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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권, 영조 즉위년 8월 30일 庚子 1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대왕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다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 【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 【25일이다.】경종 대왕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001) 오시(午時)에 왕세제(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승지(承旨)·사관(史官)은 조복(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배(拜), 궤(跪)’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궤(跪)하소서.’ 하고, 고하기를,

"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천세(千歲)!’ 하고 호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002) 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이 어찌 차마 이런 재앙을 내리는가? 거듭 큰 상(喪)을 만났는데, 나라에는 임금이 없을 수 없으므로 억지로 군하(群下)의 청을 따랐노라. 지극한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운데 보위(寶位)가 어찌 편하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타고난 천성이 관대하고 어질었으며 그 마음은 효우(孝友)하였다. 저위(儲位)에 있은 지 30년에 온 국민이 목숨을 바칠 정성이 간절하였고, 조정의 정사를 대리한 지 4년에 성고(聖考)께서는 수고로움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다. 남몰래 부각된 실덕(實德)은 지극히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정고(貞固)003) 하게 대처했고, 말없이 운용한 신기(神機)는 지극히 비색함을 돌려서 태평하게 하였다. 하늘이 널리 덮어서 만물을 길러주어 모두 형통하게 하고, 태양이 높이 매달려 퍼지는 불길한 기운을 신속하게 쓸어버렸네. 놀이와 사냥과 음악과 여색은 하나도 좋아함이 없었으므로, 정령(政令)을 시행함에 있어 모두 그 적절함을 얻었다. 위대하신 선왕(先王)의 덕을 크게 이어받았으니, 거의 삼대(三代)004) 의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기거(起居)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하다가 문득 구령(九齡)의 징조005) 를 잃었도다. 반야(半夜) 사이에 갑자기 빙궤(憑几)의 유명(遺命)006) 을 받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불행하게도 5년 안에 두번이나 승하(昇遐)의 슬픔을 품게 되었으니, 애처로운 나는 고아[嬛孤]로서 이렇게 혹독한 벌을 받게 되었다. 여차(廬次)에서 곡읍(哭泣)을 하며 명령을 내릴 경황이 없었는데, 왕위(王位)에 오를 면복(冕服) 차림으로 어찌 차마 대통(大統)을 계승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백료(百僚)들의 요청이 더욱 간절하다 하나, 다만 슬픈 감회만 더할 뿐이다. 돌이켜 보건대, 양전(兩殿)께서 특별히 간곡하게 권유(勸諭)하시니, 감히 초지(初志)를 고집할 수 있겠는가? 윤리(倫理)로는 형제이고 의리로는 부자이니, 진실로 지극히 애통함이 끝이 없다. 조종(祖宗)을 계승하여 신민(臣民)의 주인이 되었으나 보잘것없는 몸이 감당하기 어려움을 어찌하겠는가? 환규(桓圭)007) 를 잡고서 오동잎[桐葉]의 희롱008) 을 생각하였고, 법전(法殿)에 임해서 동기간(同氣間)에 쓸쓸함을 슬퍼하노라.

갱장(羹墻)의 사모함009) 이 간절하니 차례를 계승하는 생각 잊을 수가 없고, 근심이 더욱 깊었으니 임금이 되는 것이 어찌 기쁘겠는가? 높은 지위에 오르니 두려움이 마음을 놀라게 하고, 성대한 의식을 보니 끊임없이 눈물만 흐른다. 선왕(先王)의 성덕(盛德)과 선행(善行)에 뒤따라 이어가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열성(列聖)의 대업(大業)과 큰 규모(規模)를 무너뜨릴까 매우 걱정이로다. 조종(祖宗)께서 잇따라 멀리 떠남을 슬퍼했으니, 나라를 장차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인종(仁宗)·명종(明宗)처럼 서로 계승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본받을 수 있겠는가? 이에 중외(中外)에 널리 알려서 사민(士民)과 기쁨을 함께하리라. 비록 옛 나라이나 새로운 명을 받았으니, 정치는 시작을 잘해야 할 기회를 당했고, 허물과 수치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이에 함께 살기 위한 인덕(仁德)을 베푸노라. 이달 30일 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赦免)하고,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게 한다. 아! 편안하고 위태로움과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계기가 처음 시작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협력하여 도와주어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여러 신하에게 기대하노라.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조태억(趙泰億)이 지어서 바쳤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1]
    경자 : 8월 30일.
  • [註 002]
    점침(苫枕) : 옛날에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짚을 엮어 만든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상중에 있는 사람의 거처를 말함.
  • [註 003]
    정고(貞固) : 굳은 의지로 흔들리지 않음.
  • [註 004]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세 왕조(王朝)를 말함.
  • [註 005]
    구령(九齡)의 징조 : 90세를 살 수 있는 징조라는 뜻.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제(上帝)에게 구령(九齡)을 받는 꿈을 꾸었는데, 문왕(文王)이 이에 대해, "이는 너의 수명이 90임을 뜻하는 것인데, 내가 너에게 세 살을 주겠다." 하였음. 그래서 무왕이 93세에 죽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임.
  • [註 006]
    빙궤(憑几)의 유명(遺命) : 유언(遺言)을 뜻하는 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임종(臨終) 때 대신(大臣)을 불러 놓고 옥궤(玉几)에 기대어 고명(顧命)을 내린 데에서 인용된 것임.
  • [註 007]
    환규(桓圭) : 오서(五瑞)의 하나. 주대(周代)에 공작(公爵)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갖는 길이 9촌(寸)의 홀(笏).
  • [註 008]
    오동잎[桐葉]의 희롱 : 옛날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오동잎으로 규(圭)를 만들어 동생인 당숙(唐叔)에게 주고, "너를 임금으로 봉하겠다."고 한 고사에서 인용된 말임.
  • [註 009]
    갱장(羹墻)의 사모함 :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지극히 사모하니, 앉으면 요임금의 모습이 담에 나타나 보이고 음식을 대하면 국에 나타나 보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임.

