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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27권, 영조 6년 8월 27일 癸亥 2번째기사 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이의현이 대행 왕대비의 묘지문을 지어 올림에 첨삭하여 내려 주다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유지(幽誌)291) 를 찬진(撰進)하였는데, 그 글 가운데 성상(聖上)을 책봉(冊封)하여 사하(嗣下)로 삼을 적에 혹은 차자(箚子)로 혹은 소(疏)로써 안팎이 서로 결탁하여 위핍(危逼)하고 모해(謀害)하였다는 귀절이 있었으니, 대개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의 제적(諸賊)을 지적한 것이었다. 임금이 그 글을 보고 대노(大怒)하여 하교하기를,

"무신년292) 의 난역(亂逆)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앞에서 일으켰고, 세력을 잃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뒤에서 잇달았는데, 역적 김일경의 마음은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를 이끌어 들여서 흉역(凶逆)한 심사(心思)를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국본(國本)이 이미 정하여져서 그 계획을 행할 수가 없게 되자, 교문(敎文)을 가지고 난역의 근본을 앞장서 부르짖었으며, 갑진년293) 의 대상(大喪) 뒤에 김일경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하자 역적 박필몽(朴弼夢)과 같은 우두머리 제적이 차마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흉언(凶言)을 만들어내어 폐족(廢族)의 무리들을 선동하여 그 역모(逆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전말(顚末)이 이와 같은데도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문(誌文)으로써 후일 조정 고관(高官)을 병들게 하는 칼자루를 만들었다. 일찍이 시상(時象)을 통한(痛恨)한 것은 곧 성후(聖后)께서 평일에 가지신 뜻인데 지문(誌文)으로 인하여 해가 더욱 크게 되었다. 성덕(聖德)을 빛내려고 하다가 도리어 누(累)가 된다면, 그것은 곧 나의 불효(不孝)이다. 지문을 찬진한 신하는 어찌 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글을 지었겠는가? 나는 가만히 개탄하는 바이다."

하고, 인하여 첨삭(添削)하여 내려 주니,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6년 경술년294) 6월 29일 병인(丙寅)에 경순 왕대비(敬純王大妃)께서 경덕궁(慶德宮)어조당(魚藻堂)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26세였다. 7월 6일 계유(癸酉)에 유사(有司)가 ‘선문 주달(善聞周達)’과 ‘온유 성선(溫柔聖善)’의 2법(二法)을 써서 존시(尊諡)를 선의(宣懿)라 올리고, 휘호(徽號)를 효인 혜목(孝仁惠穆)이라 올렸으며, 방상(方上)은 의릉(懿陵)에 하여 이미 정하여지니, 우리 전하(殿下)께서 드디어 어제 행록(御製行錄) 한 통(通)을 내리면서 신(臣) 이의현(李宜顯)에게 유택(幽宅)의 지문을 쓰라고 명하셨다. 신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배수 계수(拜手稽首)하고 엎드려 그 행록을 읽은 뒤 감탄하기를, ‘우리 성후(聖后)의 지덕(至德)은 진실로 결함이 없었는데, 성상께서 쓰신 글이 밝고 뚜렷하여 기재(記載)한 것이 상세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외람되게 모화(模畫)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삼가 행록(行錄)을 상고하니, 후(后)의 성은 어씨(魚氏)로 세계(世系)는 함종(咸從)이다. 