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청사신의 질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다
사은사(謝恩使)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과 부사(副使) 이시방(李時昉) 등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관(館)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역관 정명수(鄭命守) 등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떠나올 적에 접대하는 것이 전과는 크게 달랐다. 서로(西路)에서는 반찬 수를 줄이는가 하면 감시도 엄하였으며, 서울에 들어가서는 통관(通官)이 문지기에게 욕을 당하였으니, 피차간에 간격이 없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본국에 필시 숨길 만한 일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지금 굳게 닫아 두는 것도 당연한 형세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으며, 또 예부(禮部)의 뜻으로 전하기를 ‘조제(吊祭)와 책봉(冊封)에 대해 각기 사은(謝恩)하는 방물(方物)이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어찌하여 그리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같은 시기에 있는 은전이므로 별도로 사은하는 예가 없어도 될 듯하다고 하니, 정역이 말하기를 ‘책봉에 대해서만 오로지 사은하고 조제에 대해서는 사은하지 않으니 이는 책봉만을 소중히 여기고 사제(賜祭)는 가벼이 여긴 것이다. 필시 주무 관장자가 있을 것이니 의당 힐문하는 조처가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며칠 후 호부 상서 파흘내(巴訖乃) 등 3인이 와서 섭왕(攝王)의 뜻으로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에서 매번 청하는 것을 애써 들어준 것도 많은데 은혜에 감사할 줄은 모르고 도리어 불경(不敬)스런 일이 있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본국에 목화가 흉작이어서 무명베를 준비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하는데 그대 나라가 아무리 작지만 민호(民戶)가 5천은 넘을 것이다. 만일 매 호에 1필씩만 징수하면 충분히 수효를 채울 것인데 준비하지 못할 걱정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제 쌀로써 대신하겠다 하니, 봉성(鳳城)으로 운반하는 값은 역시 계산하여 감할 것이다. 하고, 또 ‘두 나라가 통화(通和)하는 것은 본래 우호를 다지기 위함인데, 칙사의 일행이 토산품을 무역하고자 하면 그대 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성의와 신의가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등 기타 힐책하는 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파흘내와 기청고(祈靑古)·정명수(鄭命守) 등 6인이 모일(某日)에 칙서를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남쪽에 해진(海震)의 변이 있어 내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제 청사(淸使)가 6 인이나 함께 온다니 그 의도가 어떤 것이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번에 필시 힐문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표문(表文)을 사대(査對)005) 할 적에 미진한 곳이 있기에 신이 고치도록 했었는데, 이제 다시 보니 역시 소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힐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고, 좌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도 표문 때문에 필시 이런 힐문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힐책을 하게 되면 말로써 다툴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니, 조익이 아뢰기를,
"이는 필시 우리 나라의 간사한 자가 크게 모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문금(門禁)이 엄밀한 것이 역시 빌미가 된 것이다."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원두표(元斗杓)가 지금 파산(罷散) 중에 있으니 서용하여 원접사(遠接使)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저들은 이조와 병조 판서가 접응(接應)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조 판서 김집(金集)이 세 번째 소를 올린 뒤에 나갔습니다. 현신을 대우하는 도리로서는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사세가 이러하니 지금 체직시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청사(淸使)는 모두 대관(大官)이니 별도로 문후하는 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관(內官)을 보내야 하는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지위가 높은 조신(朝臣)을 보내야 합니다."
하자, 이경석이 예조 판서 오준(吳竣)과 원접사를 같이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에 저축해 놓은 내수사의 공포(貢布)가 있으면 연도(沿道)의 여러 읍에 나누어 주어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수사의 공물은 으레 모두 직접 수납하는데 저축해 놓은 것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모든 공가(公家)에 저축해 놓은 것을 내어서 부족한 것을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와 병조 판서가 지금 모두 참석하였으니 서로 의논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본조에 저축해 놓은 것이 상당히 많으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해조에 미리 저축해 놓은 것은 실로 군민(軍民)을 위해서 장만한 것이니, 바로 오늘날 써야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12면
- 【분류】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註 005]사대(査對) : 대조 확인.
○謝恩使仁興君 瑛、副使李時昉等馳啓曰: "臣等旣到北京, 牢閉館門。 鄭譯等來言曰: ‘俺等之出去也, 接待大異於前。 西路則減饌品, 嚴譏察, 入京則通官受辱於守門之人, 彼此無間之意安在? 本國必有可諱之事而然也。 今之牢鎖, 勢亦宜然, 勿怪也。’ 鄭譯又傳禮部之意曰: ‘弔祭、冊封, 宜各有謝恩方物, 今何以不然?’ 臣等謂之曰: ‘俱是一時恩典, 似無別謝之禮矣。’ 鄭譯曰: ‘專謝冊封, 不謝弔祭, 是冊封爲重, 而賜祭爲輕也。 必有主掌者, 當有詰問之擧矣。’ 後數日, 戶部尙書巴訖乃等三人來傳攝王之意曰: ‘爾國每有所請, 勉副者亦多, 而不知感恩, 反有不敬之事, 是何道理? 本國木花不實, 以綿布之難備爲辭。 爾國雖小, 民戶不但五千。 若徵一匹於每戶, 則足充其數, 何患難備? 然今將以米代之, 鳳城運價, 亦當計減。’ 又曰: ‘兩國通和, 自是好意, 勑使之行, 欲貿土産, 則爾國不之許, 其無誠信可知。’ 其他詰責之言, 不一而足矣。" 又馳啓曰: "巴訖乃、祈靑古及鄭命守等六人將以某日齎勑以去云。" 於是, 上引見大臣及備局諸臣。 上曰: "頃者南方有海震之變, 予甚憂懼。 今者淸使, 至於六人偕來, 其意何如?" 領議政李景奭曰: "此必有詰問之擧也。 表文査對時, 有未盡處, 臣使之改撰, 而今更見之, 亦未免踈漏。 其詰責宜矣。" 左議政趙翼曰: "臣意亦謂, 必以表文而有此詰問也。" 上曰: "彼人有所詰責, 則不可以口舌爭也, 將奈何?" 翼曰: "是必我國奸細之人重爲構誣也。" 上曰: "我國門禁之嚴密, 亦有以祟之也。" 景奭曰: "彼若以無理之事責之, 則臣當以身當之。 如是而國家無事, 則臣安敢顧念一身?" 上曰: "卿之爲國之誠, 可謂切矣。" 景奭曰: "元斗杓方在罷散中, 宜敍用爲遠接使。" 許之。 又曰: "彼人以吏、兵判, 爲有關於接應, 而吏曹判書金集三疏而後出去。 待賢之道, 宜待其更辭, 而事勢如此, 今宜遞改, 以他人代之。" 上從之。 又曰: "淸使皆是大官, 宜別有問候之擧也。" 上曰: "當遣內官耶?" 對曰: "然。" 延陽君 李時白以爲: "宜遣朝臣之位高者。" 景奭請令禮曹判書吳竣與遠接使俱發, 上從之。 景奭曰: "內司貢布, 如有留儲於西路者, 則宜分賜沿道各邑, 以紓民力。" 上曰: "內司之貢, 例皆直納, 寧有留儲?" 景奭曰: "當此之時, 凡公家所儲, 不可不出助其不給。" 上曰: "戶、兵判今皆入參, 相議施行。" 兵曹判書韓興一曰: "本曹所儲頗多, 亦可用之矣。" 景奭曰: "該曹之所預儲, 實爲軍民之需, 正合用之於今日也。"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12면
- 【분류】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