○庚子/景宗大王四年 【淸 雍正二年。】 秋八月乙未, 【二十五日。】 景宗大王昇遐于昌慶宮環翠亭。 越六日庚子午時, 王世弟卽位于昌德宮仁政門。 院相、承旨、史官具朝服坐敦禮門外西庭東向, 弘文館坐承政院之下, 侍講院坐東庭西向, 翊衛司坐侍講院之下, 兵曹、都摠府具戎服, 東西坐, 以待時至。 王世弟釋衰服, 具冕服, 自廬次出, 左通禮導王世弟, 詣大行大王殯殿, 由西階, 升就褥位。 贊儀高聲唱拜跪, 左通禮低聲跪, 告 "嗣王受寶。" 上香禮畢, 王世弟降入幕次。 已而出幕次, 步由敦禮東夾門下東階, 從延英門南行西折, 出肅章東夾門, 北折至仁政東夾門外立。 當中設御座, 王世弟升御座, 百官四拜, 呼 "千歲。" 上降御座, 入仁政東夾門, 由仁政殿正路, 升殿。 上還廬次, 釋冕服, 反衰服。 先四日, 禮曹進嗣位節目, 王世弟下令旨, 還給。 議政府率百官, 日三還納, 承政院、司憲府、司諫院、弘文館迭請, 不許。 及成服日, 外儀已辦, 院相李光佐至廬次前, 懇請服冕, 王世弟涕泣俯伏于苫枕, 終不許。 光佐呼王大妃殿、王妃殿承傳色, 口傳啓請, 自內勸進, 王大妃殿、王妃殿, 以諺敎勸進。 於是, 王世弟却輿, 步至御座前, 猶哀號不上座曰: "予昔侍衛寧考於此殿矣。 今何心登御座乎?" 嗚咽不成聲。 光佐等, 縷縷懇請, 良久登極。 正時, 禮曹始以已時啓下, 至午時乃卽位。 尊惠順 慈敬王大妃 金氏爲大王大妃, 王妃魚氏爲王大妃, 以嬪徐氏爲王妃, 遂頒敎于仁政門:

王若曰, 天胡忍於降割, 荐遘大喪? 國不可以無君, 勉從群請。 至哀難抑, 寶位何安? 恭惟大行大王, 稟質寬仁, 因心孝友。 居儲位卅載, 國人切願死之誠; 攝朝政四年, 聖考有分勞之喜。 潛孚實德, 履至艱而終貞; 默運神機, 回極否而爲泰。 玄穹廣覆, 囿品物而咸亨; 白日高懸, 廓氣翳而迅掃。 蓋遊畋聲色之一無所好, 故政令施爲之皆得其宜。 丕顯丕承, 庶期復三代之治; 不興不寐, 奄失夢九齡之徵。 誰知半夜之間, 遽承憑几之命? 不幸五年之內, 再抱遺弓之哀。 閔予孤嬛, 罹此酷罰。 廬哭泣, 猶命戒之未遑; 阼冕裳, 豈纉承之可忍? 雖百僚籲號之益懇, 只增懸懷; 顧兩殿勸諭之特勤, 敢守初志? 倫兄弟而義父子, 固至無涯之痛; 承祖宗而主臣民, 奈眇躬之難任? 秉桓圭而想桐葉之戲, 臨法殿而愴萼樓之空。 慕切羹墻, 思不忘於繼序; 憂深淵谷, 樂何有於爲君? 履尊位而怵然驚心, 瞻縟儀而澘焉出涕。 先王之盛德至善, 詎望追繩? 列聖之大業洪圖, 秪憂荒墜。 哀勛華之繼陟, 國將何爲; 若之相承, 予敢或擬? 肆揚中外之敷告, 嘉與士民而同休。 雖舊維新, 政當善始之會; 滌瑕蕩垢, 聿布竝生之仁。 自本月三十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在官者各加一資, 資窮者代加。 於戲! 惟安危理亂之機, 罔不在於初服; 顧協贊維持之力, 是所期於群工。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趙泰億製進。】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0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