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김창집 등이 대리 절목에 관한 차자를 올리고 임금이 조태구의 간언에 따라 세제 대행의 명을 회수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이미 여러 재상으로 하여금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와서 모이도록 하고, 밤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자며 대리(代理)하는 일을 함께 의논하여 드디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요즈음 갑자기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어 복합(伏閤)한 지 나흘이 되었으나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청대(請對)를 예닐곱 차례 하였으나 굳게 거절하심이 갈수록 심해져 한 번도 청광(淸光)509) 을 뵙지 못하였으며, 단지 성의가 천박하여 천심(天心)을 감회(感回)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할 뿐이니,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지난밤 내린 비지(批旨)는 더욱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바이니, 받들어 반도 읽기 전에 심담(心膽)이 함께 떨어져 놀랍고 떨린 나머지 우러러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당초의 비망기 가운데 있는, ‘대소(大小)의 국사(國事)를 아울러 재단(裁斷)하게 하라.’는 하교는 진실로 국조(國朝) 이래로 있지 아니한 일이니, 신 등은 비록 만 번 죽음을 당할지라도 결단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정유년510) 의 일에 이르러서는 본시 선조(先祖)의 재정(裁定)하신 바이며, 또 절목(節目)의 구별이 있었으니, ‘아울러 재단하게 하라.’는 명에 비하면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번의 성교(聖敎)는 지성(至誠)으로 슬퍼하는 데서 나왔으니, 전하의 신하가 된 자로서 또한 어찌 감히 가볍고 갑작스럽다는 데 구애되어 일체 모두 거역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단지 정유년의 절목에 의하여 품지(稟旨)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고 정청(庭請)을 드디어 그만두니, 중외(中外)의 인심이 놀라고 분통해 하였다.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약방(藥房)의 문안 때문에 예궐(詣闕)하여 상소하기를,
"지난밤에 삼가 성비(聖批)를 받들자, 여러 대신이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회좌(會坐)를 청하고 순문(詢問)하였습니다. 신이 ‘이 일은 비록 달을 넘기고 해를 지날지라도 받들어 순종할 리가 만무하다.’고 누누이 다투어 고집하였더니, 여러 대신이, ‘우선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 입대(入對)를 청하여 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삼가 듣건대 대신이 차자에서, ‘정유년의 절목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합니다. 아! 밤 사이에 갑자기 소견을 바꾸어 같이 일한 신하와 모의(謀議)하지도 않고 이처럼 전에 없던 놀라운 거조(擧措)를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후의 성교(聖敎)는 간하는 말을 거절한 비답에 불과한데, 자신이 대신이 되어 힘을 다해 광구(匡救)하는 도리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받들어 행하기에 급급하여 마치 미치치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니, 그 마음이 있는 바는 길 가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이루 다 죽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저으기 통분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빨리 거두어서 신인(神人)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하였는데, 승지 홍계적(洪啓迪)이 물리치고 기꺼이 상철(上徹)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이조(李肇)·김연(金演) 등이 조방(朝房)에 있으면서 청대(請對)하여 다시 다툴 것을 함께 의논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는 비록 대론(臺論)을 만났다고는 하나, 이 때를 당하여 보통 법에 구애될 수 없으니 대궐에 나아가 청대하여 죽음으로 힘써 다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조태구가 드디어 성 밖에서 궐하(闕下)에 이르렀다.
