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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25일 丙申 1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정후겸을 귀양 보내고, 윤양후·윤태연을 이배하여 천극하게 하다

정후겸(鄭厚謙)경원부(慶源府)에 귀양보내고, 윤양후(尹養厚)거제부(巨濟府)에, 윤태연(尹泰淵)위도(蝟島)에 이배(移配)하되, 윤양후윤태연은 모두 천극(栫棘)031) 하였다. 정후겸은 곧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양아들인데, 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후·윤태연 등과 함께 영종(英宗)이 일에 싫증을 내는 틈을 타 안팎으로 결탁하여 당여(黨與)를 배치해 놓고는 권세를 농간하고 국법을 멸시하여 온 세상을 교란시키는 짓을 하였고, 임금이 영특하고 총명함을 꺼려서 모함하고 훼방하는 말을 떠벌리어 저궁(儲宮)을 동요시키려고 음모했었다. 화완 옹주는 또한 오랫동안 금중(禁中)에서 거처하며 그의 아들을 위해 갖가지로 흉계를 도왔고, 을미년032) 겨울에 대리 청정(代理廳政)하라는 명이 내린 날에는, 홍인한세 가지의 알 필요가 없다는 말033) 을 진언하여 기필코 큰 계책을 극력 저지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이미 청정하게 되자 또한 심상운(沈翔雲)을 불러들여 흉악한 상소를 하게 하여 번복되기를 도모하였으나 영종(英宗)의 성명(聖明)함을 힘입어 역적들의 음모가 행해지지 못하게 되었는데, 자세한 것이 《명의록(明義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이 초창기였기 때문에 여러 역적들의 죄를 미처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대사헌 이계(李溎)가 청대(請對)하자 여차(廬次)에서 소견하였다. 이계가 아뢰기를,

"국가의 안전과 위태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감히 공제(公除)034) 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수차(袖箚)를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적에 명종(明宗)의 대상(大喪) 때에도 공제(公除)가 지나가기 전에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이 간신 심통원(沈通源)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했었고, 인조(仁祖)의 대상 때에도 인산(因山)을 거행하기 전에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이 적신(賊臣) 김자점(金自點)을 토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정후겸은 곧 심통원·김자점과 같은 사람인데, 가까운 처지에서 품고 있던 흉계는 또한 심통원이나 김자점에게도 없었던 것입니다. 5,6년에서 6,7년 이래에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무너지고, 국세(國勢)가 위태롭게 되고, 인심이 의구심에 빠지게 된 것은 첫째도 정후겸 때문이고, 둘째도 정후겸 때문입니다. 성사(城社)035) 에 의존하여 깊숙하고 엄숙한 대궐에 출몰하여, 일삼는 바는 몰래 임금의 뜻을 엿보는 것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의지하여 조정을 위협하고 견제하며 도모해 온 바는 몰래 국가의 권병(權柄)을 옮겨 쥐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신(將臣)들을 기미(羈糜)하여 우익(羽翼)을 만들어 놓고 전선(銓選)을 맡아 보며 세력을 배치해 놓아, 사람들의 성하고 쇠함이 그의 찡그림과 웃음에서 판단되어지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무릎 밑에서 구분되어지므로, 한 부류의 환득 환실(患得患失)036) 하는 무리들이 싹 쓸리어 앞을 다투어 붙으며 혹시라도 뒤지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는 신축년037)임인년038) 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습니다. 연희(燕喜)의 저택과 계룡산(鷄龍山)의 전장(田庄)은 예적의 이른바 건강(乾崗)039) 의 침석(枕席)과 부참(符讖)의 응험과 같은 것으로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으므로, 신명(神明)과 사람이 다같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하신 하교는 신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으니, 제번하고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040) 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고개를 쳐들며 추대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마는, 정후겸은 감히 시기와 혐오를 간직하고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속이고 현혹하는 말을 떠벌리어 의구(疑懼)하여 경동(驚動)하게 하고 위혐하게 핍박하는 짓을 했으니, 지난날의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져 백관들이 뜰에서 하례를 올리는 날에 춘궁(春宮)041) 의 관직을 띤 몸으로서 완강하게 소명(召命)을 어기어 뚜렷이 대항하여 다투려는 뜻이 있었으며, 아주 가까운 지경에서 요망한 심상운을 교묘하게 부리어, 감히 어지러이 수수(授受)하게 하는 흉계를 부리고 있다가, 이번에 하늘이 아픔을 내리게 되므로 만백성이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있는데도, 갑자기 병을 핑계하며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짓을 하여 조금도 애통해 하거나 경황이 없어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은 길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아는 바입니다. 시급히 정후겸의 전후의 죄악을 중외(中外)에 포고하고 분명하게 국법대로 정형(正刑)에 처하시기를 바랍니다. 화완 옹주도 그런 아들과 그런 어미이기에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원수로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실정과 처지가 그전과 달라졌기에 의심과 시기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 암암리에 꾀를 몰래 부려 어떠한 변괴를 만들어 내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또한 바라건대 즉일로 물리치어 내치고 일찌감치 감처(勘處)를 내려 궁금(宮禁)이 맑아지게 하고 넘보는 짓이 끊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수응(酬應)할 수 있는 때가 아니므로 공제(公除)를 기다린 마음에 처결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서호수(徐浩修) 등과 교리 정우순(鄭宇淳) 등이 계사(啓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이계의 말대로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또한 윤양후·윤태연 등이 정후겸의 혈당(血黨)이라는 이유로 우선 이배(移配)하고 천극(栫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구대(求對)하여 정후겸 모자의 죄를 시급히 바로잡기를 극력 청하니, 하교하기를,

