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승지 홍국영이 사직을 청하자, 신하들이 이에 대해 논의했으나 윤허하다
차대(次對)하였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구구하게 아뢸 것이 있습니다. 성심(聖心)도 오늘을 기억하시겠지요. 오늘은 신이 임진년279) 에 성명(聖明)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그날부터 전하의 신에 대한 두터운 은혜와 특별한 지우(知遇)는 아마 천고(千古)에 없는 계회(契會)280) 일 것입니다. 그 덕을 갚으려 하여도 하늘처럼 그지없다는 것은 신의 정사(情私)로서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말입니다. 이승에서는 참으로 천만분의 일도 갚을 길이 없으나 변함 없는 진심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서 영구히 전하의 견마(犬馬)가 되어 조금이라도 정성을 다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의 구구한 초심(初心)은 다만 명의(名義)를 자임(自任)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척리(戚里)281) 의 신하가 되려 하였겠습니까마는, 사세에 몰려서 마지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왕실(王室)의 인척이 되고 공사(公私)가 불행하여 올해 5월의 일이 있었습니다. 이 뒤로는 국사(國事)와 민심(民心)에 관계될 바가 없겠거니와 머무를 곳을 모르겠는데, 신이 밤낮으로 생각하고 갖가지로 헤아려도 이것은 모두 신이 아직도 조정(朝廷)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차마 말씀하시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차마 청하지 못합니다마는, 신 한 사람 때문에 나라의 계책이 이 지경이 되게 하였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신이 성명(聖明)을 길이 헤어지는 날입니다. 이제 부신(符信)을 바치고 나갈 것인데 신이 한번 금문(禁門) 밖으로 나간 뒤에 다시 세상 일에 뜻을 두어 조지(朝紙)282) 를 구하여 보고 사람을 불러 만난다면 이것은 국가를 잊은 것이니, 천신(天神)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신이 5년 동안 나라의 일을 맞아보아 조정의 명령은 신의 손에서 많이 나갔습니다마는, 신은 탐오(貪汚)하고 속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천리(天理)는 순환(循環)하니, 어찌 줄곧 이러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훈련 대장의 명소(命召)283) 를 풀어 손수 향안(香案)에 바치고 나갔다.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신들이 참으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잠시 말하지 말라. 이것이 그 아름다움을 이룩하고 끝내 보전하는 방도이다. 내가 어찌 생각 없이 그랬겠는가?"
하였다.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고쳐 복상(卜相)한 한 일이 어찌 지신(知申)284) 이 물러가고 안 물러가는 데에 관계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와 지신은 임금과 신하 사이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니고 오늘은 임진년에 서로 만난 일인데, 그때부터 이제까지 지신이 자신을 그르치게 된 것이 대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절(晩節)을 착하게 한다면 어찌 임금과 신하 사이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지신이 늘 ‘이 처지로서 혹 망설이고 물러가지 않으면 마침내 탈가(稅駕)285) 할 곳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에 참으로 또한 이치가 있다."
하였다. 정민시(鄭民始)가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막대(莫大)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위에서 어찌 생각하신 것이 없이 그러셨겠으며, 지신도 어찌 생각 없이 그랬겠습니까? 지신은 남보다 한 등급 높다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고서야 끝내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뒤로는 뜻대로 강호(江湖)의 산수(山水)에서 노닐 것인데, 조보와 사람을 보지 않겠다는 말에서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간다고 핑계하고 오히려 다시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잡는다면, 이것이 어찌 오늘의 뜻이겠는가? 지난 일은 그르쳤더라도 이 뒤의 일이 착하고 착하지 못한 것은 오직 집에서 어찌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정민시가 말하기를,
"뜻밖에 나온 일이므로 신들이 워낙 놀라고 의혹하였습니다마는, 다시 생각하여 보면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어찌 생각 없이 그랬겠습니까? 신과 지신은 형제 같은 정이 8년 동안 한결같았으므로 오늘의 일은 참으로 매우 슬픕니다마는, 이제부터 앞으로 신도 한가로이 노닐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부터 병통이 우연히 글을 읽는 데에 있었는데,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아 내는 것을 조금이라도 조수(操守)하는 공부라고 생각하였다. 오늘의 일도 사람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인데 이것도 참아 내는 것이니, 내가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대저 예전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은혜와 의리가 처음과 같이 끝내 보전하는 것이 첫째 가는 방책이다. 지신이 이 뒤로는 세속을 벗어난 선비가 되어 노래하는 계집, 춤추는 계집과 어울려 그 몸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니, 경들도 틈을 타서 가서 만나면 또한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주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출입이 잦은 것도 긴치 않으니, 혹 두어 달에 한번 서로 소식을 알릴 생각이다."
