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김창집 등이 각도의 수륙 조련·재해의 구휼·학문의 연마 등에 대해 아뢰다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금년에는 가뭄이 심한 나머지에 사나운 바람마저 연달아 불어 각종 곡물이 거의 말라 죽으니 앞으로 백성들의 일이 염려스러운 정상을 진달하고, 이어 또 말하기를,
"돌아오는 사은사(謝恩使)가 장문(狀聞)하기를, ‘사신의 행차가 거류하(巨流河)의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우리쪽 역졸(驛卒)이 저쪽 사람과 외[瓜]를 갖고 다투다가 맞아서 죽었으므로, 사신이 이 일로 심양(瀋陽)에 글을 보내서 정범(正犯)을 잡아서 법에 따라 처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니, 죽은 사람은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題給)케 하여 은휼(隱恤)하는 은전(恩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재해(災害)가 있는 고을의 수령이 곧바로 대간(臺諫)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부(馬未)와 말이 지체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여러 차례 그 집에 갔어도 만나지 못하였을 때에는 자지(刺紙)만 남겨두고 오게 하며, 또 비록 명관(名官)이 자리에 있더라도 들어가서 만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각도(各道)의 수륙(水陸) 조련(操鍊)은 잇따라 흉년을 만난 탓으로 중지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군정(軍政)이 참으로 소홀(疎怱)해진 듯합니다. 경기(京畿)만은 올 가을 조련을 비록 행할 수 없겠지만, 다른 도(道)에 있어서는 청컨대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로 하여금 조련을 실시케 하고 그 영장(營將)이 순행하면서 점호(點呼)하던 것은 정지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근래에 수령들의 위법한 일이 많은데 저치미(儲置米)나 환곡(還穀)을 관리한다고 핑계하고서 마음대로 손을 대기 때문에 모축(耗縮)의 폐단이 대체로 다 그러합니다. 일찍이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각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는 장부(帳簿) 1부를 더 꾸며 감영(監營)에 보내주기로 결정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래야만 감사가 각 고을의 장부를 보고 그 수령이 유능한지 무능한지 청렴한지 탐욕스러운지를 알게 될 것이며, 수령들도 조심하는 마음이 생겨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할 듯하니, 청컨대 다시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품계가 높고 일에 경험이 있는 의관(醫官) 한 사람씩을 윤번(輪番)으로 직숙(直宿)케 하고 자주 입시(入侍)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금년의 재해(災害) 복심(覆審)은 한결같이 계묘년319) 의 예에 따라 거행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삼남(三南)은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어 한 도는 도사(都事)가, 또 한 도는 경관(京官)이 맡고 타도(他道)는 도사로 하여금 제비를 뽑아 부정(不正)을 조사케 하고 바로 들어오도록 하여 경차관(敬差官)처럼 열읍(列邑)을 두루 다니는 일이 없이 문서를 마감함이 좋을 듯합니다. 계해년320) 에는 읍호(邑號)에 낙점(落點)하여 부정(不正)을 조사를 하였었는데 지금도 그 예대로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진계(陳戒)하기를,
