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대를 시행하다. 승습을 청하는 주문에 영의정 이름을 쓰는 일, 김창집·이이명의 참시와 신임에 대한 소결을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다
비로소 차대(次對)를 시행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손과 팔이 마비되는 증세로 매일 의원(醫員)으로 하여금 시침(試針)하면서도 친히 제전(祭奠) 드리는 일을 폐지하지 아니하였으며, 재궁(梓宮)에 옻칠을 하는 데에도 반드시 직접 가서 살펴보고 나랏일을 근심하여 일찍이 잠시도 한가롭게 지낸 적이 없었다. 이미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와 소대(召對)의 청을 받아들이고, 또다시 차대(次對)를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숙종 대왕(肅宗大王)이 미령(靡寧)한 이후부터 대행왕(大行王) 때까지 차대를 자주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규례(規例)를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이 빈청(賓廳)에 나와서 승지(承旨)에게 차대를 청한 다음에 입시(入侍)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으면 주서(注書)가 와서 전해 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침을 맞은 다음에 차대를 행할 것이니, 경(卿) 등은 합문(閤門)에 와서 모여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이광좌(李光佐)가 판윤(判尹) 심단(沈檀)·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병조 판서(兵曹判書) 조태억(趙泰億)·우참찬(右參贊) 김일경(金一鏡)·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중기(金重器)·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삼(李森)·행대사성(行大司成) 이진유(李眞儒) 및 집의(執義) 윤회(尹會)·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부수찬(副修撰) 성덕윤(成德潤)을 이끌고 모두 합문에 나와 차대를 청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무망각(无妄閣)으로 인도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어울려서 태(泰)를 이루니, 임금과 신하가 자주 접견(接見)하면 뜻이 통할 수가 있습니다. 신은 마땅히 공제(公除)한 이튿날 여러 제신들과 입시(入侍)해서 각각 맡은 직무의 일을 아뢰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지금 하교로 인하여 비로소 행하였으니, 이는 신의 실책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말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할 때는 적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때는 많다.’는 경계가 있지 않은가?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선왕(先王)의 부탁을 실추(失墜)할까 두렵다. 기대하는 것은 오직 보필하는 여러 신하들의 협력을 바랄 뿐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옛말에, ‘수성(守成)은 창업(創業)보다 어렵다.’ 하였는데, 그 수성하는 임금은 깊은 궁궐에서 생장(生長)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신하를 자주 접견하지 않아서 신하들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잠저(潛邸)078) 에 계셨으므로 사정을 두루 아시니, 전대(前代)의 수성(守成)하는 임금과 아주 다릅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의 형편이 망극(罔極)한 지경에 놓여 있으니, 이를 만회(挽回)하는 방법은 오직 전하께서 뜻을 세우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항상 생각하시기를, ‘내가 나라의 형편을 만회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선왕(先王)의 종묘(宗廟)에 들어갈 것이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다면, 여러 신하 중에 어찌 치도(治道)를 도와서 성공시킬 자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뜻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니, 혹은 뜻은 있으면서도 외부의 사물에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혹은 시일이 오래되면 소홀해져서 스스로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임금은 지극히 부귀(富貴)하기 때문에 게을리하여 소홀히 하는 생각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순(舜)임금도 그 신하들이 경계하여 심지어 말하기를, ‘단주(丹朱)079) 처럼 오만하지 마십시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자질(資質)만 믿지 마시고 더욱 면려(勉勵)하셔서 게을러지는 생각이 혹시라도 싹트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실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니, 나는 진실로 마땅히 한 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겠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도 나라 일에 대해 자기 일처럼 여기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장횡거(張橫渠)가 말하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셨을 적에는 학문에 노력하셨는데, 지금 대위(大位)에 오르시고는 장차 마음을 기울일 수 없을 것이나, 그 힘을 얻은 것에 있어서는 지금이 더욱 클 것입니다. 비록 평범한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마땅히 복습을 일삼아야 더욱 간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제왕의 학문이겠습니까? 인산(因山) 전에는 비록 전례처럼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경연(經筵)과 옥당(玉堂)은 마땅히 자주 소대(召對)하여 의리(義理)를 강론(講論)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서도 나에게 소대(召對)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격례(格例)에 구애받게 되면 통하지 않는 것이다. 현종(顯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는 빈객(賓客) 이외에 산림(山林)의 선비들까지도 같이 서연(書筵)에 들어오게 했는데, 더구나 경연(經筵)이겠는가? 나는 낮 소대(召對) 때에 경연관(經筵官)과 특진관(特進官)으로 하여금 돌아가며 들어와서 토론하게 하려고 한다."