하였다. 홍국영이 또 상소하기를,
"신의 이 날은 출신(出身)하여 전하를 만난 날이며 고신(告身)286) 을 〈받고서〉 전하께 하직한 날입니다. 거취에 따라 슬프고 기쁠 즈음에 저도 모르게 막히고 머뭇거려 지척인 연석(筵席)에서 다하지 못한 말이 많이 있고 이제 또 부신을 탑전(榻前)에 바치고 강외(江外)로 돌아가므로 만 번 죽을 죄를 무릅쓰고 다시 아뢰니, 전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 신이 전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예전에도 다시 동류(同類)가 있겠습니까? 하늘처럼 그지없고 하해(河海)처럼 헤아릴 수 없다는 것도 오히려 으레 쓴 말입니다. 신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신이 은혜를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갖은 한마음은 오직 조금이라도 갚는 데에 있었습니다. 대궐에 있으면서 임금의 위광(威光)을 힘입은 것도 이미 긴 세월이었으나, 결국 궁녀나 내시의 충성과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는 의리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늘 종묘(宗廟)에 대한 일념은 신이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되어 잊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는데, 지난해에 자전(慈殿)께서 특별히 대유(大諭)를 내리시고 조정에서 현문(賢門)을 가릴 것을 청하여 마침내 선택된 것이 신의 집이었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은 남자의 몸이니 전하를 위하여 뒷날의 도모를 할 수 없으나 신의 누이가 이미 입궁(入宮)하였으니 다행히 자손이 번창하면 우리 삼전(三殿)의 기쁨을 돕고 우리 성명(聖明)의 근심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신의 복이 적어서 신의 누이가 또한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신이 그 뒤로 심신이 불안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심해진 것은 대개 전하의 춘추는 한창이신데 전하의 저사(儲嗣)287) 가 없고 전하의 국사(國事)는 어려운데 전하의 곤치(壼治)가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릇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에게는 두 가지 도리가 있는데, 하나는 중곤(中壼)께서 원량(元良)을 양육하시기를 바라는 것이고 하나는 상념(上念)이 널리 저사에 미치시는 것입니다. 대저 어찌 대여섯 달 안에 위에서 결정이 없으시고 아래에서 논란이 없겠습니까마는, 신의 처지가 절로 다르고 은총이 매우 두텁기 때문에 전하의 성명으로도 혹 안면에 얽매이시거나 뭇 신하가 크게 바라더라도 세력에 몰려서 이제까지 세월을 보낸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 것입니다.