이때 임금이 창경궁(昌慶宮)에 있었으므로, 여러 신하 가운데 나아가 뵙고자 하는 자는 모두 창덕궁에서 건양문(建陽門)을 지나 합문 밖에 나아갔다. 그런데 조태구는 병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어서 견여(肩輿)로 큰 거리를 따라 창경궁 궐문 밖에 이르러 선인문(宣仁門) 【창경궁의 협문(夾門)이다.】 으로 들어가 사약방(司藥房)에 앉아서 사람을 승정원에 보내어 청대하였다. 이광좌 등은 금호문(金虎門) 【창덕궁 서쪽 문이다.】 으로 들어가 또한 각각 청대하였는데, 승지 홍계적 등이, ‘조태구는 바야흐로 대론(臺論)을 입었는데 어찌 감히 청대하느냐?’며 물리치고 상문(上聞)하지 않으니, 갔다왔다 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양사(兩司)의 관원이 바야흐로 대각(臺閣)에 나아갔다가 조태구가 입궐한 것을 듣자 먼저 원찬(遠竄)하기를 청하였는데, 계사(啓辭)가 미처 상철(上徹)되지 아니하여 사알(司謁)이 합문에서 승정원으로 내달려와서 조태구를 인견(引見)하겠다는 전교를 전하고, 또 임금이 이미 전(殿)에 나왔음을 말하니, 승지들이 당황하고 놀라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궐 안팎이 물 끓듯 진동(震動)하였다. 김창집(金昌集) 등은 이미 차자(箚子)를 올렸고, 조태채(趙泰采)는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는데, 김창집이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과 더불어 비국(備局)에서 예관(禮官)을 모아 바야흐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다가, 조태구가 장차 입대(入對)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서는 크게 놀라고 당황하여 지름길로 내달려 합(閤)에 올랐다. 이윽고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가 잇따라 도착하여 아울러 입대를 청하니,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창집, 영부사(領府事) 이이명, 좌의정 이건명, 우의정 조태구,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돈녕(判敦寧) 송상기(宋相琦), 행 좌참찬(行左參贊) 최석항(崔錫恒),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 이조 판서 권상유(權尙游),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 예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행 사직(行司直) 이광좌(李光佐),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 형조 참판 이조(李肇),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연(金演), 예조 참판 이집(李㙫),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 병조 참판 김재로(金在魯), 이조 참판 이병상(李秉常), 행 사직(行司直) 이정신(李正信),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한중희(韓重熙)·안중필(安重弼)·유숭(兪崇)·조영복(趙榮福),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 응교(應敎) 신절(申晢),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 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 정언(正言) 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입시(入侍)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받들었으므로, 신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쟁(廷爭)하였으나 천청(天聽)을 감회(感回)하지 못하였는데, 어젯밤에 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줄곧 버티며 떠드는 것도 감히 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아침에 차자를 올려 앙품(仰稟)한 바가 있었는데, 이제 우상(右相)의 입대(入對)로 인하여 같이 들어올 수 있었으니, 신 등이 힘써 다투지 못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조태구는 말하기를,