하였는데,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옛 관례에 조강(朝講) 때에는 삼공(三公) 가운데 한 사람이 참석하고, 주강(晝講)·석강(夕講) 때에는 지경연(知經筵)·동지경연(同知經筵)이 돌아가며 참석하고, 야대(夜對) 때에는 경연관(經筵官)은 대궐 밖에 있으므로 옥당관(玉堂官)만 들어갑니다. 대저 하루에 만기(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세 차례 강론(講論)이 있는 데다가, 또다시 야대까지 있으니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규례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서는 큰 뜻을 품고서 무비(武備)까지 묻고자 하셨으므로 무신(武臣)의 당상(堂上) 가운데 한 사람도 같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밖에 상참(常參)과 윤대(輪對) 같은 경우에는 각사(各司)의 관리가 다 들어와서 그 맡은 직무에 관한 일을 아뢰었습니다. 상참은 곧 임금의 개아(開衙)이므로 《정원일기(政院日記)》 중에 매일 상참과 경연(經筵)을 정지한 것을 반드시 기록했는데, 이는 또한 예(禮)를 아끼고 양(羊)을 그대로 두는 뜻080) 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산림(山林)의 선비도 같이 경연에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경연관의 직무를 겸하지 않고도 강석(講席)에 참여하였으니, 비록 강관(講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 학식(學識)이 고명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어떤 직무이든 구애하지 말고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고 총부(摠府)와 병조(兵曹)의 당상(堂上)과 이품(二品) 이상으로서 공무로 인하여 대궐에 들어온 자 중에서 1명도 마땅히 소대(召對)할 때에 참석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고, 이어 경연관(經筵官)에게 명하여 날마다 돌아가며 와서 기다리되, 소대할 때에 같이 들어올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조정에는 한 사람의 관원이라도 적임자를 얻지 못하게 되면 그 직무가 다 다스려지지 않는 것인데, 만약 백성의 일에 있어 가장 긴요한 것을 논한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만한 것이 없으니, 엄중하게 책려(責勵)해서 극진하게 고르도록 하소서. 무릇 묘당(廟堂)의 추천과 전조(銓曹)의 정사에 반드시 그 사람의 능부(能否)를 자세히 살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에는 천거한 사람을 벌주게 하소서."
하니,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선조 대왕(宣祖大王) 원년(元年)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그 당시 명신(名臣)이었던 이항복(李恒福)이 상소하기를, ‘성의(誠意)를 미치게 하는 것은 마땅히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고, 공도(公道)를 지키는 것은 마땅히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이치에 들어맞는 말입니다. 현재의 병폐는 모두 사정(私情)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만약 합당한 사람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사사로운 마음부터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기 전에 중관(中官)이 저녁 상식(上食) 때가 되었다고 고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상식을 마친 뒤에 다시 여러 신하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양전(兩銓)의 관원을 나오게 한 다음 되풀이 하여 계칙(戒飭)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정직한 사람은 등용하고 부정(不正)한 사람은 놓아두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정직하도록 할 수 있다." 하였는데, ‘놓아둔다’는 것은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에는 권면하는 것을 알게 해서 나중에 쓰이기를 기다리게 하는 뜻이니, 경(卿) 등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또 다시 청하기를,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거듭 신칙하여 그 수령(守令) 중에 직무를 제대로 행수하지 않는 자는 엄중하게 출척(黜陟)을 더하되, 심한 자는 전최(殿最)081) 를 기다릴 필요 없이 계문(啓聞)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윤혀(允許)하였다.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고부 주청사(告訃奏請使)를 보내어야 마땅한데, 승습(承襲)을 청하는 주문(奏文)은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 이름으로 써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최규서가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구례(舊例)에는 좌의정이나 우의정이 대신 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광좌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최규서는 곧 성상(聖上)께서 즉위(卽位)하셨을 때의 수상(首相)이었으니, 최규서의 이름으로 써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신(忠信)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치사(致仕)한 사람을 가리켜 영상(領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원로(元老)가 영상의 이름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억지로 그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 좌상(左相)의 이름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진유(李眞儒)·김일경(金一鏡) 등이 모두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가함(假銜)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새로 뽑는다면 좌상이 마땅히 승진될 것이니, 이조(吏曹)에서는 먼저 좌상을 영상으로 승진시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臣)의 선조(先祖)가 정승의 직무를 맡고자 하지 아니하여 가함(假銜)을 청하였는데, 선조가 이미 시행한 일을 신이 어찌 감히 시양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그로 인하여 정승에 임명된다면, 이는 성상께서 자나깨나 훌륭한 보필을 구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그것을 혐의롭게 여기는가? 