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대왕을 의릉에 장사지내다
경종 대왕(景宗大王)을 의릉(懿陵)에 장사지냈다. 능(陵)은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신좌(申坐) 인향(寅向)에 있고,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10리의 거리에 있다. 지난 9월 24일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25일 묘시(卯時)에 후토(后土)에 제사지내고 풀고 베고 흙을 파냈다. 11월 초10일 진시(辰時)에 금정(金井)을 열었는데, 혈(穴)의 깊이는 8척(尺) 4촌(寸)이었고, 【영조척(營造尺)을 썼다.】 광중(壙中)을 완전히 다 파낸 뒤 외재궁(外梓宮)을 내렸다. 15일 진시(辰時)에 추궁(菆宮)을 열었는데, 이날이 되어 축시(丑時)에 발인(發引)한 것이다. 발인하는 정확한 시각은 처음에 자시(子時)로 정했었는데, 견전(遣奠)의 행례(行禮)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여 축시(丑時)로 물려서 행한 것이다. 3경(更) 1점(點)에 임금이 견전을 친행하자 드디어 발인하였는데, 임금은 최복(衰服)을 갖추었다. 집사(執事)가 향로(香鑪)와 향합(香盒)을 받들어 향정(香亭)에 두자, 좌통례(左通禮)가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봉안하고 우주(虞主)는 그 뒤에 두었다. 내시(內侍)가 요여와 교의(交椅)를 받들고 나가니, 좌통례가 추궁 앞으로 나아가 북향(北向)하여 부복(俯伏)하고 여(轝)에 올릴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내시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계단을 내려오자, 총호사(摠護使)가 재궁을 마주들 관원 두 사람과 내시를 인솔하여 재궁을 받들어 내었다. 추궁을 남쪽문으로부터 들어내어 윤여(輪轝) 위로 들어내고 소금저(素錦褚)로 덮었다. 재궁을 내리자 윤대판(輪對板)을 받들었는데, 판(板)의 좌우에는 쇠고리를 두었으며, 쇠고리의 입구는 대포삭(大布索)을 물렸다. 재궁을 마주드는 관원 두 사람이 각각 그 한쪽 끝을 잡자, 내시와 액속(掖屬)이 곁에서 밀어서 마주드는 것을 도왔다. 통례(通禮)가 앞을 인도하고 나서자, 충의위(忠義衛)가 채삽(綵翣)으로 재궁(梓宮)을 가리고 좌우에서 날개를 편 것처럼 따랐다. 명정(銘旌)이 앞서 출발하자, 임금과 여러 신하와 내외(內外)의 집사들이 곡벽(哭擗)하였다. 일덕문(一德門)과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와 윤여(輪轝)를 거쳐 인정전(仁政殿) 안으로 돌아 들어가니, 임금이 인화문 밖에 섰다. 재궁이 장차 소여(小轝)로 들어가려 하니, 임금이 도보로 윤여 가장자리의 소판(小板) 위를 돌고 나서 인정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전(殿)으로 내려와 계단 위에 지팡이를 짚고 섰다. 임금이 곡하자, 여러 신하들도 모두 곡하였다. 재궁을 소여에 받들어 올리자, 임금이 친히 살핀 뒤 재궁을 전문(殿門) 밖으로 내어 대여(大轝)로 옮겨 받들어 올렸다. 