원조(遠祖)는 화인(化仁)인데 여조(麗朝)에 비로소 드러났으며, 국초(國初)에는 직제학(直提學) 어변갑(魚變甲)염퇴(恬退)295) 한 절개가 있었고, 판중추(判中樞) 어효첨(魚孝瞻)과 호조 판서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에게 전해 와서는 이들 부자(父子)가 훈덕(勳德)으로써 3세(三世)에 현양(顯揚)되었으며, 좌참찬(左參贊) 어계선(魚季瑄)은 또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 현달(顯達)하였다. 고조(高祖) 어한명(魚漢明)은 수운 판관(水運判官)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이고, 증조(曾祖) 어진익(魚震翼)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서 증(贈) 좌찬성(左贊成)이며, 조부(祖父) 어사형(魚史衡)은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서 증(贈) 영의정(領議政)인데, 이 분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낳았다. 어유귀는 해미 현감(海美縣監) 이하번(李夏蕃)의 따님에게 장가갔는데,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6세손(六世孫)으로서 완릉 부부인(完陵府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숙종(肅宗) 31년 을유296) 10월 29일 기미에 후(后)가 한사(漢師)297) 숭교방(崇敎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는데, 탄생할 때에 부부인(府夫人)이 꿈속에 해와 달이 벽 위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꿈을 깬 뒤에 이상히 여겼었다. 후께서는 어려서부터 단중(端重)하여 함부로 유희(遊戲)하지 않았으며, 행동거지가 저절로 법도에 맞았다. 말수가 적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늘 해어진 옷을 입고 남의 화식(華飾)을 보아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성품이 효순(孝順)하였다. 7세에 부부인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몸소 제전(祭奠)에 참여하여 슬퍼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늘 부부인을 추사(追思)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비록 부원군(府院君)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일찍이 교타(驕惰)한 모양을 보이지 않았다. 무술년298)단의 왕후(端懿王后)가 세자빈(世子嬪)으로서 일찍 별세(別世)하니, 숙종께서 경종을 위하여 명가(名家)의 현숙(賢淑)한 이를 극도로 간택하였다. 후(后)께서는 처음 입궐(入闕)할 때의 나이 겨우 14세이었는데, 질풍 폭우(疾風暴雨)를 만나도 엄숙하게 앉아 조금도 얼굴을 변하지 않았다. 임금299) 이 크게 기특하게 생각하여 예간(睿簡)300) 을 드디어 정하고 이에 빈(嬪)으로 책봉하여 9월 16일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후께서는 책명(冊命)을 받은 뒤에 양전(兩殿)을 받들어 섬기면서 화열(和悅)한 얼굴 빛으로써 일심(一心)으로 경외(敬畏)하니, 숙종께서 늘 손을 잡고 하교하시기를, ‘나는 너의 착함을 알고 있으니, 훗날에 너를 믿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시기를, ‘듣건대, 너의 증왕모(曾王母)께서 오래 살고 복이 많았다고 하니, 너도 그와 같기를 바란다.’ 하였는데, 후께서 물러나와 좌우(左右)에게 말하면서 울기까지 하였었다. 대상(大喪)을 당하여 애통하고 사모하기를 제도대로 다하고, 약방(藥房)에 답하기를, ‘재궁(梓宮)이 한 번 닫히면 어찌 다시 천안(天顔)301) 을 뵐 수 있겠는가?’ 하니, 신료(臣僚)들이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시(女侍)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 은혜를 골고루 흡족하게 베풀었으며, 어려서 부모(父母)를 여윈 자를 보면 더욱더 돌보고 어루만져 주었는데, 이는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님을 여읜 슬픔때문에 그것을 아랫사람에게 미루어 미치게 한 것이다. 경자년302) 에 왕후(王后)로 진위(進位)하고, 임인년303) 가을에 예를 갖추어 책봉(冊封)되었다. 