무엇이 혐의스러운가?"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최규서(崔奎瑞)는 곧 즉위(卽位)하였을 적에 영의정이었으니, 최규서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옳다. 이진유(李眞儒)의 말과 같다면, 가령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이광좌(李光佐)가 또 벼슬을 그만두었을 경우에는 또한 그 주문(奏文)을 고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임금이 처음으로 차대(次對)를 행하는데, 경재(卿宰)라는 자들은 임금에게 요구하는 술수를 가지고 당로(當路)에 아첨하니,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명의(李明誼)·윤회(尹會)가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정절(情節)이 국안(鞫案)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장수를 바꾸고 병력을 진열시킨 것은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사실 그 모의를 주장했고, 독약(毒藥)을 사온 것은 이이명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세 번이나 정형(正刑)을 명했으나, 마지막에 감단(勘斷)하며 사사(賜死)에 그쳤으니, 이보다 더 큰 실형(失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참시(斬屍)해서 전형(典刑)을 밝혀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죽은 사람에게 추후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선왕(先王)의 관대하신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뜻이니, 따를 수가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거듭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을 말하는 신하는 왕법(王法)을 지키고자 하나, 나는 반드시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신임(申銋)이 작년에 올린 상소는 적(賊) 백망(白望)을 편든 것으로서, 오직 반역 행위가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옥관(獄官)을 몰아내고 나라 일을 그르쳤습니다. 당초에 섬에다 천극(栫棘)082) 하였을 적에는 감사(減死)한다고 말했는데, 지난날 소결(疏決)083) 에서 갑자기 육지로 나오게 하면서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왕(先王)의 관대한 법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형정(刑政)이 해이해지면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경계되어 두려워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육지로 나오고 울타리를 철거하라는 명은 다시 거두어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유성추(柳星樞)는 이정식(李正植)을 신임하고 정우관(鄭宇寬)과 체결하였으며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새로 들어왔다는 말과 은화(銀貨)를 교통(交通)한 흔적이 적(賊)의 공초에 밝게 드러났으니, 그 죄를 범한 것은 윤각(尹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윤각은 곤장을 맞아 죽었으나 유성추는 법망(法網)에서 빠졌으니, 청컨대, 감사하라는 명을 거두어 들이시고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도 선왕의 관대한 법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고봉헌(高鳳獻)은 장세상(張世相)과 동시에 특명으로 유배(流配)되었고 죄명(罪名)도 같은데, 장세상은 반역으로 죽었고 고봉헌은 특별히 방면되었으니, 청컨대, 전과 같이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부의 일은 비록 알 수 없으나 내부의 일은 알 수가 있다. 그때에 마침 역환(逆宦)과 같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간신(諫臣)이 의심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리고 대행 대왕 때에 이미 석방시킨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의가 또 아뢰기를,
"반역의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나와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선동하면서 심지어 임금의 비답까지 위조하는 등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형(李坰)이 인증(引證)한 형조(刑曹)에서 퇴직한 아전 홍득휘(洪得輝)라는 자는 형조의 문안(文案)에는 그 이름이 없습니다.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면서 둘러대며 승복하지 않으니, 분명히 은밀한 실정이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밝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윤회(尹會)가 아뢰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한일운(韓日運)은 칙사(勅使)를 대접한다고 핑계대어 관가의 곡식을 팔아 사복(私腹)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서질(庶姪)을 백성 중에 부자인 김유형(金有亨)의 손녀(孫女)와 위협하여 혼인시켜 인족(隣族)에게 해를 끼쳐서 온 마을이 농사를 폐지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문을 다 믿을 수가 없으니, 자세히 살펴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윤회가 또다시 잇따라 계청(啓請)하니, 마침내 그 청을 따랐다. 이진수(李眞洙)를 지평(持平)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정언(正言)으로, 심유현(沈維賢)을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삼았는데, 이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와 참판(參判) 이세최(李世最)와 참의(參議) 심공(沈珙)의 정사(政事)로 인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8면
-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078]잠저(潛邸) : 창업(創業)의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을 일컬음.