종묘(宗廟) 앞 길에 이르러 대가(大駕)를 돌리고 향립(向立)했다가 이어 출발하였는데, 보제원(普濟院)의 설제소(設祭所)에 이르러 장전(帳殿) 한가운데다 영악(靈幄)을 설치해 재궁을 장전의 동쪽에 봉안(奉安)하고 혼백(魂帛)을 봉안하였다. 남아 있던 백관(百官)들이 진향(進香)할 때 비가 물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쏟아졌다. 백관들이 비를 맞으며 겨우 의식(儀式)대로 진향하였다. 소여가 전문(殿門)을 나설 때 임금이 옥교(玉轎)를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가, 협양문(協陽門)으로부터 나와 숙장문(肅章門) 밖에 이르러 여(轝)에서 내려 연(輦)을 탔다. 흥인문을 나서자 문 안의 빗물이 크게 불어났으므로, 백관들이 등에 지고 지났다. 보제원에 이르러 임금이 길에 들어서서 북원(北原)의 막차(幕次)에서 장차 대여(大轝)와 혼백(魂帛)을 봉심(奉審)하려 하니, 이광좌(李光佐)와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비가 심하니, 단지 대여만 봉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련(步輦)을 타고 봉사 판위(奉辭版位) 근처에 이르러 여(轝)에서 내렸다. 임금이 판자로 만든 사닥다리를 타고 여(轝)의 강(杠)에 올라가 오른쪽 편에 서서 봉심을 마친 뒤 판자로 만든 사닥다리로 내려와 봉사판 위에 섰다. 임금이 곡을 그치지 않자, 승지 김동필(金東弼)이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빗발이 이와 같은데, 영여(靈轝)를 오랫동안 멈추고 있으니, 감히 곡을 그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곡을 그쳤다. 사배(四拜)를 행하고 난 뒤 영여를 우러러보고 흐느끼며 말하기를,
"만약 나로 하여금 여(轝)를 따라가게 했더라면 정리(情理)가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매사를 오로지 경(卿) 등만 믿고 있으니 반드시 꼭 마음을 다하라.’는 뜻으로 이광좌와 조태억에게 하교하고, 보련(步輦)을 타고 환궁(還宮)하였다. 대여(大轝)가 출발하여 능소(陵所)에 도착하자,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여(轝)를 내려 순(輴)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재궁을 소여(小轝)에 봉안하였다. 정자각(丁字閣)의 유문(帷門) 밖에 이르러 통례가 무릎을 꿇고 순에서 내릴 것을 청하였다. 유문에서 찬궁(欑宮)까지 연달아 윤여(輪轝)를 설치했고 재궁을 탑상(榻上)에 봉안하였다. 내시(內侍)가 영좌(靈座)를 재궁 남쪽에 설치하여 혼백함(魂帛函)을 그 위에 봉안하고, 우주궤(虞主櫃)를 그 위에 두었으며, 향안(香案)·명정(銘旌)·책보(冊寶)·의장(儀仗)을 처음과 같이 설치하였는데, 이때가 사시(巳時)였다. 오시(午時) 초에 성빈전(成殯殿)을 행하였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채팽윤(蔡彭胤)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와서 빈전(殯殿)에 문안하고 찬궁(欑宮)을 열었다. 애초에는 오시(午時)로 계하(啓下)하였는데, 비가 그치지 않아 일에 미비(未備)한 것이 있었으므로 오정(午正)으로 물린 것이다. 