갑진년304)경종이 승하(昇遐)하고 지금의 전하(殿下)께서 사위(嗣位)하시니, 후께서는 또 왕대비(王大妃)로 진위하였다. 병오년305) 상제(喪制)가 끝나니, 군신(群臣)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경순(敬純)’이라고 하였다. 당시 경종께서 위예(違豫)306) 할 때에 병세가 4순(四旬) 동안을 위중하였는데, 후(后)가 정성을 다하여 구호(救護)하였으며 밤낮으로 애태우고 당황하였다. 마침내 거창(鉅創)307) 을 당한 초기에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윈 것이 예절에 지나쳤으며, 빈소(殯所)를 만들 때부터 찬궁(欑宮)을 열 때까지 몹시 추운 날씨인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곡읍(哭泣)하다가 드디어 고질(痼疾)에 걸리게 되었다. 이 병은 여러 해 동안 낫지 않다가 마침내 금일(今日)에 이르렀으니, 그 근원을 따진다면 원인이 있는 것이다. 후(后)는 매양 경종이 돌아가신 달을 당하면 그달 초하루부터 상선(常膳)을 들지 않았으며, 평일에 즐기던 음식도 종신토록 입에 대지 않았다. 경종이 처음에 인현 성모(仁顯聖母)의 자육(慈育)을 받아 성효(誠孝)가 돈독하였는데, 후(后)도 그 덕의(德懿)를 추모(追慕)하여 작고 큰 일을 물론하고, 반드시 성모(聖母)가 살았을 때의 규제(規制)를 물어서 행하였다. 경종을 이미 종묘(宗廟)로 모신 뒤에 고(故) 신(臣) 민진후(閔鎭厚)를 배향(配享)하게 하였는데, 후(后)는 그가 성모(聖母)의 동기(同氣)란 이유로써 연시(延諡)308) 하는 연수(宴需)를 특별히 내렸으니, 이는 또한 경종께서 그를 권대(眷待)하던 뜻을 깊이 본받은 까닭이다. 후(后)는 포용하는 덕을 스스로 숨기고 총명(聰明)을 나타내지 않았지마는, 자못 문학(文學)을 좋아하여 별궁(別宮)에 있을 때에 《소학(小學)》을 부원군에게 배웠는데, 쉽게 외우기를 평소에 익힌 것처럼 하였다. 숙종께서는 늘 책을 읽게 한 뒤에 읽는 소리를 듣고 음운(音韻)이 맑고 명랑(明朗)한 것을 자주 칭찬하였다. 후(后)는 평소에 옛날 현비(賢妃)들의 가언 미행(嘉言美行)을 즐겨 읽어서 부원군으로 하여금 《효경(孝經)》·《예기(禮記)》·《서경(書經)》·《시경(詩經)》 중에 본받을 만한 글을 골라 베껴 들이게 하여 항상 좌우(左右)에 두고 조석(朝夕)으로 살펴보았다. 지금 성상께서 절황(窒皇)309) 에 들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바로 후(后)의 유지(遺旨)를 따른 것이다. 후(后)는 평소부터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분수에 지나친 사치(奢侈)를 물리쳐 버렸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집은 본래 평범한 가문이고, 형제들도 모두 선비의 며느리이니, 궁정(宮廷)의 양식처럼 장식(粧飾)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 하고는 절대로 내려 주지 않았으며, 다만 백성의 고통만을 진념(軫念)하였다. 경종부묘(祔廟)310) 된 뒤에 동조(東朝)에게 상수(上壽)하는 것은 곧 국가의 고사(故事)인데도, 후(后)는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린다는 이유로 겸양(謙讓)하여 받지 않다가 뒤에 어쩔 수 없어서 따랐으며, 번번이 상공(常供)을 줄이고, 방물(方物)을 못 들이게 하여 절손(節損)함을 보였다. 상(喪)을 당하자 후(后)의 유교(遺敎)로써 평소에 저장하여 두었던 의대(衣襨)를 내어다가 여러 가지 수용(需用)에 보태게 하고, 상방(尙方)311) 에서 으레 들여놓던 필단(疋緞)을 면제하였으며, 제기(祭器)는 갑진년에 쓰던 것을 사용하게 하고 새로 만드는 것을 못하게 하였으니, 그가 간략하게 줄이는 데 힘쓰고 경비(經費)를 걱정하는 뜻이 아! 지극하도다. 지난날 경종을 양주(楊州)의 의릉(懿陵)에 장사지낼 때 후(后)가 그 왼편에 묘(墓)를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원군에게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이곳을 돌아갈 터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경종과 동강(同崗)에 정하게 되니, 대개 성상께서 후(后)의 그때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이 양쪽 다 유감이 없게 된 것이다. 