- [註 079]
단주(丹朱) : 요(堯)임금의 아들.- [註 080]
예(禮)를 아끼고 양(羊)을 그대로 두는 뜻 : 자공(子貢)이 고삭(告朔) 때 쓰는 양(羊)을 치우려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지만 나는 예(禮)를 아끼고자 한다. [爾愛其羊我愛其禮]"한 데에서 인용된 말. 기본 정신을 보전하기 위해 형식이나마 그대로 둔다는 말.- [註 081]
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 [註 082]
천극(栫棘) : 유배(流配)된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 곧 배소(配所)의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설치하여 외부와 격리시키는 것.- [註 083]
소결(疏決) :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함.○丙寅/始行次對。 時, 上患手臂麻木, 日令醫試針, 猶不廢親奠, 梓宮加柒, 亦必臨視, 而憂勤國事, 未嘗片時暇逸, 旣納堂箚召對之請, 又欲行次對。 然自肅宗違豫以後, 至大行朝, 罕行次對, 上問規例於李光佐。 光佐對曰: "大臣及備局諸宰, 來詣賓廳, 請承旨求對後, 有入侍之敎, 則注書來傳矣。" 上曰: "明日受針後, 當行次對, 卿等可來會閤門也。" 至是, 左議政李光佐率判尹沈檀、吏曹判書李肇、兵曹判書趙泰億、右參贊金一鏡、訓錬大將金重器、御營大將李森、行大司成李眞儒及執義尹會、大司諫李明誼、副修撰成德潤, 俱詣閤門, 求對, 上命入侍。 承旨史官引至無妄閣。 光佐曰: "天地交而成泰, 君臣頻相接, 則情志可以流通。 臣當於公除翌日, 與諸宰入侍, 各陳職掌事, 而未能焉, 今因下敎始行之, 此臣之失也。" 上曰: "古語豈不曰接賢士大夫之時少, 親宦官宮妾之時多乎? 予以否德, 恐墜付托。 所望者惟輔相諸臣之協贊而已。" 光佐曰: "語云守成難於創業, 爲其守成之主, 生長深宮, 則未知稼穡之艱難, 罕接臣隣, 則未知諸臣之賢不肖也。 今殿下, 久在潛邸, 周知事情, 殊異前代守成之主。 況今國勢罔極, 挽回之道, 惟在殿下之立志, 恒若曰: ‘予不挽回國勢, 則何以入先王之宗廟, 見在廷之諸臣乎?’ 夫如是, 則諸臣中, 豈無輔成治道者乎? 然立志甚難, 或有有志而爲事物撓奪者, 或有日久泛忽, 自底放失者。 況人君極富極貴, 易生怠忽, 故有君如舜, 而其臣之勉戒, 至曰無若丹朱傲。 殿下亦宜毋恃資質, 益加勉勵, 毋使怠忽之念或萠焉。" 上曰: "不誠無物。 予固當一念戒懼, 然諸臣於國事, 不能視若己事, 則何能有爲? 張橫渠云: ‘民吾同胞, 物吾與也。’ 爲國之道, 要不出此。" 光佐曰: "殿下在東宮, 孜孜問學, 今臨大位, 將不能專心, 然其得力, 則在今尤大。 雖以凡人言之, 當事服習, 益覺親切。 況帝王之學乎? 因山前, 雖不能如例, 經筵、玉堂, 宜頻賜召對, 講論義理也。" 上曰: "善。 堂箚亦勸予召對, 然凡事拘於格例則不通。 顯廟在東宮, 賓客外山林之士, 亦同入書筵。 況經筵乎? 予欲於晝召對, 使經筵官、特進官, 輪入詩論也。" 趙泰億曰: "故例, 朝講則三公一員入參, 晝講、夕講, 則知經筵、同知經筵, 輪回入參, 夜對則經筵官在闕外, 故玉堂獨入。 夫一日萬機之暇, 旣有三講, 又有夜對, 祖宗朝美規可見。 及至孝廟, 有大志, 欲問武備, 故武臣堂上中, 一人亦令同入。 此外如常參、輪對, 則各司官, 皆入陳其職掌事。 常參, 卽人主之開衙, 故《政院日記》中, 每日必書停常參、經筵, 亦愛禮存羊之義也。 祖宗朝令山林之士, 同入經筵, 故先正臣文元公金長生, 不兼經筵, 亦入參講席。 