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제가 인정문에 나아가 즉위하다
"이날 오시(午時)에 왕세제(王世弟)가 면류관과 곤복을 갖추어 입고 옥새(玉璽) 받는 것을 빈전(殯殿)278) 에 고하고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즉위하니, 백관(百官)이 길복(吉服)으로 하례(賀禮)를 올렸다. 왕대비(王大妃)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교명(敎命)을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고 크게 사면(赦免)하였다. 세제(世弟)가 여차(廬次)279) 에서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면류관을 쓰지 못하다가 전문(殿門)에 임하여는 슬피 부르짖으며 자리에 기꺼이 오르지 않았고, 또 자리를 물리치라고 명하여 대신(大臣)들이 번번이 많은 말로 간곡히 청해서 허락을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융성한 덕품과 지극한 선행으로서, 세자(世子) 자리에 있은 지 30여 년 만에 숙묘(肅廟)의 대리(代理)의 명령을 받았고, 팔역(八域)280) 의 민생[含生]이 목을 빼고 〈대행왕(大行王)을 위해〉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신축년281) 개원(改元) 초에 이르러 일찍이 대책(大策)을 결정하고 주창(主鬯)282) 의 중대한 임무를 개제(介弟)283) 에게 부탁하였으니, 이는 진정 천고(千古) 제왕가(帝王家)의 융성한 절문(節文)으로서, 의지와 사려가 깊고 원대하며 주고받음이 광명(光明)하여 길이 종사(宗社) 만년의 기초가 되었으니, 아! 아름답도다. 더구나 대행왕의 마음에서 우러난 우애(友愛)와 사왕(嗣王)의 하늘이 낸 효성은 백왕(百王)에 뛰어나 궁중 안이 애연(䔽然)한 화기에 차 있었으며, 가까이 친압(親狎)하는 무리도 숙연(肅然)히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이간하는 자가 없었다.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즈음에 이르러서는 승순해 받들고 보호하며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승하하신 뒤에는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여 보는 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일국의 신민들이 더욱 대행왕이 막중한 부탁에 훌륭한 사람을 얻은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5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27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註 278]빈전(殯殿) : 재궁(梓宮)을 모시는 전각.
- [註 279]
여차(廬次) : 상제가 거처하는 곳.- [註 280]
팔역(八域) : 팔도.- [註 28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282]
주창(主鬯) : 종묘(宗廟) 제사에 올리는 울창주(鬱鬯酒)를 맡았다는 뜻으로 세자의 자리를 뜻함.- [註 283]
개제(介弟) : 남의 아우를 높이어 이르는 말. 곧 영조를 가리킴.○是日午時, 王世弟具冕服, 告受寶于殯殿, 御仁政門卽位, 百官吉服陳賀。 尊王大妃爲大王大妃, 王妃爲王大妃, 頒敎中外, 大赦。 世弟自廬次, 涕泣不忍襲冕, 及御門, 哀號不肯上座, 又命却座, 大臣輒懇請屢百言, 乃許。 謹按大行大王, 以盛德至善, 在儲三十餘年, 受肅廟代理之命, 八域含生, 莫不延頸願死, 而及夫辛丑初元, 早決大策, 以主鬯之重, 托之介弟, 此誠千古帝王家盛節, 而志慮深遠, 授受光明, 永爲宗社萬年之基, 猗歟休哉! 矧惟大行固心之友、嗣王出天之孝, 度越百王, 宮闈之中, 藹然和洽, 近習無不肅焉敬畏, 罔敢間然。 至於寢疾之際, 承奉調護, 靡不用極, 昇遐之後, (躄)〔擗〕 踊哀憾, 見者大悅。 於是乎一國臣民, 益頌大行付托得人之休云爾。
- 【태백산사고본】 7책 15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27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註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