"오늘 천안(天顔)을 뵐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신은 비망기를 갑자기 내리셔서 중외가 놀라고 당황한다는 것을 듣고는 감히 제 자신이 대간의 탄핵을 입었다 하여 시골 집에 물러가 있을 수 없었으므로, 성 밖에 와 엎드려 여러 차례 상소로 진달하고 호소하였으나, 유음(兪意)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대신이 정청(庭請)을 이미 정지했다는 것을 듣자 신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사생(死生)을 걸어 반드시 다투고자 감히 와서 청대(請對)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곧 온 나라 사람의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화열(火熱)이 오르내림 때문에 기무(機務)를 사양하려고 하시지만, 화열이 오를 때는 잠시 재결을 정지하시고 화열이 내려 마음이 안정되고 뜻이 평탄해지기를 기다리신다면, 저절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뜻과 생각이 맑고 밝을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일이 닥치는 대로 순조롭게 응하신다면 사무에 적체됨이 없어 병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두 가지 일이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아니하십니까?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국가입니다. 영고(寧考)511) 께서 전하께 부탁하신 것이 어떠하며, 신인(神人)이 전하에게 의귀(依歸)512)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대보(大寶)513) 의 자리는 인군(人君)이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곳이 아닙니다. 전사(前史)를 두루 상고해 보아도 인주(人主)가 한갓 한 몸의 사사로움을 따라 경솔하게 행한 것이 전하의 오늘날 하시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아니합니다. 흰 머리의 늙은 신하가 유궁(遺弓)514) 하는 날 죽지 못하고 오늘날 이 일을 차마 보게 되었으니, 신이 이것을 광구(匡救)하지 못하면 다만 전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며,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여러 신하가 각각 차례차례 반복해서 진청(陳請)하고 이광좌·유복명이 더욱 힘써 다투었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어제의 비지(批旨)는 더욱 차마 듣지 못할 것이 있었으나, 밤이 깊어진 뒤라 글로 다시 계달하기 어려웠고, 또 절차가 복잡하여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까 두려워 감히 절목(節目)을 거행할 뜻을 차자(箚子)로 품(稟)하였으니, 실로 부득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 신하가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의 명을 도로 거두신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죽을지라도 어찌 감히 마다 하겠습니까?"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날마다 연달아 청대(請對)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고, 소회(所懷)를 아뢴 것이 아침에 들어가 저녁에 비로소 내려졌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 감히 천심(天心)을 감회(感回)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어젯밤의 전교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므로,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품 이상을 모아서 물었으나 말한 바가 각각 같지 아니하므로, 신 등이 반복해 생각했지만 어쩔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을유년515) 에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망기를 내렸을 적에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여러 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군하(群下)가 힘써 다투었으나 만약 혹시 난처한 지경에 이른다면 우선 순종하여 사무를 참결(參決)하기를 청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진차(陳箚)한 것인데, 이제 만약 성상께서 군하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신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최석항과 김연은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 을유년의 전선(傳禪)은 