雖非講官, 豈無學識高明之人乎? 宜不拘某職, 許令入參, 而如摠府、兵曹堂上及二品以上, 因公入闕者一員, 亦宜於召對時入參也。" 上曰: "善。" 仍命經筵官, 輪日來待, 以備召對時同入。 光佐曰: "朝廷一官, 不得人, 則其職皆不理, 而若論民事之最緊要者, 無如監司、守令, 嚴加責勵, 使之極擇。 凡於廟薦及兩銓之政, 必詳閱其人之能否, 及至不效, 罪其擧主。" 檀曰: "宣祖元年, 白虹貫日。 其時名臣李恒福疏言: ‘推誠, 當自納諫始; 秉公, 當自用人始。’ 此誠至言也。 方今痼弊, 皆由於私。 如欲得人, 宜先祛私也。" 語未畢, 中官以夕上食時至告, 上命諸臣退待閤門外。 及上食撤後, 復命諸臣入侍, 進兩銓官, 申申戒飭曰: "孔子言: ‘擧直措諸枉, 能使枉者直。’ 措非棄之也, 知勵於始, 待用於後也。 卿等勉之。" 光佐又請: "申飭諸道監司, 其守令之不職者, 嚴加黜陟, 甚者不待殿最, 啓聞處置。" 允之。 眞儒曰: "告訃奏請使當發矣。 請承襲奏文, 以領議政崔奎瑞名書之。 今奎瑞已致仕, 舊例無左右相替行之事。" 上問光佐, 光佐對曰: "奎瑞, 卽聖上卽阼時首相, 以奎瑞名書送便。" 上曰: "忠信可行蠻貊。 不可以已致仕之人, 稱爲領相。 況元老旣不欲受領相之號, 豈可强書其名乎? 以左相名書之。" 眞儒、一鏡等皆曰: "大臣不可假銜。" 上曰: "今若新卜, 左相自當陞。 自吏曹, 先以左相陞付領相也" 光佐曰: "臣之先祖, 不欲當相職, 而請假銜。 先祖已行之事, 臣何敢辭? 若因此命相, 非聖朝寤寐良弼之意也。" 上曰: "卿以爲嫌乎? 何嫌也?" 臣謹按, 崔奎瑞, 乃卽位時領議政, 以奎瑞之名請之是也。 如眞儒之言, 則假令使价之未渡鴨江也, 光佐又致仕, 則亦當改其奏以送乎? 聖上初行次對, 而爲卿宰者, 乃爲是要君之術, 以媚當路, 抑獨何心哉? 明誼、會啓, 略曰: "金昌集、李頤命, 情節昭載於鞫案, 易帥陳兵, 逆集實主其謀, 貿來毒藥, 在於頤賊燕行。 大行大王三命正刑, 而末稍勘斷, 止於賜死, 失刑孰大於此? 請令攸司斬屍, 明正典刑。" 上曰: "已死之人, 不宜追刑, 此是先朝寬大之典。 以予繼述之意, 不可允從。 勿煩。" 明誼申請, 上曰: "言事之臣, 欲守王法, 而予則必欲繼述也。" 明誼又啓: "申銋之昨年一疏, 右袒賊望, 惟恐逆節之綻露, 驅逐獄官, 沮敗國事。 當初島棘, 以減死爲言, 而向日疏決, 遽出陸撤籬。 此雖出於先朝寬大之典, 然刑政解弛, 亂賊無所懲畏。 請還收出陸撤籬之命。" 上曰: "勿煩。" 明誼又啓: "柳星樞信任正植, 締結宇寬, 黃兵新入之說, 銀貨交通之跡, 昭著賊招。 其負犯與尹慤無異, 而慤杖斃, 星樞漏網。 請還收減死之命, 嚴鞫得情。" 上曰: "此亦先朝寬大之典也。 勿煩。" 明誼又啓: "高鳳獻與張世相, 同時特配。 罪名亦同, 而世相逆死, 鳳獻特放。 請仍前遠配。" 上曰: "外事雖不知, 而內事則可知。 其時適與逆宦同入, 此與諫臣所疑, 大不相類。 且大行朝業已放釋, 勿煩。" 明誼又啓: "逆孽漏網, 譸張煽動, 至僞造御批而極矣。 李坰所引刑曹退吏洪得輝, 曹案旣無其名, 則指無爲有, 周遮不服, 明有隱情。 請更令王府, 嚴鞫得情。" 上曰: "勿煩。" 會啓: "金川郡守韓日運, 托以支勅, 賣官穀歸私橐, 以其庶侄, 怯婚於富民金有亨之孫女, 害及隣族, 一洞廢農。 請罷職不敍。" 上曰: "風聞不可盡信, 詳察處之。" 明日, 會復連啓, 遂從其請。 以李眞洙爲持平, 曺命敎爲正言, 沈維賢爲永川郡守, 吏曹判書李肇、參判李世最、參議沈珙政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8면
-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