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형수의 일로 잇따른 상소에 대해 무엄하다 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서명균(徐命均) 등에게 이르기를,
"조금 전에 민형수(閔亨洙)의 일 때문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민 판부사(閔判府事)가 진실로 개탄스럽기만 하다. 9년 동안 마음에 가득 맺힌 회포를 지난날에 하교하였던 것인데 이제 곧 그 아들을 교유(敎諭)하여 또 상소하였으니, 사실 수차(袖箚)가 근본이 된 것이다. 병을 조리하는 가운데 반드시 나의 마음을 격동시키려고 하지만, 내가 어찌 그에게 격노(激怒)해 병이 겹쳐져 그가 마음먹은 것을 맞추어 주겠는가? 내가 이제부터 억지로라도 약을 먹고 오래 살 것이니, 결단코 범증(范增)이 등창이 나고 주아부(周亞夫)가 피를 토하듯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형수가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쫓으려 하여 함부로 성(姓)을 버리고 이름을 지척(指斥)하였으니,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아비에게 이와 같이 한다면 제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편안치 않겠는가? 그리고 김재로(金在魯)의 언론(言論)은 약간 낫긴 하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홍 영상(洪領相)은 능히 이 영부사(李領府事)의 마음을 알아 주니 내가 일찍이 가상하게 여겼다. 민 봉조하(閔奉朝賀)는 치사(致仕)했음에도 도리어 수차(袖箚)를 진달(陳達)하였으니, 그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이로써 보건대 만약 치사(致仕)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더욱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작년 1월에 아뢴 말은 진실로 경솔하였다. 명종조(明宗朝)의 고사(故事)를 어떻게 오늘에 다 비겨 의논할 수 있겠는가? 저번에 송인명(宋寅明)이 금령(禁令)을 베풀지 말라고 말한 것이 비록 옳기는 하지만 시기와 형편이 옛날과 다름이 있으니, 민 판부사(閔判府事)가 갑자기 진달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다. 그럼에도 조정 신하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논하지 않았으니, 또한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 판부사가 만약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생각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은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나이가 아직도 희망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고, 또 선왕(先王)의 친 혈육이 없고 연령군(延齡君)의 양자(養子)에 또한 합당한 자가 없다.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이제 존재하지 않다고 한들 이와 같은 말을 어떻게 경솔히 입에 꺼낸단 말인가? 원량(元良)396) 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 15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운명이 기박하여 아직도 후사(後嗣)가 없는데, 민 봉조하(閔奉朝賀)의 말을 듣고부터는 심담(心膽)이 떨어지는 듯하여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속으로 ‘나라 형편이 만약 외롭고 약하지만 않았다면 민 봉조하의 말도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하였다.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또 진달하기에 내가 짐짓 진정(鎭定)하라고 답하였으나, 재삼 착실히 유의할 것을 굳이 청하였다. 그 심정을 추구하여 보면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고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내가 비록 어둡고 용렬하나 기필코 송종(宋宗)과 같지는 않을 것인데 장차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때 과연 관대하게 포용하였는데도 민형수가 또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남이 만약 그 아비를 그가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무함하듯 무함한다면 그는 장차 무어라 하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민형수가, 그 아비가 전번에 영동(嶺東)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므로 유감을 풀려고 한 계획이니, 이 봉조하의 그 당시의 일은 진실로 지나쳤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성감(聖鑑)이 몹시 밝으시니 신(臣) 등은 더욱 감격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여 엄히 처분하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어찌 이와 같이 지나친 성기(聲氣)를 쓰셔서 조섭(調攝)하시는 체후(體候)를 손상시키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편당(偏黨)을 없애고 선왕(先王)께 돌아가 배알(拜謁)하려 하니, 어찌 한낱 민형수에게 마음이 격동되어 음식을 물리치고 잠을 자지 않아 병을 더하게 하겠는가? 위로 인현 성모를 생각하고 아래로 부부인(府夫人)을 생각하면 어떻게 차마 민형수를 멀리 내칠 수 있겠는가마는 국법(國法)으로는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또한 말하기를,
"노여움의 원인이 그에게 있으니, 다만 마땅히 엄하게 처분할 뿐입니다. 과격하게 노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아 온 일이 많았다. 옛날에도 또한 박소(薄昭)의 사건397) 과 공명(孔明)398) 이 울면서 마속(馬謖)을 참(斬)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참아 온 적이 많았다. 지난번에 권혁(權爀)이 귀양갔을 때 한덕후(韓德厚)가 진소(陳疏)하여 ‘공의(公議)에서 나왔다.’고 한 것을 내가 몹시 잘못으로 여겼다. 요즘 옥당(玉堂)에서 또 다시 영구(營救)하였으니, 오원(吳瑗)은 더욱 무엄하다. 지난번 연중(筵中)에서 면계(勉戒)한 뒤에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6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정론-간쟁(諫諍)
- [註 396]원량(元良) : 왕세자(王世子).