이광좌가 이 일을 치계(馳啓)하여 알렸다. 미시(未時)에 재궁을 윤여(輪轝)에 봉안했는데, 퇴광(退壙)의 강(杠) 위에서 멈추었다. 임금이 또 승지를 보내어 문안(問安)하였다. 묶고 싼 것을 풀기를 마치자 조태억(趙泰億)이 수건에 소합향온(蘇合香醞)을 적셔 재궁을 깨끗하게 닦았다. 드디어 앞뒤 고패[轆轤]의 베로 된 줄로 재궁을 달고 고패의 줄을 풀어 내렸다. 액례(掖隷)가 ‘시위(侍衛), 시위’하는 소리를 외치자, 재궁을 퇴광 가운데 있는 윤여 위에 봉안하였다. 조태억이 또 재궁을 닦고 이광좌가 홀기(笏記)를 가지고 서자, 내시(內侍)가 홍람운문단(紅藍雲紋緞)으로 만든 삼중 구의(三重柩衣)를 올렸는데, 모두 분(粉)과 금(金)으로 불(黻)을 그린 것이었다. 조태억이 받들어 내리고 홍광(紅廣)으로 짠 명정(銘旌)을 구의(柩衣) 위데 덮었는데, 명정은 금자(金字)로 썼고 상방(尙方)에서 진사(進絲)한 것이었다. 내시가 노끈을 합하여 구의와 명정에 주름이 지지 않게 하였다. 내시(內侍)가 좌우에 서서 붉은 융(絨)으로 된 줄 한 가닥을 꼬아 재궁의 아래 모퉁이에 내렸다. 매번 ‘시위’ 소리를 한 번 지를 때마다 여축(轝軸)이 돌아갔는데, 재궁이 곧바로 현수문(玄隧門)으로 나아가 여(轝)가 완전히 다한 곳에 이르자, 줄을 당기는 자가 손이 걸려 능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태항(李泰恒)이 지기목(支機木)을 지고 돌아가며 재궁을 졌는데,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힘을 다 썼다. 장인(匠人)들이 번갈아 져서 재궁을 현궁(玄宮)의 탑상(榻上)에 봉안하였으니, 이때가 신시(申時)였다. 임금이 또 승지를 보내 문안(問安)하였고. 내시(內侍)가 유의(遺衣)를 올렸다. 【갑인년(1674)에는 새로 만들어 썼고, 경자년(1720)에는 진어(進御)하던 면복(冕服)을 썼다. 도감(都監)에서 계품(啓稟)하자, 갑인년의 전례에 의해 새로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평천관(平天冠)·옥규(玉圭)·패옥(佩玉)·시석(寺舃)은 옛 물건을 썼다.】 이광좌가 꿇어앉아 애책(哀冊)을 현문(玄門) 서쪽에 받들어 올리고, 옥백궤(玉帛櫃)는 애책 남쪽에 올려 두었다. 도감 당상(都監堂上) 홍치중(洪致中)이 삽(翣)을 올리고, 또 명기(明器)·복완(服玩)·부신(符信)을 받들어 올려 두었다. 드디어 현문을 잠그자 봉쇄관(封鎖官) 집의(執義) 서종하(徐宗廈)가 ‘신(臣)’자를 쓰고 수결을 두었으며, 조태억이 흙 아홉 삽을 덮었다. 총호사와 승지(承旨)·사관(史官)이 모두 정자각(丁字閣)으로 가서 제주례(題主禮)를 행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길복(吉服)을 갖추고 차례차례 위치로 나아가자, 대축(大祝)이 손을 씻은 뒤 우주(虞主)를 받들고 나와 탁자 위에 눕혀 봉안하였다. 이에 제주관(題主官) 이세최(李世最)가 글씨를 쓰고 사자관(寫字官)이 획을 보충하였다. 대축이 영좌(靈座) 위에 다시 봉안(奉安)하자 우주전(虞主奠)을 행하고, 초우제(初虞祭)를 의식(儀式)대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4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乙酉/葬景宗大王於懿陵。 