묘를 실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미년에 묘 옆이 장마에 깎여나가서 작은 묘갈(墓碣)이 형상을 드러냈습니다."

하니, 도신에게 명하여 직접 봉심하고 나서 돈과 곡식을 넉넉히 주어 무덤을 봉축하고 제청(祭廳)을 지어주게 하였고, 따로 무덤 지키는 민호(民戶)를 두어 백성들이 장사지내거나 나무하고 꼴베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며, 지방관이 춘추로 보살펴서 감영을 통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묵은 비석이 단소하므로 본도로 하여금 비석을 새로 만들게 하고 어제 비문을 내렸다. 그 비문에,

"내가 즉위한 지 13년이 되는 기유년 2월에 선왕의 능침을 전알하고 돌아오다가 서울 근교에 머물렀는데, 충주에 사는 유학 이국주가 연로(輦路)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은 진안 대군의 15대손입니다. 대군의 묘를 함흥에서 풍덕 고개(古蓋)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헌은 병화(兵火)로 인해 다 없어졌고 자손들은 먹고 살기 위해 바삐 돌아다닌 지가 지금 거의 1백 년이 가까우니, 무덤에 봉분하고 나무를 심었던 자라 하더라도 그곳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가깝고 먼 친척을 돈독하게 대해주시는 조정의 은덕에 힘입어, 지난 정미년 풍덕에 물이 넘쳐흘러 짧은 묘갈이 나타났는데, 그 묘갈에, 진안 대군삼한 국부인 지씨 지묘(鎭安大君妻三韓國夫人池氏之墓)라고 씌여 있고, 그 옆에는 대군묘재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석인(石人) 한 쌍이 쓰러진 소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묘역 둘레에 도도록한 것들은 모두 백성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감히 그것들을 뭉개고 새로운 무덤을 만들 수 없어 이렇게 참람스럽게 아룁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 그분이 바로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泰伯)이시다. 옛날 우리 선대왕께서 오랫동안 도를 행하시어 교화가 이루어졌고 덕있는 이를 표창하고 공있는 이를 보답함에 있어 빠뜨린 일이 없었으므로 대군에게도 마침내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주셨다. 그때는 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떨어져나간 비문 조각과 깎여나간 글자를 이끼에 묻히고 돌이 부서진 뒤끝에서 비로소 찾아냈으니, 내가 변변치는 못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융숭히 보답하는 데 있어 어찌 감히 선대왕의 뜻과 일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도신에게 명하여 묘역의 한계를 정해 금장을 하게 하고 나라 법에 따라 물자를 대주어서 다시 봉축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은전을 보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병자일에 큰 비를 다시 세워 서(序)를 짓고 명(銘)을 하여 영원히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그 서(序)에,

"대군의 휘(諱)는 이방우(李旁雨)이고 태조 대왕의 장남으로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이다. 어려서 태조를 섬길 적에 효자로 칭송되었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몸소 검약(儉約)을 실천하였으며 일체의 부귀 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으나, 홍무(洪武) 무진년에 태조께서 우시중(右侍中)으로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에 제수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 정벌을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의리를 내세우고 회군(回軍)하시어 중국을 받들자, 이때 대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鐵原)으로 들어가 은거할 뜻을 가졌다. 임신년 가을 태조께서 사람들의 권고로 대위(大位)에 오르시자 대군은 마음속으로 정종(定宗)태종(太宗)이 모두 성덕(聖德)이 있어 하늘이 인정하고 인심이 쏠리는 것이 마치 주(周)나라 왕가(王家)의 왕계(王季)·문왕(文王)과 같음을 알고는 항상 노둔한 사람으로 자처하며 다시는 국가의 일에 간여하지 않고 고향 함흥으로 물러가 살았다. 그러자 태조께서도 그 뜻을 대략 아시고서 한 구역의 전지와 집을 주고서 거기에서 늙도록 살게 하였으니, 그것은 그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였고 또 그 자취를 묻어버리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부인은 찬성사 지윤(池奫)의 따님이고 아들은 이복근(李福根) 하나를 두었는데, 정종조 때 정난 정사 공신(靖難定社功臣)에 기록되고 봉녕후(奉寧侯)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안간(安簡)이다. 안간공의 후손으로 지금 생존해 있는 자가 약간 명이라고 한다."