또한 여러 신하의 힘써 다투는 것을 거스르기 어려워서 곧 도로 정지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김창집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곧 대리(代理)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석항과 김연은 곧 을유년의 일에 견주니, 인심이 놀라고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비망기를 환수하기를 청하는 성심이야 어찌 여러 사람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가 다시 서로 잇따라 힘써 다투며 수작(酬酢)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크게 떠드는 것이 지극히 황공한 줄 압니다만, 먼저 신의 힘써 다투지 못한 죄를 다스린 후에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신 등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여러 번 입대(入對)를 청하였으나 한 번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모두 신 등의 성의가 천박한 죄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전후의 비망기를 도로 거둘 것을 쾌히 허락하신 뒤에야 온 나라의 물결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김창집이 아뢰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후의 비망기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받아서 임금 앞에 놓았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이제 대신의 말로 인하여 이처럼 도로 거두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부터 안정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물러가 구학(丘壑)에서 죽을지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창집·이이명·조태구가 이어서 자주 의관(醫官)의 입진(入診)을 허락하고 증세에 대해 의약(議藥)하도록 청하고, 민진원(閔鎭遠)도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하여 옳고 그름을 서로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는 물러가고 승지와 삼사(三司)는 남아서 일을 아뢰었다. 홍석보(洪錫輔)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본원(本院)516) 에서 바야흐로 우상(右相)이 〈탄핵을〉 무릅쓰고 들어와 청대(請對)한 잘못을 배척하여 계품(啓稟)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인견(引見)의 명이 갑자기 내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으셨는지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어찌 안팎을 막음이 없으며 사사로운 길을 열어 둘 수가 있겠습니까? 들어와서 고한 사람을 명백하게 적발하여 영원히 후일의 폐단을 막고 군정(群情)의 의혹을 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어유룡(魚有龍)·박치원(朴致遠)·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아뢰기를,
"조태구는 대각(臺閣)에서 토죄(討罪)하는 날 감히 마음대로 궐문으로 들어와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으니, 오늘날 나라의 기강(紀綱)이 비록 여지가 없다 할지라도 하루라도 나라가 있다면 그 방자한 행동을 일체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태구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와서 청대(請對)하자, 승정원에서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한창이라고 하여 품달(稟達)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사알(司謁)이 입시(入侍)하라는 일을 전교하였습니다. 무릇 신하의 접견은 승정원을 경유하는 것이 3백 년의 정규(定規)인데, 지금 대신은 어떤 사사로운 길로 몰래 입래(入來)한 까닭을 품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비록 북문(北門)의 변(變)517) 이 있을지라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승전색(承傳色)·사알(司謁)을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핵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치원이 아뢰기를,
