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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권, 영조 즉위년 9월 29일 己巳 2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밤에 소대하여 《강목》의 양기를 강하였다. 김씨 성의 궁인 일에 관해 박필몽 등과 논함

밤에 소대(召對)하여 《강목(綱目)》의 양기(梁紀)를 강(講)하였다. 참찬관(參贊官) 박필몽(朴弼夢)이 아뢰기를,

"문(文)이 질(質)을 앞선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사의(私意)가 너무 앞서서 다만 겉치레만 꾸미면서 한결같이 혐의를 멀리하는 것을 위주로 삼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의 좋아함과 미워함은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니, 쓰거나 버리거나 올려줌과 벌줌에 있어 한결같이 공정(公正)하게 하지 않고 치우친 사심(私心)으로 협잡(挾雜)하면 그 해(害)는 반드시 국세(國勢)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임용(任用)하거나 죄를 줌에 있어 한 몸의 사심으로 그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박필몽이 또 말하기를,

"궁인(宮人)의 일을 한결같이 아울러 내보내자고 한 요청은 하책(下策)에서 나온 것이니, 원컨대, 속히 윤허하여 따르도록 하소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보낼 수 없는 사유를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씨 성을 가진 자로 인하여 어선(御膳)을 담당했던 사람을 다 내쫓는다면 일이 명백하지 못하고 명분도 올바르지 못하다. 만약에 그 사람이 있었다면 선왕(先王)께서 어찌 조사하여 내쫓지 아니하였겠는가? 내쫓는 것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그것은 명분이 없는 데에 가까운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성덕윤(成德潤)이 말하기를,

"약이 어찌 공중에서 떨어졌겠습니까? 사람이 시켜서 행하였다면 어찌 어선을 담당한 사람 외에서 나왔겠습니까? 성상(聖上)의 하교 가운데 ‘죽음 가운데에서 살기를 구하느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死中求生 胡辭亂說]’는 여덟 자에 대해서 신은 의혹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한 번 퍼지게 되면 사방에서 놀라 의혹을 품을 뿐만 아니라, 적당(賊黨) 가운데 그래도 남아 있는 여얼(餘孼)이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못한 때를 당하여 어찌 구실을 붙일 길이 없겠습니까? 그 한 마디 말씀은 다시 거두어 들이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곧 선왕(先王)의 하교이니, 도로 거두어들일는지의 여부(與否)는 이제 와서 논할 만한 것이 못된다. 선왕께서 이미 ‘없다’고 하교하셨으니 그 일은 난초(亂招)에 귀착되는 것이 옳다. 선왕께서 ‘없다.’고 하신 하교를 중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아니면 적(賊)의 초사를 중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하였다. 효고(曉鼓)를 치려고 할 무렵에 기사관(記事官) 박문수(朴文秀)가 나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명백한데도 유신(儒臣)들이 번갈아 진계(陳啓)하는 것은 성상의 하교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상의 하교 중에 ‘없다.’고 하신 것은 선왕의 하교이고, 적(賊)의 공초를 가지고 ‘터무니 없는 말이다.’라고 한 것도 선왕의 하교입니다. 이번에, ‘선왕의 하교를 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적의 초사를 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하셨는데, 이 하교는 정녕(丁寧)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신들은 오히려 논란을 중지하지 않고 있으며, 엄려(嚴廬) 가운데 야고(夜鼓)가 여러 번 울렸으니, 신은 진실로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조원명(趙遠命)이 말하기를,

"박문수의 말이 명백하나, 사관(史官)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일을 말하는 것은 전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의 분개한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나, 앞으로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추고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臣)은 삼가 살펴보건대, 김성의 궁인(宮人) 일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김창집(金昌集)의 지친(至親)인 숙종(肅宗)의 후궁(後宮) 영빈(寧嬪)을 은연중에 가리킨 것이며, 이로써 모든 김씨를 일망 타진하려 하고 차자(箚子)를 연명해서 올린 여러 신하들에게 언급한 것이었다. 그래서 감히 선왕의 하교를 가리켜 사실이 없는 것이라고 일컬으면서 새 임금에게 따진 것이다. 아! 이거원(李巨源)이 말한 윤기(綸紀)가 멸절(滅絶)되었다고 한 것은 누가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하겠는가? 박문수가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 강개(慷慨)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10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夜, 召對, 講《綱目》 《梁紀》。 參贊官朴弼夢陳: "文勝質, 爲今日痼弊。 私意太勝, 徒飾外面, 一以遠嫌爲主。" 又言: "人主好惡, 關係至重。 用捨陟罰, 不能一出於公正, 而挾雜以偏係之私, 則其害必至國勢(扤捏)〔杌隉〕 。 願殿下, 任人罪人, 勿使一己之私, 亂於其間。" 上優答之。 弼夢又言: "宮人事, 一幷放出之請, 出於下策, 願亟允從。 如其不然, 不當放出之委折, 明白下敎焉。" 上曰: "因金姓而盡黜掌膳者, 事不明白, 名亦不正。 若有之, 則先朝豈不査黜乎? 放出雖美事, 此近無名矣。" 侍讀官成德潤曰: "藥豈空中落來乎? 人旣使之行之, 則豈出掌膳之外乎? 聖敎中, ‘死中求生, 胡辭亂說’ 八字, 臣不勝訝惑。 王言一播, 不但四方驚惑, 賊黨猶有餘孽, 當此人心不淑之日, 豈無藉口之道乎? 此一轉語, 還收幸甚。" 上曰: "此乃先朝下敎, 則還收與否, 到今非所可論。 先朝旣以無之爲敎, 則此事歸之亂招可也。 以先朝無之之敎, 歸重可乎? 以賊招歸重可乎?" 曉鼓將下, 記事官朴文秀進曰: "上敎明白, 而儒臣之迭陳, 以未詳上敎也。 上敎中無之云者, 先朝之下敎也, 以賊招爲胡辭亂說云者, 亦先朝之下敎也。 今以 ‘先朝下敎, 歸重可乎。 以賊招歸重可乎?’ 此敎不啻丁寧, 而儒臣猶覆難不止, 嚴廬之中, 夜鼓屢下, 臣誠沓沓也。" 承旨趙遠命曰: "文秀之言明白矣, 然史官之出位言事, 違例, 請推考。" 上曰: "史官慨然之心, 予非不知, 後弊不可不慮, 推考可也。" 臣謹按, 金姓宮人事, 一鏡弼夢輩, 暗指肅廟後宮寧嬪之爲金昌集至親者, 欲以是網打諸, 以及於聯箚諸臣, 故敢以先朝下敎, 稱爲無實, 而責之於新君。 嗚呼! 巨源所謂倫紀滅絶者, 誰當之哉? 宜文秀之出位慷慨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10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