아! 신은 선조(先朝)에서 지우(知遇)288) 하고부터 전하를 섬긴 몇 해 동안에 천하의 대계(大計)가 신 때문에 산만해지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천신(天神)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신이 밤낮으로 등대(登對)할 때에 이것을 아뢰느라 혀가 거의 헐고 말이 이미 다하였습니다. 무릇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용납되기를 바라고 아첨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말이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니, 신의 말은 천리(天理)의 공정한 것인데도 전하께서 신의 말을 물리치시는 것은 또한 신이 조정에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신은 전하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감수하겠으나 감히 선왕께 죄를 얻는 귀신이 될 수 없으니, 신이 어찌 오늘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는 또한 사정(私情)을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의 나이는 이제 서른 둘입니다. 진사(進士) 급제(及第)가 되어도 오히려 늦지 않은데, 자신이 국정(國政)에 참여하고 손에 병권(兵權)을 잡았으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집안이 매우 창성한 한 거족(巨族)으로서 청조(淸朝)에서 사람을 등용한 것이 이러하고 사문(私門)에서 복을 받은 것이 이러하니, 집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으며 나라가 어찌 그 근심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전하께서 병신년289) 3월 10일 등극하시기 전 어느 밤에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광무제(光武帝)는 능히 자릉(子陵)의 고절(高節)을 이룩하였습니다290) . 신은 워낙 자릉에게 미치지 못하나 저하(邸下)께서는 어찌 광무제만 못하시겠습니까? 신이 강호의 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면 바라는 것이 만족하겠습니다.’ 하니, 전하께서 신의 손을 잡고 또한 눈물을 흘리시며 ‘이때에 그대가 떠날 수 있는가? 두어 해를 지내고 나라의 일에 두서가 있거든 그때에 그대가 떠나도 될 것이다.’ 하시므로, 신이 절하고 엎드려 명을 받고 드디어 무리를 쫓아 따라갔는데, 이제 또 서너 해를 지냈습니다. 아! 전하께서 이 말을 기억하실 것이고 좌승지 정민시(鄭民始)도 이 말을 들었을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아! 예전부터 나라의 일을 맡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나라의 일을 맡은 것은 또한 특이합니다. 