"최석항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하며 곧 오늘날 대리(代理)의 명을 을유년518) 전선(傳禪)의 일로 지적함으로써 인심을 놀라게 하고 의혹하게 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에 있는 바를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또 당초에 비망기는 깊은 밤에 내려졌는데, 최석항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같이 들어갈까 두려워하여, 대신(大臣)이 바야흐로 나아가는데 앞질러 들어가서 혼자 독대(獨對)하여 여러 신하가 힘써 다투는 길을 거꾸로 막고 자기가 혼자 일을 처리한 자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으니, 그 정태(情態)에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군(國君)에게 질병이 있을 경우 태자(太子)가 청정(聽政)하고 선위(禪位)받았던 것은 당(唐)나라에는 순종(順宗)이 있고, 송(宋)나라에는 광종(光宗)이 있었다. 순종은 풍암(風瘖)519) 으로 말을 못하여 조회를 보지 못하였고, 광종은 심지(心志)를 잃어서 부모에게 문안을 폐하고 집상(執喪)을 하지 못하므로, 두황상(杜黃裳)과 조여우(趙汝愚)의 일520) 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비록 조회에 임하여 침묵하고 청단(聽斷)에 권태로움을 느낄지라도 기거 동작(起居動作)이 상도(常度)가 있고 조향(朝享)을 폐한 적이 없으며, 비록 혹시 화기(火氣)가 올라 섬미(譫迷)521) 함이 있을지라도 군하(群下)가 아뢰는 일에 대한 수답(酬答)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순종·광종 두 임금처럼 말을 못하거나 집상(執喪)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대신으로서 비록 충성스러움이 두황상·조여우와 같은 자가 있을지라도 정무를 놓는 일을 즉위 원년(元年)에 갑자기 의논하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돌아보건대 이이명과 김창집은 죄와 허물이 쌓이고 쌓여 항상 스스로 위태로와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이런 일을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 자제(子弟)와 문객(門客)의 흉측한 계획과 사악한 모의가 또 역안(逆案)에 낭자한 경우이겠는가? 정무를 놓는 명이 있었는데도 정청(庭請)을 또 거두니, 중외의 인심이 비분(悲憤)하고 대소 신민(大小臣民)은 분주하여 허둥지둥하였다. 제생(諸生) 중에는 대궐을 지키면서 울부짖는 자까지 있었는데, 조태구가 대궐에 나아가 입대(入對)하자 반한(反汗)의 명령이 있음을 듣고서는 모두 기뻐하여 뛰어 마지 않았으니, 경종(景宗)의 거룩한 덕이야말로 전(傳)에 이른바, ‘슬퍼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아니하여도 백성이 슬퍼하고 공경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아니하여도 백성이 공경한다.’는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사신(史臣)은 말한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마음의 병이 갑절이나 심해져 군신(君臣)을 대할 때는 말이 혹 뒤바뀌는 경우가 있고 만기(萬機)에 임할 때는 살피지 못함이 많았으니, 진실로 두려워할 만한 종사(宗社)의 근심이 있었으니, 이는 조성복(趙聖復)의 상소와 네 대신의 차자(箚子)에서 빙자해 말한 바이다. 청정(聽政)은 선조(先朝)로부터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고 세제(世弟)의 영명(英明)함은 족히 큰 임무를 맡아 감당할 만하니, 성상께서 정무를 놓고 한가로운 데 나아가 조양(調養)에 전심하되 1분(分)의 차효가 있다면 어찌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두황상(杜黃裳)·조여우(趙汝愚)의 일이니, 어찌 곧장 역(逆)으로 논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윤(伊尹)·곽광(霍光)522) ·두황상·조여우는 공(公)을 위한 것이었고, 왕망(王莽)·동탁(董卓)·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523) 은 사(私)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 무리들의 충(忠)이 되고 역(逆)이 되는 것은 또한 오직 마음의 공(公)과 사(私)가 어떠한가에 있을 뿐이다. 마음을 속에 감추었으니, 그 공과 사를 어떻게 분변해 낼 것인가? 