후(后)의 장지(葬地)는 신좌 인향(申坐寅向)으로 했으니, 영릉(寧陵)312) 의 유제(遺制)를 모방하여 상하혈(上下穴)로 썼는데, 본릉(本陵)에서부터 80척(尺)쯤 떨어져 있었다. 능호(陵號)는 그전대로 하고 고치지 않았다. 10월 19일 오시(午時)에 현궁(玄宮)으로 모셨다. 이보다 앞서 단의 왕후(端懿王后)와 후(后)는 모두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종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해 성상을 책봉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던 것인데, 나라를 원망하는 나쁜 무리들이 이때부터 더욱 화심(禍心)을 품고 흉계(凶計)를 쌓아서 역신(逆臣)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흉적(凶賊) 목호룡(睦虎龍) 등은 안팎에서 서로 결탁하여 몰래 뜻을 잃은 무리들과 약속해 위핍(危逼)함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으나, 경종의 깊은 우애(友愛)와 후(后)의 끊임없는 도움을 받아 음모(陰謀)가 마침내 실행되지 못하자, 역적 김일경은 또 차마 들을 수도 없는 흉언(凶言)을 교문(敎文)에 베껴 써서 8방(八方)에 전파시켜 인심(人心)을 속이고 현혹하게 하다가, 갑진년 대상(大喪) 뒤에 그 무리들은 길러온 세력을 선동(煽動)시켜 무신년의 변란을 만들어 내니, 후(后)는 더욱 통탄하면서 하교하기를, ‘세도(世道)가 이와 같아서 궁흉(窮凶)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말을 지어내니, 이는 당저(當宁)만 무함하는 것을 뿐 아니라, 사실은 선왕(先王)을 모욕(侮辱)하는 것이니, 원통함을 견딜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아! 당일(當日)의 일은 후(后)께서 실제로 몸소 경종을 부축하여 일어나 앉고 약을 마시는데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遺憾)이 없게 했으니, 곧 후(后)가 몸소 당한 일로써 깊이 아는 것이므로, 그들이 거짓말을 만들고 꾸며내어 무함하는 것에 더욱 통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간정(奸情)을 타파하고 국가의 무함을 밝히는 것이 진실로 우리 성후(聖后)의 탁월한 지식과 밝은 살핌이 천고(千古)에 뛰어난 이가 아니었다면 또한 어떻게 성의(聖意)를 밝혀 타일러서 후세(後世)에 전하여 알리기를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올해 여름에 와서 흉역(凶逆)이 다시 일어나서 사정이 더욱 사방에 전파(傳播)되니, 후(后)께서 또 하교하기를, ‘이것은 필시 무신년의 여당(餘黨)일 터인데, 이 역적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할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하고, 경심 통골(驚心痛骨)하는 교지를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몸소 국문(鞫問)하고 엄중히 사실을 조사하여 기필코 흉역(凶逆)의 무리들을 없애서 후(后)의 자애스러운 마음을 위안하려고 하였는데, 장추(長秋)313) 가 갑자기 막혔고, 휘음(徽音)314) 이 영원히 닫혔으니, 이것이 성상께서 슬퍼하고 한스러워하는 바이다. 아! 신이 삼가 성상의 제술(製述)을 가져다가 위와 같이 문장을 배열하여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하건대, 우리 성후(聖后)의 철범 혜문(喆範惠聞)은 비록 동사(彤史)315) 에 기록된 어떤 일도 이보다 나을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마땅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복록을 향유하여야 할 터인데, 돌아보건대, 경자년 이후로 10여 년 간에 국운(國運)이 망극하여 상변(喪變)이 거듭 일어났는데, 후(后)는 이에 눈물로써 날을 보냈으므로 슬픔이 쌓여 홧병이 생겨 수(壽)까지 오래 누리지 못하게 되니, 천리(天理)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그러나 위로 종팽(宗祊)316) 을 염려하여 위태한 정세가 마음을 애태웠으나 성사(聖嗣)를 보호 안정시켜 화맹(禍萌)을 점차 사라지게 하여 양궁(兩宮)의 사이에 화기가 흡족하여졌다. 