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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1월 16일 甲戌 2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김덕령·김덕홍의 고향에 그들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우게 하다

전교하였다.

"어제는 이 제독 사당기(李提督祠堂記)를 짓고 오늘은 임 충민 표려윤음(林忠愍表閭綸音)을 내렸는데, 김 충장(金忠壯)의 집에 사제(賜祭)하러 갔던 관원이 복명(復命)하면서 그 집에 간직되어 있던 유고(遺稿)와 수적(手蹟)을 가져다가 올렸으니, 일이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 글을 읽고 그 글씨를 보니 왕성하게 생기(生氣)가 있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한 글자에 한 번씩 감탄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다 읽었다.

일찍이 듣건대 우리 나라는 접역(鰈域)150) 에 위치해서 풍기(風氣)가 국한되었으므로 생각 또한 옹졸한데 거기다 당사(黨私)를 현자(賢者)와 정인(正人)을 해치는 무기로 삼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착수(着手)하느냐 내가 먼저 착수하느냐에 따라 연슬(淵膝)이 크게 달라진다고 하기에, 나도 즉시 이런 풍기에 이런 당사마저 있다면 비록 기(夔)·설(卨)·관중(管仲)·제갈량(諸葛亮) 같은 인재가 다시 나오더라도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충장공이 화를 당한 것만이 반대파 소인들에게서 연유한 것일 뿐 아니라 충무공(忠武公)충민공(忠愍公)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몹시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은 공의(公議)이고 어두워지지 않는 것은 영웅의 업적이어서, 천 년 전의 일이 백세(百世) 뒤에서도 사리상 굽혀진 것은 반드시 펴지고 억울한 것은 언제고 풀리기 마련이다. 만약 충장공의 영혼으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한다면 영웅의 눈물이 반드시 주체할 수 없이 흐를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의 유고와 수적을 호남백(湖南伯)으로 하여금 모각(模刻)해서 반포하게 하라.

임 충민공 부부의 충렬(忠烈)에 대해서는 이미 표려(表閭)하였거니와, 충장공 형제의 지극한 효성이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근본이 되었고, 그 부인의 효성 또한 이에 짝하여 아름답고 완전하였다. 형제와 부부가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드높고 늠름한 행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는데도, 아직까지 정포(旌褒)하는 은전이 없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 병조 판서 충장공 김덕령정경 부인 흥양 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라. 그리고 그 형 충신 증 지평 김덕홍(金德弘)도 함께 비기(碑記)에 실어 조정에서 영원히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라."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5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윤리(倫理)

  • [註 150]
    접역(鰈域) : 동해에서 가자미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별칭으로 쓰임. 《한서(漢書)》 권25 교사지(郊祀志).

○敎曰: "昨撰李提督祠堂記, 今下林忠愍表閭綸音, 而金忠壯家賜祭官復命, 以家藏遺藁、手蹟來呈, 事若有不偶然者。 讀其文, 見其筆, 颯颯有生意, 如見伊人, 一字一嗟, 不覺掩卷。 嘗聞我國, 介在鰈域, 風氣所局, 意象亦拙, 重以黨私爲戕賢害正之斧鋸, 物我先着, 淵膝逈殊, 予則曰以若風氣, 有若黨私, 雖使之才復起, 難容於世云爾。 不惟忠壯之被禍, 由於異臭之小人, 忠武忠愍皆莫不然, 寧不痛恨? 然不泯者公議, 不眛者英爽, 千歲在前, 百世在後, 理有屈而必伸, 冤無往而不雪。 若令忠壯有知, 英雄之淚, 必不禁簌簌。 忠壯公 金德齡遺稿、手蹟, 令湖南伯, 模刻頒之。 林忠愍夫妻之忠烈, 旣表其閭。 況忠壯兄弟至孝, 爲效忠之本, 而其夫人之孝, 匹美俱完。 兄弟、夫婦, 殺身殉國, 卓卓澟澟, 至于今塗人耳目, 而迄無旌異之典, 豈非欠事? 令地方官立石, 表其里曰: ‘贈兵曹判書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 李氏忠孝之里’, 仍以其兄忠臣贈持平金德弘, 同載碑記, 以示朝家曠感之意。"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5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윤리(倫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