무릇 크고 작은 공사(公事)의 절박한 근심과 즐거움은 신이 모르는 것이 없었고, 무릇 안팎의 크고 작은 소리와 맛의 맵고 짠 것은 신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신하로서 이렇게 중대한 일을 부담하고도 끝내 무사하여 자리에서 죽은 자가 있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섬긴 이래로 오직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不欺心]’는 석 자를 지켜서 다행히 무사히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탐련(貪戀)하여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낭패하게 되더라도 신은 본디 아까울 것은 못됩니다마는, 뒷날 논하는 자가 어찌 임금과 신하 사이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광무제와 자릉의 일을 당초에 전하께 아뢴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이 지킬 만한 의리가 없는데 까닭 없이 떠나려 한다면 그것도 성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하여 본다면 신에게 참으로 지킬 만한 의리가 없겠습니까? 신이 가정에서 꾀하지 않고 경사(卿士)에게 말하지 않고서 이 황급한 일을 처리한 것도 어찌 신이 좋아서 한 것이겠습니까? 또 신이 수일(數日) 이래로 들어가면 자리에 엎드려 울고 나가면 지붕을 쳐다보며 한탄하여 마치 장차 죽을 사람이 그 남은 날을 아까워하는 것과 같은 꼴인 것을 성명께서는 혹 아셨을 것입니다. 오늘 신의 이런 행동을 본 자는 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라 말하기를, ‘저 사람이 갑자기 이런 일을 하니 반드시 국가에 죄를 지어 그럴 것이다.’ 하겠으나, 저 잗단 자들이 어찌 신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 양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신에게 삼자함(三字銜)291) 을 주어 끝내 한결같은 은택을 다하셨거니와, 도문(都門)을 한번 나가 종남(終南)292) 이 문득 가로막으면 신의 불안함이 아들이 젖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며 목이 메어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랜 예전부터 영구한 후세까지 어찌 우리와 같은 임금과 신하의 만남이 있겠는가? 나에게 이미 순(舜)임금·우(禹)임금 같은 명철함이 없거니와 경도 〈순임금을 섬긴〉 직(稷)293) ·설(契)의 현량(賢良)에 미치지 못하나, 그 만남을 돌아보면 천년에 한번 만날 만한 때에 보필을 부탁하였으니, 옛사람에 견주더라도 그 신의(信義)는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매우 믿고 오로지 위임한 것이 이제 4년이 되었다. 아! 을미년294) 동짓달에 강석(講席)에서 한 말과 병신년 3월에 여차(廬次)에서 아뢴 것과 지난해 6월 가례(嘉禮) 때에 한 말은 경의 마음속의 간절한 것인 줄 본디 알면서 나는 만류하였거니와, 경이 오늘 청한 것에 대해서만 내가 윤허하였다마는, 어찌 전에 말한 것들에 대하여 인색하고 뒤에 청한 것에 대하여 따른 것이겠는가? 내 마음을 경만은 알 것이니, 내가 어찌 차마 많이 말하여 말세의 거짓된 풍습을 본뜰 수 있겠는가? 아! 경의 말은 곧 내 말이니, 내가 경의 청을 애써 따른 뜻을 알려면 반드시 경의 글을 읽어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일전의 매복(枚卜)이 경의 집에 미친 것이 또한 어찌 범연한 뜻이었겠는가? 세도(世道)의 책무를 맡는 데에 어찌 마땅한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말에 나타내지 않은 숨은 뜻을 경은 말없는 가운데에서 알 것이다. 