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신공·인사 적체 등을 논하다. 조복양·김좌명·조한영을 추고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은 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영릉(寧陵)의 석물을 봉심해 보니, 상석(裳石)이 물러나온 곳은 술지(戌地)에서부터 손방(巽方)까지로 8, 9분이 물러나기도 하고 1촌 3, 4분이 물러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바로 보토(補土)한 곳으로서, 상석은 으레 지대(地臺) 위에 배치하므로 쉽게 고칠 수 있습니다. 난간석(欄干石) 바깥의 전석(磚石)이 견고하지 못한 탓에 이와 같이 된 것이니, 이 돌을 치운 다음 견고하게 쌓고서 회로 채운다면 좋을 듯합니다. 석공(石工)에게 물어보니 역시 고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다지면서 쌓는 것이 비록 미안스러운 듯은 하지만 여기에 구애되어 고치지 않는다면 이는 영구히 보전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뒷날을 위한 계책으로 말한다면 바깥의 전석을 치우고 광릉(光陵)의 제도와 같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쉽게 할 수가 없으니, 우선은 가을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처리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경억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비망기를 보건대, 말뜻이 간절하였는바, 신하들 치고 그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뒤에 즉시 비가 내렸으니 감응하는 이치가 매우 신속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태가 지나갔다 하여 성상의 뜻이 흑 해이해진다면 어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응답하는 도는 참으로 공구 수성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구원하는 정책에 미쳐가지 않는다면 역시 끝내는 무익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각각 반 필을 감하여 이미 실제적인 혜택을 주었습니다. 한집안에 여자가 많은 자들도 변통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백성들 가운데 나이가 겨우 16세밖에 안된 자들은 반드시 신역(身役)을 스스로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니, 혹 20세로 한계를 정한다면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것은 효종조에 강구하였던 일입니다. 20세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전년에 이미 반 필을 감해주었는데 지금 또 나이를 물린다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다른 군역(軍役)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반드시 그런 마음을 먹을 것이니, 다른 대신들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여쭈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경억이 또 아뢰기를,
"재변을 당한 호서 지방 고을들의 제반 신역(身役)을 지난번에 관찰사 민유중의 장계로 인하여 반으로 감하였으며,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도 똑같이 반으로 감해주었습니다. 경기·해서(海西)·원양(原襄) 세 도의 재변을 당한 고을의 노비 신공도 호서 지방의 예에 의거해서 시행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억이 또 아뢰기를,
"이처럼 재변을 당하여 도움을 구하는 때에는 재야에 있는 유신(儒臣) 송준길·윤선거 등을 특별히 불러 오는 것이 마땅하며, 오랫동안 올라 오지 않고 있는 이상진(李尙眞)과 교외로 물러가 있는 이단상(李端相)의 경우에도 모두 징소하여 기어이 조정에 나오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숙(李䎘) 등 8인은 이미 직첩(職帖)을 주었으니, 거두어 서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자못 받아들일 뜻이 있었다. 또 아뢰기를,
"승문원의 참하(參下) 중에는 적체된 자가 많아 40여 명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서열이 아주 낮은 자는 6품으로 오를 기약이 없는데, 그 가운데 어찌 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사일(仕日) 수가 많은 것을 기준으로 승천시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에 성균관에 참하관이 몹시 많았으므로 한 도목(都目)에 두 사람씩을 승출(陞出)시켰습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적체된 것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승문원의 참하관을 찰방(察訪)으로 차출해 보내는데, 광흥창·사재감·제용감 등 세 곳의 참봉도 역시 문신 참하관의 자리입니다. 이번에도 실관(實官) 외에는 이 예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한 도목에 두 사람씩을 승출시키는 것도 성균관의 규례를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성균관의 규례는 6월에는 두 사람을 승출시키고 12월에는 한 사람을 승출시키는 것이었다. 이조 참판 민정중이 뒤에 다시 아뢰어 이에 의거해서 거행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경억이 진달한 인재를 불러쓰고 정신을 모우라는 말은 참으로 절실하고도 지극한 말입니다. 다만 허다한 여러 신하들을 위에서 어떻게 다 살필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참으로 죄가 없는데도 거두어 쓰지 않고 있는 자가 있는데, 이는 대개 조정에 당론(黨論)이 있어서 자기 편 의견만 주장하고 반대 편 의견은 배척해서이니, 어떻게 공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조에는 전랑(銓郞)의 권한이 가벼웠는데, 지금은 권한이 낭관에게 있어서 주의를 할 즈음에 당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대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일에 있어서 한쪽 편 사람들은 추존하고 한쪽 편 사람들은 배척하고 있습니다. 신 역시 색목(色目)을 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을 존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로 인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영구히 폐기해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벼슬길이 막힌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위에서 여러 신하들을 보는 것은 하늘이 만물을 굽어보는 것과 같으니, 어찌 치우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대간으로서 말했다 하더라도 한 번 시의에 거슬리면 문득 폐기당합니다. 상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무슨 죄로 벼슬길이 막혔는지를 물어본다면 무고하게 폐기당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박장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마침 참판이 없고 단지 실랑청(實郞廳)만 있으나 김좌명의 말과 같이 권한이 중한 자는 없습니다."