"주상께서 사복(嗣服)321) 하신 처음에는 조금도 흠잡을 수 없는 정사였는데, 대한(大旱)과 풍재(風災)가 근년에 볼 수 없었을 만큼 심했고, 궁궐의 정문(正門)이 또한 무너졌으니, 이는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고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상께서는 법연(法筵)을 자주 열어 신하들을 인견하시고 글의 뜻을 강론하며 군덕(君德)의 궐실(闕失)과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으시면서 부지런히 치도(治道)를 구하시면 또한 하늘의 마음도 감동시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겹쳐서 흉년이 든 뒤라서 국용(國用)이 거의 탕갈(蕩竭)되었는데 다만 절약하는 길만이 실로 나라를 넉넉케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근본이 될 것이니, 즉 검덕(儉德)을 밝히는 데 힘쓰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였다. 김창집(金昌集)과 수찬(修撰) 이중협(李重協)도 잇따라 그 일에 대하여 진달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요(堯)·순(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힘써야 할 것은 다만 선대왕(先大王)의 유규(遺規)를 잘 계술하는 데 있을 뿐이니, 신민(臣民)들의 바라는 바도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잇따라 실록청(實錄廳)에 나아가 일기(日記)를 살펴보건대 선왕께서는 전후(前後) 거상(居喪)하실 때 성효(誠孝)가 지극하셔서 초상시는 곡성이 그치지 않으셨고, 성복(成服) 후에도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거나 때로는 국휼(國恤) 후에 처음 입시(入侍)하는 사람을 보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곡읍(哭泣)하여 매우 슬퍼 하셨으며, 발인(發靷)할 때나 반혼(返魂)할 때나 교외로 거동하실 때에는 끊임없이 호읍(號泣)하셔 슬퍼하심이 신하들을 감동케 하여 군신(群臣)들도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우느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으며, 삭막(朔望)의 은전(殷奠)이나 오향 대제(五享大祭)는 친히 지내지 않음이 없으셨으며, 비록 몸이 편치 못하실 때에도 섭행(攝行)을 허락하지 않아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세 번 힘껏 진달하였으나, 더러는 허락하시고 더러는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또 학문에도 부지런하셔서 날마다 경연을 열었고 대단한 사고가 없으면 아예 정강(停講)한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하교하시기를, ‘밤이면 책을 읽다가 4경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든다.’ 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혹시 기력이 손상될까 염려하여 조금이라도 섭양(撮養)하는 방도에 유념하실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또 일찍이 하교(下敎)하시기를, ‘매일 진강(進講)한 글은 반드시 8, 90번은 내리 읽는다.’ 하셨습니다. 무릇 효도(孝學)는 백행(百行)의 근원이요 학문은 정치하는 근본인데 선왕의 독효(篤孝)와 근학(勤學)이 이러하셨으니, 어찌 백왕(百王) 위에 우뚝 솟은 성절(盛節)이 아니었겠습니까? 이러하셨기에 그분의 향국(享國)322) 은 50년이나 되었고 치적(治績)도 두드러졌으며, 비록 한때의 실수는 있었지만 마침내 일월(日月) 같은 경신(更新)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영구히 잊지 못하므로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죽음으로써 전하께 보은(報恩)코자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안색의 슬픔이나 곡읍(哭泣)의 서러움이 군신(群臣)들을 감동시킨 바도 없으셨고, 대소 제향(大小諸享)를 친히 지내신 때도 한 번도 없으셨으며, 강연(講筵)도 아직 한 번도 열지 않았고 며칠 소대(召對)하시더니 즉시로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성덕(聖德)의 근본되는 바탕이 이와 같으시면 무엇으로써 신민들에게 보이실 것이며, 무엇으로써 정치를 하시겠습니까? 