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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42권, 영조 12년 11월 23일 壬子 3번째기사 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고 자수한 박성창을 석방하다

효자 박성창(朴聖昌)을 복호하라고 명하였다. 박성창공홍도(公洪道)의 백성인데 아버지의 원수를 찔러 죽이고 관(官)에 나아가 청명(請命)하였다. 관찰사 이종백(李宗白)이 논계(論啓)하였으므로 형조에 내렸는데, 형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 박성창은 바로 주관(周官)에서 이른바 ‘사람을 살해하였으나 의로운 것이다.’라는 것에 해당이 됩니다. 경(經)에도 복수의 의리를 허여하였습니다만, 법에는 당연히 시행해야 할 율(律)이 있는 것입니다. 당(唐)나라의 신하인 한유(韓愈)의 복수장(復讐狀)에 이르기를, ‘무릇 아버지를 위해 원수를 갚은 경우에는 그 사건이 발각된 즉시 그 사건의 내용을 갖추어 상서성(尙書省)에 신보(申報)하고, 거기에서 의논을 모아 주문(奏聞)하여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처리한다.’고 했는데, 이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지금 박성창의 어미가 맹인(盲人)이어서 폐기된 사람이지만, 9년 동안 원수를 섬겼으니, 그 죄가 윤상(倫常)에 관계되므로 또한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두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대저 박성창은 어린 나이에 변을 당하였으므로, 숨어서 떠돌아 다니다가 장성하자마자 통쾌하게 9년 전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일이 매우 기특하고 그 효성이 숭상할 만합니다. 도신이 인용한 주관(周官)의 의의가 진실로 윤당(允當)합니다. 그러나 관에 고하지 않고 멋대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장(杖) 60이라는 것이 율문(律文)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박성창의 어미 김씨(金氏)는 맹인인데다 힘이 약하여 흉포한 장년(壯年)의 남자를 항거할 수 없었던 것은 이세(理勢)가 진실로 그러하였습니다만, 자기 아들이 복수하겠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기꺼이 따라서 도와 성공시켰으니, 이 또한 드러낼 만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누적되어 온 통분한 마음에 설사 의(義)를 자처하기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만, 폐질(廢疾)이 있는 몸이고, 죄가 사형(死刑)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법에도 논하지 말라는 조문이 있으니, 너그럽게 사면(赦免)하여 방송(放送)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고사를 상고하게 하였다. 옥당 유건기(兪健基)가 말하기를,

"옛날 장심소(張審素)의 아들 장황수(張璜琇)양왕(楊汪)이 자기 아비를 무함하여 살해한 것을 원통하게 여겨 영표(嶺表)에서 도망하여 돌아와서 양왕을 죽였습니다. 장구령(張九齡)459) 은 이를 살리려고 했습니다만, 이임보(李林甫)가 쟁론하였으므로, 드디어 죽임을 당했는데, 사민(士民)들이 불쌍하게 여겨 그를 위해 애뢰(哀誄)를 지어 사당에 바쳤으며, 호씨(胡氏)460) 의 의논도 장구령을 옳게 여겼습니다. 양(梁)나라 천감(天監)461) 연간에 회양(淮陽) 사람이 그 태수(太守) 성안락(成安樂)을 죽이고 성(城)을 가지고 내부(內附)하자 무제(武帝)가 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성경준(成京儁)이 사람을 사서 자기 아비를 살해한 자를 찔러 죽이자 무제는 이를 의롭게 여겨 석방하였습니다. 본조의 신용개(申用漑)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도당에서 살해당하였는데, 신용개가 아비의 원수를 도심(都心)의 시가(市街)에서 칼로 베고서 대궐에 나아가 청명(請命)하였으나, 조가(朝家)에서 죄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박성창도 죄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판결하기를,

"다만 한유(韓愈)의 복수의(復讐議)뿐만이 아니라 왕첩(往牒)462) 과 국조(國朝)의 고사에도 모두 원인(援引)할 만한 것이 있으니, 특별히 장형(杖刑)을 제하고 방송(放送)하도록 하라. 박성창은 그의 나이 9세의 어린 아이로서 아비의 원수를 기억하였다가 9년 뒤에 어미를 찾아서 대낮에 원수를 갚았으니, 옛사람에 견주어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관정(官庭)에 자수하여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또한 옛날 왕세명(王世命)에 견주어 부끄러울 것이 없다. 특별히 복호를 제급하여 그의 효성을 표창하는 바이다. 그의 어미 김씨도 방송하여 박성창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돌아가게 하도록 도신에게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26면
  • 【분류】
    재정-역(役)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註 459]
    장구령(張九齡) : 당 현종(唐玄宗) 때 명상(名相).
  • [註 460]
    호씨(胡氏) : 북송(北宋)의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 [註 461]
    천감(天監) : 양 무제(梁武帝)의 연호.
  • [註 462]
    왕첩(往牒) : 사서(史書).

○命復孝子朴聖昌戶。 聖昌, 公洪道民也。 刺殺父讎, 詣官請命。 觀察使李宗白論啓, 下刑曹。 刑曹奏曰: "今此朴聖昌正是周官所謂殺人而義者也。 經許復讎之義, 法有當施之律, 而韓愈復讎狀云: ‘凡復父讎, 事發具其事, 申尙書省, 集議奏聞, 酌其宜而處之。’ 蓋欲使經權, 不失其宜也。 今聖昌之母, 雖是盲廢之人, 九年事讎, 罪關倫常, 亦不可輕加原恕, 竝令該曹稟處。 夫聖昌幼穉逢變, 竄伏流離, 纔及長成, 快復九年之讎, 其事甚奇, 其孝可尙。 道臣所引《周官》之義, 誠爲允當, 而不告官擅殺者, 杖六十, 昭載律文, 有難撓改。 聖昌, 目盲力弱, 不能拒凶悍之壯男, 理勢固然, 而其子有復讎之意, 則樂聞而助成之, 此亦可暴積年隱痛之心。 設有處義之未盡, 廢疾而罪不至死, 則法有勿論之文, 寬免放送, 恐合事宜。" 上使儒臣, 博考古事。 玉堂兪健基曰: "昔張審素之子瑝琇, 怨楊汪誣殺其父, 自嶺表逃歸殺張九齡欲活之, 李林甫爭之, 遂見殺, 士民憐之, 爲作哀誄致堂。 胡氏之論, 亦以九齡爲韙。 天監中, 淮陽人殺其太守成安樂, 擧城內附, 武帝賞之。 子京雋購人刺殺殺其父者, 武帝義而釋之。 本朝申用漑之父㴐爲咸吉道觀察使, 被害於李施愛之黨, 用漑劍斬父讎於都市, 詣闕請命, 朝家不罪。 今聖昌似無可罪。" 上判曰: "非特韓愈之議, 往牒與國朝故事, 俱有可援, 特令除杖放送。 夫聖昌以九歲穉兒, 能記父讎, 尋母於九年之後, 雪讎於白晝之中, 比諸前人, 可謂特異。 自首官庭, 視死如歸, 亦無愧於昔之王世命矣。 特爲給復, 以彰其孝。 其母亦放, 令聖昌護歸事, 諭道臣。"


  •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26면
  • 【분류】
    재정-역(役)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