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붕당이라는 명목은 만력(萬曆)을해년008) 에 비롯되었는데,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고질적인 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계해년009) 이후로는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어찌 의논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거두어 쓰이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쓸 만한데도 버림을 당했던 사람을 김좌명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좌명이 어찌 감히 말머리를 감춘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물으신다면 일일이 대답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붕당의 폐단이 점점 성해지는데 어찌 점점 쇠해진다고 말하는가. 조복양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전에는 한쪽 편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 반대 편 사람들은 모두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계해년 이후로는 이쪽 편과 저쪽 편을 뒤섞어 써서 전과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조복양과 박장원은 모두 면전에서 상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박장원과 조복양이 면전에서 속인다는 지척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쟁변하기를 마지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좌명의 말은 몹시 불평스러우며, 조복양이 진달한 바도 타당치 않습니다. 색목(色目)에 대한 말을 어찌 임금 앞에서 할 수 있으며, 면전에서 속인다고 말한 것은 김좌명이 잘못한 것입니다."
하고, 이경억이 아뢰기를,
"김좌명이 면전에서 속인다고 한 말은 적당치 않으며, 조복양이 쟁변하는 즈음에도 불평스러운 말과 기색이 있었습니다. 사체에 있어서 모두 온당치 않으니,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조복양과 김좌명이 일어나 나가려 하자, 상이 모두 도로 앉도록 명하였다. 헌납 윤형성이 또 아뢰기를,
"부총관 조한영(曺漢英)은 이미 마음대로 직소(直所)를 떠난 잘못을 저질렀는데, 지난번에 기우제의 제관에 차임되어서도 또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군사-군역(軍役)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정론(政論) / 재정-역(役) / 신분(身分) / 구휼(救恤)