이런 때문에 군신들은 심신(心身)이 풀리고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다시는 봉공(奉公) 진직(盡職)하려는 뜻이 없으니 이같이 하고서 어떻게 나라를 보호하여 지키겠습니까? 조종(祖宗)의 3백 년 기업(基業)과 선왕의 50년 지사(志事)가 전하의 시대에 이르러 추절(墜絶)을 면치 못한다면 후일 전하께서 추회(追悔)하고 자신(自新)하려고 하신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전번에는 친히 연제(練祭)를 행하시고 자주 소대(召對)를 명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기뻐서 서로 하례(賀禮)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사(親祀)나 소대(召對)가 여러 신하들의 몸에 무슨 손익(損益)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런데도 이토록 서로 기뻐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다시는 더 간단(間斷)이 없으시면 성덕(聖德)에는 허물이 없게 될 것이오 나랏일에도 혹시나 희망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군신들의 지극히 간절한 심정을 굽어살피시지 않으십니까? 전후로 허튼 말을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매양 유의(留意)하겠다는 교지만 내리시고 채용한 사실은 보지를 못했으니, 만일 신의 말이 불가하다고 여기시면 바로 퇴척(退斥)을 명하시고 만일 옳다고 여기시면 바로 해조(該曹)에 명을 내리소서. 앞으로는 대소 제향을 모두 친히 지내도록 마련하시고 또 내일부터 경연(經筵)을 열어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용동(聳動)케 하시면 실로 종사(宗祀)와 신민(臣民)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죄다 면계(勉戒)의 말을 아뢰었습니다. 주상께서 어찌 조심스럽게 살피시는 뜻이 없어서 경연을 오랫동안 정지하셨겠습니까? 혹시 옥체(玉體)가 편안하지 않으셔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비록 밖으로 나타난 증상은 없으시더라도 보신하고 조섭하는 일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앞서 드렸던 곤담환(滾痰丸)을 다 드시지 않으셨다니 그러고서도 어떻게 효과를 기대하겠습니까? 혹시라도 거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은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실덕(失德)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사위(嗣位)한 뒤에도 기무(機務)를 재결하신 즈음에 실수한 바는 없었으나 삭망(朔望)의 은전(殷奠)에 간혹 대행[攝行]한 일이 많았고 경연의 개강(開講)도 정폐(停廢)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효사(孝思)에 소홀하고 청단(聽斷)함에 게을러서 그랬겠는가? 다만 항상 편치 못할 때가 많아서 그랬던 것뿐이다. 일찍이 궁료(宮僚)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떠듬거리는 병이 있어서 무엇을 좀 물어 보려다 그만둘 때가 자주 있었다.’ 하였고, 또 유신(儒臣)들이 친히 제사지내기를 청할 때에 각병(脚病)이 있어서 억지로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교한 바도 있었으니, 경연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병원(病源)의 소재(所在)를 짐작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민진원(閔鎭遠)의 처지는 다른 조신(朝臣)들과는 다르니 과연 지성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측근에서 보호하고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는 것이 참다운 그의 직분인데, 그 말씨가 간곡하지 못하여 임금에게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여 인도하려는 뜻이 매우 모자랐으니, 듣는 이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6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공물(貢物)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 외교-야(野) / 사법-치안(治安) / 군사-병법(兵法)