하였고, 그 명(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周)나라가 주나라가 된 까닭을 알 수 있다. 원천이 멀리 칠수(漆水)·저수(沮水)에서 시작되고007) 풍수(豊水)에 기초(芑草)가 있는 데서 기틀을 잡아008) 급기야 어지신 주공(周公)·소공(召公)·필공(畢公)·굉요(閎夭) 등이 모두 함께 나라의 기강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하늘이 주나라를 특별히 후하게 돌보아주어 주나라의 덕이 역사상 어느 누구도 겨룰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일찍이 태백이 세 번 사양했던 것이 그 중에서도 더욱 찬란한 빛이 되었음을 모른 것이다. 옛일로 오늘을 비추어 볼 때 대군은 우리 나라에 있어 주나라태백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산에도 색깔이 있으니 남기(嵐氣)가 그것이고, 물에도 무늬가 있으니 물결이 그것이다. 나라라고 하여 어찌 빛깔과 무늬가 없겠는가. 백세 이후에도 그 풍도를 듣고서 흥기할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8면
  • 【분류】
    풍속(風俗) / 인물(人物)

  • [註 007]
    칠수(漆水)·저수(沮水)에서 시작되고 : 공유(公劉)가 칠수와 저수 지대에 나라를 정하고 다시 후직(后稷)의 유업을 닦아 농사에 힘써 축적을 늘리자 사방의 백성들이 주(周)에 귀의하였으므로 거의 망해가던 주(周)가 비로소 일어나게 된 고사.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綿) 《사기(史記)》 주기(周紀).
  • [註 008]
    풍수(豊水)에 기초(芑草)가 있는 데서 기틀을 잡아 : 풍수 하류 지방인 호(鎬)가 물산이 풍요하기 때문에 무왕(武王)이 자손들에게 영원한 안락을 물려주기 위해 호경(鎬京)으로 천도(遷都)한 고사. 기초(芑草)는 풀 이름인데, 시인(詩人)이 이를 빌어 물산의 풍요를 비춘 것임.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

○修鎭安大君墓, 竪御製碑。 幼學李國柱上言: "十五代祖鎭安大君豐德, 丙子亂後, 子孫流落失傳。 丁未, 潦水嚙其墓側, 小碣露出狀。" 命道伯親審, 優助錢穀, 封築墳塋, 造給祭廳, 別置守塚戶, 禁民葬樵牧。 地方官春秋看審報營。 轉聞舊碣短小, 令本道具石。 御製碑文曰:

予卽阼之十三年己酉春二月, 祗謁于先寢, 反次于國郊, 忠州幼學李國柱, 稽首輦路言: "臣鎭安大君十五世孫也。 大君之墓, 自咸興遷于豐德古蓋云爾, 然文獻則兵燹於散佚, 子孫則衣食於奔走, 今且幾百年矣, 其封而樹者, 尙能徵其處乎? 惟是朝廷敦親睦遠之德, 以藉以庇。 前歲丁未, 水決于, 而短碣出焉, 題曰鎭安大君三韓國夫人 池氏之墓, 旁刻大君墓在左五字。 前有石人一雙, 杈枒於偃松叢棘中, 而纍纍然環墓域者, 皆民塚也。 臣不敢夷之爲斧堂之飾, 僭以聞。" 予曰: "嘻此我家之吳泰伯也。 昔我寧考, 久道化成, 旌德酬功, 靡有遺典, 而大君遂以靖懿, 易其名。 時則墓猶無聞也, 其在于今, 殘文齧翰, 始得於苔沒石泐之餘, 則予不穀, 所以表章而崇報之者, 曷敢不于前寧人志事善述焉?" 乃命道臣, 宮步而禁葬, 準邦典, 給貲助築, 以示特恩。 至冬十二月丙子, 改竪豊碑, 序以銘之, 以詔無窮。

其序曰:

大君諱芳雨, 太祖大王第一男, 神懿王后 韓氏誕生也。 幼事太祖以孝稱, 處兄弟篤于友愛, 稍長心潛詩書, 躬行儉約, 一切富貴榮祿, 意泊如也。 仕麗朝, 官至禮儀判書。 洪武戊辰, 太祖以右侍中, 仍授右軍都統使, 率師攻遼, 及次威化島, 倡義回軍, 以尊中國。 當是時, 大君挈家入鐵原, 有韜晦志。 壬申秋, 太祖勉登大位, 大君心知定宗太宗俱有聖德, 天與人歸, 如王季文王, 常以魯鈍自居, 不復與國家事, 退處咸興之故里。 太祖微察其意, 爲賜一區田舍, 俾終老焉, 則蓋不欲枉其志, 而亦以泯其跡也。 夫人贊成事之女, 有一男福根, 定宗朝策靖難定社功, 封奉寧侯, 謚安簡安簡之後, 至今存者若干人云。

其銘曰:

人亦有言: "之所以爲可知已。 源遠于, 思永乎芑, 施及之賢, 咸與之之綱之紀, 此天之畀也特厚, 而之德, 莫競乎靑史。" 是誠然矣。 曾不知泰伯之三讓, 又爲之黼黻乎其中邪。 以古鏡今, 大君之在本朝曰泰伯之在家也。 夫山有色, 嵐是也, 水有文, 波是也。 至於國獨無色與文耶? 百世之下, 聞其風而興起者, 孰使之然?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8면
  • 【분류】
    풍속(風俗)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