난역(亂逆)이 창궐(猖獗)할 때를 당하여서는 그 근본 원인을 분석하는 데 말과 의리가 엄정(嚴正)하니, 그것은 양성(兩聖)317) 이 모욕을 당한 것을 통분히 여겨 일언지간(一言之間)에 명쾌하게 분변한 것이 더욱 명백하고 준엄하여 족히 군정(群情)을 진압하고 흉도(凶圖)를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유지(維持)하게 되고 국기(國基)가 공고(鞏固)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 여기에 힘입음이 있을 것이다. 그 의덕(懿德)과 휘열(徽烈)을 하찮은 문자(文字)를 가지고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신민(臣民)의 지극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이겠는가? 아! 융성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19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변란(變亂)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註 291]
    유지(幽誌) : 지문(誌文). 죽는 사람의 성명·지위·행적(行蹟) 등을 기록한 글. 석판(石板)이나 도판(陶板)에 새기어 묘 옆이나 광내(壙內)에 묻음.
  • [註 292]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293]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294]
    경술년 : 1730 영조 6년.
  • [註 295]
    염퇴(恬退) : 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
  • [註 296]
    을유 : 1705년.
  • [註 297]
    한사(漢師) : 한성.
  • [註 298]
    무술년 : 1718 숙종 44년.
  • [註 299]
    임금 : 숙종.
  • [註 300]
    예간(睿簡) : 임금의 간택.
  • [註 301]
    천안(天顔) : 임금의 얼굴.
  • [註 302]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註 303]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304]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305]
    병오년 : 1726 영조 2년.
  • [註 306]
    위예(違豫) : 편치 못함.
  • [註 307]
    거창(鉅創) : 경종의 승하를 가리킴.
  • [註 308]
    연시(延諡) : 시호(諡號)를 받들고 나온 선시관(宣諡官)을 그 본가(本家)에서 시호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 의식(儀式)을 행하고 맞아들이는 일.
  • [註 309]
    절황(窒皇) : 종묘(宗廟)의 앞에 있는 문.
  • [註 310]
    부묘(祔廟) : 임금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다음에 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시는 것.
  • [註 311]
    상방(尙方) : 상의원(尙衣院).
  • [註 312]
    영릉(寧陵) : 효종(孝宗)과 그 비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능호.
  • [註 313]
    장추(長秋) : 왕후가 거처하는 궁전.
  • [註 314]
    휘음(徽音) : 후비의 덕음(德音).
  • [註 315]
    동사(彤史) : 동관(彤管)을 가진 사관(史官). 동관은 옛날 여사(女史)가 궁중(宮中)에서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할 때 쓰던 붓인데, 《후한서(後漢書)》 광무 곽 황후기(光武郭皇后紀)에 "여사가 동관으로 공을 기록하고 허물을 쓴다."고 하였고, 그 주(注)에 "동관은 붓대가 붉은 붓이다"라고 하였음. 동관사(彤管史).
  • [註 316]
    종팽(宗祊) : 종묘의 제사.
  • [註 317]
    양성(兩聖) : 경종과 영조.