또한 생각하면, 우리 군신(君臣) 사이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오늘의 일을 보고 오늘의 일을 들으면 반드시 그렇게 말할 것인데, 이 뜻은 경의 상소에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일반의 뜻이라 하겠으나, 우리 군신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또한 어찌하여 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동요하겠는가? 선마(宣麻)295) 하는 날에 약간의 말을 갖출 것이다. 경의 상소 가운데에 있는 청을 윤허하니, 경은 헤아려 알라."
하였다. 홍국영은 본디 학문이 없고 행검(行檢)이 없으며 성질도 가볍고 사나워서 동배(同輩)에 끼지 못하였다. 을미년·병신년 임금이 춘저(春邸)296) 에서 외롭고 위태로울 때에 그가 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 등 역적들과 원한이 있기 때문에 주연(胄筵)297) 에 데려다 두었는데, 언동이 약빠르고 또 능히 저들이 하는 짓을 죄다 고하고 꺼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특별히 총애하였다. 그래서 국변인(國邊人)으로 자처(自處)하고 역적을 친다고 핑계하여 제뜻대로 다하였다. 임금이 등극하고서 한 해 안에 재상(宰相) 줄에 뛰어오르고 지신사(知申事) 로서 숙위(宿衛大將)을 겸하여 중병(重兵)을 손에 쥐고 금중(禁中)에 오래 있으면서 모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와 대각(臺閣)의 언론과 양전(兩銓)298) 의 정주(政注)를 다 먼저 결정한 뒤에야 위에 올리니, 공경(公卿)·백집사(百執事)부터 악목(岳牧)299) ·서관(庶官)까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뜻밖의 재앙이 당장 오므로, 온 세상이 두려워서 마치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여 여염집에서 사사로이 말하는 자일지라도 다 지신사라 부르고 감히 그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못하였다. 그 누이가 빈(嬪)이 되고서는 더욱 방자하고 무도하여 곤전(坤殿)300) 의 허물을 지적하여 함부로 몰고 협박하는 것이 그지없었으나, 임금이 참고 말하지 않았다. 그 누이가 죽고서는 원(園)을 봉(封)하고 혼궁(魂宮)을 두었고 점점 국권을 옮길 생각을 품어 앞장서 말하기를, ‘저사(儲嗣)를 넓히는 일은 다시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역적 이인(李䄄)301) 의 아들302) 을 대전관(代奠官)으로 삼고 그 군호(君號)를 고쳐 완풍(完豊)이라 하고 늘 내 생질이라 불렀다. 완이라는 것은 국성(國姓)의 본관이 완산(完山)을 뜻하고 풍이라는 것은 스스로 제 성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킨 것이다. 가리켜 견주는 것이 매우 도리에 어그러지므로 듣는 자가 뼛골이 오싹하였으나, 큰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고 감히 성내지 못하였다. 또 적신(賊臣) 송덕상(宋德相)을 추겨 행색이 어떠하고 도리가 어떠한 자를 임금에게 권하게 하였는데, 바로 담(湛)이다. 그래서 역적의 모의가 날로 빨라지고 재앙의 시기가 날로 다가오니, 임금이 과단(果斷)을 결심하였으나 오히려 끝내 보전하려 하고 또 그 헤아리기 어려운 짓을 염려하여 밖에 선포하여 보이지 않고 조용히 함께 말하여 그 죄를 낱낱이 들어서 풍자하여 떠나게 하였다. 홍국영이 제 죄악이 임금에게 깊이 밝혀진 것을 스스로 알아서 감히 항명(抗命)하지 못하고 드디어 부신(符信)을 바치고 나가서 강교(江郊)에 살았다. 