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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44권, 인조 21년 11월 16일 丙午 1번째기사 1643년 명 숭정(崇禎) 16년

대사헌 이경여 등이 면포 수납의 비리, 혼례, 둔전 제도 등에 대해 아뢰다

대사헌 이경여 등이 아뢰기를,

"임금이 명하면 신하는 받들고 명령이 나오면 백성은 믿는 것은 나라를 경영하는 큰 원칙입니다. 성상께서 민폐를 깊이 염려하시어 백성들로부터 징수하는 포백(布帛)에 대해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헤아려 법식을 정하고 그 척도(尺度)를 반포하여 팔방에 행회(行會)하였으므로 극도로 다급하고 괴로워하던 백성들이 뛸 듯이 기뻐하여 어쩌면 재생할 가망이 있음직도 하였는데, 베를 짜고 곡식을 덜어내어 간신히 갖추어 상납하면 해관은 왕명을 팽개치고 이익을 앞세워 목전의 성과만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받은 물건을 도로 물리치는 폐단이 민력을 재차 피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의를 잃은 화는 마침내 곡식이 있더라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왕의 위신이 끊어지지 않고 국법이 오히려 있는데 이러한 것을 덮어 둔다면 그 법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호조·병조·공조와 훈련 도감의 당해 당상은 파직하고, 임오년에 승전을 받든 뒤로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당해 낭관은 잡아다가 추고하고, 이밖에 포백을 출납한 각 해사(該司)의 관리도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그리고 제도(諸道)의 방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덕을 베푸는 책임을 맡았으니, 위에 보고하고 아래에 시달하는 것이 곧 그 직책입니다. 조정에서 행회한 뒤에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여 조정의 재처(裁處)를 기다려야 될 것인데 오직 해조의 분부만을 따라 원망과 고통이 날로 쌓여지게 하였으니, 모두 추고하소서.

상기(喪紀)는 사람 자식의 큰 도리이고 혼례는 풍속 교화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수천 년의 기자(箕子) 봉국으로 수백 년 동안 성군이 계속 일어나 법을 만들고 교화를 베풀어 치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우므로 혼인과 초상의 예가 고대를 놓고 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큰 변란을 치룬 뒤로는 민풍(民風)이 크게 무너지고 예속이 전혀 없어져서 최마(衰麻)복을 미처 벗기도 전에 사위를 맞이하고 장가를 들여도 이상하게 여길 줄 모르고 유식한 가정에서도 간혹 그런 일이 있으니, 습속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부모의 상을 당한 딸자식이 최복을 벗어던지고 길복을 입고서 슬픔을 머금고 혼인을 하는 일까지 있으니, 이는 천리가 사라지고 인도가 끊어진 것입니다. 예서(禮書)에 ‘본인의 부모가 기년복(朞年服) 이상의 초상이 없어야만 혼인을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예서를 상고하여 법식을 정하되 앞으로 삼년상 안에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자는 ‘그 상사를 삼가지 않았다. [不謹其喪]’는 율로 논하고, 상중에 성혼한 처녀는 주혼(主婚)한 사람이 관원일 때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사인(士人)이면 영원히 정거(停擧)에 처하며, 상중의 여자에게 장가든 자도 똑같은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군왕은 토지로 백성을 기르는데 일정한 강토 이외에 어찌 다른 전답이 있겠습니까. 옛날의 이른바 둔전(屯田)이란 것은, 국경 너머에 군사를 주 둔시킬 때 이미 모여진 군사의 힘으로 경작하지 않은 땅을 개간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따라서 운송하는 노력을 줄이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소위 각 아문의 둔전과 같이 나라 안에 둔전을 두고 농민에게 미끼를 설치한 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역(役)을 피하는 자가 다 모여들고 구실을 내지 않은 자가 앞다투어 달려와서 원결(元結)은 날로 줄어들어 세입이 감소하고 도망한 자들의 안식처가 되어 군액이 축나므로 백성의 전답이 탈취당하고 이웃 농사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 일을 담당한 자가 이익을 독차지하여 제 몸을 살찌우는데도 수령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며 신구(新舊)의 궁가도 또한 이러한 폐단이 있어서 원망은 국가에 돌아가고 위로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니, 일체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서 계문하여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삼조(三曹)와 훈국(訓局) 당상은 모두 추고하고 둔전에 관한 일은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상가의 혼인을 금하는 일로 대신에게 수의할 것을 청하였는데,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의논드리기를,

