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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 8월 12일 庚辰 2번째기사 1771년 청 건륭(乾隆) 36년

김치인이 사서 민양렬이 사초를 바치지 않았던 일 등을 아뢰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얼마 전에 사서 민양렬(閔養烈)이 사초(史草)를 바치지 않았다 하여 본직(本職)의 체차(遞差)를 허락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한림(翰林)은 비록 승륙(陞六)325) 하였다 하더라도 사초를 바치기 전에는 부직(付職)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례(古例)입니다.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검의(檢擬)하는 데 구애받음이 없으므로, 지난날 이로써 진달하여 전조의 당상을 추고(推考)하였었는데, 얼마 안되어 또 이러한 일이 있어서 번거롭게 처분하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해당 전관(銓官)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유언술(兪彦述) 등이 품었던 생각을 진계하고, 삭출(削黜)한 죄인 홍봉한(洪鳳漢)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또 누누이 하교하고 이어서 스스로 하는 대로 맡겨 두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유언술 등이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특별히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홍술해(洪述海)를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정광충이 품고 있는 생각을 진계(陳啓)하기를,

"지난날 합사(合辭)한 논의가 지극히 엄중하여 잠시 일으켰다가 곧 정지하여 대각(臺閣)의 체모(體貌)를 무너뜨려 손상시킨 것은 이미 말할 만한 것도 없지만, 전 도헌(都憲) 조영진(趙榮進)이 당초에 강개(慷慨)하여 논의를 일으켰다가 곧 몹시 측은하게 여기시는 하교로 인하여 이를 정지하였다는 것은 전후가 모순된 것으로 극도로 한심한 데 해당되며, 전 간장(諫長) 윤방(尹坊)이 따라서 참여하였다가 따라서 정지하였다고 말한 것 또한 대각(臺閣)의 수치가 됩니다. 청컨대 아울러 삭직(削職)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전 도헌은 결코 강경했던 것도 아니고 또한 승순(承順)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 자세히 살피지 않았으니,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전형을 시행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본 일에 대해서는 내가 묻고 싶지 않다. 무엇 때문에 지극히 중대하게 여기는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홍봉한은 처지가 어떠한데, 수십년 동안 정권(政權)을 잡아 제멋대로 했을 뿐만이 아니므로, 여분(輿憤)이 이미 절실하여 조정의 논의가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몹시 가엾게 슬퍼하신 하교에 감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부범(負犯)이 지극히 중대함은 어찌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봉한이 전에는 잘했으나, 그 당시의 일만 유독 잘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전의 일도 또한 어찌 잘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이에 대해 말하게 한다면, 지난번의 일을 홍봉한이 어찌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눈물을 흘리면서 간(諫)했어야 마땅하고, 간해서 얻지 못하면 마땅히 나에게 사실을 고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죄이므로, 그를 밀병(蜜餠)에 부처(付處)했었다. 내가 신축년326) ·임인년327)유복명(柳復明)을 대간(大諫)으로 삼은 후부터 ‘합계(合啓)’ 두 자에 대해 지리(支離)함을 금하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또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또 대신(臺臣)도 가소롭다. 만약 하고자 하면 한층 더해야 할 것인데, 전일에 부처한 것을 어떻게 거듭할 수 있겠는가? 그 조사(措辭)도 또한 강직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정광충을 사명(賜名)한 것이 무엇 때문인데, 오늘의 거조는 판이하여 두 사람 같으니 사명한 것이 스스로 부끄럽다. 대사헌 정광충은 먼저 체차(遞差)한 다음 갑산부(甲山府)에 원찬(遠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의 대각(臺閣)을 살펴보건대, 말단이 어떻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서로 버틴다면 언제 처리하겠는가? 이제 내가 마땅히 스스로 처분해야지 어떻게 합사(合辭)를 기다리겠는가? 나에게는 군강(君綱)이 있는데, 또한 어떻게 구차하게 하겠는가? 혜빈(惠嬪)에게 은고(恩顧)를 내릴 것을 생각하는 것은 홍봉한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군(人君)은 거조가 정대(正大)해야 마땅하니, 어찌 지금의 이목(耳目)에 따라 용렬하게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양사(兩司)를 감률(勘律)한 바에 의거하여 미처 청하지 않은 자는 먼저 안율(按律)하라는 청을 먼저 윤허하였으나, 특별히 그 율을 용서하되 종신토록 서인을 삼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하교한 후에는 거듭 율(律)을 더하는 일이 없을 것인데, 이것은 충자(冲子)를 위하고 국강(國綱)을 위한 것이다. 만약 다시 이 일을 제기하면, 주(周)나라의 팔형(八刑)328) 은 난민(亂民)에 대해서도 오히려 형벌이 있었는데, 더욱이 난신(亂臣)이겠는가?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이를 듣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3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역사-편사(編史)