드디어 삼자함(三字銜)을 주었는데 온 조정이 당황하고 놀라워하며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은 대개 임금의 큰 인애(仁愛)와 큰 도량 때문이다. 그가 숙위소(宿衛所)에 있을 때에 의녀(醫女)·침선비(針線婢)를 두고서 어지럽고 더러운 짓을 자행하였고, 거처하는 곳에 임금이 거처하는 곳과 담 하나가 막혔을 뿐인데 병위(兵衛)를 부르고 대답하는 것이 마치 사삿집과 같았고, 방 안에는 늘 다리가 높은 평상을 두고 맨발로 다리를 뻗고 앉았는데 경재(卿宰)가 다 평상 아래에 가서 절하였고, 평소에 말하는 것은 다 거리의 천한 사람이 하는 상스럽고 더러운 말투이고 장로(長老)를 꾸짖어 욕하고 공경(公卿)을 능멸하였으므로, 이때부터 3백 년 동안의 진신(搢紳)·사대부(士大夫)의 풍습이 하루아침에 땅을 쓴 듯이 없어졌다 한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22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註 279]임진년 : 1772 영조 48년.
- [註 280]
계회(契會) : 정이 굳게 얽힘.- [註 281]
척리(戚里) : 임금의 외척(外戚).- [註 282]
조지(朝紙) :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일을 날마다 아침에 적어서 반포(頒布)하던 일. 또는 그것을 적은 종이. 조보(朝報).- [註 283]
명소(命召) : 명소패(命召牌).- [註 284]
지신(知申) : 도승지.- [註 285]
탈가(稅駕) : 이사(李斯)가 진(秦)의 재상(宰相)이 되어 부귀가 극도에 이르자 "내가 탈가(稅駕)할 곳을 알지 못하겠노라."고 한 데서 나온 말. 탈가란 곧 해가(解駕)로, 수레를 풀고 편안하게 휴식하고자 하는 뜻임. 즉 이사가 부귀가 극도에 달하였으나, 향후의 길흉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으로 한 말임. 전하여 장래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으로 쓰임.- [註 286]
고신(告身) : 직첩(職牒).- [註 287]
저사(儲嗣) : 왕세자.- [註 288]
지우(知遇) : 남이 자기의 재능을 잘 알아 대접함.- [註 289]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註 290]
‘광무제(光武帝)는 능히 자릉(子陵)의 고절(高節)을 이룩하였습니다 : 자릉(子陵)은 후한(後漢) 사람. 엄광(嚴光)의 자(字) 엄광이 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숨어 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 대부(諫議大夫)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였음. 곧 임금이 신하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하는 것을 들어준 것을 말함.- [註 291]
삼자함(三字銜) : 봉조하(奉朝賀).- [註 292]
종남(終南) : 남산(南山).- [註 293]
직(稷) : 후직(后稷).- [註 294]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295]
선마(宣麻) : 임금이 신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할 때에 함께 써서 주는 글.- [註 296]
춘저(春邸) : 세자궁의 별칭.- [註 297]
주연(胄筵)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註 298]
양전(兩銓) : 이조와 병조.- [註 299]