그 하는 일을 추적하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국군(國君)에게 질병이 있어 세자가 수고로움을 대신하는 것은 바로 나라의 큰 정사이니, 또한 숨기고 덮어서 비밀로 할 만한 것이 아니니, 대신이 애초에 바로 청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은미(隱微)하게 말을 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3일 동안 정청(庭請)하여 힘써 다투고 고집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미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또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신의 변하지 아니하는 충성된 마음으로 종사(宗社)를 위해 큰 의논을 세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가? 그 몰래 손과 다리를 놀려 힘써 덮으려고 한 것은 그 마음에 협잡(挾雜)한 바가 있어 속으로 부족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이른바 협잡이라는 것은 이 무리가 성상을 등의 까끄라기처럼 보아 30년 이래 두려워하며 도마 위의 고기로 자처하고, 동궁에게는 또 스스로 정책(定策)524) 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 일의 거행은 바로 까그라기를 없애고 도마를 벗어나며 공(功)을 요구하고 보답을 바라는 계책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비록 착함이 이윤(伊尹)과 같고 어질고도 충성스러움이 곽광(霍光)·두황상(杜黃裳)·조여우(趙如愚)와 같은 이가 이 처지에서 이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데, 하물며 환득 환실(患得患失)525) 하고 옹치(癕痔)526) 를 입으로 빨아주는 탐욕스럽고 비루함이 이 무리와 같은 경우이겠는가? 아! 임금과 신하 사이는 분의(分義)가 엄중하니, 만약 한 몸의 사사로운 이해(利害)로 그 사이에 참여한다면, 맹자(孟子)가 이른바 ‘이윤(伊尹)의 뜻이 있으면 가하다.’고 한 데에 크게 어긋남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장경부(張敬夫)527) 가 이른바 ‘일신의 이해를 위하여 꾀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經)에 이르기를, ‘그 큰 괴수(魁首)를 죽인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수종(首從)528) 의 구분이 없겠는가? 더욱이 애초에 옥안(獄案)에 관련되지 아니한 자는 더욱 구별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제 한꺼번에 네 대신을 함께 죽였으니 그 또한 참혹하다."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8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註 509]청광(淸光) : 임금의 얼굴.
- [註 510]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511]
영고(寧考) : 선왕.- [註 512]
의귀(依歸) : 의탁.- [註 513]
대보(大寶) : 왕위.- [註 514]
유궁(遺弓) : 왕의 죽음.- [註 515]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516]
본원(本院) : 사간원.- [註 517]
북문(北門)의 변(變) : 중종(中宗) 14년(1519)에 남곤(南哀)·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모함하여 사사(賜死) 또는 유배(流配)하게 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한 것. 북문은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註 518]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519]
풍암(風瘖) : 중풍으로 말을 못함.- [註 520]
두황상(杜黃裳)과 조여우(趙汝愚)의 일 : 두황상은 당(唐)나라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憲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순종이 중풍을 앓아 벙어리가 되어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자, 순종 즉위년 7월에 사위 위집의(韋執誼)를 시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황태자(皇太子)가 정무를 대신 처리할 것을 청하게 하였고, 조여우는 송(宋)나라 효종(孝宗) 때의 명신으로, 효종이 죽고 광종이 정신병을 앓아 집상(執喪)하지 못하자, 한탁주(韓佗胄)를 헌성 태후(憲成太后)에게 보내어 내선(內禪)을 청하고, 가왕(嘉王)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하게 하였음.- [註 521]