  • [註 325]
    승륙(陞六) : 7품(七品)이하의 벼슬아치가 6품(六品)에 오름.
  • [註 326]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327]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328]
    팔형(八刑) : 주대(周代)의 여덟 가지 형벌. 곧 불효(不孝)·불목(不睦)·부제(不弟)·불임(不任)·불휼(不恤)·조언(造言)·난민(亂民)에 대한 형(刑).

○上御集慶堂, 引見大臣備堂。 領議政金致仁啓曰: "俄者以司書閔養烈之未納史草, 有本職許遞之命, 翰林雖陞六, 未納史草之前, 則不得付職, 乃古例也。 而近來銓曹, 無礙檢擬, 故向日以此陳達, 推考銓堂, 而曾未幾何, 又有此事, 至煩處分, 請當該銓官罷職。" 上從之。 大司憲兪彦述等陳所懷, 請削黜罪人洪鳳漢中途付處, 上又縷縷下敎, 仍命任自爲焉。 彦述等引避, 上特施永刊仕版之典。 以鄭光忠爲大司憲、洪述海爲大司諫。 光忠陳所懷曰: "向日合辭之論, 至爲嚴重, 乍發旋停, 臺體之壞損, 已無可言, 前都憲趙榮進, 初因慷慨而發之, 旋因懇惻之敎而停之, 前後予盾, 極涉寒心, 前諫長尹坊之以隨參隨停爲言者, 亦爲臺閣之羞。 竝請削職。" 答曰: "前都憲則決非强爲, 亦非承順。 然處事不審, 特施不敍之典。" 仍敎曰: "本事則予不欲問。 何爲至重?" 光忠曰: "洪鳳漢之地處何如, 而數十年秉政, 不特專擅矣, 輿憤旣切, 廷論方發。 惻怛之敎, 非不感動, 而其於負犯之至重何?" 上曰: "洪鳳漢, 前則善爲, 其時事獨不善爲乎?" 光忠曰: "前事亦豈善爲乎?" 上曰: "使我言之, 向來之事, 鳳漢豈不知之? 在渠之道, 固當垂涕而諫, 諫而不得, 則當告于予, 鳳漢不此之爲, 此渠之罪也, 付處於渠蜜餠。 而予自辛壬, 柳復明爲大諫之後, 合啓二字, 不勝支離, 今又有此事, 予豈堪忍乎? 且臺臣亦可笑矣。 若欲爲之, 則當加一層, 前日之付處, 何可更爲乎? 其措辭, 亦非骨鯁矣。" 仍敎曰: "鄭光忠賜名若何, 今日擧措, 判若二人, 賜名自愧。 大司憲鄭光忠先遞差, 甲山府遠竄。" 又敎曰: "觀今臺閣, 可謂末如之何? 以此相持, 何時了當? 今予當自爲處分, 何待合辭? 予有君綱, 亦何苟且? 憶垂恩顧惠嬪, 非爲鳳漢也, 人君擧措, 其宜正大, 何可隨今耳目而庸碌乎? 依昨日兩司勘律, 未及請者, 先允按律之請, 而特貸其律, 免爲庶人, 以終其年。 若此下敎之後, 更無加律之事, 此則爲沖子爲國綱。 若復提此事, 之八刑, 亂民猶有刑, 況亂臣乎? 其令中外, 咸使聞之。"


  • 【태백산사고본】 78책 117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93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