악목(岳牧) : 지방관.- [註 300]
○丁未/次對。 都承旨洪國榮進前奏曰: "有區區仰達者。 聖心, 亦記今日乎? 今日, 卽臣王辰年初遇聖明之曰也。 粤自是日, 殿下之於臣, 恩渥之隆重, 知遇之殊異, 殆是千古所未有之契會也。 欲報之德, 昊天罔極者, 在臣情私, 猶屬歇后語也。 此生此世, 實無千萬一報效之道, 而斷斷素心, 只願世世生生, 爲殿下犬馬, 以效一分之忱。 臣之區區初心, 只以名義自任, 豈欲爲戚里之臣, 而事勢所迫, 有不得已者。 近年以來, 戚聯王室, 而公私不幸, 有今年五月之事矣。 自今以後 國事、民心, 無所繫焉, 莫知止泊之所。 臣晝思夜度, 百爾計之, 此莫非以臣之猶在於朝端, 故上不忍言之, 下不忍講之, 緣臣一身, 使國計至此, 豈不可悶乎? 今日, 卽臣永訣聖明之日也。 今將納符出去, 而臣於一出禁門之外, 若復有意於世, 而求見朝紙, 召接人客, 則此卽忘國家也。 天神必殛之。 臣五年當國, 朝廷命令, 多出於臣手, 而臣則別無貪濁欺暪之事矣。 天理循環, 豈有一直如此之理乎?" 仍解訓將命召, 手獻香案而出。 尙喆曰: "今日事, 臣等實未知其故矣。" 上曰: "卿等, 姑勿言。 此所以成其美, 而保終始之道也。 予豈無商量而然乎?" 命善曰: "改卜一事, 何關於知申之退、不退乎?" 上曰: "予與知申, 君臣之間, 實非泛然, 而今日, 卽壬辰相逢之日也。 自此至今, 致使知申誤身者, 蓋由於是也。 然若使善其晩節, 則豈不爲君臣間美事耶? 知申, 常以爲: ‘以此地處, 若或猶豫不退, 則畢竟將不知稅駕之所云’, 此言, 誠亦有理。" 民始曰: "今日之事, 可謂莫大之事也。 自上豈無商量而然也, 知申亦豈無商量而然乎? 知申可謂高人一等。" 上曰: "如此然後, 庶可以保終始。 自今以後, 任其遨遊於江湖山水, 而至於不見朝報、人客之說, 亦可見其心矣。 稱以休退, 猶復遙執朝權, 則此豈今日之意乎? 旣往雖誤, 此後事之善不善, 唯在自家之如何矣。" 民始曰: "事出不意, 臣等固已驚惑, 而更思之, 上下豈無商量而然乎? 臣與知申, 情如兄弟, 八年如一。 今日事, 誠極悵然, 而從今以往, 臣亦庶幾有優閒之日矣。" 上曰: "予自少時, 苦癖偶在於讀書, 而以忍得不可忍之事, 爲一分操守之工夫。 今日事, 亦是人所不可忍之境, 而此又忍過者, 予亦豈得已哉? 大體從古君臣之間, 恩義如初, 終始保全, 爲第一策。 知申此後, 則可爲方外之士, 而歌娃舞女, 以終其身。 卿等亦乘閒往會, 則亦豈非美事乎? 予則非不欲頻頻相見, 而出入頻數, 亦爲不緊, 或數月一次, 相爲通信計耳。" 洪國榮又上疏曰:
臣之是日, 卽出身, 而逢殿下之日也;卽告身, 而辭殿下之日也。 去就悲歡之際, 自不覺抑塞遲回, 咫尺筵席, 多有未畢之言。 今又獻符榻前, 歸身江外, 冒萬死更陳焉。 惟殿下察之。 噫! 臣之受殿下恩, 於古更有倫哉? 昊天罔極, 河海莫量, 猶屬例語。 臣不敢言, 而臣自受恩以來, 夙宵一心, 惟在毫分報效。 處禁闥, 籍王靈者, 亦已多歲月矣。 要其歸, 不過爲婦寺之忠、休戚之義而已。 每以宗祊一念, 爲臣不暝之恨, 耿耿在心, 如不欲生。 昨年, 慈殿特下大諭, 朝廷請卜賢門, 畢竟膺選, 乃在臣家。 臣竊自惟念, 臣則卽男子身耳, 無以爲殿下爲後圖, 而臣妹旣入宮, 庶幸其螽斯繁衍, 贊我三殿之喜, 寬我聖明之憂。 臣福薄, 臣妹又靑年而夭。 臣自厥後, 心神不安, 憂恐益甚者, 蓋以殿下之春秋方盛, 殿下之儲嗣無地, 殿下之國事惟難, 殿下之壼治罔涯。 凡今在廷之臣, 有二道理焉。 一, 以望中壼之誕育元良。 一, (而)〔以〕 望上念之廣及儲嗣。 夫何五六月之內, 上無發落, 下無爭難, 特以臣處地自別, 恩寵太優, 雖以殿下之聖明, 或拘於顔面, 群臣之顒祝, 猶逼於勢力, 迄此悠悠, 國不亡幸矣。 嗚呼! 臣自先朝知遇, 事殿下幾年, 致使天下大計, 緣臣而泮渙。 臣之罪, 天神必殛之。 臣晝宵登對之際, 以此仰奏, 舌幾弊矣, 辭旣竭矣。 凡人臣之事君, 不在於求容悅媚, 在於其言之行不行, 臣言, 乃天理之公。 殿下之違拂臣言者, 亦以臣身之在朝耳。 臣甘爲殿下負恩之人, 不敢爲先王得罪之鬼, 臣安得無今日之擧哉? 臣亦有私情之所可言者。 臣年今三十二矣。 爲進士及第, 猶爲不晩矣。 躬參國政, 手握兵權, 昔有是否? 重以門闌盈盛, 便一巨族, 淸朝之用人如此, 私門之受福如此, 家安得無事, 國安得不受其憂? 