"혼인은 인륜의 근본이고 풍속 교화의 시초이므로 만약 한번 그 정도를 잃어버리면 예법이 무너지고 풍속이 망가지니, 헌부의 말은 참으로 엄정합니다. 다만 혼인을 제 때에 하는 것은 왕도 정치에서 중시하는 바이고 해조가 인용한 《대전(大典)》도 또한 선왕(先王)께서 인정이나 예법을 참작하여 한 시대 왕조의 법으로 정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제 혹시 부모가 상중에 있더라도 자녀가 이미 복을 다 마쳤고 또 별도로 혼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변통하는 조처가 있어야겠으며, 자녀로서 기복(期服)이 다 끝나지 않은 자와 처녀로서 상중에 있는 자가 곧바로 혼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헌부의 계사대로 일체 죄를 적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67면
  • 【분류】
    재정(財政) / 사법-탄핵(彈劾) / 윤리(倫理) / 풍속-예속(禮俗) / 농업-전제(田制)

○丙午/大司憲李敬輿等啓曰: "君命臣承, 令行民信, 爲國之大經。 聖上軫念民弊, 凡布帛之賦於民者, 稟裁定式, 至頒尺度, 行會八方, 燃眉蹙頞之民, 歡欣鼓舞, 庶有再生之望, 繴纑損粟, 艱備上納, 該官棄命, 先利取辦。 目前點退之弊, 不但再殫民力, 失信之患, 終至有粟莫食。 王綱未絶, 邦憲猶在, 此而掩置, 法將何施? 請戶曹、兵曹、工曹、訓鍊都監當該堂上罷職, 壬午年捧承傳後, 在任最久該郞拿推, 此外布帛出納各該司官, 亦令査覈處置。 且諸道方伯任承宣之責, 通上達下, 乃其職耳。 行會之後, 有此越法害民之事, 則具由馳啓, 以竢朝廷裁處可也, 而只循該曹分付, 使怨苦日畜, 請竝推考。 喪紀, 人子之大倫; 婚禮, 風化之攸基。 我國千載封, 百年聖作, 勑典敷敎, 化行俗美, 婚喪之禮, 視古無慙。 喪亂以後, 民風大壞, 禮俗都喪, 衰麻未變, 迎壻娶婦, 恬不知怪, 有識之家, 或未免焉, 習俗之移人, 可勝惜哉? 至有女子遭父母喪者, 脫衰變吉, 含哀合卺, 此則天理滅矣, 人道絶矣。 《禮》曰: ‘父母無期以上喪, 方可婚娶。’ 請令禮官, 考禮定式, 其自今三年之內, 嫁女娶婦者, 論以不謹其喪之律, 處子冒喪成婚者, 主婚人削去仕版, 士人則永爲停擧, 其娶喪女者, 亦爲一體施行。 王者以土養民, 經界之外, 豈有他田? 古所謂屯田者, 屯兵徼外, 用已聚之兵, 闢不耕之地, 以資軍食, 以省轉輸, 未聞置屯於國中, 設餌於農民, 如今日所謂各衙門屯田也。 避役者咸聚, 逃賦者爭赴, 元結日蹙而稅入減, 逋亡成藪而軍額缺, 民田見奪, 隣井被害。 榦事者專利封己, 守令莫敢誰何, 新舊宮家, 亦有此弊, 歸怨國家, 上累聖德, 不可不一切痛禁。 請令該道監司, 査出啓聞革罷。" 答曰: "依啓。 三曹及訓局堂上, 竝推考。 屯田一事, 置之可也。" 禮曹以喪家禁婚娶事, 請議於大臣, 昇平府院君 金瑬議曰: "婚姻, 人倫之本, 風化之始。 如或一失其正, 則禮法壞矣, 風俗斁矣, 憲府之論, 實爲嚴正, 而第婚姻以時, 王政之所重, 該曹所引《大典》, 亦先王參酌情禮, 定爲一王之法。 今或父母雖在喪中, 子女皆已服盡, 而且別有主婚之人, 則合有變通之擧。 至於子女之朞服未盡者、處子之方在喪中, 而徑行婚嫁者, 宜依憲府啓辭, 一切科罪。" 上令依議施行。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67면
  • 【분류】
    재정(財政) / 사법-탄핵(彈劾) / 윤리(倫理) / 풍속-예속(禮俗) / 농업-전제(田制)