- [註 397]
박소(薄昭)의 사건 : 박소는 박희(薄姬)의 아우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외삼촌임. 지후(軹侯)에 책봉되었고 사신을 살해하는 등 방자하게 굴었음. 문제가 자결하게 하였으나 자결하지 않으므로, 문제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가서 조문하며 통곡하자 하는 수 없이 자결하였음.- [註 398]
공명(孔明) : 제갈양(諸葛亮)의 자.○藥房入診。 上謂徐命均等曰: "俄以閔亨洙事下備忘, 而閔判府誠慨然矣。 九年弸結之懷, 下敎於頃日矣, 今乃敎諭其子, 又爲上疏, 其實袖箚爲本矣。 靜攝之中, 必欲予之激惱, 予豈可激怒於渠, 而添病適中其心乎? 予欲從此强服藥而久視, 決不如范增之疽發, 亞夫之嘔血矣。 亨洙欲逐李奉朝賀, 肆然去姓斥名, 若他人於渠父如此, 則於渠心安乎否乎? 金在魯言論稍勝, 而內則不然。 洪領相能知領府事之心, 予嘗嘉之矣。 閔奉朝賀致仕, 而猶陳袖箚, 未知其出於利己乎爲國乎。 以此觀之, 若不許休致, 尤當如何? 昨年正月所達之言, 誠踈率矣。 明宗朝故事, 何可擬議於今日乎? 向來宋寅明勿設禁之言, 雖是而時勢與古有異, 閔判府遽然陳達誠非矣, 而朝臣皆緘口不論, 亦可謂朝廷有人乎? 閔判府若思仁顯聖母, 必不宜發此等言矣。 予年猶非望斷之人, 且無先王骨肉, 延齡養子, 亦無可合者。 三宗血脈, 今無存者, 則如此之言, 何可率口而發乎? 元良若生存, 則今至十五歲矣。" 仍嗚咽流涕曰: "予命道奇險, 尙無嗣屬, 自聞閔奉朝之言, 心膽若墜, 意尙忽忽, 而自語於心曰: ‘國勢若不孤弱, 則閔奉朝之言, 亦不必若此矣。’ 頃日筵中, 又爲陳達, 予以故爲鎭定爲答, 而再三以着實留意固請, 究其心則斷斷無他, 亶出於爲國。 予雖暗劣, 必不如宋宗, 將置我何地之言也。 予於其時, 果爲優容, 而亨洙又安敢若是? 人若構誣其父, 如渠之誣李奉朝, 則其將謂何? 此無他, 閔亨洙以其父之向來見謫於嶺東, 欲爲逞憾之計, 李奉朝賀其時事誠過矣。" 命均曰: "聖鑑孔昭, 臣等冞切感激之心, 嚴處分而已。 何如是過用聲氣, 以損調攝之候耶?" 上曰: "予欲祛偏黨, 而歸拜先王, 豈可激惱於一亨洙, 却膳廢寢, 以至於添病也哉? 上念仁顯聖母, 下思府夫人, 豈忍遠逐閔亨洙, 而國法不可貸也。" 提調尹淳亦以爲: "可怒在彼, 只當嚴處分而已, 不必激怒。" 上曰: "忍之者多矣。 古亦有薄昭事、孔明泣斬馬謖, 而予則忍之者多矣。 向來權爀之竄逐也, 韓德厚陳疏以爲, 出於公議, 予甚非之矣。 今者玉堂又復營救, 吳瑗尤爲無狀矣。 頃日筵中勉戒之後, 豈敢若是乎?"
-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6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정론-간쟁(諫諍)
- [註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