섬미(譫迷) : 병을 앓아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함.- [註 522]
이윤(伊尹)·곽광(霍光) : 이윤은 은(殷)나라의 명상(名相)으로, 왕(王)인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으로 내쫓아 악행을 고치게 하였음. 곽광은 전한(前漢)의 명신으로, 창읍왕(昌邑王) 하(賀)의 정사가 문란하자 그를 폐(廢)하고 효선제(孝宣帝)를 영립(迎立)하였음.- [註 523]
왕망(王莽)·동탁(董卓)·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 : 왕망은 한(漢)나라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서 평제(平帝)를 죽이고 한조(漢朝)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자. 동탁은 후한(後漢)의 장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헌제(獻帝)를 세워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횡을 일삼다가 여포(呂布)·왕충(王充)에게 살해된 자. 사마의는 삼국 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로 문제(文帝) 때 승상의 자리에 올라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제위(帝位)를 찬탈할 기초를 닦은 자. 환온은 동진(東晉)의 장군으로 황제(皇帝) 혁(奕)을 폐위(廢位)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한 후 찬탈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자. 이 네 사람은 모두 왕위를 직접 찬탈하거나 찬탈 음모를 꾸민 자임.- [註 524]
정책(定策) : 세제(世弟)로 세운 일.- [註 525]
환득 환실(患得患失) :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근심하는 비루한 짓.- [註 526]
○領議政金昌集、領中樞府事李頤命、判中樞府事趙泰采、左議政李健命, 旣令諸宰, 待朝來會, 夜宿備邊司, 共議代理事, 遂聯名上箚曰:
近日忽有非常之擧, 伏閤四日, 不但不賜允兪, 請對六七, 牢拒愈甚, 終未得一瞻淸光。 只恨誠意淺薄, 不能感回天心, 臣等之罪, 萬死猶輕。 去夜所下批旨, 尤非臣子所忍聞, 奉讀未半, 心膽俱墜, 驚惶震悸, 莫知所以仰對。 第伏念當初備忘中, 大小國事, 竝令裁斷之敎, 實國朝以來所未有之事, 臣等雖萬被誅戮, 決不敢奉承。 至於丁酉事, 自是先朝之裁定, 且有節目之區別, 其視竝令裁斷之命, 不啻有間。 況此聖敎, 出於至誠惻怛, 爲殿下臣子者, 亦安敢以輕遽爲拘, 一倂違拒, 以傷我殿下之心哉? 伏乞聖明, 亟命有司, 只依丁酉節目, 稟旨擧行。
箚入, 庭請遂輟, 中外人情駭憤。 左參贊崔錫恒, 以藥房問安, 詣闕上疏言:
去夜伏承聖批, 諸大臣請二品以上、三司, 會坐詢問。 臣以此事, 雖經年閱歲, 萬無承順之理, 縷縷爭執, 諸大臣以姑爲陳箚待罪, 仍請入對陳達爲言。 卽伏聞大臣箚語, 請依丁酉節目施行。 噫嘻! 半夜之間, 猝變所見, 不謀同事之臣, 爲此無前之駭擧, 臣誠莫曉其故。 前後聖敎, 不過拒諫之批, 而身爲大臣, 不思竭力匡救之義, 汲汲奉行, 如恐不及, 其心所在, 路人所知。 忘君負國之罪, 可勝誅哉? 臣竊痛之。 伏乞快收成命, 以慰神人之望。
承旨洪啓迪却不肯徹。 李光佐、李台佐、李肇、金演等在朝房, 共議請對復爭, 或言: "右議政趙泰耉, 雖遭臺論, 當此時不可拘常規, 宜赴闕請對, 以死力爭。" 泰耉遂自城外至闕下。 時上在昌慶宮, 群臣進見者, 皆自昌德宮, 踰建陽門, 趨閤外。 泰耉病甚不任行步, 以肩輿, 遵大衢抵昌慶闕外, 從宣仁門, 【昌慶宮夾門。】 入坐司鑰房, 送人政院請對。 李光佐等由金虎門 【昌德宮西門。】 入, 亦各請對, 承旨洪啓迪等, 以泰耉方被臺論, 安敢請對? 却不上聞, 往復不已。 兩司官, 方詣臺, 聞泰耉入闕, 請爲先遠竄, 啓未及徹, 司謁自閤門, 疾趨政院, 傳敎引見泰耉, 且言上已御殿, 承旨等惶駭詣閤外。 是時, 闕內外震動如沸。 昌集等, 旣上箚, 泰采托疾歸第, 昌集與頤命、健命在備局, 會禮官方講定節目, 聞泰耉將入對, 大驚惶從徑路疾趨上閤。 俄而, 二品以上、三司諸臣, 皆踵到, 竝請入對, 上御進修堂引見。 領議政金昌集、領府事李頤命、左議政李健命、右議政趙泰耉、行戶曹判書閔鎭遠、判敦寧宋相琦、行左參贊崔錫恒、工曹判書李觀命、吏曹判書權尙游、兵曹判書李晩成、禮曹判書李宜顯、行司直李光佐、淸恩君 韓配夏、刑曹參判李肇、江原監司金演、禮曹參判李㙫、江華留守李台佐、兵曹參判金在魯、吏曹參判李秉常、行司直李正臣、承旨洪啓迪ㆍ韓重熙ㆍ安重弼ㆍ兪崇ㆍ趙榮福、司諫魚有龍、應敎申晳、掌令朴致遠、校理李重協、持平柳復明、正言愼無逸ㆍ黃梓等入侍。 昌集言: "千萬意外, 忽承非常之下敎, 臣等率百官廷爭, 不能感回天聽, 昨夜又承不忍聞之敎。 一向强聒, 亦有不敢, 朝者陳箚, 有所仰稟。 今因右相入對, 得以同入。 臣等不能力爭之罪, 萬死無惜。" 泰耉曰: "今日得瞻天顔, 死亦無恨。 臣聞備忘忽下, 中外驚遑, 不敢以身遭臺劾, 退處鄕廬, 來伏城外, 屢疏陳籲, 未蒙兪音。 今日遽聞大臣, 已停庭請, 臣不勝崩迫震駭, 欲以死生必爭, 敢來請對, 以冀回天。 此非臣一人之言, 乃國人之言也。 