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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5권, 영조 4년 2월 25일 丙午 1번째기사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해서의 절수지에서 차인들이 침학하는 것을 벌하도록 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의 조강(朝講)에 나아가니,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과 전경(典經) 이종성(伊宗城)이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진강(進講)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정제(伊廷濟)가 아뢰기를,

"해서(海西)는 관방(關防)의 요해지(要害地)이고 관서(關西)영애(嶺阨)의 긴요한 중지(重地)인데, 연달아 절수(折受)한 가운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도신(道臣) 및 수신(帥臣)의 장계와 비국의 회계로 인하여 성상께서 환수(還收)하도록 쾌히 허락하셨는데, 차인(差人)들이 열읍(列邑)에 왕래하면서 여러모로 뇌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속여서 진고(進告)하는 자는 적발(摘發)하여 형조에 보내어 감죄(勘罪)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사(領事)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복(福)을 아끼는 도리를 말하건대,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는 아기에게 먼저 제택(第宅)과 전원(田園)을 마련해 주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선묘조(宣廟朝) 때에 공주(公主)와 옹주(翁主) 가운데 수복(壽福)을 누린 이가 많았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전원과 제택을 검소(儉素)한 데 힘썼으므로 이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억지로 꾸며낸 말에 가까우나, 또한 이런 이치가 없지도 않습니다. 혹은 잠저(潛邸)113) 때에 쓰던 바와 다른 유족(裕足)한 궁가(宮家)에서 형편에 따라 나누어 보내게 하고, 다시 절수(折受)하지 말도록 한다면 다만 국가에 유익할 뿐 아니라, 그 궁가에도 반드시 복(福)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특진관(特進官) 여필용(呂必容)이 말하기를,

" 증(贈) 좌랑(佐郞) 엄흥도(嚴興道)는 충절(忠節)이 특이(特異)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손이 없어 외손(外孫)이 봉사(奉祀)하고 있는데, 몹시 빈한(貧寒)하여 향화(香火)를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호(復戶)114) 하여 그 제향(祭享)을 받들고 분묘(墳墓)가 있는 산에 초목(樵牧)을 금지하게 한다면, 실로 은휼(隱恤)의 전례(典禮)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미(寒微)한 사람을 낭서(郞署)에 증직(贈職)했으니, 선조(先朝)의 포상(褒賞)한 뜻을 볼 수 있다. 대대로 군역(軍役)을 면제하고 복호도 참작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5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왕실-비빈(妃嬪) / 군사-군역(軍役) /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註 113]
    잠저(潛邸) : 임금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집.
  • [註 114]
    복호(復戶) : 조선조 때 충신(忠臣)·효자(孝子)·절부(節婦)가 태어난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던 일.

○丙午/上御朝講于宣政殿, 侍讀官趙顯命、典經李宗城進講《書傳》 《大禹謨》。 參贊官李廷濟奏曰: "海西關防要害之地, 關西嶺阨緊重之處, 連入折受中, 因道臣帥臣狀聞, 備局回啓, 聖上快許還寢, 而差人往來列邑, 索賂多端。 自今以後, 誣妄進告者, 宜摘發, 移送法曺勘罪。" 上從之。 領事李光佐曰: "以惜福之道言之, 方在襁褓, 不宜先置第宅田園。宣廟朝公、翁主, 多享壽福, 世以爲: ‘田園第宅, 務從儉終, 能致如此。’ 此近傅會之說, 而亦不無此理。 或以潛邸所用及他宮家裕足者, 從便割送, 更勿折受, 則不但有益於國, 其於宮家, 亦必有福。" 上嘉納之。 特進官呂必容曰: "贈佐郞嚴興道, 忠節卓異。 身後無嗣, 以外孫奉祀, 而殘弊特甚, 香火不繼。 特爲復戶, 俾主其祀, 禁其樵牧於墳山, 則實合隱恤之典。" 上曰: "寒微之人, 至贈郞署, 先朝褒賞之意, 可見世世免軍役復戶, 亦參酌以給。"


  • 【태백산사고본】 13책 15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왕실-비빈(妃嬪) / 군사-군역(軍役) /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