是以臣於殿下丙申三月初十日登極前一夜, 涕泣陳曰: ‘惟光武能成子陵之高。 臣固不及子陵, 而邸下何讓于光武乎? 使臣爲江湖一氓, 志願滿足矣。’ 殿下執臣手亦涕泣曰: ‘此時, 君可去乎? 差過數三年, 國事若有頭緖, 其時, 君可去矣。’ 臣拜伏受命, 逐隊隨行。 今又過三數年矣。 嗚呼! 殿下想記此言。 惟左承旨鄭民始, 亦嘗聞此也。 臣焉敢誣也? 嗚呼! 從古, 任國事者何限, 而臣之任國事, 亦有異焉。 凡大小公事, 眉睫憂樂, 臣未嘗不知。 凡內外巨細聲味辛醎, 臣未嘗不與焉。 有人臣擔此重、負此大, 而終焉無事, 死於席者乎? 臣事殿下以來, 惟有不欺心三字, 可幸無事至今矣。 貪戀不去, 終致狼狽, 臣固不足惜, 而後之論者, 其不有議於君臣之際乎? 此臣之所以, 光武、子陵事, 初仰陳於殿下者也。 然臣無可執之義, 無端求去, 其亦不誠。 試以今日事言之, 臣固無可執之義乎? 臣不謀於家庭, 不言于卿士, 辦此遑急之事, 亦豈臣樂爲也? 且臣於數日以來, 入則俯席而泣, 出則仰屋而吁, 有如將死之人, 惜其餘日之狀, 惟聖明或領會也。 今日之見臣此擧者, 皆瞠然而驚曰: ‘彼夫也, 忽有此事, 是必得罪國家而然也。’ 彼齷齪者安知臣心哉? 惟聖明, 可諒察也。 特借臣以三字銜, 以卒終始之澤焉。 都門一出, 終南便隔, 臣之耿耿然如子戀乳。 臨紙嗚咽, 不知所云。
批曰: "嗚呼! 前乎千古, 後乎千古, 孰有如吾君臣之遭逢與際會也哉? 予旣無姚、姒之明;卿不及稷、契之良, 而顧其遭逢也際會也, 則當千一之期, 寄心膂之托。 雖或方之古人, 而其信義庶無愧矣。 以是倚毗重, 而委任專, 迄今四載于玆矣。 嗚呼! 乙未至月講席之說, 丙申三月廬次之奏, 昨年六月嘉禮時言, 固皆知卿肝膈之懇, 而予則挽之矣。 獨於卿今日之請, 予乃許之, 何靳於前而從於後也? 惟予之心, 卿獨知之。 予安忍多誥, 以效叔季虛僞之風也? 嗚呼! 卿之新言, 卽子言也。 若知予勉循卿請之意, 須讀卿章, 則庶可悉之。 嗚呼! 日前枚卜之及於卿家, 又豈是泛然底意哉? 世道之責, 豈患無人? 言外之意, 卿可默會。 抑又思之, 世之不識吾君臣之際者, 觀今日之事, 聞今日之擧, 必曰云然。 此意, 卿疏亦已及之, 可謂一般意思也。 然在吾君臣心之如何而已。 亦何用毫髮之于其間哉? 多少具在宣麻日。 許副卿疏中之請, 卿其諒悉。" 國榮, 素不學, 無行檢, 性又剽輕悍愎, 爲儕流所不齒。 乙丙間, 上在春邸孤危, 以其與麟ㆍ簡諸賊, 有怨引, 處胄筵。 言貌便黠, 又能以渠所作爲, 悉告不諱。 以此特加寵幸。 於是, 自處以國邊人, 托討逆以逞其志。 及上御極, 一歲中, 超至宰列。 以知申事, 兼宿衛大將, 而手握重兵。 長處禁中, 凡軍國機務、臺閣言議、兩銓政注, 皆先就決, 然後方上徹。 自公卿、百執事, 至岳牧庶官, 聽其賢指。 少有違拂, 奇禍立至, 擧世惴惴, 若不保朝夕。 雖閭巷間屋下私語者, 皆稱知申事, 不敢斥呼其名。 及其妹爲嬪, 益恣肆不道, 指斥坤殿, 誣逼迫脅, 罔有紀極, 上隱忍未發。 及其妹喪, 封園置魂宮, 轉懷移國之計, 唱言曰: "廣儲嗣之擧, 不可再也。" 遂以逆䄄之子, 爲代奠官, 改其君號曰完豐, 恒稱吾甥也。 完者, 謂完山, 國姓本貫也。 豐者, 自指其姓貫之豐山也。 指擬絶悖, 聞者骨顫, 而積威所壓噤, 莫敢出氣。 又嗾賊臣宋德相, 投疏勸上, 行某樣ㆍ道理某樣者, 卽指湛也。 於是賊謀日急, 禍機日迫, 上乃決意乾斷, 而猶欲全保其終始, 且慮其難測, 不以宣示於外, 從容與語, 數其罪而諷之使去。 國榮自知其罪惡, 爲上所深燭, 不敢抗命, 遂納符而出居江郊。 遂假三字銜, 滿朝錯愕, 莫有知者, 蓋上之大仁也、偉度也。 其在宿衛所也, 蓄醫女、針線婢, 恣行淫褻。 所居與上所御, 隔一垣, 而兵衛唱喏, 如私第。 房中四時, 設高足平床, 赤胠箕踞, 卿宰皆往拜於床下。 恒居所言, 皆街巷賤人鄙俚, 醜穢口氣, 詬辱長老, 陵蔑公孤。 自是三百年搢紳士大夫之風, 一朝掃地云。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22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註 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