陵在楊州 天藏山申坐寅向, 距興仁門十里。 先於九月二十四日始役, 二十五日卯時, 祀后土斬草破土。 十一月初十日辰時, 開金井, 穴深八尺四寸, 【用營造尺。】 穿壙畢後, 下外梓宮。 十五日辰時, 啓菆宮, 至是日丑時發引。 發引正時, 初定於子時, 以遣奠行禮之遲久, 以丑時退行。 三更一點, 上親行遣奠, 遂發引, 上具衰服。 執事奉香鑪、香盒, 置於香亭, 左通禮進詣靈座前跪, 請陞轝。 大祝奉魂帛函, 安於腰轝, 虞主置其後。 內侍奉腰轝及交椅而出, 左通禮進當菆宮前, 北向俯伏啓, 請陞轝。 內侍奉銘旌降階, 摠護使率舁梓宮官二人及內侍, 奉出梓宮。 由菆宮南戶, 舁出輪轝上, 覆以素錦褚。 梓宮下, 承以輪對板, 板之左右, 着鐵環, 環口含以大布索。 舁梓宮官二人, 各執其一端, 內侍及掖屬, 幇助推舁。 通禮前導, 忠義衛以綵翣障梓宮, 翼而隨之。 銘旌先行, 上及諸臣內外執事哭擗。 出一德門、仁和門, 由輪轝轉入仁政殿, 上立於仁和門外。 梓宮將入小轝, 上步巡輪轝邊小板上, 入仁政殿內, 轉下殿, 扶杖立於階上。 上哭, 諸臣皆哭。 梓宮奉於小轝, 上親審後, 梓宮出殿門外, 移奉大轝。 至宗廟前路, 回駕向立, 仍進發, 至普濟院設祭所, 設靈幄於帳殿正中, 奉安梓宮, 帳殿之東, 奉安魂帛。 留(者)〔都〕 百官進香時, 雨如飜盆。 百官雨立進香, 僅如儀。 小轝出殿門時, 上乘玉轎還內, 自協陽門出, 至肅章門外, 降輿陞輦。 出興仁門, 門內雨水大漲, 百官背負而過。 至普濟院, 上入路北原上幕次, 將奉審大轝及魂帛, 光佐及諸臣曰: "雨甚, 只奉審大轝好矣。" 上御步輦, 到奉辭版位近處, 降輿。 上由板梯, 登轝杠上, 立於右邊, 奉審訖, 下板梯, 立於奉辭版位。 上哭不止, 承旨金東弼進伏曰: "雨勢如此, 靈轝久駐, 敢請止哭。" 上止哭。 行四拜訖, 瞻望靈轝泣曰: "若使予隨轝, 則情理豈至此哉?" 上, 以每事專恃卿等, 必須盡心之意, 下敎于光佐、泰億等, 以步輦還宮。 大轝前行, 至陵所, 通禮跪請降轝陞輴。 遂奉安梓宮於小轝。 至丁字閣帷門外, 通禮跪請降輴。 自帷門至欑宮, 連設輪轝, 奉安梓宮于榻上。 內侍設靈座于梓宮南, 奉安魂帛函于其上, 置虞主櫃于其後, 設香案、銘旌、冊寶、儀仗如初, 已時也。 午初行成殯奠, 同副承旨蔡彭胤奉上命來問安于殯殿, 啓欑宮。 初以午時啓下矣, 雨不止, 事未備, 退以午正。 光佐馳啓以聞。 未時, 奉安梓宮于輪轝, 止于退壙杠上。 上又遣承旨問安。 解結裹訖, 泰億以巾漬蘇合香醞, 凈拭梓宮。 遂以前後轆轤兩布索, 搭梓宮, 解下轆轤索。 掖隷唱侍衛聲, 奉安梓宮于退壙中輪轝上。 泰億又拭梓宮, 光佐持笏記立, 內侍以紅藍綠雲紋緞二重柩衣進, 皆以粉與金畫黻。 泰億奉下, 以紅廣織銘旌, 覆柩衣之上, 旌以金字書之, 尙方進絲。 內侍合紉柩衣銘旌, 使不得皺卷。 內侍左右立, 以紅絨索一條, 兜搭梓宮下隅。 每侍衛一聲, 轝軸輪轉, 梓宮直就玄隧門, 至轝盡處, 引索者手礙不能用力。 工曹判書朴泰恒, 負支機木, 轉負梓宮, 力盡不能盡限, 匠人替擔, 奉安梓宮于玄宮榻上, 申時也。 上又遣承旨問安, 內侍進遺衣。 【甲寅年, 則新造用之, 庚子年, 則以進御冕服用之。 都監啓稟, 命依甲寅例新造, 而平天冠、玉圭、佣玉、赤舃, 以舊件用之。】 光佐跪進哀冊, 奠于玄門西, 玉帛櫃奠于衣冊南。 都監堂上洪致中進翣, 又奠明器、服玩、符信, 遂鎖玄門。 封鎖官執義徐宗厦, 書臣字着押, 泰億覆土九鍤。 摠護使及承旨、 史官, 俱詣丁字閣, 行題主禮。 諸臣俱以吉服, 以次就位, 大祝盥手奉出虞主, 偃安于卓子上。 題主官李世最寫之, 寫字官補畫。 大祝還安於靈座上, 行題主奠, 初虞祭如儀。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4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