○辛未/上御熙政堂受鍼後, 引見大臣及備局諸臣。 禮曹判書趙復陽曰: "奉審寧陵石物, 則裳石之退出者, 自戍地至巽方, 或八九分, 或一寸三四分。 此乃補土處, 裳石例排地臺之上, 可得易改。 欄干石外, 磚石不固, 以致如此, 去此石仍堅築之, 實以灰則似好。 問于石工, 則亦以爲改之不難矣。 杵築雖似未安, 拘於此而不改, 非萬年計也。" 上曰: "以久遠計言之, 則不如去外磚石如光陵之制, 然不可容易爲之, 姑待秋成以處。" 大司憲李慶億曰: "頃見備忘, 辭旨懇惻, 群下孰不感動? 其後卽雨, 感應之理, 可謂神速。 而若以事過, 聖志或懈, 則豈不可悶乎? 應天之道, 固當以恐懼修省爲先。 而若不推及於革弊救民之政, 則亦終歸於無益矣。 各司奴婢身貢, 各減半匹, 已爲實惠。 而一家內疊有女子者, 亦宜變通。 且凡民之年纔十六者, 必難自辨其身役, 或以二十歲爲限, 則似當矣。" 領相鄭太和曰: "此乃孝廟朝講究之事。 以二十歲爲限宜當。" 戶曹判書金佐明曰: "前年旣減半匹, 今又退年, 則未知其如何?" 太和曰: "如此則他軍役之人, 亦必生心, 宜待他大臣出仕稟處。" 上允之。 慶億又曰: "湖西被災邑諸般身役, 頃以道臣閔維重狀啓, 旣已減半, 內奴婢身貢亦許一體減半矣。 京畿、海西、原襄三道災邑, 內奴婢身貢, 宜竝依湖西例施行, 以軫民隱也。" 上從之。 慶億又曰: "當此遇災求助之日, 在野儒臣宋浚吉、尹宣擧等, 另宜召致, 如李尙眞久不上來, 李端相退居郊畿, 皆可下召, 以期造朝。 且李䎘等八人, 旣給職帖, 則亦宜收敍也。" 上意頗納之。 又曰: "承文參下積滯者, 多至四十餘人。 故序在最下者, 陞出六品無期, 其中亦豈無可用之人乎? 合以積仕陞遷矣。" 太和曰: "在前成均參下甚多, 故一都目陞出兩人。 今亦依此爲之似當。" 吏曹判書朴長遠曰: "爲其積滯, 以承文參下, 差送察訪, 而如廣興、司宰、濟用三處參奉, 亦是文臣參下之窠。 今亦實官外, 宜依此例爲之。" 太和曰: "一都目陞出兩人, 亦當用成均館例也。" 上竝允之。 【成均館規例, 六月則陞出二人, 十二月則陞出一人。 故吏曹參判閔鼎重後更稟, 依此擧行。】 佐明曰: "李慶億所陳召用人才, 聚會精神之言, 誠爲切至。 而第許多群臣, 自上何以盡察? 固有無罪而不爲收用者, 蓋朝有黨論, 入者主之, 出者斥之, 烏得爲公論乎? 仁祖朝則銓郞權輕, 而今則權在郞官, 注擬之時, 堂上不得任意爲之。 蓋先正臣李珥、成渾之事, 一邊人則推尊, 一邊人則排抑。 臣亦不免色目, 尊尙二臣。 而豈可因此永廢其異論之人乎? 卽今見塞者甚多。 上之視群下, 如天之視萬物, 豈宜有偏重之事乎? 雖以臺閣言之, 一忤時議, 輒見廢棄。 自上若問某人之以某罪見塞, 則可知其無故廢棄矣。" 長遠曰: "近來適無副貳之官, 只有實郞廳, 而〔未〕 有權重如佐明之言者。" 復陽曰: "朋黨之目, 始於萬曆乙亥, 實是前古所無之痼弊。 而癸亥以後, 則不至已甚, 豈有以異論, 而不爲收用者乎? 可用之人見棄者, 問于佐明則可知。 佐明豈得爲藏頭說話乎?" 佐明曰: "自上若下問, 則何難一一仰對乎?" 上曰: "朋黨之弊漸盛, 豈曰漸衰? 復陽之言, 予未能知也。" 復陽曰: "在前則一邊入據要地, 則一邊盡爲退出。 而癸亥後則參用彼此, 不至如前矣。" 佐明曰: "復陽、長遠, 皆面謾矣。" 長遠、復陽等, 以面謾之斥, 頗爭辨不已。 太和曰: "佐明之言, 旣甚不平, 而復陽所達, 亦爲未妥。 色目之說, 何可出於前席, 而面謾之言? 佐明亦過矣。" 慶億曰: "佐明面謾之言, 旣已不當, 而復陽爭辨之際, 亦多不平辭色。 其在事體, 俱甚未安, 請竝推考。" 上從之。 復陽、佐明將起出, 上竝命還坐。 獻納尹衡聖又啓: "副摠管曺漢英旣有擅離直所之失, 頃差祈雨祭官, 又有托病不進之罪, 請罷職。" 上命姑先推考。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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