- [註 319]계묘년 : 1663 현종 4년.
- [註 320]
○上引見相臣及備局諸宰。 領議政金昌集陳今年旱災之餘, 惡風連吹, 各穀擧皆枯損, 前頭民事可慮之狀, 仍曰: "回還謝恩使狀聞以爲: ‘使行到巨流河, 金郊驛卒, 與彼人爭瓜, 被打致斃, 使臣以此呈文瀋陽, 拿致正犯, 當爲正法’ 云, 致斃人, 請令本道題給米布, 以示隱恤之典。" 上可之。 又曰: "災邑守令, 以未卽歷見臺諫, 故夫馬稽滯。 請自今以後, 屢往其家, 不得逢着, 則許留其刺, 雖名官在座, 亦令入見。" 又曰: "各道水陸操, 連値凶年, 停廢已久, 戎政實涉疎虞。 京畿則今秋操練, 雖不可行, 他道則請令兵、水使行操, 停其營將之巡點。" 上竝從之。 又言: "近來守令, 多有不法之事, 儲置米及還穀, 稱以料理, 任意下手, 故耗縮之弊, 大抵皆然。 曾仍大臣陳達, 各邑守令遞歸時, 重記一件, 使之修送于營門事定奪矣。 蓋監司見其各邑記簿, 則可以知其能否廉貪, 而守令亦有畏戢之心, 似不敢放縱, 請更爲申飭。" 上亦從之。 昌集請秩高老熟醫官一人, 輪回直宿, 頻數入侍, 上許之。 戶曹判書閔鎭遠曰: "今年災傷覆審, 一依癸卯年例, 擧行事定奪矣。 三南則分左右, 一道都事, 一道京官, 他道則令都事, 抽栍摘奸後, 使之卽爲入來, 無如敬差官之遍行列邑, 磨勘文書, 似爲便好矣。 癸亥年則邑號落點而摘奸。 今亦依此爲之乎?" 上允之。 左議政李健命陳戒曰: "自上嗣服之初, 少無疵政, 而亢旱、風災, 挽近所無, 法宮正門, 又壞, 此可見仁天警告之心。 自上頻開法筵, 引接臣隣, 講論文義, 訪問君德闕失、百姓疾苦, 孜孜求治, 則亦可以感回天心矣。 荐歲凶荒之餘, 國用垂竭, 惟是節省之道, 實爲裕國恤民之本, 伏望懋昭儉德。" 昌集及修撰李重協繼陳其事, 上答以留意。 鎭遠曰: "古人有言: ‘欲法堯、舜, 當法祖宗。’ 今日殿下之所可自勉者, 唯在克紹先大王遺規, 而臣民之所冀望, 無過於此矣。 連赴實錄廳, 考閱日記, 則先王於前後居憂之際, 誠孝篤至, 初喪哭不絶聲, 成服後引接諸臣時, 見有國恤後初入侍者, 則輒哭泣盡哀, 發靷、返魂時, 郊外動駕也, 號泣不已, 哀動臣隣, 群臣皆掩泣莫敢仰視, 朔望殷奠及五享大祭, 無不親行。 雖未寧時, 亦不許攝行, 藥房諸臣, 再三力陳, 或許或否。 且勤於學問, 日必開筵, 非有大段事故, 則未嘗停講, 下敎曰: ‘夜則讀書, 四更後始就寢。’ 諸臣恐其傷損氣力, 請少思攝養之道, 而終不從。 又嘗下敎曰: ‘每日進講之書, 必讀下八九十遍。’ 夫孝爲百行之源, 學爲出治之本, 而先王之篤孝勤學至此, 豈非卓冠百王之盛節耶? 是以, 厥享國五十年, 而治效休明。 雖或有一時之過擧, 終必有日月之更, 盛德、至善, 沒世不忘。 今日群下, 皆欲以死追報於殿下者, 此也。 今殿下嗣服之初, 顔色之戚、哭泣之哀, 未有以感動群下, 大小祭享, 絶無親行之時, 講筵向未一開, 數日召對, 旋又停止。 聖德根本之地如此, 則其何以示臣民乎, 其何以出治乎? 是以, 群下無不解體失望, 無復有奉公盡職之意。 若是而其可以保守其國乎? 祖宗三百年基業, 先王五十年志事, 至于殿下之身, 而將不免墜絶, 則日後殿下雖欲追悔自新, 其可得乎? 頃者親行練祭, 頻命召對, 群下莫不動色相賀。 夫親祀、召對, 有何損益於諸臣之身, 而如是相賀者, 蓋從今不復間斷, 則聖德可以無愆, 而國事或有可望故也。 殿下豈不俯念群下至切之情乎? 前後冒進狂言, 非止一二, 而每下留意之敎, 未見採用之實。 如以臣言爲不可, 則卽命斥退, 如以爲可, 則卽命該曹。 日後大小祭享, 皆以親行磨鍊, 亦自明日爲始開講, 使觀聽聳動, 則實宗社臣民之幸也。" 上又以留意答之。 禮曹參判李肇曰: "諸臣畢陳勉戒之言。 自上豈無惕省之念, 而講筵久停? 或緣玉體欠安而然耶? 雖無形現症候, 保護將攝之道, 不可少忽。 前進滾痰丸, 未盡進御, 何以責效? 伏望毋或間輟。" 上允之。 上自在儲闈, 未聞有失德, 及至嗣位, 稟裁機宜之際, 無所違覆, 朔望殷奠, 間多攝行, 法筵開講, 未免停廢。 此豈忽於孝思, 倦於聽斷而然哉? 只以常多違豫故耳。 嘗諭宮僚曰: "予有訥病, 欲問難而止者屢矣。" 又於儒臣親祀之請, 以有脚病, 不能强爲敎, 則出入筵席之人, 可以揣知病源之所在, 而鎭遠處地, 異於朝臣, 果有至誠憂愛之心, 則左右保護, 盡心醫治, 固其職耳, 而其辭氣之間, 不能婉曲, 殊欠納約自牖之義, 聽聞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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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공물(貢物)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 외교-야(野) / 사법-치안(治安) / 군사-병법(兵法)
- [註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