○判府事李宜顯撰進大行王大妃幽誌, 其文中冊聖上爲嗣下, 有或箚或疏, 內外締結危逼謀害之句, 蓋指泰耉鳳輝等諸賊也。 上覽之, 大怒, 敎曰:

"戊申亂逆, 倡之於先, 而失志怨國之徒, 繼之於後, 逆之心, 欲引進怨國之徒, 遂凶逆之心, 而國本旣定, 難售其計, 以敎文首倡亂逆之本。 甲辰大喪之後, 旣伏法。 賊領袖諸賊, 造不忍聞不忍言之凶言, 煽動廢族之類, 釀成其逆。 其顚末如此, 而未能擺脫舊習, 以誌文, 作日後病搢紳之欛柄。 嘗痛恨于時象者, 乃聖后平日之意, 而因誌文, 害尤大矣。 欲光聖德, 而反累焉, 則予之不孝矣。 撰進之臣, 豈不諒此意, 快意下筆耶? 予竊慨歎。

因添刪以下, 誌文曰:

上之六年庚戌二十九日丙寅, 敬純王大妃薨于慶德宮魚藻堂, 春秋二十六。 粤七日癸酉, 有司用善聞周達、溫柔聖善二法, 上尊謚曰宣懿, 上徽號曰孝仁惠穆, 治方上於懿陵, 厥旣得卜。 我殿下遂下御製行錄一通, 命臣宜顯, 誌諸幽。 臣辭不獲, 拜手稽首, 伏而讀之, 歎曰: "我聖后至德, 誠無間然, 而聖筆昭回, 記載該悉, 臣何敢猥有模畫?" 謹稽行錄, 后姓魚氏, 系出咸從。 遠祖化仁, 始顯朝。 國初直提學變甲, 有恬退節, 傳至判中樞, 孝瞻、戶曹判書襄肅公 世恭, 仍父子以勳德, 顯三世, 而左參贊季瑄, 又顯於朝。 高祖 , 水運判官, 贈左贊成, 曾祖震翼, 江原道觀察使, 贈左贊成, 祖史衡, 漢城右尹, 贈領議政, 寔生領敦寧府事咸原府院君 有龜。 娶海美縣監李夏蕃女, 中宗大王六世孫也, 追封完陵府夫人。 以肅宗三十一年乙酉十月二十九日己未, 誕后于漢師崇敎坊私第, 將誕, 府夫人夢見日月幷懸壁上, 覺而異之。 后自幼端重, 不妄遊戲, 動止自中矩度。 罕言語, 喜慍不形, 常衣弊服, 見人華飾, 無歆羡色, 性孝順。 七歲遭府夫人喪, 躬參祭奠, 哀慟如成人。 稍長, 每追思出涕, 雖爲府院君所鍾愛, 未嘗有驕惰之容。 戊戌, 端懿王后, 以世子嬪早世, 肅宗景廟, 極遴名家賢淑。 后初入闕, 年甫十四歲, 遇疾風暴雨, 而凝坐不少變。 上大奇之, 睿簡遂定, 乃冊爲嬪, 以九月十六日, 行嘉禮。 后旣膺冊命, 承事兩殿, 愉色婉容, 一心敬畏, 肅廟常執手敎曰: "予知汝賢, 他日恃汝多矣。" 又敎曰: "聞汝曾王母, 壽考多祉, 願汝似之也。" 后退語左右, 至於泣下。 洎大喪, 哀慕盡制, 答藥房曰: "梓宮一閉, 更覩天顔, 那可得也?" 臣僚莫不感動。 御女侍, 恩施普洽, 見有早喪父母者, 顧撫有加, 蓋自傷其幻失慈顔, 而推及於下也。 庚子, 進位王后, 壬寅秋, 備禮冊封。 甲辰, 景廟昇遐, 今殿下嗣位, 又進位王大妃。 丙午喪制闋, 群臣上尊號曰敬純。 當景廟違豫時, 症候浹四旬彌留, 后殫誠救護, 夙宵焦遑。 鉅創之初, 哀毁踰禮, 自殯至啓欑宮, 當祈寒不離哭泣, 遂嬰痼疾。 閱歲沈淹, 竟至於今日, 其源蓋有繇焉。 后每値景廟不諱之月, 自朔日, 不御常膳, 平日所嗜, 終身不以近口。 景廟初被仁顯聖母慈育誠孝篤至, 后追慕德懿, 事無大小, 必問聖母時規制而行之。 景廟旣入廟, 以故臣閔鎭厚配侑, 后以聖母同氣也, 特贈延謚之需, 亦所以深體景廟眷待意也。 