殿下雖以火熱升降, 欲謝機務, 火升之時, 姑停裁決, 以俟火降心定意平, 則自可烟消霧散, 志慮淸明。 如此之時, 物來順應, 事務無滯, 治病治國, 兩行不悖。 殿下, 何不念及於此也? 國家非殿下之國家, 乃祖宗之國家。 寧考之付托於殿下者, 何如也, 神人之依歸於殿下者, 何如也? 大寶之位, 非人君自私之地。 歷攷前史, 未有人主徒循一已之私, 率意徑行, 如殿下今日之爲者也。 白首老臣, 不死於遺弓之日, 忍見今日此擧。 臣於此, 不能匡救, 則不特負殿下也, 亦所以負先王也。 臣生亦何爲? 如不得反汗之命, 有死而已, 不得請, 則不敢退。" 仍泣下沾襟。 諸臣, 各以次反覆陳請, 光佐、復明爭之尤力。 昌集又言: "昨日批旨, 尤有不忍聞者, 夜深後難以文字更達, 且恐節次層加, 以至難言之境, 敢以節目擧行之意箚稟, 實不得已也。 今諸臣, 以收還爲請, 必欲收還之意, 臣亦何異於諸臣哉? 今若收還前旨, 臣雖萬被誅戮, 何敢辭乎?" 健命曰: "連日請對, 終未蒙許, 所懷之啓, 朝而入者, 夕而始下, 如此而何望感回天心? 昨夜傳敎, 前古所未聞之事, 直欲鑽地以入而不可得。 會問二品以上, 所言各自不同, 臣等反復思惟, 不知所以爲計, 而曾聞乙酉, 先大王之下備忘也, 故相臣尹趾完移書諸大臣以爲: ‘群下力爭, 而若或至於難處之境, 則不若姑爲承順, 請以參決事務之爲得。’ 故臣與諸大臣, 相議陳箚, 而今若自上俯循群下之請, 亟命收回成命, 豈不大幸?" 錫恒、演言: "先王朝乙酉傳禪, 亦以諸臣力爭之難咈, 旋卽還寢。 殿下何不思繼述之道乎?" 昌集曰: "今日事, 乃代理, 而錫恒、演, 乃比於乙酉時事, 人心尤豈不驚惑乎? 臣雖無狀, 請還備忘之誠心, 豈下於諸人乎? 諸臣復相繼力爭, 請賜酬酢, 上終不答。 昌集曰: "强聒極知惶恐, 而先治臣不能力爭之罪, 然後收還成命宜矣。" 頤命曰: "臣等烏得無罪? 屢請對而一不許, 此皆臣等誠意淺薄之罪也。" 昌集又曰: "前後備忘, 快許收還, 然後擧國波蕩之心, 可以鎭定矣。" 上曰: "唯。" 昌集白遣史官, 持入前後備忘, 納置上前。 泰耉言: "今因大臣之言, 有此還收, 人心自此可定。 臣雖退死丘壑, 有何餘憾?" 昌集、頤命、泰耉繼請頻許醫官入診, 對症議藥, 鎭遠亦請頻接臣僚, 可否相濟, 上竝不答。 諸臣退, 而承旨、三司留奏事。 洪錫輔等進曰: "本院方斥右相冒入請對之失, 不許啓稟, 而引見之命遽下。 殿下從何得聞右相之入來乎? 人君爲國之道, 豈可使內外無防, 私逕旁開乎? 其入告之人, 不可不明白摘發, 永杜後弊, 以破群情之疑惑。" 有龍、致遠、無逸、梓等啓曰: "趙泰耉當臺閣討罪之日, 乃敢擅入闕門, 略無顧忌。 今日國綱, 雖無餘地, 一日有國, 則不可一任其恣睢。 請爲先遠竄。" 上不允。 又啓曰: "趙泰耉從宣仁門人來請對, 政院以臺啓方張, 不許稟達, 而司謁以入侍事傳敎。 夫臣隣晉接, 關由喉司, 乃三百年定規, 今未知大臣, 自何私逕, 微稟入來之由? 此路一開, 雖有北門之變, 無以隄防。 請承傳色、司謁, 拿問嚴覈。" 上允之。 致遠啓曰: "崔錫恒筵中陳達, 輒以今日代理之命, 指爲乙酉傳禪之事, 以爲驚惑人心之計, 其心所在, 誠不可測。 且當初備忘, 下於深更, 錫恒或恐他人之同入, 大臣方進而徑自獨對, 逆杜諸臣力爭之路, 要衒自家獨辦之迹, 其爲情態, 有不忍正視。 請削奪官爵, 門外黜送。" 上不允。 謹按自古國君有疾, 儲貳聽政受禪者, 唐有順宗, 宋有光宗, 而順宗, 風瘖不能言不視朝, 光宗心志喪易, 廢過宮定省, 不能執喪, 所以有杜黃裳、趙汝愚之事也。 上雖臨朝, 淵默倦於聽斷, 而起居動作, 有常度, 朝享未嘗廢。 雖或火逆譫迷, 而群臣奏事, 酬答不差, 非若順、光二宗之不能言不執喪, 則大臣雖有忠如黃裳、汝愚者, 固難遽議釋務之事於卽位初元也。 顧以頤命、昌集之積罪累釁, 恒懷自危之心, 而敢爲此焉。 況其子弟、門客, 凶圖邪謀, 又自狼藉於逆案者乎? 當釋務有命, 庭請且撤, 中外人情悲憤, 大小臣民奔走遑遑。 諸生至有守闕號泣者, 及聞趙泰耉赴闕人對, 得有反汗之命, 咸歡喜抃躍不已。 若景宗盛德, 豈非傳所謂未施哀於民, 而民哀之, 未施敬於民, 而民敬之者歟?
【史臣曰: "上自卽位以來, 心恙倍劇, 對群臣言語, 或有顚錯, 臨萬機酬應, 多不照管, 宗社之憂, 誠有澟澟者。 此聖復之疏, 四相之箚所以藉口者也。 聽政, 自先朝, 已有成規, 世弟英明, 足以堪任大寄, 聖上釋務就閑, 專意調養, 得有一分之差, 則豈非宗社臣民之幸? 此正杜黃裳、趙汝愚之事, 豈可遽以逆論哉? 然伊、霍、杜、趙, 以其公者也; 莽、卓、懿、溫, 以其私者也。 今日此輩之爲忠爲逆, 亦惟在心之公私之如何耳。 心藏於內, 其公與私, 曷由卞哉? 跡其事而心可知已。 夫國君有疾, 儲君代勞, 乃國之大政, 亦非隱微可諱之事, 則大臣初不直請, 而借口微發者何也? 三日庭籲, 勉强爭執者何也? 旣上節目, 又請還收者, 何也? 大臣之以斷斷赤心, 爲宗社建大議者, 亦如此乎? 其所以陰弄手脚, 務欲掩覆者, 以其心有所挾雜, 內有所不足故耳。 夫所謂挾雜者, 此輩視聖上如背芒, 三十年來, 澟然以俎肉自居, 其於東宮, 則又自以爲定策之功, 而是擧也, 乃所以去乎芒脫夫俎, 而爲要功望報之計者也。 雖聖如伊尹, 賢且忠如霍光、杜、趙, 處此地而行此事, 無以自暴其心。 況患得失、吮癰痔, 貪濁鄙汙如此輩者乎? 嗚呼! 君臣之際, 分義嚴重, 苟以一已利害之私, 參於其間, 豈不大有盭於孟子所謂有伊尹之志則可者耶? 此正張敬夫所謂爲一身利害計者, 必誅毋赦者也。 然經曰: ‘殲厥巨魁。’ 其中豈無首從之分? 況初不干連於獄案者, 尤宜區別, 而今乃一擧而駢戮四相, 其亦酷矣。"】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8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註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