"공손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때라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정후겸은 멀리 귀양 보내고 옹주는 이미 사제(私第)로 나갔으므로 논할 것이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註 031]
    천극(栫棘) : 귀양살이하는 중죄인의 거처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제한하는 일.
  • [註 032]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033]
    세 가지의 알 필요가 없다는 말 : 영조 51년(1775) 11월 계사일에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고 하자, 홍인한이 이를 반대하면서, "동궁(東宮)께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 누가 합당한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조정의 일에 대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던 것을 말함.
  • [註 034]
    공제(公除) :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일반 공무를 중지하고 26일 동안 조의를 표하던 일.
  • [註 035]
    성사(城社) : 성호 사서(城狐社鼠)의 준말. 굴 속에 있는 여우를 파 내려 하나 성이 무너질까 두렵고, 쥐를 불질러 쫓으려 하나 사당이 타버릴까 두렵다는 뜻으로 세력가에게 의지하여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비유한 말임.
  • [註 036]
    환득 환실(患得患失) : 지위(地位)를 얻지 못하여서는 어떻게 하면 얻을까 하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소인배를 가리킴.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
  • [註 03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38]
    임인년 : 1722 경조 2년.
  • [註 039]
    건강(乾崗) : 집 좌향(坐向)이 건좌(乾坐) 즉 서북향(西北向)인 것을 말함. 옛날 천자의 궁궐을 건좌로 지었다고 하며 여기서는 그 기상과 행동이 장차 반역을 범하리라는 것을 비유한 말로 쓰임.
  • [註 040]
    왕망(王莽)·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 : 모두 중국의 유명한 반역자들임. 왕망은 한(漢)나라 평제(平帝)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웠고, 조조는 후한(後漢)의 혼란기에 세력을 떨쳐 그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魏)나라를 세우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사마의는 조조의 신하로 있으면서 그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며, 환온은 진나라 말기에 황제를 폐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였음.
  • [註 041]
    춘궁(春宮) : 예조의 별칭.

○丙申/竄鄭厚謙慶源府, 移配尹養厚巨濟府, 尹泰淵蝟島, 養厚泰淵竝荐棘。 厚謙和緩主之繼子, 與洪麟漢洪相簡養厚泰淵等, 乘英宗倦勤, 表裏糾結, 布植黨與, 弄權蔑法, 壞亂一世, 憚上英明, 譸張誣毁, 謀欲動搖儲宮。 和緩主又長處禁中, 爲其子助兇百方, 乙未冬代聽命下之日, 麟漢進三不必知之說, 必欲力沮大計。 上旣聽政, 又募沈翔雲, 投匈疏以圖飜覆, 賴英宗聖明, 賊謀不得售, 詳載《明義錄》。 至是庶事草創, 未及明正諸賊之罪, 大司憲李溎求對, 召見于廬次。 奏曰: "事係國家安(巵)危, 不敢遲待公除。" 仍陳袖箚, 略曰:

明宗大喪, 未過公除, 而相臣李浚慶請討奸臣沈通源, 仁祖大喪, 未行因山, 而先正臣宋浚吉, 請討賊臣自點。 今日之鄭厚謙, 卽通源自點, 而地處之逼, 包藏之匈, 又通源自點之所無, 五六七年以來, 世道之壞亂, 國勢之岌嶪, 人心之疑懼, 一則厚謙, 二則厚謙。 依籍城社, 出沒深嚴, 而所事者密覘上意也, 憑恃寵靈, 脅制朝廷, 而所營者陰移國柄也。 羈絡將臣, 作爲羽翼, 主張銓選, 排布氣勢, 榮枯判於嚬笑, 殺活分於淵膝, 一種患得失之徒, 靡然爭附, 惟恐或後。 甚至辛壬三兇之爲先大王萬世之讎者, 欺蔽斡旋, 復其官秩。 燕喜之宅, 鷄龍之庄, 古所謂乾崗之枕, 符讖之應, 擧世譁傳, 神人俱憤。 惟我先大王祖孫相依之敎, 可以感動臣隣, 除非, 孰不延頸願戴? 而厚謙則敢蓄猜嫌, 常懷怨懟, 譸張誑惑之說, 疑動危逼之形, 昔之, 無以過此。 及夫名位旣定, 百僚庭賀之日, 身帶春官, 悍然違召, 顯有爭抗之意, 指顧之間, 幻出妖, 敢售疑亂授受之計, 而乃者昊天降割, 萬姓號擗, 而卒然托疾, 扶杖緩步, 略無哀遑之色, 其心所在, 路人皆知。 亟請以厚謙前後罪惡, 布告中外, 明正典刑。 至於和緩翁主, 是子是母, 國人之所共讎。 到今情地殊前, 疑忌轉甚。 其暗售潛逞, 不知做出何等變怪, 亦願卽日逬黜, 早賜勘處, 以淸宮禁, 以絶覬覦。

批曰: "此非酬應之時, 待公除後處之。" 都承旨徐浩修等, 校理鄭宇淳等, 以啓以箚, 請從言, 不允。 玉堂又以養厚泰淵, 厚謙之血黨, 請先移配荐棘, 從之。 大臣三司求對, 力請亟正厚謙母子之罪。 敎曰: "恭默之時, 有難多言。 鄭厚謙遠竄, 翁主已出第, 無可論矣。"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