后含章自晦, 不作聰明, 而顧愛好文學, 在別宮, 受《小學》於府院君, 誦慣如素習。 肅廟常使讀而聽之, 亟賞音韻之淸朗。 平居喜觀古賢妃嘉言美行, 使府院君, 謄進《孝經》《禮書》《詩經》中可法者, 常置左右, 朝夕省覽。 今聖上, 命入窒皇者, 寔遵后遺旨也。 后雅尙儉約, 斥去奢靡, 嘗曰: "吾家是素門, 兄弟皆士子婦, 宮樣粧飾, 非其分也。" 絶不賜與, 惟軫念民隱。 祔廟後, 上壽東朝, 卽國家故事, 而后以歲歉人飢, 謙讓不受, 後乃勉從, 輒減常供, 停方物, 以示節損。 及喪, 以遺敎, 出素儲衣襨, 補諸需, 除尙方例進疋緞, 祭器用甲辰遺餘, 毋令新造, 其務簡省, 恤經費之意, 嗚呼! 至哉。 始景廟楊州懿陵, 后聞其左有穴可扦, 謂府院君曰: "吾必以是爲歸。" 今定于同崗, 蓋聖上不敢孤后當日意也。 於是乎神道人情, 兩無憾焉。 后葬爲申坐寅向, 倣寧陵遺制, 用上下穴, 距本陵爲八十尺許。 陵號仍舊不改。 以十月十九日午時, 下玄宮焉。 先是, 端懿后與后俱無育, 景廟爲宗社大計, 冊聖上爲嗣。 怨國不逞之類, 自此尤包藏禍心, 蘊蓄凶計, 而逆臣一鏡弼夢、凶賊虎龍等, 表裏締結, 陰約失志之輩, 危逼無不至。 賴景廟友愛之深、摯后扶翊甚勤, 陰計終未售, 逆又以不忍聞之凶言, 謄之敎文, 播諸八方, 誑惑人心, 甲辰大喪後, 其徒克煽醞釀, 以成戊申之變。 后益痛惋下敎曰: "世道若此, 做出窮凶叵測之言, 此非但誣當宁, 實所以衊先王也, 可勝痛哉?" 嗚呼? 當日之事, 后實躬扶, 起居藥飮, 自始至終, 靡有遺憾。 乃后所親當而深知者, 此所以尤痛其架虛創說。 打破奸情, 昭晣國誣者, 苟非我聖后卓識淵鑑, 度越千古, 則亦何以明諭聖意, 垂揭後世若是哉? 及至今夏, 凶逆復起, 情節益狼藉, 后又曰: "此是戊申餘黨, 豈料此賊, 至今如此乎?" 至有驚心痛骨之敎。 上方親鞫嚴覈, 必期悉除凶孽, 以慰慈心, 而長秋遽隔, 徽音永閟, 此聖上, 所以哀恨者也。 嗚呼! 臣謹就聖製, 排纂如右, 而仍竊又念, 我聖后, 喆範惠聞, 雖彤史所載, 殆無以過之。 是宜受天保佑, 享有茀祿, 而顧自庚子以後, 十餘年間, 國運罔極, 喪變洊仍, 后於是, 涕泣爲日, 積哀成疢, 以致壽算之不永, 天理之難諶, 有如是夫。 然上念宗祊, 危厲薰心, 翼安聖嗣, 潛銷禍萌, 兩宮之間, 和氣融翕。 及夫亂逆之猖獗, 又洞劈源委, 辭嚴義正, 其所以痛兩聖之受衊, 夬辨於一言之間者, 尤明白截峻, 有足以鎭群情而戢凶圖, 則自此世道之維持, 邦基之鞏固, 將有賴於斯矣。 其懿德徽烈, 有非區區文字, 所可形容其萬一者, 此可以少慰臣民之至痛者歟? 嗚呼盛哉!


  • 【태백산사고본】 21책 2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19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변란(變亂) / 정론(政論)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